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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1 - 로마의 카이사르 7년 전투 끝에 갈리아를 정복하다!
유럽의 주요 민족은 라틴족(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켈트족(벨기에, 프랑스,
스위스, 북이탈리아, 영국), 게르만족(독일, 오스트리아), 노르만족(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및 슬라브족(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체코, 세르비아) 인데 로마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의 그리스인들의 호칭인 켈트족을 갈리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에 갈리아인 세노네스부족, 피렌체에 에트루리아인, 로마에 라틴인,
산악지대에 삼니움인 그리고 나폴리에서 타란토와 바리에 이르는 해안가에는 그리스
여러 도시국가에서 건설한 식민도시가 있었는데,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건국해 일곱명의 왕을 거쳐서 기원전 509년 왕을 폐하고 공화국이 됩니다.
1. 기원전 396년 켈트족 갈리아인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하다.
로마는 라틴족 사이에 우위를 차지한후 기원전 396년 카밀루스의 지휘 아래 에트루리아의 도시 베이
를 점령해 주민들을 학살했는데, 땅의 처리를 두고 평민과 귀족의 의견이 엇갈려 내분이 일어
났으니... 이런 중에 북이탈리아에 거주하던 켈트(갈리아)인 세노네스족은 기원전 391년에 남하해
에트루리아의 클루시움이란 도시를 약탈한후 브렌누스가 지휘하는 세노네스족은 로마로 남진합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켈트족은 북쪽에 있던 부족들에 밀려 일부가 이탈리아 북부로
들어와 정착했다는데, 군대 안에서 지위에 따라 투구 깃털 장식을 달며 기병과 보병에 전차까지
있었고 전사들 중에는 알몸으로 싸우는자들도 있으며, 자기가 죽인 적병의 목을 잘라 말에
매달며 집에 돌아가면 머리를 기름에 담가두었다가 손님에게 보여주는걸 기쁨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로마가 갈리아라고 부른 켈트족은 그리스인둘이 붙인 이름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남자들은 중국인
처럼 평상시에는 물론이고 전투 때도 치마를 입었던데 비해.... 저 사람들은 흉노 처럼 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바지입은 사람 = 켈트" 로 붙였다고 하는데, 전투시 전차를 타고 싸웠다고 합니다.
ㅋ로마는 라티움의 패권자였으나 점령된 도시 베이를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귀족과 평민의 대립으로 군사력이 약해졌으니 기원전 390년 7월 18일 알리아 전투
에서 패배했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패잔병들이 개미처럼 흩어져 달아났다고 합니다?
켈트계 갈리아인 세노네스족은 로마성내로 진입하였고 로마 시민은 싸울 수 있는 자들만
뽑아 높은 언덕인 카피톨리노로 올라가 농성하니 켈트족은 원로원 의원, 어린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죽이고 로마 시내의 건물들과 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살랐습니다.
켈트족은 7개월간 로마를 점령했으나 도시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 몰랐으니 시체를 수로
에 버려 더러워진 수돗물을 먹고 전염병까지 생기는데, 로마인들도 갈리아인들을 무찌를
방법이 없자 배상금으로 300kg 황금을 주니 비로소 켈트족은 로마를 떠나는데.... 로마는
카밀루스를 독재관으로 삼고는 떠나는 켈트족의 후미를 습격하여 분풀이를 하였다고 합니다.
2. 로마 레기온 스타일로 재건해 이탈리아 패자가 되다.
로마는 이 패배를 계기로 군대를 개혁하니 그리스 팔랑크스를 버리고 레기온 스타일로 진화하는데,
'팔랑크스' 는 병사들이 하나의 거대한 사각형을 이뤄 공격하는 방식으로, 정면에서 뚫을 가능성
이 거의 없으나 제한된 조건이라는 약점이 있으니... 나무나 바위가 없는 매끈한 평야지대 여야
하고, 측면과 후방이 완전히 보호 되어야 하며 느린 스피드 에다가 훈련으로 숙달이 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로마가 새로 도입한 '레기온' 스타일은 작은 네모들로 큰 네모를 형성해 공격하는 스타일
이니.... 신분 높은 계급을 보호하기 위해 계급순 일렬로 배치하는 전술을 사용하는데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Hastati, Principes, Triarii) 로 나뉘는 마니풀루스 진형 입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는 120명 단위로 총 1200명씩, 최후미로 예비대인 트리아리는 60명 단위로
총 600명을 편제하여 1개 군단병력을 3000명 선에서 유지하였고.... 양익에는 기병대 300명을
나누어 배치했으며, 군단 총원으로 세지 않는 벨리테스(Velites) 들은 대열 중간에 나뉘어 배치됩니다.
