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나의 뿌리는 농촌이다. 민 번60으로 시작하는 세대는 거의가 농업을 주로 하던 시절이 아닌가 생각되어서 이다. 돌이켜보면 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 세기교체까지, 그리고 08년, 오십 문턱을 코앞에 두고, 가슴으로부터 외치는 소리가 있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일찍이 어머님을 여의고 기초생활은 물론, 교육조차도 초등을 바듯이 마친 정도이다. 그 때는 “여자가 배워서 뭐하냐”가 대세여서 진학 기회 제공도 없었다. 쓴 웃음이 난다. 초등 졸업 후 무섭게 제 밥벌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 짓도 제대로 못하고, 병마에 시달리곤 했다. 그래도 가족만이 유일한 의지 처라 언니의 도움으로 고등공민을 거쳐, 검정고시를 하였다. 아실 이는 아시겠지만, 참으로 어지럽던 세상이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나 활동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기 어려웠다. 세상사 어렵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어렴다고 푸념만 한다면 재미가 없을 터, 그래서 말이지만 농사 12번 지어본 것으로 농 박사가 된다면야 제대로 된 교육체험을 한 것 일 테지요. 거기다 재미까지 있으면 금상첨화, 그러나 돈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1차생산자로써 복합영농은 왜 이리 일도 많은지... 내가 워낙 일을 좋아하는 체질이라 다행이다 싶다. 그렇지 안다면 귀농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리라.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경기도 부천시 와우산 밑에서 살다가 어느 날 밤, 잠에서 깨어 내 옆에 잠들어 있는 네 아이와 네 아이 저편에 잠든 옆 지기를 보면서 네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고, 불연 듯 떠오르는 한 생각에 매일이 초초하고 힘겨웠다. 그것이 막내를 출산한 후여서 우울증에 감염된 것도 모르고 불안 해 했다. 그리하여 옮길 것을 결심하고 옆지기에게 의논하여 보았지만 놀란 개구리 오줌 싸며 튀어 오르듯 한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고향으로 가기를 권유하여 귀농을 쟁취 하였다. 그날로 보따리 싸서 집세 전세 다두고 “고 고 씽” “허허, 허어이참”, 누군가 하는 소리 뒤로 하고 “살기 좋다고 소문난 서천”으로 갔다._96년 어디나 낯선 곳은 반듯이 텃새가 있다. 고향을 그저 인심 좋고 사람 좋은 곳으로만 생각하고 쉽게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행동하면 오산이다. 바로 시어머님으로부터 질타가 쏟아졌다. 도시서 잘살지 창피하게 귀향한 것을, 처음엔 초가삼간도 집이라고 야박하다 생각했는데 후에 알게 된 것은 그나마도 남의 집 이였고, 시세말로 집도 절도 없는 꼴인데, 상식이 없는 며느리 살러 왔다고 하니 어머님께서 걱정으로 하신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도 헐 리 우고 없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서 가보면 이렇다. 아궁이에 불 때서 밥 짓고 물 데워서 아이들 씻기고, 소나무 여름옷 주워 다 쌓고, 누런 황금들판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저 신기하고 재미났다. 시어머님의 걱정 섞인 말씀도 뒷전이고, 울 ‘옆지기’ 친구가 경영하는 정미소에 임시 일하는 것이 오전 늦게 나가 밤새워 콤바인 포대 나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 농 노동 인줄도 모르고 막내업고 ‘자장자장’ 보름 만에 옆지기 KO패, 못하겠다고 누워 버렸다. 며칠쉬면 회복되겠지 했는데 이건 아니다. 엥? 이건 아니데 해봐야 소용없고, 뛰어봐야 벼룩이요, 날아봐야 날개 잃은 선녀였다. 어떠한 경우로라도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질 않았다. 옆 지기에게 물었다. 육하원칙을! 우선 농촌은 농업생산으로 소득이 있는데 재배할 토지가 없고, 열심히 하고 나면 쉴 곳이 있어야 재충전을 하는데 집이 없고, 예비금 두꺼비 한 마리 없고..., 이렇게 없는 것만 있었다. 