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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베들레헴 작은 집 원문보기 글쓴이: 해바라기
율곡(栗谷), 수운(水雲), 해월(海月)
내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보고 발견하는 정신적 밑거름들 중에서, 주로 氣哲學的 전통을 통해서 내려온 사상계보의 영향을 발견하게 된다. 氣哲學과 종교적 역동성이 통합된 사람으로서 율곡, 수운, 해월 그 세 사람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율곡에 대한 연구는 깊게하진 못했지만 1970대말, 내가 대학원 철학과에서 늦깎이 학도로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부터였다. 물론 그 이전부터 독서를 통해서 율곡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윤사순교수를 통하여 유교철학을 듣고, 또 나의 문학석사학위 논제를 "율곡의 理氣論과 社會更張說"로 잡으면서 크게 증진되었다.
원시유가의 공맹철학이 중국적 삶의 현실을 밑바탕으로한 실천적 유학으로서의 깊은 진리성이있지만, 중국사람들이 워낙 현실적인 사람들인 연고로 종교철학적 차원은 크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주후 1세기 인도로 부터 심원한 불교사상의 유입을 통해 사상적 충격을 받게 되었고, 안으로는 노장사상을 근간으로하는 도가(道家)의 끊임없는 비판과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게 서양 기독교사상사에서 중세기 스콜라신학이 시작되던 10세기 무렵부터 소위 말하는 신유학(新儒學,Neo-Confucianism)이 중국에서 발달하게 되었고, 주희(朱喜)에 이르러 이기설로서 집대성 되었다. 내가 보기엔 신유학사상 곧 성리학(性理學)이란 원시유학의 철학적 정신이 불교와 노장철학의 영향을 받아들여 창조적으로 자신을 재구성해 낸 세계관, 존재론, 인성론이었다고 보여진다.
한국 유학의 두 거봉중에서 퇴계보다도 율곡이 항상 더 내 맘을 사로잡았다. 왜 그랬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두 분 모두 유교 성리학자이지만, 율곡이 지닌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과 그것에 기초한 그의 사회철학으로서 '사회갱장론'이 나의 맘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한국 유학자들의 이기론이 항상 주희의 기본명제 곧 이(理)와 기(氣)는 서로 혼동 될 성질이 것도 아니고 분리될 성질의 것도 아니라고 하는 명제 곧 "이기 불상잡 불상리'(理氣 不相雜 不相離) 원칙에 동의 하지만, 무엇을 더 시원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에 따라서 주리설(主理說)과 주기설(主氣說)로 갈라지게 된다. 퇴계는 전자의 거두요 율곡은 후자의 거두인 셈이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운 이념은 신유학이었고, 혁신적 정치사상, 공리공론보다는 삶을 중요시하는 정치철학이념이 조선조 초기에 활력을 지녔었다. 그러나 건국 후 200년이 지나면서 초창기의 혁신적 정신이나 참신성, 역동성은 사라지고 사회전체의 기강이 무너져서 관료화 되어가고 침체되어가며,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 유학은 천지이법을 나라 다스리는 법철학의 기본으로 삼고있기 때문에 천지가 변할 수 없듯이 나라의 통치법률도 변 할 수 없으며, 따라서 기득권을 전제로하는 기존사회질서를 변혁시킬 없다는 보수주의가 사회전반과 학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의 위대성은 기철학을 주기론적 자기철학적 신념의 중심으로 삼고 그것으로 지배엘리트들의 주리설(主理說)적 관념론을 비판해 들어갔다는 데 있다. 율곡의 철학 사상은 사회변혁을 통한 민생들의 삶을 위한 정치철학으로 변혁시키고자 하는 생명중심의 철학사상인 것이다. 율곡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산 정약용을 거쳐 수운 최재우에 이르는 기철학중심의 세계관과 존재론은 언제나 사회변혁적이며 위민민본주의를 주창하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무릇 삼라만상의 생성 육성 결실은 창조적 운동성을 그 본질로 하는 기(氣)의 능산적(能産的) 활동이 먼저 일어남으로서 가능한 것이고, 그런 기의 운동이 혼돈과 무질서로 빠지지 않게 이(理)가 '탄다'(乘)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사회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변화를 가져온다. 먼저 불변적인 사회법전이 존재하고나서, 민중의 사회적 삶, 생산활동등이 사회법전에 맞춰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순서가 거꾸로 뒤집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의 생산 활동과 사회활동이 먼저 존재하는 것을 섬기고 돕기 위해서 법률, 국가, 행정등 소위 상부구조가 필요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마르크스 상하부구조론을 말하는것은 아니지만, 理氣의 不相雜 不相離의 철학적 이념은 상하부구조론의 상호순환적 공속관계성을 앞질러 말한 것이고 그렇게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율곡이었다.
