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정을 방해하는 것들
2024.04.07.(부활절제2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32/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그들을 굶주린 채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33/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인데, 이 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무슨 수로 구하겠습니까?"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물고기가 몇 마리 있습니다."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나서, 36/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들어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37/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나서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 38/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도, 남자만 사천 명이었다. (마태복음 15:32-38)
들어가는 말
예수님이 보여주신 연대의 정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우리를 향해 드러내신 연대의 정,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의지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연대의 정을 드러낸 하나님 그 자체이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연대의 정을 드러내십니다.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그들을 굶주린 채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32) 앞선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공감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데, 여기서는 예수님, 제자들, 그리고 군중들 모두가 지금 배고픕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공감이 연대의 정으로 넘어가는 데서 드러난 장애물들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많은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먹일 수 있단 말인가요? 우리 역시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무언가를 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감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연대의 정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부족한 것에 실망할 것이고 때로는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울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연대의 정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이럴 때는 모른 척해야 합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도 장애물입니다. 이것은 연대의 정을 거두어들일 핑계가 됩니다.
연대의 정에 대한 제자들의 현실이해
거리는 제자들의 노력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제자들도 사람들의 배고픔을 덜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먼 거리는 그들의 열정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여기는 빈 들인데, 이 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무슨 수로 구하겠습니까?”(33) 멀리 있음은 연대의 정을 드러내지 않을 그럴듯한 핑계입니다. 안타까운 소식은 우리와 상관없는 먼 곳에서 일어납니다. 배고픔은 멀리 있으며 우리가 가진 빵을 전달할 방법은 없습니다. 가장 실질적인 장애물은 충분한 빵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 어쩌자는 말인가?’
이웃의 결핍을 알면서도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그 결핍을 채울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연대의 정은 공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공감은 같은 상황에서 느끼는 동일한 감정일 뿐이지만 연대의 정은 함께 하기 위해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다가가야 하며, 나의 것을 너와 나누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연대의 정은 나누어야 할 것이 나에게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과 네가 지닌 결핍의 격차가 너무 큽니다. 당신들은 너무 많고, 멀리 떨어져 있으며, 내가 가진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나눔을 포기하며, 연대의 정을 거두어들입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34) 이 질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이 충분한지 따져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의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일곱 개가 있습니다.”(34) 라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일곱은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일곱 개를 가지고 있다는 대답을 통해 마태는 다음 사실을 강조합니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연대의 정에 있어서 완전하다는 것이며,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연대의 정은 ‘충분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하지 못함을 호소하면서 끊임없이 더 달라고 기도합니다.
제자들의 현실이해에 대한 예수의 물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면 우리는 공감할 수는 있을지언정 연대의 정을 드러낼 수는 없지 않은가?’ 맞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이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누구라도 연대의 정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묻지도 않은 것, 즉 작은 물고기 몇 마리까지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빵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을 뿐이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이 한 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빵은 고작 일곱 덩어리이며, 기껏해야 작은 물고기가 몇 마리 더 있을 뿐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더 있다는 것조차 부족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그분의 연대의 정에 제자들이 함께 참여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보기에 제자들이 가진 물고기는 부족함이 아니라 완전함을 확증해 줄 뿐입니다. 제자들은 충분함 그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대의 정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이 한 없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연대의 정을 실천하기에 충분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는 없다고 말하는 대신 조금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감(sympathy)은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일어나는 동일한 감정일 뿐이지만, 연대의 정(compassion)은 당신에게 없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연대의 정은 타인에게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지만, 많고 적음, 크고 작음에 상관없습니다. 빵 다섯 개가 절실한 사람에게 빵 한 개를 건네준다면 실망하거나 때론 화를 내지 않을까요?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행위는 갈등과 대립 나아가 적대감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특히 공동체성이 사라진 사회나 국가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는 사람 역시 주저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여전히 부족한가?
따라서 연대의 정을 행동으로 옮길 때는 그 사이에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예수님은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들고서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형편없이 부족해 보이지만, 연대의 정을 실천할 수 있는 그 적은 것들이 감사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풍족한 것만을 감사의 대상으로 여겨왔습니다. 부자가 된 것만이 감사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연대의 정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적은 것에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행동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내어놓았던 것을 나누어 받아서 사람들에게 건네줍니다.
연대의 정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떼어내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판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행동이 부족했고 판단이 앞섰습니다.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아니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핑계를 위해 판단하지 않았던가요? 예수님은 외딴 곳에서 많은 무리를 먹일 빵이 부족하다는 제자들의 판단에 어떤 식으로도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의 어떤 합리적 판단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이해시키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연대의 정은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오직 행동해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빵과 물고기를 내어 놓았고, 감사가 더해져 다시 돌아온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제자들의 행동 가운에 부족한 빵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나누는 행동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누면서 얼마나 많은 조건을 갖다 붙이고 있었나요? 예배와 기도 시간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과 지식과 건강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것을 타인과 나누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사람들에게 건네기만 하면 됩니다. 마태는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나서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37) 고 기록합니다. 남은 빵이 일곱 광주리였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완전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연대의 정을 드러내는데 완전했듯이, 남은 부스러기 일곱 광주리는 그 결과로서의 만족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부족한 빵은 부족한 배부름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연대의 정에 감사가 더해질 때 부족함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앞에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놓을 때, 그분은 그것을 나누어 우리에게 되돌려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누기만 하면 됩니다. 연대의 정을 요구하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소유의 부족함을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각은 이 장면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식은 현실 인식인가요, 그리스도 인식인가요?
우리의 인식이 현실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부족했던 빵이 어떻게 많아졌는지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지니신 초능력을 바라보게 되고, 우리가 가진 능력은 형편없음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연대의 정을 드러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있는 빵과 물고기에 감사하셨고, 그것을 다시 제자들에게 건네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다시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바라보게 하며,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