'하스타티(Hastati)'는 주로 전투 경험이 부족한 젋은 신참병, '프린키페스(Principes)' 는
전투 경험이 적당히 있고 나이도 장년층인 남자, '트리아리(Triarii)'는 나이가 있고
전투 경험이 많은 남자들로 구성되었으니.... 신체적으로나 경험을 고려한다면 로마군
의 중핵은 프린키페스 였으니 이러한 마니풀루스 시스템은 카밀루스가 창안했다고 합니다.
로마는 재기하여 자 레기온 스타일로 부대를 편성해서 중부에 삼니움족을 굴복시키고,
남부에 그리스 식민도시들을 손에 넣은후 3차례에 걸쳐 포에니전쟁으로 카르타고
를 멸망시키고는 동쪽으로 진출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취한후 시리아까지 멸망
시키니..... 서쪽으로 스페인에서 부터 동쪽으로 시리아 까지 지중해 전역을 장악합니다.
3. 프랑스 남부에 로마 식민지 속주(플로빈키아) 나르보넨시스
프랑스 남부에 마르세이유 지역은 그리스인 도시국가가 진출해 식민도시를 건설했는데, 한니발
이 스페인에서 부터 이 지역을 통과해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략했으니... 로마가 승리한
후에는 자연히 프랑스 남부 해안지대는 기원전 118년경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는데, 기원전
103년에 마리우스가 프로빈키아에 원정을 해서 침입한 게르만족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프로방스 지방의 어원이 된 프로빈키아는 라틴어로 속주라는 뜻인데 프랑스 남부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이름으로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프로빈키아 노스트라',
'프로빈키아' 등이 있었는데...... 훗날 그 중에 프로빈키아라는 이름으로 정해졌지만
아우구스투스 때에는 나르보넨시스로 이름이 바뀌었고 나르본 이라는 도시가 건설 됩니다.
기원전 58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아, 프로빈키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로마는 갈리아의 켈트족 부족국가들과 교역 및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프랑스의 하이두이족은 프랑스 켈트족인 세콰니족,
스위스의 켈트족인 헬베티족 그리고 게르만족의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독일 게르만족(수에비족?)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스위스 제네바의 켈트족인 헬베티족은 대서양
에 면한 산토니족의 영토 브르타뉴로 이주하기 위해 프로빈키아 속주를 지날 것을 카이사르
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지만, 그래도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의 영토를 지나려고 했는데
이에 하이두이족이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전쟁이 시작되어 갈리아 전쟁으로 확대됩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 이후 불과 7년만에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
었는데 전쟁 자체는 8년째, 기원전 5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알레시아 공방전의 결과
로 전쟁은 실질적으로 끝났으며..... 기원전 51년은 전후처리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니 갈리아 전쟁에 대한 1차 사료는 카이사르의 저작 “갈리아 전쟁기” 가 있습니다.
4. 스위스 켈트족인 헬베티족 갈리아를 가로지르다 카이사르에게 격파당하다
기원전 58년 독일 게르만족에게 밀려난 헬베티족은 스위스 레만호에서 브르타뉴 지방
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시작했으니...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12개
도시와 400개 촌락에서 모인 총인원 37 만명, 그 중에서 전사(戰士)만 9만
2천에 달하는 대 무리가 2개월치 식량만 휴대한 채 고향인 스위스 제네바를 떠납니다.