인간학에 있어서도 인의예지(仁義禮智)등 소위말하는 도심(道心)의 현상적 표현만이 아니라, 모든 희비애락의 감정적 현상들이 모두 기(氣)의 발(發)이라고 선언함으로서, 인간학에서 이성, 오성, 덕성, 감성의 중요성을 모두 동등한 차원에 올려놓는 파격적 사상을 제창하게 된것이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상사 에서는 항상 지성의 능력이나 인간의 도덕적 능력에 비하여 감성의 중요성을 폄하해왔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일이다. 감성의 차원은 미학적 예술론은 물론이요, 종교적 체험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율곡의 기철학적 인간학은 내게 항상 매력과 참신학 발상법의 전환을 선물로 주어왔다.
율곡사상에 의해 촉발된 나의 기철학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 동학을 출현시킨 최수운의 '시천주'(侍天主) 종교체험에 집중되게 되었다. 동학에 대한 나의 관심도 1970년대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박종홍교수가 책임편집을 맡으셔서 펴내시던 <한국철학> 연구지와, 그 분의 한국 철학사 논문 속에서 "동학은 한국사상의 결정체"라는 판단에 크게 고무되었다.
내가 1970-80년대 한국 정치사회상황 속에서 동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단순히 학문적 관심만이 아니라, 당시 19세기 후반 붕괴해가던 조선왕조의 혼란기에, 동학이 지녔던 비판적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에너지와 결집력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학문적으로 밝혀보려는 의도가 병행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1970년대 유신혁명군사정부 통치시절, 군사정부의 각종 부정과 폭거에 대하여 비판적 저항을 하려는 지식인들의 '성명서' 하나에 이름석자를 연서명함으로써 동참을 호소해도 그렇게 동지들 뫃으기가 어려웠고 모두 자기 보신적 몸사르기에 급급하는 지식인들을 행태(行態)를 경험하게 되었을 때, 도대체 무슨 힘이 1894년 당시 동학도들 30만명 이상을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자발적으로 뫃이게하고 자신을 역사변혁의 제단 위에 바치게 하였던가를 규명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1970년대만 해도, 동학연구에 관한 자료구하기가 쉽지를 않았다. 어데서 부터 손을 데야 할런지를 몰랐다. 서점이나 도서관을 뒤져보아도 참고자료가 없었다. 나는 직접 수운회관 천도교 본부를 찾아갔다. 나의 신분과 연구계획을 밝히고, 현재까지 동학 및 천도교에 관련된 모든 인쇄된자료가 있거든 구입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십여권 유인물과 저작물들을 구입하여 가지고 올 수 있었다.
동학을 연구해보면 볼수록, 동학의 핵심은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고민하며 사색하고 기도하다가 터져나온 수운 최재우의 독특한 원초적 '종교체험'에 핵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수운의 '시천주'체험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의 '시천주' 체험은 한국인의 종교적 영성의 원형이 19세기 말의 극한상황에서 다시 분출된 것이고, 그의 원초적 종교체험을 담은 철학적 그릇은 '至氣一元論的 氣哲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종교체험 안에는 전통적인 한국인의 하늘님 신앙, 기철학적 신유학의 존재론, 유불선 삼교의 종교적 엑기스등이 종체적으로 융합되어 사회변혁의 힘으로 분출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그의 '시천주 체험'에서 하늘님을 몸에 '모신다'는 '시자'(侍字) 해설을 깊이 음미하면 음미할 수록, 지극히 한국적이면서, 기철학적 인관관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성령체험과도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니 내 맘 속으로는, 성서가 증언하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당시 조선백성 한민족의 고통을 함께 체휼하시고,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신음하시면서, 최수운을 그렇게 소명으로 불러내 '시천주'체험을 하게 하였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水雲자신이 해설한 '시천주' 곧 하느님을 모신다는 신앙상태의 설명은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였다. 사람의 몸 생명 안에 신령한 기운이 충만하고, 이 생명적 기운이 몸과 우주생명과의 유기적 관계성안에서 창발적 역동성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이같은 직접적 현존을 인간으로부터 분리시키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직감적으로 알고있는 상태가 곧 "하눌님을 모신 상태"라고 수운은 설명 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가 모두 거룩한 하나님을 그의 몸 안에 모시고 있은즉, 사회신분차별, 성차별, 직업의 빈부귀천등 일체의 불평등한 삶의 현실은 용납되어서는 아니되고, 변혁되어야 한다는 사회변혁의 정열이 솟구쳐 나왔다. 