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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선포다. 설교는 하나님이 바로 이 곳에서 지금 하시는 일, 지금 이 때에 바로 이 장소에서 하지는 일을 선언한다. 또한 그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는 그것에 합당하게 반응하도록 요청한다. 설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현존하시며 행동하고 계신다는 소식, 좋은 소식이다. “너회가 모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 바로 이 거리에, 이 성소에, 이 동네에 계신다. 그리고 지금 일하고 계신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안다면 여기에 참여하고 싶을 것이다.”
모든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아주 잘 보여 주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마가는 아주 두드러진다. 그는 강렬하고도 긴박한 언어로 아주 능숙하게 복음의 현재성과 현장성, 그리고 인격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
설교는 현재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에 우리를 개인적으로 참여시키는 언어다. 설교는 인격성과 현재성을 잘 전달해 준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그 설교의 말이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그 설교의 말이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나 심지어는 어제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한 것이라고 혹은 가깝거나 먼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그냥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지금 여기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나에게 계시해 준다. 설교자들이나 그 모방자들로부터 들었던 어떠한 무미건조한 말도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 설교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나
님의 말씀, 하나님의 행동, 하나님의 현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가르침은 선포된 것을 확장시키면서, 텍스트의 함의와 이 세상에서 그 진리가 일으키는 반향, 하나님의 말씀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삶을 사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형성하는 특별한 방식들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그러나 구조화되어 있지 않은 가벼운 대화들은 가정과 일터에서, 놀이터나 동네 슈퍼에서, 탑승 시간을 기다리는 공항 터미널에서, 조류 관찰을 하는 친구들과 쌍안경을 가지고 들판을 걸으면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과 서로와의 우연한 만남들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하신 많은 말들이 바로 이러한 성격의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자나 교사가 아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말은 먹고 마시고, 쇼핑하고 여행하고 때로는 우리가 '잡담' 이라고 치부하며 회피하는 그러한 사소한 말들을 하는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나온다.
모든 복음서 저자들은 이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시는 예수님을 제시하지만, 이와 같은 가볍고도 구조화되어 있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광범위하게 계시해 주는 책은 바로 누가의 복음서다. 마가가 설교에 집중하고 마태가 가르침에 집중한다면, 누가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격의 없이 주고받는 언어에 집중한다.
* 예수님과 그 성경학자 사이의 대화 전체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성경학자가 질문한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질문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세 번째 이자 마지막 질문을 하신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강도들의 습격을 받은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그 세 사람 중에서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성경학자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제시해 준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웃을 정
의하지 않았다. 이웃을 만들어 내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온갖 종류의 “누가 내 이웃인가?” 하는 질문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는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핵심적인 질문은 “내가 이웃이 될 것인가?” 이다. 하인리히 그리븐(HeinrichGreeven)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은 자신의 이웃을 정의할 수 없다. 오직 이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 예수님과 그 성경학자 사이의 대화에서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맴도는 주도적인 단어는 명령형 동사 ‘사랑하라' 이다. 그 사랑의 명령은 비록 반복되지는 않지만 이 대화의 내용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다.
명사로서의 '사랑'은 거대하고 복잡한 주제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그것의 문화적인 표현, 감정적인 복잡미묘함, 심리적인 뉘앙스 등을 탐구하느라 수천수만 쪽에 달하는 내용을 기록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는 그러한 식의 탐구가 놀랍도록 적다. 사랑은 우리의 예언자와 제사장들, 사도와 목사들, 기도하는 시인과 지혜로운 현인들이 토론해야 할 주제가 아니다. 이 단어는 명사로 자주 사용되지만, 성경에서 그 단어는 무엇보다도 살아서 움직이는 동사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이다.
'사랑' 이라는 명사가 동사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토론하거나 이해하거나 탐구해야 할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 동사가 명령형으로 전해지면 그것은 순종의 행위를 통해 살아난다. 행동으로 옮겨지고, 이야기 속에 심겨지고,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참 성질을 드러낸다. 이야기 속에서 동사로 사용되면, 그 고귀하고 영광이 울려 퍼지는 단어가 우리의 영혼을 고귀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지, 이웃이 사라져 버린 이 세상에서 사람을 조작하는 욕심과 냉소적인 권력 혹은 비인격적인 탐욕을 은폐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지가 곧 분명해진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단어를 말씀하시는데, 두 가지 모두 명령형의 동사다. “가라… 하라."
더 이상 질문할 것도 없다. 더 이상 대답할 것도 없다. 더 이상
의 종교적 언어도 없다. 가서 사랑하라.
*여행 내러티브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번째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이웃으로 만들었다. 우리의 이웃인지조차 몰랐던 남녀들의 이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이 우리의 이웃인지조차 몰랐던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종이 위에 그려진 캐리커처로 전형화하는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마리아인과 같이 존재를 무시하는 민족적, 인종적, 도덕적, 종교적 용어를 사용했다. 간단한 언어의 술수로 그들을 일단 비인간화하고 나면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는다. 어떻게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다시 인간화하고, 다시 인격화하고, 다시 이웃으로 만든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단 이웃이 되고 나면, 가는 길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또 다른 이웃을 만나게 된다.
* 여행 내러티브에 나오는 두 번째 이이기는 하나님께 인격의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사람을 전형화함으로써 그들을 비인격화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일반화함으로써 하나님을 비인격화한다. 사상으로서의 하나님, 세력으로서의 하나님, 교의로서의 하나님처럼 말이다. 그리나 사상이나 세력이나 교회를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령에서 사실상 사랑을 빼 버리고 ‘인식하다’, ‘존중하다’. '‘고려하다’, ‘변호하다’,‘연구하다’ 등의 동사로 대체해 버린다. 이 동시들은 모두 인격적 관계를 전혀 혹은 거의 요구하지 않는 동사들이다.
그래서 누가는 자신의 여행 내러티브를 작성하면서, 사마리아인 이이기가 우리의 모든 비인격화된 이웃을 돌아보게 했듯이 비인격화된 하나님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격성을 철저하게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그리니까 기도할 수 있는 인어의 방식에 우리를 푹 담그신다
기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여러 측면 중에서 인간성 자체와의 접촉을 잃어버리기가 가장 쉬운 단 하나의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인간성을 박탈할 때 우리 자신의 인간성과도 접촉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고, 정직하게 기도 한다. 재난과 위기는 종종 인간성의 가장 기본으로 데려간다. 거기에서 우리의 언어는 모든 겉치레와 경건한 행세를 버리게 되고 우리의 뱃속 깊은데서 나오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 제자들은 갈릴리 시절을 지내면서 상당히 오랫동안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께 "우리에게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요청하고 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사는 입문 과정은 마쳤고 이제는 그 위의 단계를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이 그들에게 생겼다. 그 때 그들이 선택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기도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참 의미 있지 않은가? 그들은 더 나은 태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다. 윤리학 과정을 이수하겠다고 간청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사고할 수 있게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다. 신학 세미나를 요청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할 수 있는 전략적 계획 수립 과정을 요구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이제 삼 년 남짓 되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모방하거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따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일구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던 그대로 하나님과 인격으로 대면하고, 하나님과 관계 맺으며, 하나님의 사랑에서 능력을 공급받아 일하고 싶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근원적 행동, 가장 인간적이고 인간화하는 행동을 지도반고 훈련받고 싶어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장 잘하시는 일을 자신들도 잘하고 싶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짤막한 기도의 모델을 주시고, 간단한 비유를 들려주시고, 부모와 자녀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가지고 그 기도와 비유를 서로 연결시키서 서로 배합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설명은 우리의 상상력을 작동시킨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한 발짝 물러나셔서 그 기도와 비유가 우리 안에서 작용하게 하신다.
