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책상서랍에서 훈련수첩을 꺼내 펼쳐 보았다.
그 안에 빼곡이 담겨 있는 수 많은 계산들과 숫자들...
1초를 쪼개고 나누고, 또 밀린 1초, 1초에 아쉬워하며
나는 지난 7개월동안 과연 무엇을 준비해 온 것일까.
올 봄 동아는 부상으로 인한 부족한 훈련양으로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고
이번 중앙에서만큼은 어떠한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똑같이 주어진 시간과 조건안에서 최선을 다하여
그 노력에 합당한 기록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중앙을 준비하며 페이스주로 삼고자 했던
첫번째 강화대회에서는 정말 무참히 무너져야 했고
두 번째 상암동대회 역시 근육부상으로 형편없는 기록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32키로짜리 대회에서조차 모두 실패했는데
오히려 중앙이 다가올수록 가슴속에선
‘나는 할 수 있고 분명히 해 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도 되지 않는 자신감과 흥분이 점점 더 끓어 넘치고 있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것에 도전하게 만드는 이 무모한 게임.
마라톤이 이래서 나는 좋다.
중앙에서의 나의 목표는 5km당 19‘30“ 여덟번!
골인점에 기어서 들어올지언정 목표는 2.45였다.
***설레는 출발선에서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출발점이 있겠지만
마라톤대회의 출발선만큼 가슴 설레고 멋진 곳도 또 없을 것이다.
모두가 긴장과 흥분속에서도 두 눈만큼은 오직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다.
어서 빨리 출발의 총소리가 울리기만을...
추울것이라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포근함이 느껴질 정도의 날씨였다.
출발 전 혼자서 십분정도 가볍게 몸을 풀고 빽빽한 선수들의 틈을 비집고
출발선 다섯 번째 정도에 위치를 잡는다.
배번의 숫자가 그 선수의 서열과 내공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어
여기 저기에서 은근한 자리싸움이 벌어진다.
출발전에 소변을 비웠음에도 문득 다시 요의가 느껴진다.
마침 옆주자의 반쯤 채워진 포카리통을 빌려 나 역시 볼일을 보는데
느닷없이 총소리가 터진다.
출발은 그렇게 황망했다.
주문을 외기 시작한다.
자, 이제 드디어 시작이다.
천천히, 천천히...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그동안 흘렸던 땀과
고통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잠깐 사이에 수 많은 주자들이 무더기로 나를 추월해간다.
"얼마든지 저를 추월해 가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다시 저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이상할 정도로 무겁다.
km당 구간기록이 계속 늦어져서 페이스를 맞춰 나가기가 힘들다.
5km:19.35
***마음은 뜨겁게, 발걸음은 차갑게.
이번 중앙대회는 분명히 거리표시가 맞질 않았다.
언덕이 많은 코스이긴 했으나 km당 구간거리가 너무 많이 들쭉 날쭉했으며
특히나 20키로~25키로 구간은 전체 거리 또한 맞지를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의문점 하나.
과연 나의 컨디션은 베스트였을까?
훈련양을 줄이며 테이퍼링은 제대로 된 것이었을까?
결국 이 문제도 앞으로 내가 풀어야 할 문제 중 하나이겠지만
10km지점이 다 되어 가는데도 몸은 풀리지 않고 숨도 역시 계속 가뻤다.
만일 테이퍼링이 제대로 되었다면
19‘30“ 정도의 페이스는 가뿐하게 느껴져야 할 텐데...
이러다가 또 다시 후반에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처절하게 무너졌던 대회의 악몽들이 다시 머릿속에 상기되며
후반의 레이스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 무거운 느낌.
이것이 후반에 어떻게 내 발목을 붙잡게 될 것인지.
방법은 없다.
계속 가보는 수밖에...
10km:19.30 (39.05)
***평범한 레이스는 없다.
올 동아에서 나는 2.51을 달렸다.
그리고 이제 나의 마라톤 경력도 완전히 초보는 아닐 것이다.
동아이후 지금까지 흘려 온 땀의 정직함을 믿어 보자.
나는 분명히 동아때보다 진화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몸과 나의 정신에...
약해지지 말자.
은근하고 긴 언덕들이 계속 이어지고
키로당 구간랩은 4‘15에서 3’50사이에서 요동을 친다.
어쩔 수 없이 몸은 구간랩의 몇 초차이에 따라
함께 가속과 감속을 반복한다.
나를 믿었어야 했건만 정말 바보같은 레이스였다.
