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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은 경주의 남산 서록계류에 연한 작은 숲 속에 있던 것으로 이곳은 신라의 별궁이 있던 자리로, 현재 사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은 없어지고 석조구조물만 남아 있다. 이 포석정은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고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에 인공적인 기술을 가미하여 이룩한 조화미는 신라 궁원(宮苑) 기술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원래는 남산계곡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돌이 있었고, 그곳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 포석정이 정확하게 언제, 어떤 연유로 마련되었으며, 그 주된 용도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포석정 터에 남아 있는 포석(鮑石)은 다듬은 화강석 돌을 사용하여 물이 흘러가도록 한 구조이데, 전체적인 형태가 마치 바다의 전복 껍질 둘레와 같은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하여,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이궁터 離宮址
신라 왕실의 별궁이었던 포석정은 경주 남산 포석계의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일대를 성남 이궁터(城南離宮址)라고 부른다. 이궁(離宮)이란 임금이 행차하였을 때 머무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곳은 왕족과 귀족들의 놀이터 또는 남산신(南山神)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이곳의 건물터는 알지 못하고 있는데, 오직 옛 모습 그대로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개울가 바로 위에 자리잡고 있는 포석정 뿐이다. 돌에 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 받았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돌의 홈모양이 구불구불하여 전복 껍질 모양과 같으므로 포석정(鮑石亭)이라 하였다.
포석정에서 건물 흔적도 발굴되었고, 1999년에는 ' 포석 (砲石)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도발견되었다. 이 기와조각이 발견된 곳은 포석정 남쪽의 약 1,500평 정도되는 부지로, 시굴 조사과정에서 가로 12cm, 세로 16cm 정도 크기의 기와조각에 나뭇가지와 함께 '포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 6점이 출토된 것이다. 기와에 새겨진 '포'자는 포석정을 의미하는 '포 (鮑)'자가 아니라 '포(砲)'자인데 학자들은 포(鮑)자를 약자화하여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신라기와조각의 출토는 이를 '화랑세기'에 나타나는 ' 포석사 (鮑石祠) ', 즉 신주를 모시는 사당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즉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한 성스럽고도 경건한 장소이었다는 해석이다.
유상곡수 流觴曲水
물이 포어(鮑魚 ... 전복 껍데기 모양 또는 전복 말린 것 같은 모양) 모양을 따라 만든 수구(水溝)로 흐르면 물 위에 띄운 술잔으로 술을 마시며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면서 즐기도록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水路)이다. 이를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시회(詩會)라고 부르는데, 포석정은 본래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다.
중국 동진(東晉) 시대 때 절강성의 작은 도시 소흥(紹興)에서 당대의 명필 왕희지(王羲之.321~379)로부터 비롯되었다. '왕희지'는 자신의 집 안 난정(蘭亭)에서 가까운 문인 41명을 초대하여 시회를 즐겼다. 난정(蘭亭)이 경주의 포석정과 다른 것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물길을 만들었고, 그 규모도 훨씬 크다. 명나라 시절에 편찬된 ' 난정수회도 (蘭亭修會圖) '는 그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연꽃 속에 술잔을 넣어 물 위에 띄워 놓고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질기는데, 詩를 짓지 못하는 사람은 벌칙으로 술잔을 마셔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 경주의 포석정도 술잔이 곡수(曲水)를 돌아 각자 앉은 자리 앞으로 오면 술을 마시면서 詩를 한 수 짓는데, 시간이 늦거나 제대로 짓지 못하면 벌주(罰酒)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포석정의 유상곡수에 대하여는 서거정(徐巨正)의 詩, 십이영가(十二詠歌)에도 나오고 있다.
포석정 앞에 말을 세울 때 / 생각에 잠겨 옛 일을 돌이켜 보네 / 유상곡수하던 터는 아직 남았건만 / 취한 춤 미친 노래 부르던 일은 이미 옳지 못하네 / 함부로 음탕하고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쏜가 / 강개한 심정을 어찌 견딜까 / 가며가며 오릉의 길 읊조리며 지나노니 / 금성의 돌무지가 모두 떨어져버렸데
포석정에 관한 기록
포석정(鮑石亭)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기록에 없다. 신라 제 49대 헌강왕(憲康王. 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임금 앞에서 여러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임금은 신하(臣下)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하였다. 남산신(南山神)이 산으로 돌아간 다음 이제는 놀아도 좋다니 신하들은 물었다.
그 동안 어찌하여 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 하고 물으니, 임금은 ' 그동안 남산신이 내려오셔서 춤을추고 가셨기 때문이다 ' 이 말을 들은 신하가 다시 물었다. 남산신이 어떻게 춤을 추었으까 ? 신하들이 재차 물으니 임금은 손수 일어나서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내어 보였다. 그후부터 그 춤이 널리 행하여졌는데, 남산신(南山神)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祥審舞)라고 하였으니, 이 춤은 고려시대에까지 유행되었다고 한다. 왕이 따라 추었다고 해서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 또는 어무상심무(御無祥審舞)라고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에는 이미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안압지(雁鴨池) 해안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으니 신라예술이 가장 왕성하던 때를 지나 조각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시대인 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 三國遺史 處龍郞 望海寺條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나갔더니 남산의 산신(山神)이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 측근자들은 못보는데 왕만이 이것으로 보았다. 그것이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는대로 왕도 이것을 따라 스스로 춤을 추어 보셨다. 그 귀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祥審)이라고도 하므로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해오면서 어무상심(御舞祥審)이라고도 하며 혹은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도 한다. 더러는 말하기를 원래 그 귀신이 나와서 춤을 출 때에 그 모양을 ' 자세히 본떠 (審祥) '조각장이를 시켜 그대로 새겨 후대에 보였으므로 ' 상심 (祥審 ... 본을 자세히 뜸) '이라고 하였다. 혹은 또 상염무(霜髥務 ... 흰 수염 춤)라고도 하였으니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위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포석정은 신라인들의 유희장만은 아니었다. 포석정은 신라왕이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음복하면서 여흥을 즐기며 술잔을 띄우던 신성한 곳이었다. 또한 그 위치도 남산신성에게 가까운 곳이다. 신성이 어떠한 곳인가 ? 신성은 나라가 위급할 때 신라의 조정이 피난가는 곳이며 이곳에서 항전을 벌이는 곳이다.