*우리는 생물학적인 존재다. 그렇다. 우리는 심리적인 존재다. 사실이다. 우리는 정치적인 존재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경제적인 존재다. 당연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기초는 인격성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기도는 오로지 인격적인 관계(아버지! 친구여)의 단어와 문법으로만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기도는 결코 제대로 된 용어를 바른 순서대로 사용하는 것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기도는 결코 좋은 태도, 바른 기질, 혹은 능숙한 조작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기도는 결코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좀 얻거나 나 자신의 내면과 접하는 문제가 될 수 없다. 기도는 관계다. 오로지 그리고 영원히 인격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주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비인격성의 전형 그 자체인 기술의 교만하고도 신성 모독적인 요구에 의해 인격성이 억압당할 위험이 계속해서 존재하고 갈수록 커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되셨을 때, 그분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분 앞에서 온전하게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대로 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빈곤해지고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비워진 상태로 완전히 가난해진 상태로 설 때에만 우리는 오로지 빈손으로만 받을 수 있는 그것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축복하시는 마음의 가난이다(마 5:3). 끊임없이 아버지께 의존하시며 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를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빈곤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절대적인 빈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거지들이다. 아버지, 빵을 주세요. 친구야, 나에게 빵 세 조각만 빌려 줘.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가장 불완전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필요는 언제나 우리의 능력을 넘어선다. 요하네스 메츠(Johannes Baptist Metz)는 “우리 인간성의 급진적 가난”과 우리 인간성의 핵심에 있는 “초월적인 빈곤”에 대해서 말했다.
우리는 기도하면 덜 빈곤해지거나 덜 의존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빈곤해지고, 더 의존적이 된다. 다시 말해서, 더 인간적이 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죄가 우리를 소외시키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바로 그 인간 조건 속으로 더 깊숙이 잠수해 들어가게 된다.
* 예수님은 다음의 말씀으로 기도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을 마지신다. "너희가 아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11:13).
성령이라고? 우리 자신과 우리 친구를 위해서 빵을 구하고 있었는 줄 알았는데, 생선과 계란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성령이라고? 맞다. 우리가 빵과 생선과 계란을 구했던 것이 맞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이 대화에 '성령' 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으심으로써 예수님은 하루하루의 매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방식을 이해하도록 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와 인격적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성령은 우리 삶의 그리고 우리 친구와 이웃의 삶의 모든 구체적인 일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을 포필하시며 인격적으로 현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네가 죽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곳간 가득한 네 물건들은 누가 가지겠느냐?
“자신의 곳간을 하나님이 아니라 자아로 채우게 되면 바로 그런 일
을 당하게 될 것이다”(눅 12:13-21, 「메시지).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이야기는 정의를 요청한 그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고 그 사람의 욕심을 꿰뚫는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그렇게 한다. 무리 앞으로 나온 그 사람이 곳간 짓는 자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아챌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유는 설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는 실례가 아니다. 우리는 구경꾼의 자리에서 비유를 듣고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으라고 기대할 수 없다. 비유는 참여를 요구하기에, 그 이야기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기에, 더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어렵게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비유가 우리로 하여금 곳간 짓는 자의 역할을 취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비유는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존중해 준다.
* 욕심은 거의 보이지 않는 최다. 부요함이라고 하는 내장 안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자그마한 기생충이다. 우리보다 앞선 세대의 문화에서 심은 특별한 풍요함과 풍부함을 가장 이상적인 숙주로 삼았던 것 같다. 미다스 왕의 신화가 그것에 대한 진형적인 경고다. 그러나 놀랄 만큼 높은 생활 수준과 거의 무제한으로 접할 수 있는 소비 상품을 가진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 기생충에 취약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즐기도록 배우는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이나 그 기생충에 취약하다. 우리는 부자다. 우리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물건에 대해서건 하나님에 대해서건, 부유해지는 순간 우리는 욕심에 빠지기 쉽다.
이와 같은 부의 조건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축복으로 이해하건, 자본주의 경제의 물질적 결과로 이해하면 상관없다. 심 바이러스가 항상 우리의 혈관 속에 흐리고 있다. 어떤 때 그 것에 감염되지 않도록 막아 주는 충분한 성경 항체(계명, 잠언, 비유)가 주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방어막이 느슨해지고 모든 기관이 피로를 느낄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욕심이라는 감기에 걸리게 된다. 그러면 머지않아 더 큰 곳간을 채울 생각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부요함을 나누어야 할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용해야 할 권력으로 계산하기 시작한다. 부와 지위를 재해석해서 우리 자신이 관리하는 것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조직하고 지도하고 인도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로 인식한다. 그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우리는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책임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필요 없다. 우리가 통제한다. 우리가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경험도 더 많다. 우리는 정말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그래서 더 큰 곳간이 필요하다. 가진 것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이 축적하고, 영향력을 확장한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하며 매우 바쁘게 지내려고 한다. 왜냐하면 아주 바쁘면 훨씬 더 요구가 많고 어려운 사랑이라는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갈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일임이 분명한 곳간 짓기를 하다 보면 하나님 사랑은 차치하고라도 이웃 사랑을 할 시간과 에너지조차 별로 남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경고를 잘 받았다. 그렇지만 곳간 짓기는 여전히 번창하는 산업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노예로서, 또 어떤 사람들은 두 주인을 모두 섬기는 가운데 그 산업의 번창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의 이웃과 목사가 우리를 존경하게 된다(그러나 주로 우리의 가족은 우리를 존경하지 않는다). 우리는 승진도 한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가 탐심의 기생충으로 병들어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우리를 의사에게 데려다 주어야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를 더 병들게 만들고 있다.
* 우리의 모든 부요함은 은혜의 부요함이다. 우리는 결코 권력으로 부요하지 않으며, 돈으로 부요하지 않으며, 영향력으로 부요하지 않다. 우리는 사랑으로 부요하다.
다채로운 설명으로 생생하게 몇 가지를 열거하시면서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과를 무리에게 이해시키신다.
"식사 시간에 식탁에 어떤 음식이 올라오는지에 대해서 혹은 옷장에 있는 옷이 유행에 맞는지에 대해서 수선 떨지 마라. 너희의 내적 삶은 단지 너희 뱃속에 집어넣는 음식에 대한 것이 아니며, 외적 모양새는 단지 몸에 걸치는 옷의 문제가 아니다. 저기 갈가마귀들을 보아라. 자유롭고 구애받지 않으며, 직무 기술서에 매이지도 않고,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무사태평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다.
거울 앞에서 수선 떨어서 키가 1센티미터라도 더 자란 사람이 있었는가? 그 정도 결과도 못 얻는다면, 왜 굳이 수선을 떠는가? 들판으로 나가서 야생화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자신의 외모를 가지고 수선 떨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만한 색깔과 디자인을 본 적이 있는가?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태반인 야생화도 하나님이 그렇게 주의를 기울여 돌보신다면, 너희에게도 주의를 기울이시고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너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내가 여기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너희가 긴장을 풀고 무엇을 얻는 일에 너무 몰두하지 않게 해서 하나님의 주심에 반응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수선을 떨지만, 너희는 하나님도 알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도 안다. 하나님의 실재와 하나님의 주도하심,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너희 자신을 푹 담가라. 그러면 너희의 모든 일상적 인간사들이 다 해결되는 것을 볼 것이다. 무엇을 놓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들은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다!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 자체를 너희에게 주시기 원하신다.
너그러워져라.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파산하지 않는 은행, 천국에 있는 은행과 거래를 터라. 은행털이범도 근접하지 못하고, 공금 횡령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안전한 은행, 믿을 수 있는 은행과 거래를 터라. 당연하지 않은가?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이 바로 너희가 가장 있고 싶어하는 곳일 테고, 결국에는 있게 될 곳이다" (눅 12:22-34, 메시지).
* 가난이란 우리가 어느 정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이며, 하나님이 긴박하게 필요함을 알게 되고, 그래
서 기도의 언어를 배울 에너지를 얻게 되는 상태다. 부요함은 그 반대의 상태다.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고,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곳간을 짓는 과정에서 우리의 언어는 인격성과 관계성을 거세당한다. 우리의 빈곤,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빈곤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의 언어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고 유창함도 잃어버린다. 더 큰 곳간에 몰두하느라 우리는 친구를 위해서 빵을 구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우리의 상상력 속에 자리를 잡게 되면, 커다란 곳간을 짓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는 일이 문득 친구를 위해서 세 조각의 빵을 구하는 일에 비해 퍽이나 하찮게 보인다.