그랬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나의 가족만 있었다._ 어머님과 옆지기 그리고 네 명의 곱디고운 아해들! 천만 다행인 것은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다는 것 이었다. 네가 한 인물 하기에 부티 나게 생겼고, 한 생각을 가지고 귀농하였으니 도전하기로 마음정하고, 내 집 마련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어머님 사시던 마을에 터를 잡으려 하였으나 반대하시고, 사연많은 옆지기땅 아버님소유권에 근저당장기연체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곳이 아주 재미난 전설이 있다. 국도29호선이 개통되기 전에까지도 처녀 귀신이 나온다는 곳이었다. 살펴보니 제법 쓸만한 곳이다. 좋은 곳은 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보호된다고 하더니만 ㅎㅎㅎ 우리 것이 되겠구나 하고 쾌재를 부르면서 연체 건에 근저당을 해소 시켜야 했다. 목표가 “일단 해보자”로 정해졌으니 단위농협을 방문하여 리스크 건을 해소시키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문의를 하니 반가운 기색으로 해묵은 시어머님 연탄 값까지 들고 나온다. 팔백만원금에 갚아야 하는 것이 천삼백만원 이라니... 도시에 두고 온 전세 값으론 턱 차고, 친정언니에게 오백을 차용하고(지금도 상환하지 못하고 있다._끌끌!) 아버님소유권 증여로 해결하고, 이렇게 은행 채무부터 시작해서 안 해본 일 없는 것 같다. 심지어 담당사무관 당신 과부요? 라고 물을 정도였고, 집안 조카에겐 자네 아주머니 왜 울고 다닌다나? 라고 비웃었다. 한몫 가지고 내려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니 여기저기 쉰밥 신세다! 그래도 난 멈출 수 없었다. 시작했으니까! 곧 IMF가 왔고, 그나마 업자 줄행랑,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멍멍 닭 ?던 개 꼴이 되었다! “멍멍 멍멍” 개근성을 살려 집터 닦던 뒷산으로 가서 아무도 모르게 “멍멍 왈왈 으르렁 으르렁" 이렇게 한참이 지나자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고 다시 내려와서 돌아다녔다. 우리 집을 지을 만 한 돈이 어디 있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새마을 소득 지원자금이라는 게 있단다. 역시 어릴 적 유신교육과 새마을 노래를 불렀던 인연으로 횡재를 했다고 감사해 했으나, 돈을 관리 하는 은행의 문턱은 참으로 높았다. 주민 등록등본을 손에 쥐고 군수님을 찾아뵙고, 도움을 요청하였다.(새마을소득지원자금-2년거치 2년상환) 다행이 행정의 도움으로 중단한 집과 창고을 짓을 수 있었고, 농가주택으로 준공이 나고, 등기권리증을 옆지기것으로 해 두었다. 이듬해에 입주하고 보니 이번엔 먹고 살길이? 터 닦을 때부터 가든 한다고 소문난 집이라 그리 했으면 지금의 농업은 못했을 것이다. 없는 것이 복이라 그리 하지도 못하고 옆지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약진 농기계 수리 센터를 허가내어 도와 주려 했으나 끝내 하지 못했다. 결국취소하고 만일을 대비해 22.8평 창고를 근린생활 시설로 용도 변경 해두었다. 당시 어리던 아해들이 이제 고1*2,중1,2로 자랐고, 나는 여성 농업인으로 12번의 학습을 치러내고 있다. 다시가라하면 가고 싶지 않다. 어찌 우여 곡절이 없겠는가? 잠시 더듬어보면, 집옆 9다랑이 수렁답 농사짓기, 11월말이 되도 아무도 콤바인을 해주지 않았다. 빠진다고, 늦었다고, 서리맞은 일품벼를 보는 내속도 그와 같았다. 일주일을 사정하여서 수확 할 수 있었던 내가 “무엇을 생각 했을까” 농업.농촌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으며, 그해 여성농업인 후계자 신청을 하고, 선정전 관내 농.기 교육이란 교육은 다 받았다. 그때는 충남기술원이 대전에 있었다. 표고 버섯반, 여성 농기게 종합반, 농작업에 대해 전무한 사람으로서 친척의 도움을 받았지만, 거의 머슴을 살다시피 해야 했고, 농지원부 만들기도 눈물을 쏘옥 뺄 정도였다. 