15km:19'41" (58'50"...예상 통과기록 58‘30“)
***최선과 차선사이에서
서서히 오늘 목표했던 2.45의 꿈은 접히기 시작한다.
이것은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너무나 정확한 내 몸의 물리적인 현상이다.
몸이 가볍게 풀려야 할 시점은 한참전에 분명히 지났다.
조금씩, 조금씩 다리에 피곤함이 느껴진다.
앞으로 남은 거리가 10키로 정도라면
무리하게 페이스를 올려 모험을 걸어 볼 수도 있겠지만
남은 거리는 아직도 반이 훨씬 더 남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35키로, 아니 30키로도 채 버티지 못하고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게 마라톤이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동안 흘려온 땀방울들이 이렇게 쉽게 무너져서는 안된다.
그래, 이제부터는 km당 구간기록은 보지 말자.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오직 내 몸의 느낌만을 믿어 보자.
20km:19'31" (1.18'21" 예상 누적기록은 1.18‘00“)
이구간 거리는 분명 짧았던 듯 합니다.
~25km 구간기록이 다소 길었던 듯 하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들 느끼셨는지요?
***이 벅차 오르는 가슴을
드디어 선도차들의 움직임들이 포착된다.
다시금 내 가슴도 출발선에 섰을 때처럼 다시 뛰기 시작한다.
이제 곧 이어 엘리트들의 멋진 질주가 나를 스쳐갈 것이다.
아, 이 흥분됨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저들과 내가 이 주로에서 함께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저들이 바람처럼 휩쓸고 간 이 길을
뒤이어 내가 달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온다.
이윽고 질주해 오는 흡사 사슴의 그것과 같은 검은 저들의 다리들.
그야말로 달리는 조각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곧 이어 거리는 많이 벌어졌지만 지영준을 비롯한 우리의 엘리트들도
띄엄 띄엄 스쳐 지나간다.
"이봉주의 후예들! 제발 힘을 내서 달려라!"
나 역시 이제부터는 후반을 준비해야 한다.
다리에 피로함은 더해가지만 아직 힘은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오늘 전체적인레이스의 결과는 앞으로 5km에 달렸다.
이제 이 지점을 지나서부터는 내가 속도를 높이고 싶다고 해서
속도를 올릴수는 없을 것이다.
곧 이어 스쳐가는 마스터즈 선두권의 힘찬 역주에
자극을 받으며 나 역시 반환점을 향해 달린다.
25km:20'04 (1.38'26 ...예상 통과기록 1.38‘00“)
하프 통과기록:1.23‘21...
하프 통과 구간역시 다소 거리가 조금 길었던 듯...
***고통과 행복은 하나다
반환점을 돌았다.
일마의 야생마선배와 재학이형이 이끌고 있는
두 그룹의 일마의 써브3 군단들이 힘차게 역주를 해 오고 있다.
심리적 ‘벽’이었던 30키로 지점이 가까워 오면서
어쩌면 남은 거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싹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한다.
삼거리 코너의 트럭 밴드에서는 커트 코베인의
익숙한 절규만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 두려움을 넘었다고 생각 하니 이제는 여유가 생긴다.
아, 행복하다.
앞으로 단 몇 km로도 못 달리고 발길을 세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럴지라도 희망을 품고 달리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지 아니한가.
정말 행복과 고통은 종이 한장 차이인가 보다.
30km:19'39" (1.57‘49“)
2.45 예상 마지노선은 1.57‘00“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힘은 아직도 충분한 느낌이다.
물론 이 느낌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망과
무사히 안착할 수도 있겠다는 안도감에 생겨난
주관적인 느낌일수도 있었을 것이다.
잠시, 초반에 내가 느꼈던 몸의 무거움,
그래서 차선의 선택을 한 나의 판단이 혹시
너무나 몸을 사렸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아니었다.
중앙코스는 분명 반환이후 특히 30키로 이후부터
내리막도 계속 이어지며 후반이 편한 코스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내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경쾌한 이 발걸음의 느낌에도 불구하고
계속 구간기록이 늦어진다는 것은
분명'벽‘에 가까워 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지금까지 많은 주자들을 추월해 왔고
이제 곁에는 출발때부터 함께 동반주를 했던
홍콩주자 한분과 또 한분에 나까지 셋뿐이다.
그리고 내게도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종아리에서 갑자기 움찔하며 쥐가 오른다.
경기 중 쥐의 출몰은 최악의 싸인이다.