* 이 세상에서든 교회 안에서든 무언가 잘못된 것을 보면 우리는 바로 행동에 뛰어들어 잘못을 바로잡고 죄와 사악함에 대항하고, 적과 싸우고, 열을 내며 밖으로 나가 '그리스도의 병사들을 모집한다.
바로 그 때, 우리의 상상력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예수님의 거름 이야기가 벌떡 살아나 우리 안에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 비유는 행동하라고 부추기는 대신에 행동에서 발을 빼게 한다. 우리를 불쾌하게 하는 사람, 우리에게 혹은 하나님 나라에 쓸모없는 사람, “땅만 버리는” 사람과 마주칠 때 우리는 곧바로 인내심을 잃어버리고는 물리적으로 혹은 말로 그 사람을 없애 버린다. “그를 찍어 버리라! 그녀를 찍어 버리라! 그것을 찍어 버리라!" 우리는 절단해 버리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려 든다.
국제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성이 더 큰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위해서 땅을 밀어 버리는 가장 쉽고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거름 이야기는 우리의 요란하고 공격적인 문제 해결 임무를 방해한다. 이 비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잠깐만, 그렇게 서두르지 마. 좀 기다려 봐 시간을 좀더 줘. 이 나무에 거름을 좀 주게 해줘.”
* 거름은 빠른 해결책이 아니다. 아무런 직접적인 결과가 없다. 거름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결과를 원한다면 나무를 찍어 버리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는 그렇게 땅을 밀어 버리고 새로 시작할 준비를 한다. 아기의 탄생, 새로 출항하는 배를 명명하는 의식, 새 직장에 첫 출근하는 날, 전쟁을 벌이는 일 등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참 좋아한다. 그러나 거름을 뿌리는 일에는 그러한 흥분이 하나도 없다. 전혀 극적인 일도, 매력적인 일도, 사람들의 부러운 눈길을 사는 일도 아니다. 거름은 느린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하실 때 예수님은 시간, 보이지 않는 것. 조용한 것, 느린 것을 좋아하신 것으로 유명하다. 누룩, 소금, 씨앗, 빛, 그리고 거름.
거름은 이 세상의 질서에서 그다지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찌꺼기다. 쓰레기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눈에 띄지도 냄새가 흘러나오지도 않게 모아서 운반하는 효율적이고 때로는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주의 깊은 사람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처럼 죽은 것으로 보이는 경멸당하는 쓰레기가 사실은 생명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안다. 거기에는 효소와 온갖 미생물이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물질들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신실하려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 할 수 없는 일이 많다. 그 중에서도 폭력이 손꼽힌다. 우리 손으로 직접 해결하려 하고, 우리를 불쾌하게 하는 것과 함께 불쾌하게 하는 사람까지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폭력이다.
* 유진 로젠스톡 - 휘시(Eugen Rosenstock Huessy)는 이렇게 썼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유혹은 성급함이다. 그 원래의 의미 그대로, 기다리고 견디고 참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적이고도 심오한 관계 속에서 우리 동료들과 함께 살면서 치러야 하는 대가를 치르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 이사야처럼 그도 무시당했다.
거름, 침묵. 거름은 “나에게 이루어지이다” 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침묵의 에너지, 부활의 에너지에 순복하는 것이다. 말과 침묵, 둘 다 언어다. 언어의 예술은 말하는 기술만큼이나 말하지 않는 기술도 요구한다. 많은 해악과 오해가, 경청 없는 말하기로부터 비롯된다. 들을 때 우리는 침묵한다. 나는 솔 벨로우(Saul Bellow)의 견해를 좋아한다. "오래 입을 다물고 있을수록 더 비옥해진다.” 침묵은 부활을 이루어 내는 거름이다.
하나님은 행동하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끊임없이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시 107:31)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기다리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벤후 3:9), 심지어 사마리아인들도? 그렇다. 심지어 사마리아인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신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느림,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느림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번역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이 단어가 앞의 기름과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나왔던 단어와 동일하다는 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고난 주간에 울려 퍼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은 “찍어 버리라!"는 농부의 명령이 일으키는 메아리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아버지께 드린 예수님의 기도와 그 정원사가 “그대로 두소서 하고 중재하며 나선 말에는 서로 똑같은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는 헬라어로 '아페스 (aphes)다. 어떤 맥락에서는 그 단어가 “손 대지 마…침착해라.…내버려 둬"라는 뜻으로 쓰인다. 죄나 죄책과 관련된 맥락에서는 "용서하라. 면제하라”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눅 11:4), 여기에서 비유와 기도의 맥락이 한데 모아진다.
무화과나무에 가하려 했던 폭력이 정원사의 "그대로 두소서" 라 말에 비켜가 버린다. 예수님께 닥친 폭력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기도에 반격당한다.
거름에 몰두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용서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은 군중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다거나 그 사건 이후로 그 누구라도 먼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거나 인정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용서의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선제공격과도 같은 용서였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용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때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받을 것을 위해 기도하셨다.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놀라운 은혜다.
*그러나 종교 공동체 바깥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방식으로 공동체 안에서 번창하는 죄의 형태가 한 가지 있다. 아예 그 죄가 시작되는 장소가 바로 예배가 드려지는 자리다. 종교 공동체가 이러한 영적 무질서, 이 죄의 조건을, 세속화된 세계가 제공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제공한다. 이 죄를 일컫는 일반적인 명칭은 ‘자기 의’ 다. 이 죄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의를 명예롭게 여기고 추구하는 공동체의 토양을 필요로 한다. 의로운 길을 실천하는 공동체 없이는 자기 의가 불가능하다.…
이 현상은 너무도 흔하고, 무척 해롭고, 대개의 경우 눈에 띄지 않아서 전형적으로 풍자되는 형식으로밖에는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현상에 주목하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경건병 (eusebeigenic) 이다. 의학 용어인 '의원병' 에서 유추해서 이 단어를 구성했다. 헬라어로 '유세비아' (etasebeia)는 '거룩한, 경건한, 독실한' 이라는 뜻이다. 거룩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온통 신앙과 순종으로 사는 사람 즉 의로운 사람 (righteous)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언제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단어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유세비아의 특징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에 대해서는 상관하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더 많은 돈, 더 많은 쾌락, 더 즐거운 섹스, 안정된 노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죄를 지으며 다른 사람들도 죄를 짓게 하는 위치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만 지을 수 있고 지을 기회가 있는 몇 가지 죄들 중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하는 죄가 바로 자기 의의 죄다.
*예수님은 눈먼 자와 말 못하는 자 그리고 불구자도 자신의 왕국 사업에 포함시키셨지만, “가난한 자" 를 먼저 언급하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지위나 명성이나 자격을 논하지 않고 이방인이든 버림받은 자든, “누구든지 올 사람은 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름 없는 자에게 이름을 붙이시고, 아무도 보지 않는 사람을 보이게 만드시고, 아무도 듣지 않는 자의 말에 소리를 더하심으로써 “누구든지”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외연을 넓히고 계셨다. 우선 나사로가 그 시작이었다.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서 리더십의 최전방에 설 사람들이라고 가정하는 전형적인 남녀의 상을 산산조각 내 버린다. 예수님은 자신의 왕국 통치를 확립하는 일에 참여할 추종자들을 찾아다니고 계셨다. 예수님의 첫 모집자는 대부분의 구경꾼들을 화나게 할 만큼 놀라운 인물이었다. 부자이고 권세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결코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과 영향력 있는 랍비였던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추종자로서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기록된 복음서의 이야기에 보면 예수님이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을 찾아다니셨다는 암시는 하나도 없다. 바울은 부름받은 자들을 액면 그대로 평가하면서 이러한 예수님의 방식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일부러 문화 속에서 간과당하고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는 남자와 여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내세울 ‘이름도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고전 1:28, 「메시지).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사람으로 영향력 있고 숙달된 이들(우리가 흔히 "리더십 자질이 입증되었다”고 말하는, 혹은 적어도 '리더십의 잠재력'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남자와 여자들)을 겨냥하는 미국식 전략과는 대조적이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나오는 두 사람 모두 죄인이다. 그 사실만큼은 분명하나 세리는 사람을 곤궁하게 만들 정도로 착취하는 야비한 직업을 가진, 눈에 띄는 죄인이다. 그러나 죄인으로서 바리새인의 지위는 그런 식으로 눈에 띄지는 않다. 그는 사회적으로 전형적인 '죄인'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지 않을 만한 역할을 부여받은 사회 계급의 일원이다. 전형적인 지인들의 부류에 가장 걸맞은 사람들로는 도둑, 불량배, 간음하는 자, 그리고 세리(눅 18:11) 등이 있는 데, 모는 사람이 바리새인은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회당에 있던 적어도 몇 사람은 그 사람이 종교적이고 상당히 거만하다는 것을 아마도 눈치 채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기도가 정직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그러한 거만함 말이다. 그러나 거만함과 부정직한 기도에는 도둑, 불량배, 간음하는 자, 세리에게 붙어 다니는 것과 같은 사회적인 비난이 따라붙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죄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 바리새인은 여전히 죄인이었다.