농업인 후계자선정에 따른 지역후견인을 구하는데도 눈물과 역경의 연속, 농기 센터의 알 수 없는 편견 등이 이었지만, 농업을 하겠다는 나의 일념이 통했는지 “98여성 농업인 후계자가” 되었고, 한필지의 답과 중고지만 트랙터(25마력)와 콤바인(RX295)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중 유일하게 새것이 관리기 였다. 왜냐면 고구마재배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고, 해남에가서(2월) 2년에 걸쳐 농가에가서 현장 농작업을 통해 재배기술을 습득하였기 때문이다. 그곳은 매우 빠른 기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따뜻하고 넓은 황토가 있었다. 알맞은 조건을 두루 갗추고 있는 곳이다. 고구마 재배에 맞는 토지를 구했고 비닐멀칭 조기재배는 성공적이었다. 때마침 국가관리자가 바뀌고 직거래가 권유 되었다. 진입로가 없는 곳이라 남보다 먼저 심고, 수확하여 이고지고 직거래 장으로 다녔다. 그땐 농협중앙회가 함께 하였고 군이나 농.기에서는 전무한일 이였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의 연속으로 어렵던 때를 높은 이율을 안고 혜쳐 나갈 수 이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일들은 계속되지 않았다. 관리자가 바뀌고, 정책이 바뀌고, 그에 따라 나의 농업계획도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농민직거래는 소멸되고, 이후 자동차 세일사업가가 자리 매김하였다. 다시 제정비하여, 옆지기를 전업농으로 선정되게 하였고, 임차도 늘려나갔다. 농업인 이지만 동네 가운데 살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전달 받지 못하는 것이 부지기 수였다. 이때부터 농.기교육, 군청정보화교육 등을 농한기에 집중하여 받았고, 컴퓨터가 없는지라 복습은 엄두도 못 냈으며, 후계자 지원으로 농민신문이나 지역 신문을 받아 보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던 중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농업농촌을 바로 알 수는 없을까? 고민 하던 중 충남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을 이수 하였지만, 문제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다. 전에 하였던 직거래와의 인연으로 유성구 일대에 직거래 고객을 만났고, 한달에 1~2번을 자가 농업생산물을 직거래하기 시작하였다. 고객은 나의 모습에서 믿음을 얻게 되었던 같다. 늦은 밤에도 싫은 내색 안하시고, 받아 주셨다. 품목은 점차 확대 되었고, 힘든 농노동 후에 어린아이들을 잠재우고, 대전을 왕래하는 일이 즐거웠다. 그중 가장 큰 보람은 김장때 절임배추를 씻어서 갖다드리는 일을 주문 받았는데, 김장 하시는 것을 매우 즐겁게 생각하시었다. 나중에는 부재료까지 주문받아 내가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고, 지역 생산물은 사다가 드렸다. 서로가 행복한 김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비자 트랜드는 바뀌고, 소핵가족이 진행되어서 쌀20kg 에서 5kg로 이렇게 현저히 주문량이 줄었다. 당연히 주문하시는 고객께서 미안한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내가 먼저 홈페이지를 통해 뵙기를 청하고 중단하였다. 지금도 여전하게 온라인 주문을 하여주시는 고객이 계신다. 고맙고 감사함이 내가 농업을 할 수 있는 원천이 아니가 생각한다.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알아보니 제법 많은 비용이 필요 했다. 이때만 해도 농,기를 통해서 농진청 홈페이지 지원 제작이 있는 줄 몰랐다. 주로 아피스나, 농,기센터 내의 생활개선회 회원중 잘꾸려 나가는자, 중앙정보화 교육 이수자, 우수 농업경영체등이 주를 이루고 있고 지역에 전자상거래 연구회가 활발한 곳이 홈페이지 경영농가가 집중되어 있다. 다행이 우리 지역도 충전농이 출범하여 농업인 대회도 개최하는가 보다. 좋은 일이다. 이런 일들은 많을 수 록 좋다. 여하튼 매출의 감소와 자연기후의 횡포, 옆지기의 건강악화로 07년도는 농업생산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경영 악화로 이어졌고, 어렵게 마련한 후계자구매농지, 전업농구매 농지를 전업농 포기 각서를 쓰기로 하고 마지막 벼 재배를 하였다. 그런데 돌아가지 못한 오리가 휩쓸고, 때우기를 거듭하여 지금은 잘자라고 있다. 