죽어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데...
35km:19'56" (2.18'01")
***제발 한번만 더 달리게 해다오
쉽게 얻어질 마라톤은 아니라 생각했다.
푸른 가을 하늘에게 간절히 부탁을 했다.
그러나 경련은 점점 더 잦아 진다.
무심코 입에서 튀어 나온 “어이쿠!” 라는 내 비명에
동반주 하던 주자가 자신이 마치 내 레이스를 방해라도 한 듯 알고
깜짝 놀라며 곁에서 떨어진다.
이내 내 표정과 걸음걸이로 쥐라는 걸 알아 보시고
눈빛으로만 힘을 전해 준다.
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쥐는 마치 살아 있는 그 무엇처럼 불끈 불끈 종아리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제는 왼쪽 햄스트링까지도...
서게 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다.
보폭은 짧게, 짧게, 속도는 늦춰야 한다.
결과적으로 여기까지가 내 한계이고 지금의 내 실력이다.
속도가 떨어지자 어려움 없이 추월을 했던 주자들이
다시 한둘씩 내 앞을 추월을 해간다.
일원역이든가...아마도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긴 언덕이었을 것이다.
이 언덕을 오르면서부터는 조금만 다리에 힘을 실을 양이면
어김없이 양쪽 다리가 경련으로 꿈틀거렸다.
40km:20'33" (2.38'35")
***과연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일까?
이제 나에게 남은 거리는 2키로.
30키로를 넘기면서부터 다리는 무거워지고 힘은 들었지만
오직 한 가지만은 묻고 또 되물었다.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인가?
오늘 경기에서 나는 과연 최선을 다해 뛰어 왔던 것일까?
이제 정말 내게 남은 마지막 힘을 짜내야 할 때다.
얼마 전 나를 추월해 갔던 저 만치 앞서가는 홍콩선수만은 마지막으로 잡고 싶었다.
멀어졌던 거리가 다시 얼마간 좁혀지기는 했지만 역부족.
역시 만만한 주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골인.
이 순간을 상상하며 여러장 페이스챠트를 붙여 놓고
런닝머신위에서도 눈시울을 붉히곤 했는데...
그렇게 나의 가을 달리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40~2.195: 9‘04“
최종: 2.47‘35“ 전체 33위.
ps:
주로에서 힘차게 응원해주신 성식이형, 종수형님.
다시금 감사 말씀 올립니다.
기록단축의 기쁨도 맛 보았고 몇가지 아쉬움 점도 분명히 있었으나
가을 달리기시즌은 중앙으로 만족할까 합니다.
마라톤, 하면 할수록 재미 있고 몸을 만들어 가는 재미도 상당합니다.
아마도 달리기와 고통에 대한 중독이 분명한듯 합니다.
부상 조심하며 급하지 않게 가겠지만,
조금 더 하면 분명히 더 나아질것은 이 몹쓸 욕심에
앞으로 조금만 더 가 볼까 합니다.
후기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완벽의 시나리오와 연출에 조화를 이룬 명작에 찬사를 보내며 정열적이고 부지런함의 엘리트 기질에 내자신이 숙연해지네여..멋쟁이~~
썹쓰리드리며 앞으로 더 좋은 기록하시길 기원하며 멋진글 감사 합니다 이병희 철인님
병희씨... 정말 멋지네... 열심히 훈련해서 맘껏 뛰어볼 날을 그려봅니다~ 욕심만큼.. 열심히 한다면 몹쓸 욕심 부려봐도 좋겠네...^^
그 치밀하고 정확한 훈련과 레이스에 존경스럽다. 열정과 냉정 늘 일찍와서 운동장을 뛰는 힘찬 말. 말이라 불리울 사나이 힘.
멋지다 병희 담엔 꼭 245 성공할 수 있을거야 무한질주 이병희 힘!
철저한 준비와 굳은 의지로 목표달성은 못했지만 나아지는 병희씨 기록이 끝없음을 기대합니다. 홧팅!!
일반 사람들은 도저히 도전할수 없는 기록인득 하네요.....병희씨의 기록은 일철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이철힘!!~~~
병희야~~ 그기록에도 만족 못하면... 나같은 넘은 워찌 살아갈꼬...멋쟁이 병희 !! 히~임 !!!
병희씨 끝이어디야??? 아니면 쁘로로 전향 ㅋㅋ 좋은기록완주 축하하네...
병희, 멋진 완주기야... 축하해. 멋진 레이스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