수백년 살아온 터전인 고향땅에 대한 미련을 끊기 위해 대담한 결정을 했으니.... 바로 도시와 부락을
불태웠던 것이지요? 강에 놓인 다리를 끊고 배수진을 친 군사들 처럼 BC 58년 4월에 제네바에
집결한 헬베티족은 갈리아의 하이두이족 등 여러 강력한 부족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대서양
브레타뉴에 이르는 서쪽인 직진코스를 포기하고 론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우회길을 택합니다.
이미 오래전에 로마화 된 갈리아(프랑스) 남부 속주 “갈리아 트란살피나” 를 통과해야 하는데, 당시
로마에서 집정관을 지낸후, 이곳 속주 총독으로 내정된 시저(카이사르) 는 단호히 거부하는데....
하지만 이때 시저는 갈리아 (프랑스) 남부 임지에 아직 부임하기 전이라 이탈리아 땅에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멀리 이태리 북동부에 있는 3개 군단이 도착하는 것을 가다리지 못하고 또 로마에서
새로 2개 군단이 편성되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달랑 1개 군단(제10군단으로 병력수 6천명)
만 거느리고 급히 알프스를 넘으니 이런 전광석화 같은 행동에 당황한 헬베티족은 하이두이족에
부탁해 세콰니족 영토를 무사히 지나도록 설득 (임진왜란때 戰死易 假道難 전사이가도난?) 합니다.
하지만 30여만명이 지나가다 보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사소한 충돌이 마침내 전투로 돌변
하였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 화(禍) 가 하이두이족 에게도 미치자 하이두이족은 동맹
관계인 로마에 원군을 청하니 카이사르는 프로빈키아 속주에서 3개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프랑스) 리옹으로 진격해 손강에서 강을 건너던 헬베티아족 후미에 일격을 가합니다.
이후에 하이두이족으로 부터 기병 4천과 군량 보급을 받은 카이사르는 6개 군단을
이끌고북쪽으로 추격하여 오툉에서 벌어진 비브락테 전투에서 헬베티인들에게
대승을 거두니, 군량이 떨어진 헬베티인들이 항복하고 고향 제네바로 돌아왔을
때는 37 만명의 무리 중에서 70 % 가 죽고 불과 11 만명으로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이 뼈아픈 역사를 어찌 후손인 스위스인들이 잊어버릴 수 있겠는지요? 지금은 게르만족 독일어 주민
이 대다수를 차지함에도 26개주 연방인 스위스 Swiss 는 영어로, 우리나라로 치면 “코리아” 이니
“대한민국”에 해당하는 국명은 무엇인고 하면 65% 를 차지하는 독일계는 슈바이츠 Schweiz, 20%
프랑스계는 쉬스 Suisse, 7% 이탈리아계는 슈비쩨라 Svizzera 1% 인 로망슈계는 슈비즈라 Svizra 라?
스위스 라는 이름은 1291년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대항하여 루체른 호수 동남쪽에서 모여
뤼틀리 동맹을 맺었던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등 3개 주 중에 “슈비츠” 주에서 기원하는
데, 로마의 라틴어“카이사르”가 영어로는 “시저”로 되듯이... 민족별로 발음이 다르니
라틴어로.... Confoederatio Helvetica (헬베티아 연방)이 스위스의 공식 국명으로 불립니다.
따라서 유로권에 속하지 않는 스위스의 화폐 스위스 프랑 CHF 는 Confoederatio Helvetica
Franc (헬베티아 프랑) 의 약어인 것이며 수도 베른에“헬베티아 Helvetiaplatz"
광장 이 있으니 헬베티아는 바로 카이사르에게 쫃겨 되돌아왔던 조상들의 이름인 것입니다?
5. 로마 장군 카이사르 7년 전쟁 끝에 갈리아를 정복하다
헬베티족과 전투 이후 갈리아인들은 게르만 부족인 수에비족을 물리쳐 달라고 카이사르에게 부탁
하니, 카이사르는 독일 남서부를 일컫는 지명인 슈바벤(Schwaben) 의 어원이 된 수에비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시작했으나 브장송에서 협상이 결렬되고 수에비족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니 카이사르는 브장송에 겨울 숙영지를 짓고 라인강을 로마의 방위선으로 결정합니다.