인간이란 신령한 영물인지라, 보통 때에는 먹고사는 생물적 욕구충족의 일차적 문제에만 메달리다가도, 어느 때 불현듯 자기 본래적 모습을 보여주면, 거룩한 생명의 제단에 자기 생명을 바칠 줄 아는 거룩한 존재요, 신령한 존재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사회경제사적인 프롤레타리아트들의 혁명운동이라는 시각만 가지고서는 그 본질이 다 해명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수운의 동학운동은 나에게 '기철학의 종교적 형태'와 '몸의 신학'을 일깨워 주었고, 기독교 성령론의 한국적 신학전개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창조의 영'이시고, '생명의 영'이시며, 치유하고 변혁하며 새롭게 갱신하시는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이신 성령께서, 19세기말 미국 전도사들과 함께 첨으로 한국 땅에 들어오시게 되었다는 서구 정통보수신학을 나는 더 이상 추종하면서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수운의 '시천주' 체험신앙이 나에게 더 한층 충격과 신학적 발상법의 전환을 촉구하게 된 계기는 해월(海月) 최시형의 보다 내재화된 '향아설위'(向我設位)의 강론을 통해서 왔다. 海月은 그의 스승 水雲에 비하여 학문을 닦지 못한 사람, '글 읽지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수운 주위에 모인 기라성 같이 둘러선 '글을 아는' 학자출신의 지도자들을 제치고 제2 동학지도자로서 발탁되었다. 법통을 해월에게 넘긴 것은 신앙이란 학문적 이론체가 아니라, 몸전체로 체험하고 즉증해야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海月의 지도력에 의하여 水雲의 원초적 '시천주 체험'은 더욱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살았던 당시 한민족의 기층 생명안으로 내재화 되어갔고, 신토불이형태로 성육화 되어갔다고 보여진다.그 대표적 표현이 '事人如天'이요 '向我說位'라는 강론이다. '사인여천'의 기본교의에 의하여, 고통받고있는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 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이 따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과 하나님이 존재적으로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동학과 천도교는 전통적 유불선으로부터 자신들이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 섬기는 일을 통하지 않고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가르쳤고 그렇게 행동했던 당시 서구종교(서학, 천주교)와 자신을 또한 구별했다. 해월은 한걸은 더나아가 밥한 그릇으로 표현되는 물질, 신령한 인간, 내재적 초월자 하느님을 같은 심정으로 존경해야 한다는 삼경사상(三敬思想)을 가르침으로 인해서, 현대 카토릭 영성신학자 라이몬드 파니카의 '우주신인론적 영성체험'(Experience of the Cosmotheandric Spirituality)를 앞당겨 말하게 되었다.
海月의 '向我設位'강론은 나이 18세까지 유교적 제사를 가정에서 엄격하게 지내본 나에게 가이 신선한 충격으로 닥아왔다. 이야기 인즉, 경기도 여주땅, 어느 동학교도 집에서 관헌들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을 때 그 동학교도 집에서 가르친 것이라고 한다. 마침 묶고있는 그 동학교도 집에 그날 밤이 조상 제삿날 이었다. 오백년 전통대로 젯상을 벽면에 부쳐서 차리고,음식을 진설하고, 향을 피우고 축문을 올리면서 조상님께 정성스레 제사를 올렷다. 제사가 끝난 후, 해월은 제사의 참 정신은 벽을 향해 젯상을 차려놓고 조상들의 혼령의 강림과 흠양을 비는 전통적 제사관을 초극하여, 제사드리는 후손의 생명 안에 임재하고 살아있는 조상을 항하여 제사드림이 옳다고 말하였다. 소위 '向壁設位'를 '向我設位'로 전환시키는 도(道)를 설파하였다.
海月의 '향아설위'의 사상은 화잇드헤드의 유기체철학이 말하는 구조와 너무나 흡사하다. 전체의 과거는 흘러가버린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눈 앞에서 새롭게 창발하고 있는 모든 '현실재'(actual entities) 안으로 들어와 '객관적으로 부활'한다. 지금 내 생명 안에 전체 지나간 조상들의 생명이 함께 한다. 그만큼, 지금을 살아가는 한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책임성이 확장심화된다. 동학의 수운과 해월은 진정 '한국적 사상의 결정체'이다. 특히 나에게 '몸의 신학'의 중요성과 현재적 생명의 무궁성과 성령론적 역동을 가르쳐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내가 동학으로부터 받은 사상적 빚을 갚기 위하여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기독교 신학자로서 동학의 '시천주 신체험'이 내포하고 있는 귀중한 진리를 천도교 출판물에 실어 그 의미를 강조하였다. 내가 집필한 논문 중 상당수가 동학에 관련된 글이 된 연유는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신학형성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믿는 신앙과 크리스쳔 영성을 성숙시켜가는데 도움을 받은 중요한 사상가들의 영향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어찌 지금까지 언급한 사람들 뿐이랴마는, 영향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깊은 영향을 받아서 지금의 나의 신학과 신앙적 영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가들만을 이야기 하였다. 나는 그 모든 분들께 감사한다.
숨밭 김경재 / 목사, 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