*친구의 이야기(눅 11:5-13)는 예상치 못한 손님 때문에 빵을 빌리러 한밤중에 옆집을 찾아가는 일상적인 행위를 가지고 기도를 이야기했다. 기도는 신비스럽거나 무슨 비법과도 같은 영성이 아니다. 기도는 평범한 행위다. 기도는 사람 사귀는 법,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법을 전수하고 다니는 동기 부여 전문가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우정의 행위처럼 간단하다. 기도는 인공호흡처럼 비상시나 위기 상황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빵을 부탁하기도 하고 얻기도 하는 일상적인 환대의 행위처럼 아주 흔한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그리고 가족 안에서 늘 일어나는 일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과부의 이야기(눅 18:1-8)는 우리가 흔히 '응답받지 못한 기도로 분류하는 것을 그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 다시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기도 앞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을 냉담한 무관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하길 바란다. 하나님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악한 재판관과는 정반대다. 모든 면에서 정반대다. 기도는 하나님이 모르고 계시는 어떤 일, 꺼리시는 어떤 일, 혹은 시간이 없어 관심을 기울일 수 없는 어떤 일을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끈질기게, 신실하게 신뢰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하나님이 바로 지금 우리를 대신해서 일하고 계심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주권에 우리를 굴복시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 이다. 결코 그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은, 바로 지금 (“속히”, 8절) 당신의 삶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러니 계속해서 기도하라. 포기하지 말라.
그리고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인격적이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기도, 일상 생활 속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와 언어에 뿌리를 두지 않은 기도, 소위 기도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의 위선적인 어리석음을 생생하게 폭로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언어는 하나님이 우리를 원하시는 세상에서 말씀하신 언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은 기어코 우리를 되찾으려 하신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가 그 사랑하는 대상을 원하듯이 우리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우리와의 회복된 관계를 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추구하고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할 생각을 조금이라도 품기 오래 전부터 우리를 추구하고 계셨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하나님이 첫 단어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을 건다는 생각 혹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조차도 떠오르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마리아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셨고 가브리엘은 이러한 말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눅 1:28) 마리아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당황하고 놀라면서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자신에게 전해진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인 줄 마리아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머지않아 그녀는 알게 되었다. 천사가 자신의 인사말에 설명을 덧붙여 주었고, 마리아는 이제 곧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그녀의 몸 안에 잉태하게 하실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말의 의미를 명쾌하게 밝혀 주는 질문과 답변이 오간 후에 마리아는 찬성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1:38).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잉태하게 하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고려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서관으로 보내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했는지를 알아보고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고민해 보게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베테랑 천사들로 수색대를 조직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 그리고 운이 좋다면 하나님의 사진도 찍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게 하지 않으신다. 그렇지 않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시 50:3).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오시는 것이다. 우리가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 자세하게 기록된 증거에 의하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신이 되기 원한다. 모든 대륙과 문명에서, 모든 세기와 종교에서 그 증거가 계속 쌓이고 있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성경에서 그 증거가 철저하고 설득력 있게 확인되고 있고, 각 사람의 인생에 그 증거가 기록되어 있다. 종교 사업에서 하나님은 동맹이 아니라 적수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신이 되기를 원한다. 뱀이 우리에게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약속했고(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창 3:5) 그 때 이후로 우리는 계속해서 그 시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결과도 썩 괜찮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선조인 이스라엘 민족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보면 그와 같은 결론을 피할 여지가 하나도 없다. 광야에서 기적처럼 음식과 물을 공급받은 후에 새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에 모여서 지진과 연기와 불과 나팔 소리와 울려 퍼지는 천둥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다. 그러한 일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홍해에서의 구원,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 바위에서 쏟아져 나온 물,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절정을 이루는, 규정하시고 자유를 주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말씀. 그런데 그들은 잊어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 일을 반복한다. 바알과 아세라 그리고 몰록. 가나안과 두로, 이집트와 아시리아와 바벨론의 신들. 페르시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러시아와 중국의 신들. 인도와 아프리카의 신들, 영국과 호주의 신들, 그리고 미국의 신들. 미국은 현재 금송아지 생산에서 세계 선두다.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 우리를 보여 주는 구약의 이 전형적인 이야기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교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 말하자면 ‘거듭난 백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온전히 다 받았고 그 계시를 지키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었다.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7)라는 말을 그들은 참으로 진지하게 했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마귀의 성공 사례가 성경에 참으로 광범위하게 다루어진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을 좀더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떼를 지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진함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복음의 메시지를 크고 분명하게 들려주기만 하면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참여하겠다고 나설 것이라고 하는, 널리 확산된 미국인들의 생각은 마귀가 주는 환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하나님의 진리의 용어들만 사용하는 가정일 뿐이다. 그것은 성령과는 분리된 영성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에는 동참하지 않는 예수님에 대한 정보일 뿐이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를 형성시켜 주는 이야기들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특히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일하시는 방식,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 예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 즉 예수 방식(Jesus way)을 익힌다.
예루살렘에서 끝난 예수님의 이야기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사실 끝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은 예루살렘 이후에도 계속되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인이 맡기신 돈' 즉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들과 예수님이 사신 삶은 우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들과 우리가 살아내는 이야기 안에서 계속해서 순환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이 곳에 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 맡겨진 그 돈은 지키거나, 보호하거나, 안전하게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써야 하는 것이다.
* 앞서 우리는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을 살펴보았다. 그 이야기는 은유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었다. 은유와 이야기는 예수님이 쓰신 언어의 특징이다. 이야기는 인격적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 그리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원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 이야기는 실제 삶의 현장에 가까이 있게 해주고, 우리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에 민감하게 해주고, 침묵을 회피하지 않게 해준다. 이야기에는 형식도 추상적 개념도, ‘거대 진리’도 없다.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항상 인지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지도로 그려 그 내용을 해독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다. 이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명령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는 모호함과 참여의 여지를 제공해 주는 언어다. 언어로 창조되고 형성된 세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이 세계 속에서 서로가 대화하며 참여하게 해주는 언어다.
* 그리고 당연히 침묵도 있어야 한다. 침묵이 반드시 필요하다. 침묵은 흔히 간과하는 언어의 한 요소인데, 사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기도의 언어에서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이야기와 은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할 말을 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도의 경우, 대체로 집중해서 듣는 것으로 나타나는 침묵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들을 때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경청은 말처럼 언어의 한 부분이다. 말하기의 한 요소로서 침묵을 강요하는 쉼표와 마침표들은, 명사와 동사만큼이나 언어에 본질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에서 침묵은 건성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침묵이 없다면 우리의 말은 어수선한 지껄임으로 타락하게 된다.