라인강 상류지역에 거주했던 수에비족은 여러 민족의 연합으로 보이는데 1세기 초반 수에비 연맹에
속해 있던 마르코만니 족은 훗날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괴멸시킨 아르미니우스
와 싸워 패배했지만...... 그가 로마에 패퇴한 후 세력을 회복했으며 2세기 중반 수에비 연맹의
마르코만니와 콰디족은 로마제국을 침공하고 5현제의 마지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대결합니다.
그리고 3세기에 수에비 연맹은 알레만니 혹은 알라만으로 불렸으니 독일 마인강
연안에 정착하는데.... 수에비는 여러 부족의 연맹체였고 로마인들이
게르만이라 칭한 부족은 고트족을 제외하면 십중팔구 이들이었다는 것이라 합니다.
훗날 568년에 이탈리아로 침략해 동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 롬바르디아 왕국을 세우는 하는 랑고바르드
족도 수에비의 한 갈래라는 주장도 있으니, 그렇다면 발트 지역에서 게르마니아로 이주해 온 민족들을
통틀어 수에비로 칭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해 잠시 수에비 왕국을 세웁니다.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갈리아인들 사이의 내부 부족투쟁에 개입하는데 로마군은
갈리아 북동부 경계선까지 진출하여 레미족과 동맹을 맺고 벨가이 여러부족과 전투
를 벌였는데, 벨가이인(벨기에)은 30만명으로 수에시오네스족의 족장 갈바를 중심
으로 로마군에 맞섰으니 카이사르는 센강을 건너 벨가이인들과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수에시오네스족을 물리치고 벨로바키족, 암비아니족과 차례로 강화를 맺은
다음 벨기에 영토인 갈리아 북동부를 평정하였고, 부하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
에게 대서양 연안의 부족을 평정하게 하였으니..... 이리하여 갈리아(프랑스)
전체가 평화로워졌고 카이사르는 겨울 숙영지를 갈리아 중서부 오를레앙에 잡았습니다.
기원전 56년 카이사르는 제1차 삼두정치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만난 "루카회담" 에서 다시
한번 삼두정치의 방향을 정하는데, 그 사이 베네티족을 비롯한 갈리아 서부의 부족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으니 카이사르는 브르타뉴 지방으로 진군해서는...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로마 해군 선단이 베네티족의 함대 220척을 격파하여 베네티족을 완전히 괴멸시켰습니다.
한편 카이사르의 부하 장수들도 곳곳에서 카이사르 대신 전과를 올렸으며 라인강
에서는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노르망디는 사비누스, 아키텐에서는 청년
크라수스가 승리하였으니.... 카이사르는 노르망디에서 겨울 숙영지를 설치합니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라인강으로 진격해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을 쳐부수고 독일 본
과 쾰른 사이 중간지점에서 다리를 놓아 처음으로 라인강을 넘어 수감부리족을 공격하고
우비족과 화평을 맺었으며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해안가에서 브리타니아인
들의 공격을 받았고 격전을 치렀지만....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하고 다시 갈리아로 돌아 옵니다.
카이사르의 1일 행군속도는 33km 인데 이보다 못한 군대는 국군 1사단 평양 진격 25km ,
알렉산드로스 대왕 24km, 6.25 중공군 20km, 영국 사자왕 리차드 16km, 이라크전
미군 16 km, 6.25 인민군 10km 이고 더 빠른 군대는 나폴레옹 40km, 독일군 기갑부대
소련침공 42km, 특전사 천리행군 44km, 부르고뉴 기마대 59km, 고구려 모본왕 기마대
72km, 홍군 대장정 130km, 몽골 기병 134km 이고 몽골 바투의 유럽 침공 151km 입니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제2차 브리타니아원정을 계획했으니 그전에 트리베리족을 복속시키고
브리타니아를 침공하자 브리타니아인들은 게릴라 전술로 공격했고 카이사르는 템즈강을
건너 쳐들어가서 브리타니아의 카시벨라우누스와 강화를 맺고 가을에 갈리아로 돌아왔는데
갈리아에서 밀 수확이 예년에 훨씬 못미치니.... 군단을 여덟개로 분산해 겨울을 보내기로 합니다.