엎어진 사람 아주 눌러 버리겠다는 심산인가 보았다. 사람이 그랬다면... 하지만 자연이 준 고난이라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렇다 나는 12번의 농사를 통해 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만고풍상의 아픔을 보상 받고 있음을 스스로 깨우치고 있다. 이 아니 기쁜가? 남몰래 산에 올라 통곡하던 그때의 내가 아니다. 실패의 연속이지만, 지역에서 농사일 잘하는 여성으로 알려져 있고, 부자 농민은 못됐으나 서천군 고구마 연구회리더로 활동한다. 지난 2년 고구마 육묘에서 재배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를 알려 드렸고, 농.기의 도움으로 전국에서 앞 다투는 곳의 견학도 모두 하였다. 벤치마킹을 통해 서천고구마 연구회의 차별성을 이끌어내려고 하였으며, 농민자체 유통조직화도 시도 했으며, 각 지역 단위 농협에 작목반도 결성하여 활동 하도록 하였으나, “역부족!” 자신의 농가 경영도 어려운 시점에 이웃과 함께 일하는 것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울 옆지기부터... 그래도 쓰리밥통(눈,귀,입)을 고집하며 06농림부 연수원 일반인 교육 여성리더쉽 아카데미 5기를 수료, 1,2회차 심화과정도 수료, 07농진청 농업경영비지니스 연구과정을 수료, 현재는 서천농업대학과 예산농업기술원 글로벌 농업대학을 다니고 있다. 농진청 연구과정에서는 홈페이지 제작 지원에 대해서 알게 되어 신청과정을 밟고 지원을 받았으며, 자신의 농업경영에 대해서 제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농업농촌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부분이 다소나마 해소된 점 등은 매우 큰 소득이었다. 농림부 연수원 여리아 교육에서는 여성농업인 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 가장 취약한 자녀 교육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 것과 지역에서의 여성리더의 역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개발과 발견에 높은 비중을 둔 교육과정 편성 이였다. 여성 농업인 이라면 한번 도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한해의 반은 농업, 반은 교육으로 채워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국가기관에서 배우고, 나를 찾아가는 길을 닦아가면서 행복한 농업을 하려고 한다. 내가 행복한 농업을 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 나의 2녀2남도 나와함께 각자가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과정을 통해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가족농장의 일원으로 활동하길 바란다. 비록 부자 농민은 못되더라도, 글로벌시대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기를... 지금은 귀농과 귀촌에 대해서 정부의 정책과 각지자체의 열띤 모심 경쟁으로 주가가 치 솟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귀향은 여러분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을 디자인 하고 공유하는 일은 더 없이 행복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도시민 여러분은 웹에 친밀한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농업인 처럼 일 할 수는 없겠지만, 서로를 위해 노력한다면 좋은 경쟁력이 될 것입니다. 짧은 12번의 농업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지금도 진행 중인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 교육부분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미력한 글을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
출처: 땅고개농장 원문보기 글쓴이: 여름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