*기도는 우리의 첫 언어다. 누구나 기도할 수 있으며, 실제로 모두가 기도한다. 기도하는지조차 모를 때에도 우리는 기도한다. “도와주세요” 가 우리의 첫 기도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감사합니다”는 우리의 마지막 기도다.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묘한 아이러니가 있다. 가장 자연스럽고 진정성을 지닌 언어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는 또한 위조하기가 가장 쉬운 언어 형태이기도 하다. 결코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기도하는 흉내를 낼 수 있고, 기도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기도의 형식을 실천할 수 있고, 기도의 자세를 취할 수 있고, 기도의 명성을 얻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찌감치 발견한다. 소위 우리의 '기도' 라는 것이 기도가 없는 삶을 가리기 위한 위장술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버지' 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 조건에 스며들어 있는 미묘하고도 교묘한 기도의 비인격화를 막기 위한 언어적 전략이다. 기술의 포화 상태에 빠진 문화 속에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혹은 더 심하게는 “어떻게 기도해야 효과적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질문은, 근본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비인격적인 기법으로 왜곡시킨다. 하나님을 사상 혹은 힘 혹은 더 큰 권력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기도는 통제의 행위로 축소된다. “내가 분위기를 제대로 잡고 말을 잘 골라서 순서에 맞게 사용하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게 하거나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태도를 갖게 된다.
예수님이 붙여 놓으신 위험 표시 중 두 가지가 기도에서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과 관련된 위험이다. 경고! 하나님과 다른 모든 사람을 얼굴 없는 청중으로 비인격화하지 말고 종교를 연기하지 말라. 경고! 말을 언어가 아닌 숫자로 사용해서 하나님을 비인격화하지 말라. "빈말을 되풀이하면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혹은 그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도 개의치 않으면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줄 알고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비인격화하지 말라.
기도에서 인격성을 지워 버리는 순간 기도는 사라진다. 심장이 박동을 멈춘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기도의 인격성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은유로서 '아버지'는 사람을 부르는 것이지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딸은 기능이 아니다. 그들은 독특한 혈연의 관계다.
*'하나님' 이라는 단어는 선함과 거룩함과 영광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으로 사용되면서 미신이 덧붙여져 손상된다. 무심결에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두려움과 무지와 신성 모독의 의미와 결합한다. 그 이름은 지속적으로 씻고 닦을 필요가 있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도록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에 신성 모독의 얼룩을 조금이라도 묻히는 단어들을 정화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우상 숭배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우리 마음에 남기는 이미지들을 청소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며, 예수님과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드러낼 때까지 '하나님' 이라는 명사에 묻은 녹과 때를 긁어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는 예수님의 일과 예수님의 말씀을 내면화하는 것이고 거기에 동참하는 것이다.
지금 이 곳에 있다고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추종자로 모집하셔서 기도와 예배, 증거와 선한 일을 전문으로 하는 그 영역에 참여하고 그 영역으로 가득 채워지라고 하시는 이 세상의 종교적인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 나라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다른 세상은 없다. 하나님 나라에 반항하는 요소들이 이 세상에 있을 뿐이다. 이 세상 어느 한편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모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예수님이 여시고, 선언하신 것은 현존하는 포괄적인 실재다. 하나님 나라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과 구원으로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참여자로 우리 정체성을 규명하고 우리를 그분께 바치는 것이다. 이 간구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나의 나라가 임한다...” 이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왕좌를 버리신 적이 없다. 하나님의 통치가 자주 부인되고, 날마다 도전 받고, 종종 무시되는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기도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마리아의 기도대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서 예수님이 잉태되고 태어나셨다. 그리고 마리아가 그 기도를 드린 지 30년이 지난 후에, 마리아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이었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이 기도를 드리신다.
그로부터 3년 후에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이와 똑같은 기도를 드리신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2). 이 기도도 마찬가지로 응답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부활하신 왕이 되신다.
내가 이 세 번째 간구의 기도를 수태고지와 겟세마네 사이에 놓는 이유는 이 간구가 철저하게 예수님을 맥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는 기도는 예수님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기도라는 맥락과 분리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야기와 기도 속에 있어야 한다.
*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기도의 삶에서 모든 것은 '땅에서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세상적인' 일이다. 첫 세 개의 간구는 모두 하나님이 이미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은 땅에서 창조, 구원, 축복의 사역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우리의 정부와 학교에서, 우리의 감옥과 교회에서, 바다에 나가 있는 배에서 그리고 고속도로의 자동차에서 일하고 계시며, 배고프고 가난한 자들 틈에서, 신생아와 임종을 맞이하는 자들 사이에서 일하고 계시다. 당신 나름의 목록을 만들어 보라.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넣어 보라. 그리고 그것을 기도하라.
모든 것의 출발은 하늘이다. 모든 것의 끝도 하늘이다. 하늘은 우리를 넘어서는 무엇,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무엇,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능가하는 무엇,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있어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무엇에 대해서 쓰는 은유다.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하는 곳은 바로 땅이고, 그 곳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과 보는 것이 서로 만나 창조와 구원과 거룩이 된다. 실재의 양극인 하늘과 땅이 융합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의 가장 완전한 계시는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기도다. 예수님의 모든 기도와 이야기는 하늘에서 시작되지만 땅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이야기와 기도는 하늘에서 비롯되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대한 자발적이고 순종적인 참여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와 기도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과 땅에서 하시는 일에 대한 이야기와 기도 안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과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언어에서는 하늘과 땅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하늘과 땅은 유기적인 통일체다. 그 어떠한 철의 장벽도 그것을 분리할 수 없다. 아름다움, 선함, 할렐루야, 아멘, 거룩, 구원, 백마와 스물네 명의 장로들, 죽임당한 어린양과 결혼식 만찬, 네모 반듯한 도시와 생명의 강 등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이제 우리는 대명사가 바뀌는 중요한 지점에 오게 된다. 첫 세개의 간구는 하늘에 계신 분('당신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신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 기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를 참여시킨다. 그러나 마지막 세 개의 대명사는 땅에 사는 인간(‘우리’)으로 바뀐다.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하시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데 필요로 하는 것에 하나님을 참여시킨다.
기도는 하나님의 모든 일에 우리를 깊이 책임 있게 연루시킨다. 기도는 또한 우리 삶의 모든 내용에 하나님을 깊이 변혁(급격하게 바뀌어 아주 달라짐)적으로 연루시킨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고”는 이 땅에서 사는 그 어떤 삶에서든 천사주의는 선택 사항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는 예수님도 포함함을 기억하길 바란다. 빵보다 더 감각적이고, 물질적이고, 기본적일 수는 없다. 빵의 누룩 냄새, 호밀이 묻어 있는 두툼한 껍질, 질감이 풍부한 그 맛.
빵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필요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접촉하고 있는 이 거대하고 복잡한 경이의 창조 세계에서 우리는 상호 의존하며 사는 피조물이다. 빵을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결정적으로 비미국적인 의존 선언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원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인 양 어리석게 허세 부리는 태도를 포기한다. 우리는 '존재의 위대한 사슬’에서 겸손하게 우리의 자리에 가 앉는다.
* 필요는 수용성 있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고, 오로지 선물로서만 받을 수 있는 그것을 받을 준비를 시켜 준다. 필요는 하늘과 바다. 네잎클로버와 벌, 남편과 아내, 말과 마차의 이 거대한 주고받음의 생태학적 복잡성에 문을 열어 준다. 필요는 우리를 그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로 축소하지 않는다. 필요는 야생화와 딱따구리, 아들과 딸, 부모 그리고 조부모와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다. 필요에 내재하는 한계는 우리가 위대함의 환상에 빠지지 않도록, 이기적인 교만이 주는 고립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 준다. 우리의 창조된 상태가 가진 한계는, 우리 주변에 충만하게 살아 있는 창조 세계의 삶에서 자비롭고도 수용적인 역동 가운데서 살아가라는 초대다. 한계는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제한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을 제한할 뿐이다.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의 필요는 선물을 주고, 선물을 받는 실재 속에서 살아가라는 지속적인 초대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하나님의 은혜는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여기에 네 인생이 있다. 너는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네가 없이는 이 모임이 완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상이 있다. 아름다운 일과 끔찍한 일 모두가 일어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 무엇도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다. 나는 너를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 우리는 은혜가 충만한 세상에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에게 … 주시고”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하나님은 주신다. 인생은 선물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주셨으니"(요 3:16), 주고받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규범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인간 공동체에서 그것은 규범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잘못된 것이 참으로 많다.