적과 항전을 벌이는 가까운 장소에서 유희를 즐길 수 있단 말인가 ?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할 당시는 12월 한 겨울이었고, 신라 조정에서는 '견훤'이 이미 영천까지 진주한 것을 알고 개성으로 사신을 보내 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요청해 놓고 있는 상태이었고, 왕건(王建)은 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이동 중이었다. 즉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던 경애왕(景哀王)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포석정은 임금이 신(神)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것이다. 경애왕 역시 꺼져가는 신라의 사직을 구하기 위해서 왕건에게 구원요청을 해놓고 포석정으로 와서 남산신(南山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포석정의 구성
포석정의 수로(水路)는 측벽을 다양한 크기의 63개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하였는데, 20cm 정도 높이에 비하여 측벽 석재의 최대 폭은 15cm 정도이므로 상당히 안정되어 있고 모든 구간에서 내측 함몰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포석정의 귀두(龜頭)는 없어졌으며 .. (원래는 원형 석조(石槽) 위에 큰 돌을 설치하여 그 거북의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설계되었는데, 조선 말엽에 어느 부윤(府尹)이 돌거북을 옮겨다가 자기 조상무덤의 비석대로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옴) .. 입구에 있는 5백 년 정도 된 고목의 뿌리에 의해 지반(地盤)의 융기가 약간 있었지만, 수리적인 특성에는 큰 영향을 미치니 않은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형태는 구불구불한 포어형(鮑魚形)으로 동서의 긴 축이 10.3m, 폭는 약 7m로 수로(水路)의 길이는 약 22m이다. 수로의 폭은 일정하지 않고 약 24cm에서 최대 40cm까지 다양하지만, 평균 30cm 정도이다. 깊이도 대체로 22cm 정도이며, 수로의 입구와 출구의 낙차는 40cm 정도이다. 물의 입수부에는 원래 거북이 모양의 돌이 있어서 계곡에서 끌어온 물을 공급하였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처음 물이 들어오는 곳에는 가운데가 우묵한 원형의 시설이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출수구도 물의 높이를 조절하였을 것이지만 아무런 시설이 남아 있지 않고 수로의 끝이 열려 있다.
원래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며, 이 물을 받는 원형 석조(石槽)가 있어 이곳에서 구불구불한 모양의 곡석(曲石)이 타원 모양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배수구의 마무리가 분명하지 않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온데다 일제강점기에 임의로 보수하여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이 많히 파손되었다. 즉, 현재 보이는 모습은 일제시대에 철거되었다가 다시 설치하는 과정에서 없어진 돌은 보충하여 다시 설치한 모습인 것이다.
유체역학 流體力學
그러나 포석정의 경우 규모가 작으므로 물이 그대로 흘러가면 2~3분 안에 다 빠져나가므로 그 짧은 시간에 4언시(四言詩)나 오언시(五言詩)를 짓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시작(詩作)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7~10분 정도는 주어야 한다. 포석정은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유체역학(流體力學)으로 말끔히 해결하였다. 술잔이 곡수(曲水)를 돌 때 맴돌기도 하고 멈추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곡수사적(曲水事蹟)은 물 위에 술잔을 띄우면 흘려내려 갈 뿐 좀처럼 맴돌지는 않는다.
즉, 이곳 포석정은 유체역학적으로 설계되어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에 술잔을 띄웠을 때 술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와류(渦流 .. 회돌이) 현상이 생기도록 설계하였기 대문이다. '회돌이현상'이란 주 흐름에 반하는 회전현상을 말하며 쉽게 말하여 소용돌이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포석정의 유체역학적 기능은 모형을 만들어 실험과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밝혀지기도 하였지만, 물결리 치는 듯한 독특한 포어(鮑魚) 모양에서 비롯되고 있다. 포석정의 물이 흘러가는 경로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출발시키는 경우 술잔은 결코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 술잔은 회돌이 구역에서 돌기도 하고 막혀서 갇힐 수도 있다.
게다가 신라인들은 수로의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굴곡이 있는 지점에 수로의 폭을 확장하거나 내측 바닥면의 함몰을 조성하여 술잔의 전복을 방지하였다. 즉, 포석정은 다양한 水路를 만들어 그 위에 술잔을 띄웠을 때 다양한 흐름과 위치의 변화를 만들어내도록 주의 깊은 관찰력과 이해력에 기초하여 설계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곳 포석정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에 2회, 삼국사기에 1회 기록되어 있다.
견훤과 경애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