그중의 한군데에서 15개대대 9,000명의 병사가 에부로네스족의 족장인 암비오릭스의 계략에
말려들어 몰살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네르비족과 아투아투키족도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6만명의 벨가이족 군대가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겨울 숙영지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카이사르는 키케로를 구하러 달려갔고 반란부족을 격파했으며 아미앵 에서 겨울을 보냅니다.
전쟁 6년째인 기원전 53년 카이사르는 반란을 일으킨 네르비족을 제압한후 파리에서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주재했는데 이때 참석하지 않은 부족을 반란부 족으로 간주하여 압박했고,
결국 세노네스족과 카르누테스족의 복종을 받았으니 이로써 배후를 강화한 카이사르
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트레베리족을 라비에누스에게 격파하라고 명하고는 합류합니다.
카이사르는 다리를 만들어 두번째로 라인강을 넘어갔으나 깊숙이 추격하지는 않았는데
게르만족과 전면전을 벌이지는 않고 다시 돌아와 진지를 짓고 6,000명을 라인강
서쪽에 에 주둔시켰으며 암비오릭스를 쫓아 북쪽으로 추격했으나 결국 붙잡지는
못하고 돌아와서는 랭스 에서 부족장 회의를 다시 주재하고 반란군 주동자를 처형합니다.
전쟁 7년째인 기원전 52년 카르누테스족이 오를레앙의 로마인을 살해하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아르베르니족의 족장이된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부족의 총궐기를 호소하여 갈리아
부족 대부분이 로마에 반기를 들자, 카이사르는 프로빈키아에서 갈리아 중부로 달려가 군단을
모아 보르주에서 농성하는 갈리아군을 격파하지만 게르고비아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합니다.
6. 카이사르의 로마군 5만 갈리아 부족 33만 대군을 알레시아 전투에서 격파하다
이 틈을 타서 갈리아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전투를 걸었지만.... 카이사르는 이들을
다시 격파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 요새에서 8만명의 병력으로 농성
하자, 카이사르는 12개 군단 5만으로 알레시아에 포위망을 구축하지만 갈리아
부족 연합의 25만 대군이 포위망을 다시 포위하여 안팎의 적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기원전 260년 5월 조나라 염파는 장평에 보루를 쌓으니 왕흘의 진군이 돌파못하자 진나라는 장군을
백기로 바꾸고 헛소문을 퍼뜨려 조국 대장을 낙마시키고 새로 온 조괄의 공세에 거짓 후퇴하다가
매복한 군대가 일어나 앞뒤로 포위하자 조군은 보루를 쌓고 버텼지만 진군은 후방에 성채를 쌓아
원군을 막고 보급을 차단하니, 굶어죽을 지경인 조군이 항복하자 저 40만 포로를 땅에 묻어 죽입니다.
손자병법에 적의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지하책이라 했으니 일본 전국시대에 다케다 신겐은 1550년 7월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의 하야시성을 공격하기 전에 성을 쌓았으니 마쓰모토성의 전신이며, 하시바
히데요시는 1581년 난공불락이라는 독토리성을 취할 때 성과 보루며 목책을 쌓아 보급을 차단해 굶겨
죽이는 작전을 쓰면서 후방에서 오는 모리씨 원군에 대해 성채를 쌓아 저지하니 전투없이 성을 얻습니다.
기원전 52년 9월에 벌어진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앞과 뒤쪽에 2중의 나무 방벽을
세우니, 언덕 위에 베르킨게토릭스를 막기 위해 쌓은 나무로 둘러친 내측성벽은17km 이고
120미터를 두고 바깥에는 갈리아 부족들의 원군에 대비하기 위해 22km 외벽을 쌓았습니다.