우리를 적시고 있는 은혜는 끊임없이 죄로 가려진다. 죄는 은혜의 반대다. 죄는 선물에 반대하고 인격에 반대한다. 죄는 살아있는 관계를 끊어 놓거나 고의로 방해한다. 받는 대신에 우리는 가져간다. 우리 접시에 놓인 빵이 맘에 안 든다고 생각하고는 그것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여동생으로부터 아이스크림이 담긴 그릇을 뺏는다. 기꺼이 겸손하게 부탁하고 감사하게 받는 인격적이고도 열려 있는 자세를 요구하는 은혜의 세계 대신에, 조작과 폭력, 효율성, 통제의 비인격화된 세상을 택한다. 말은 선전으로 비인격화된다. 성은 포르노로 비인격화된다. 정치는 억압으로 비인격화된다. 권력은 전쟁으로 비인격화된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많이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용서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마치 죄가 병균이나 다락 속에 있는 쥐인 것처럼 우리 삶에서 그것을 몰아내심으로써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마치 죄가 괴저병에 걸린 다리인 양 그것을 잘라 내시고 우리를 불구로 만드심으로써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신다. 목발을 짚고 다니는 거룩한 자로 만들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심으로써 죄의 문제를 다루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용서하실 때 우리는 부족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한 존재가 된다.
죄는 살아 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거부하거나 맺지 못하는 것이고, 따라서 죄의 용서는 죄에 대한 사
선적 정의 몇 개를 가지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깊은 인격적 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인격성을 거부하는 죄는 오로지 인격적으로만 다룰 수 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확고한 인격이시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포괄적이고 성경적인 방법이다. 삼위일체의 모든 작용이 인격적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는 추상적이거나 비인격적인 면이 하나도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도 추상적이거나 비인격적인 면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죄에 대한 해결책이 주어져야 한다면, 법과 규칙, 규약과 규율의 선상에서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남녀는 본질적으로 인격적이며 오로지 인격적인 관계에만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인격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격이다. 죄는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인격을 침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계명에 대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에 대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죄는 정의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영혼에 대한 범죄다. 성적으로 부절적한 행위여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와 아이의 인격을 훼손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다. 땅에 대한 법이나 집에 대한 법규를 위반해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침해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고…” 라고 기도하시면서 우리가 독립적인 인생을 사는 전제와 습관을 서서히 벗어 버리게 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인생, 그저 피조물에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자녀와 이웃과 학생과 피고용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물과 공기, 나무와 땅을 자기 마음대로 주관하고 싶어하는 독립적인 피조물로 사는 인생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우리는 주관자가 아니다. 우리가 통제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을 우리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은 주신다. 인생은 선물이다. 우리가 선물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시옵고……” 라고 기도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 곁에서 기도하시는 가운데 받는 편에 서는 것이 어떠한지를 직접 느낀다. 은혜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 어떠한지를 말이다.
*엉망진창이 된 죄의 문제를 다루시고 우리가 날마다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옛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 이 세상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어떻게든 해 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던가? 우리는 할 수 없다. 죄를 다룰 수 있는 사법상의 혹은 교육적인 혹은 심리학적인 방법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가? 그런 방법은 없다. 은혜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죄의 나라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을 배우며,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기도하면서, 그러한 하나님의 삶의 방식으로 들어간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나를 끊임없이 놀라게 하는 것은 이 기도가 놀랄 만큼 친밀한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기도하신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기도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기도하신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기도한다. 예수님께는 학교 선생 같은 면이 하나도 없으며, 우월한 자세를 취하시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상당히 위엄 있는 존재로 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우리의 친구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곁에 두고 이 익숙지 않은 기도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면서 우리 앞에 현존하시고 우리 안에 활동하시는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존재하게 되고 굴복하며 순종하게 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예수님과 함께 기도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시는 삶을 우리도 기도하고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사렛, 가버나움 - 이 마을들은 전부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모두 작은 마을이었고, 누구나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마을들이었다. 작은 도시에서는 익명의 사람이 없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모를 리가 없었다. 예수님이 치유하신 이야기를 모두가 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설교하고 가르치시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과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예수님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세개의 작은 마을을 세 개의 크고 부유하고 악명 높은 고대의 도시들과 비교하신다. 바로 두로와 시돈과 소돔이다. “너희는 악의 온상이었던 그 이교도들이 나빴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그들보다 더 심하다. 너희가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고 불경하게 부도덕하거나 불결하지 않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지옥의 문 앞에 위태롭게 서 있다.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제일 나쁜 일이다. 회개하기를 강철같이 거부하고, 자족하는 삶을 계속해서 고집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현존하시는데, 너희는 너희 삶을 통해 그분에 대한 무관심을 외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악처럼 보이지 않는 악이 있다. 복음의 삼각지대에 있던 마을들에 팽배했던 악은 눈에 띄는 악이 아니었다. 헤롯의 궁전 복도를 활보하는 악처럼, 로마에서 날뛰는 악처럼 그렇게 극명하게 나타나는 오만방자함이 아니었다. 작은 마을에서는 눈에 띄는 죄가 번성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웃들의 잘못을 지적하신 말씀에는, 그들이 확고하게 도덕적인 의미나 범죄의 측면에서 나쁘다는 암시는 없었다. 예수님의 비난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적극적인 무관심, 판에 박힌 관습적인 평상성을 떠나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폭로했다. 그들은 무채색의 진부함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신문에도 나지 않을 눈에 띄지 않는 악이지만, 그 결과는 소돔과 두로 시돈을 능가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면서도 고의로 무시한다. 자비롭게도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삶을 제의하시는데, 그들은 그저 어깨 한번 으쓱하고는 돌아선다.
*예수님의 기도는 결코 예수님의 생애와 분리될 수 없다. 기도는 하나의 관심 분야가 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기도는 전문적인 활동이 아니다. 교향악단의 경우 어떤 사람들은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어떤 사람들은 오보에를 연주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어떤 사람들은 트롬본을 연주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그렇지 않다. 누구는 병든 자를 병문안하고 누구는 찬송가를 부르고, 누구는 성경을 읽고, 누구는 돈을 내고, 누구는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측면을 하나 선택해서 그것에 대한 지도와 훈련을 받고는 좋아하는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은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계시와 성육신의 그물망으로부터 별도로 떼어 내서 '기도의 용사들'이 되기 위해 노력을 들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숨을 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살기 위해서는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숨을 쉬는 것과 관련된 질병은 있어도 특별하게 탁월한 숨쉬기란 없다. 우리는 어떤 개인을 따로 지목해서 “저 사람은 숨쉬기의 대가야" 라고 말하지 않는다.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무엇이 나오는가? 명성과는 거리가 먼 삶, 거절, 희생적 삶, 순종적 죽음이 나온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사이와 주변으로 하나님의 밝은 현존이 이 세상이 멸시하고 무시하는 그것, 우리도 그토록 자주 멸시하고 무시하는 그것에 후광을 비춰 준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이 기도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며 그 삶과 죽음이 모든 인생에 빛을 비춰 준다. 그 빛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말하게 된다. “영광,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삶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드리신 기도 중에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가 대답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기도는 이 기도밖에 없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같은 견해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기도하시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 이 기도에는 세 가지 시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과거의 영광, 현재의 영광, 그리고 미래의 영광 영광에 대한 기대가 결과적으로는 영광에의 참여로 나타나고 있다.
*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이제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최고의 제자와 최악의 제자 모두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유다에게 예수님은 무엇인가를 얻어 낼 수 있는 수단이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자기 자신보다 큰 무엇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두 사람 모두 틀렸다. 예수님을 따르면 참으로 많은 것을 얻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은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신다. 우리는 얻고 얻고 또 얻는다. 그러나 그러한 얻음은 유다나 베드로가 상상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일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계속해서 (베드로의 경우처럼) 최선의 동기에서든 (유다의 경우처럼) 최악의 동기에서든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황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목청을 높이지도 않으신다. 그들이 둔하다고 길책하지도 않으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이들과 함께 길고 다소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며 보내기로 마음먹으시다. 그 긴 대화는 긴 기도로 마무리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가장 긴 예수님의 기도다.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앞에 나온 대화와 연속선상에 있다. 대화에서 기도로 옮겨 가실 때 예수님은 말의 속도나 방향을 바꾸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친구들과 이야기하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과 이야기하시고, 하나님과 이야기하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하신다.
그 대화는 “때가 이르렀다”는 말로 시작되었다(요. 13:1), 예수님은 그것과 똑같은 말로 그 대화를 마치셨다.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16:32), 이제 우리는 이 문장의 의미를 안다. 바로 “죽을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때'가 이 대화의 배경이다. 그 배경은 이어서 이 기도의 배경이 된다. 그러나 영광이 그 행위를 이룬다. 죽음과 영광은 도무지 자연스럽게 어울릴 만한 한 쌍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는 그것이 어우러진다.
*(세 번 사용된) '영광' 이라는 명사와 (일곱 번 사용된) '영광스럽게 하다'(혹은 한국어 번역으로 '영화롭게 하다' - 역주)라는 동사가 이 기도를 지배하고 있다. 이 기도는 스스로를 상쇄시키는 두 개의 반대 개념인 영광과 죽음을 하나로 가져와서 같은 사건의 양극적 요소로 만든다. 죽음의 행위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 죽음의 행위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예수님은 영광을 위해 기도하셨다. 영광이 일어난다. 죽음으로서의 영광과 영광으로서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쉽거나 편안한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는, 우리의 구원이자 이 세상의 구원이신 이 영광을 우선 이해하고 그 다음에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 대화와 기도에서 죽음과 영광, 영광과 죽음이 병치되는 것은 참으로 극적인 일이지만, 결코 요란스럽지는 않다. 이 두 실재는 마치 그것이 늘 서로에게 속해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 서로 얽혀 있다. 그런데 사실은 “창세 전부터"(요 17:24) 그 둘은 그렇게 서로 얽혀 있었다. 여기서는 논쟁적인 언어가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고, 교훈적인 것도 없다. 그리고 감정을 부추기는 것은 더군다나 없다. 이 언어에서 우리는 진리를 분별한다. 긴박함을 감지한다. 그러나 심리적인 조작은 없다. 이것은 인격적 언어이며, 관계적 언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나 - 너(I-Thou)의 언어라고 참으로 탁월하게 탐구해 낸 그러한 언어다.
것은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기도하시는 방식을 버리고 그 대신에 웃음 띤 세일즈맨의 화려한 웅변술이나 사악한 욕설을 취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파괴적인 것은 없다. 만약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진리가 사실로 축소되거나, 구원이 전략으로 비인격화되거나, 사랑이 표어나 원칙으로 추상화되면 복음은 모독당하게 된다.
* 기도는 거리를 두는 행위가 아니다. 기도는 '사물에 대한 시각을 잡아 주는' 혹은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게 해주는 종교적인 실천이 아니다. 기도는 참여의 행위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에 참여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에 참여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참여하시는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신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불과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그 상황에서 기도와 고난이 중보의 재료가 된다. “네가 깊고도 위대한 사실을 깨닫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영혼이, 모든 인간의 영혼이 깊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단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고난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사상이나 프로젝트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기도는 삼위일체의 모든 작용에 인격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우리는 성부가 하시는 모든 일과 성자가 하시는 모든 말씀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육화하시는 모든 것에 관여한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조금 전에 마친 긴 대화가 이제는 기도의 친밀성 안으로 한데 모아져 마무리되고, 그 기도 안에서 제가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참여하게 된다.
*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동안 그 방에 남아 있다면 우리는 모든 세례 받은 자들을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꺼운 마음을 얻게 된다. 그러한 마음이 금방 들지는 않겠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언젠가는 우리 안에 그 의도를 이룰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경쟁자로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평가하시거나 점수를 매기지 않으신다.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논쟁들을 해결할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가 편안한 마음으로 동지애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현존 가운데 더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우리가 가진 분열과 분리주의에의 충동 그리고 우리의 경쟁과 공개적 비판이 예수님이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시는 그 방 안에서는 더 이상 설 여지가 없음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가이사라라는 세속적인 도시에서 고넬료라는 로마 군인이 뜻밖에도 신앙을 가진 것을 보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심을 깨달았도다(행 10:34-35), 베드로의 이 말에다가 ‘혹은 교회의 외모’를 덧붙이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성령 세례는 모든 존재의 기본이 되는 이러한 삼위일체의 토대를 설교하는 성례전이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우리는 세례의 물로 들어감으로써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의 특별한 정체성이 인격적인 이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모든 방식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확인되고 분명해진다. 우리는 자율적이지 않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한다.
죄는 고립시키는 행위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하나의 창조로부터, 하나님의 공동체로부터 관계적으로 분리한다. 우리의 창조된 본질인 관계의 복잡성을 다시 세우는 일은 명령이나 법령으로 될 수 없다.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친밀함은 비인격적으로 성취될 수 없다. 우리는 강제적인 성적 친밀함을 강간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참으로 인간을 가장 폭력적으로 격하시키는 행위 중 하나다. 하나님은 강간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찰스 윌리엄스의 소설에는 등장 인물들이 왜 하나님이 거룩한 일들을 좀더 잘 해결하지 못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하지 않는 일을 우리가 대신 해 드리는 것이 왜 석설하지 못한지에 대해서 토론하는 부분이 있다. 그 대화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하나님은 주기만 하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이 주실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런데 심지어 하나님도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는 상황에서만 자기 자신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방식으로는 일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고 자유로우시다. 따라서 기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격적이며, 자유롭게 주고 자유롭게 받아야 한다. 기도는 누군가를 강요하는 초자연적인 기법이 아니다. 기도는 죄인과 성인을 익명의 두 무리로 구분해서 한 무리에게는 파멸을 부과하고 한 무리에게는 구원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각각의 사람과 사물을, 그리고 그 사람과 사물이 가지는 모든 특징을 절대적으로 진지하게 대하면서 동시에 절대적으로 자유를 유지한다. 우리는 자유를 떠나서는 서로와 혹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복잡하고 힘든 일이지만,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그러한 어려움을 겪는다. 교회란 하나님이 하나님 방식대로 존재하시고 예수님이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동적 하나 즉 영광에 참여하도록 기도하시는 크고 건강한 삼위 일체적 모임의 터전이다.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에 영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에 영광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우는 일차적인 장이다. 교회는 우리가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예수님과 날마다 일어나는 우리의 죽음에 스스로 하는 가지치기의 장이다. 그 때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맡아서 통제하려들지 말아야 하고, 그들을 강제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협박이로든, 군사력으로든, 정치적 조작으로든 사람들이 우리 방식을 따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유명 인사들과 하룻밤을 보내러 돌아다니느라 인생을 낭비하거나, 흥분에 차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떤 대의를 들먹이며 자신이 야심을 채우고 변덕을 만족시키며 인생을 허비해도 안 된다.
* 예수님이 그 날 밥 겟세마네에서 손에 들고 계셨던 잔은 하나님의 뜻이다. 희생적 사랑의 결정적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죄와 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희생적 죽음이다. 예수님은 그 죄와 악을 자신의 영혼에 흡수시켜서 그것으로 구원을 만들어 내신다. 마치 잔에서 그것을 마시는 것처럼 그렇게 들이키신다. 예수님의 이름을 영어로 번역하면, “야웨가 구원하신다” 이다. 그 잔을 마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이 되신다.