나무 성채 바깥에는 참호를 파고 해자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였으니 1차 저지선이고
그 다음에는 흙으로 둔덕을 쌓은 다음에 함정을 팟으니 풀로 덮어 가린 함정
안에 뾰족한 갈고리와 날카로운 꼬챙이를 빈틈없이 꽂아 적군이나 말이 떨어지면
죽게했으니 2차 저지선이고 그 다음에 나무 방책인데 중간 중간에 높은 망루를
세운 다음 적의 화살로 부터 보호받는 망루에 숨어 화살을 날리니 3차 저지선입니다.
9월 20일 갈리아 전약에서 모여든 25만에 달하는 갈리아 부족 증원군이 로마군의 포위망
가까이 까지 진격해 오자, 로마군은 기병이 상대에 비해 숫적으로는 압도적으로
적었지만 기병전으로 나서 용감히 싸워 갈리아 기병을 물리쳤고, 외부의 증원군에 호응
해 나온 농성군 보병도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다시 요새로 되돌아 올라 갑니다.
다음날 갈리아군은 공성기를 보강해 야음을 틈타 로마군 나무 성채를 공격해 왔으니 전투를 벌였
지만 방벽에 저지당해 로마군의 포위망을 뚫는데 실패하고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으며,
이때도 요새 안에서 농성군이 호응했으나 안팎에 걸친 포위망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전투 사흘째 되는 날 갈리아군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인 베르카시베라우누스에게 6만
명을 주어 카이사르 포위망의 가장 약한 곳인 북쪽 진지를 공격하게 했고 정오에
세군데서 동시 다발적인 파상적인 총공격을 감행했는데, 카이사르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붉은빛 망토를 입고 병사들에게 보이는 높은 망루에 올라 지휘를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높은 망루에 올라 전투 장면을 한눈에 보면서 정확한 상황판단으로 지휘했고
부장 라비에누스를 북쪽의 약한 방벽으로 보내 공격을 막게 했는데, 안팎의 갈리아
군의 총공세에 포위망 몇 군데는 뚫렸지만.... 적재적소에 카이사르가 그때 그때
지원군을 보내어 막을 수 있었고...... 워낙에 포위망이 여러 겹이었기 때문에 버텨냅니다.
이후 가장 전투가 치열한 북쪽 전선에서 카이사르는 직접 증원군을 이끌고 전선으로 뛰어들었으니
갈리아군도 더욱 세차게 공격해왔지만 배후에서 기습한 로마 기병대에 쫓겨 괴멸했고 베르카
시베라우누스는 생포되었으며, 요새 안에서 공격하던 갈리아군도 몇시간에 걸친 격전과 백병전
끝에 북쪽 전선이 무너지자 요새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포위하던 갈리아군도 패해서 달아납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무기를 버리고 카이사르에 투항했으며 카이사르는 군단을 여덟군데로 나누어 겨울을
나게하고 자신은 하이투이족의 영토에서 숙영했는데, 이로써 사실상의 갈리아 전쟁은 막을 내렷으니
기원전 51년 겨울 동안 카이사르는“갈리아 전쟁기”7권을 간행했으며 전후처리를 통해 모든 부족
을 로마에 복속시켰고 갈리아를 로마화했으며 속주세를 정액제로 바꾸니 갈리아의 라틴화가 진행됩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가 몸젠의 “카이사르는 로마 역사상 유일한 독창적인 천재” 란 말을 빌려
“카이사르는 이이제이의 달인” 이라 했으니 어제의 적 갈리아 부족장들의 지위와 권력을
그대로 인정하고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으며 심지어 로마 원로원 의석까지 주었는데......
조건은 로마 속주가 되어 로마군이 갈리아 방어를 맡는 대신에 “속주세”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과 대립해 내전으로 이어졌으니 로마군은 4년간이나 갈리아를 비웠는데도
갈리아인들은 반란(독립)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원로원은 그리스나 이집트에서 전쟁비용을 조달
했지만 에스파니아에서 싸운 재력이 부족한 카이사르에게 갈리아는 군량에다가 세금까지 착실히
거두어서 보냅니다? 이는 로마의 느슨한 지배가 갈리아인들에게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는 뜻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