물론 이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순전한 신비다. 설명되지 않는 신비, 그러나 어둠에 가려진 신비는 아니다. 그 신비를 증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기꺼이 죽는 행위는 수용의 행위이며 생명을 끌어안는 행위임을 증언하는 시인과 농부들, 가수와 부모들이 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죽음으로 들어가시고 죽음을 통과해 가신다. 기도를 통해서 죽음은 뜻밖의 영역을 얻게 된다. 더 이상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부활의 전조가 된다. 종점이 아니라 시작이 된다. “우리는 끝에서 시작하게 된다"(T. S. 엘리엇). 예수님의 수난 기도, 예수님의 ‘죽음 기도’를 기도하면서 우리는 죽음이 우리에게도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네 개의 수난 기도 중에서 제일 처음 드려진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요 12:28)는 이 죽음을 예견한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요 17:1)는 우리에게 이 죽음을 준비시켜 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0)로 시작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드린 마지막 기도는 죽음 그 자체를 기도한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라고 하는 이 세 번째 기도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진통 속으로 들어가시면서 우리도 그 고통에 포함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 죽는다. 첫 죽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할 때 오는 죽음이다.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며, 교만하게 혼자 고립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적 동반 가운데 순종과 믿음의 삶을 살기로 선택한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기도하실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기도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에 포함된다. 그 기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부활의 증인이 될 때의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하는 기도의 방식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에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을 증언한다. (롬 6:5-11),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도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자신이 죽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죽을 것을 명령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 말은 … 십자가에서 죽는 나의 죽음에까지 나를 따라오라"는 뜻이다.
*정의는 복잡한 문제다. 유죄와 무죄를 결정하고 범죄를 방지하고 약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과 법정의 세계는, 언제나 유대 사회와 기독교 사회를 포함해서 모든 정치적 사회적 체제의 근본 기둥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온 역사를 통해서 '정의' 라는 제목 하에 축적된 지혜가 참으로 많다. 우리는 정의 없이는 기능할 수가 없다. 우리의 안전과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는 정의를 집행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야 한다. 성경의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가장 힘 있고 강력하게 말하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이 정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결정적인 발언이 될 수 없다. 모든 잘못의 문제, 모든 죄의 문제, 이 세상과 우리의 잘못된 문제, 우리의 적과 우리 친구의 모든 잘못된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발언은 용서다.
*나는 정의를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정의와 용서 간의 긴장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다. 죄의 미묘함과 악의 완고함으로 미루어 볼 때,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 다면 우리는 이내 도덕적 무정부 상태와 정치적 대혼란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이 용서가 우선이라는 생각을 우리 삶에 다시 도입하고자 한다. 죄와 불의와 악의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기도는 정의가 아니라 용서를 위한 기도다. 용서의 행위가 정의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용서는 복음의 증언과 관련된 일들에 인겨적인 차원을 도입해 준다.
예수님의 용서 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정신은 복수가 아니라 연민을, 노여움이 아니라 이해를, 중성화된 이방인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죄인인 형제자매에 대한 수용을 훈련하게 된다. 이 기도는 또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할”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 둔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다치게 하고 있거나 모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며, 자신들이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 (마 25 410)을 속이거나 그들에게 영구적인 손상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정의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용서가 더 중요하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예수님처럼 무엇보다도 비인격적인 정의의 대리인이 아니라 인격적인 용서의 전달자이며 부활의 증인이다.
그러한 용서는 나긋나긋한 감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날카로운 복음이다. 그러한 용서는 도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라는 용광로에서 다져져 하얗게 열을 발산하는 부활의 사랑이다.
예수님 옆의 십자가에 달린 범죄자가 정당하게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할 때(그 사람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그 선고가 무효가 된 것은 아니다. 그 범죄자는 자신의 범죄 때문에 죽었다. 그러나 용서가 정의를 이겼다. 항상 그렇다.
* 우리의 기도하는 선조 중에서 가장 지혜롭고 열정적인 인물 중 하나는 바로 장 피에르 드 코사드(Jean-Pierre de Caussade)라는 프랑스 신부다. 그가 사용한 “신의 섭리에의 양도” 라고 하는 문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와 유사하다. 그는 자신의 짧지만 강렬한 책 「신의 섭리에의 양도(Abr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라는 책에서 인간 경험의 전체 스펙트럼에 걸쳐서 이러한 의탁/양도가 가지는 실제적 함의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현재 순간의 성례전” 에 대해서 말한다. 코사드의 핵심 문장은 이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로 양도했다면,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규칙만이 있다. 바로 현재 순간에 대한 의무다. 그의 글은, ‘구름 같은 증인’들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는 습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기도하시는 지금 여기의 예수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원하게 만든다.
이 기도는 우리가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남겨 두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의 영혼을 포기하면서 마지못해 드리는 단념의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이 기도를 드린다. 주어진 또 하루의 생명을 살아내고 집을 페인트 칠하고,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유방에 생긴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고, 대학 등록금으로 낼 수표에 서명을 하고, 밭에 보리를 심을 채비를 하면서 우리는 기도한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십자가에서 기도하시면서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의 신제적인 조건을 기도에 포함시키셨다. 목마름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신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날마다 죽을 때 우리 몸의 실제성도 기도에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늦게 추가하는 정도로만 그것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신체 부분 중 십자가에서 하신 이 속죄의 희생으로부터 배제된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고통을 포함해서, 우리의 신체 부분 중에서 배제되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잘 표현했다. “여러분의 일상, 여러분의 평범한 삶 자고, 먹고, 일하러 가고, 걸어다니는 그 삶을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십시오.” (롬 12-1, 「메시지).
* 이와 같은 “예수님 그리고…"는 예수님 그리고 정치, 예수님 그리고 교육, 예수님 그리고 기업, 심지어는 예수님 그리고 부처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정치와 교육과 기업과 부처가 우리의 주의를 끌 만한 것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삶에 들어오도록 기도하신 것들이 아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와 같은 그리고 들을 지워 버린다. 기도의 초점이 다시 한 번 명쾌하고 또렷해진다. 그 초점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 행위다. 우리는 순종적 믿음의 행위를 위해서 자유를 얻었다. 그것은 우리가 그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가게 되는 유일한 인간 행동이다.
*기도의 본질은 예수님 안에 육화된 하나님의 말씀, 우리의 성경
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현존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길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고, 반응하는 언어와 일치하는 언어의 용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언어 즉 '예수님-언어'의 세계에 잠김으로써 기도의 언어를 배운다. 우리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이라는 맥락 속에서 기도한다. 우리의 기도는 더 이상 우리의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종교적인 뱀의 언어에 대해서 경고를 잘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는 더 이상 우리의 심리 상태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성부에 의해서 성령을 통해 예수님 안에 계시된 삼위일체라는 커다란 세계 속에서, 듣고 말하는 데 적합한 기도의 언어를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인격적 언어다. 성부와 성자의 언어, 하나님과 딸의 언어다. 관계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그것은 대화다.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 드린다. 대등한 두 주체 간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지나치지만, 적어도 양측 모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양측 모두 계시의 언어, 깊은 관계의 언어, 정보의 언어가 아닌 언어, 조작적 언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한다.
*성부: 기도는 이방인의 행위, 이방인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가
족 안에서 기도한다. 하나님과의 자연스러운 친근함에서 비롯되는 기도를 드린다.
성자: 우리는 어둠 가운데서, 암중모색하며 기도하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를 계시한다. 우리가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는 안다. 우리는 하나님을 구원하시는 분, 주시는 분, 사랑하시는 분, 들으시는 분으로 안다.
성령: 우리는 '혼자'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는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에너지를 끌어모아서 한마디의 진술을 하거나 어떤 대의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에 우리의 말과 묵상과 행동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도에는 우리보다 더 많은 것들이 들어가 있다. 대개는 성령께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 찬양과 간구와 순종의 반응을 이끌어 내신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서 쓰는 언어이며,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고, 우리에게 위엄을 부여하신다. 발타자르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속되는 기도의 발언.. 인간이 자발적으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기만 하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기도의 언어에 유창해 질 수 없다. 책을 읽는 것으로도 안 되고, 어떤 교육 과정에 등록하는 것으로도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기도의 언어에 유창해진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