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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아이티주의―이성과 진리의 색깔을 묻다
김달관 - 서울대학교 교수
2010년 9월
2005년 5월 13~15일 동안에 도미니카공화국 사회와 정부당국은 폭력적으로 3천여 명 이상의 아이티인을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대규모로 추방했다.
또한 대부분이 아이티계로 검은 피부색을 갖고 있는 도미니카공화국 여자와 아동을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 국경지역인 다하본(Dajabon)에서 추방했다.
이러한 대규모의 아이티인 추방은 2005년 5월 9일 아티요 팔마(Hatillo Palma) 지역에서 도미니카공화국 상인이 아이티 이주민에게 부당하게 암살된 것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아이티뿐만 아니라 도미니카공화국과 국제사회에서도 인권침해뿐만 아니라 그 비인간적 대처에 당혹스러워 했다. 이는 도미니카공화국의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지닌 반 아이티주의가 여실히 표출된 사건이었다.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 국경의 유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사이에 있는 이스파뇰라라고 불리는 섬을 공유하고 있다.
이스파뇰라 섬 서쪽 1/3은 아이티에, 나머지 2/3는 도미니카공화국에 속한다.
아이티는 처음에 스페인 식민지였다가 이후에 프랑스 식민지가 되면서 프랑스 어와 크레올 어를 사용하고, 대부분의 아이티인은 흑인이다. 반면 도미니카공화국은 스페인 식민지였기에 스페인 어를 사용하고 대부분은 물라토다.
기본적으로 스페인이 식민정책으로 1788년까지 독점무역 체제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식민초기 20~3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스파뇰라 섬에서 금광과 원주민이
급감하면서 스페인의 관심은 쿠바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후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정복과 식민을 빠르게 진행했다.
이렇게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빠르게 정복ㆍ식민화 할 수 있었던 요인은 카피툴라시온(Capitulacion)이라고 하는, 정복단(征服團)과 스페인 왕실 사이의 계약을 통해 정복 참여자에게 지금 시각에서 보더라도 기여분에 대해 공정하게 배분한다는 강력한 인센티브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에 카리브해에서 권력공백과 스페인의 관리가 허술한 틈을 타고 해적이 출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었던 영화 시리즈 <카리브 해적>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반면 이스파뇰라 섬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지만, 스페인의 독점 무역으로 밀수가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이스파뇰라 섬에 밀수가 성행하게 되었다. 이에 밀수가 가능한
지역이면서 현재 아이티 지역인 이스파뇰라 섬의 북서쪽, 남서쪽, 해안가 등에 작은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식민당국은 밀수로 재정수입이 감소하였기 때문에 현 아이티 지역의 도시를 인위적으로 파괴하고 식민당국의 영향력이 쉽게 미칠 수 있게끔 현 도미니카공화국 수도인 산토도밍고 인근에 살도록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산토도밍고 인근에 도시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이에 스페인 식민당국의 영향력이 약한 틈을 타서 1629년경 부터 현 아이티의 북쪽에 위치한 토르투가(Tortuga) 섬에 프랑스 해적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이후 이스파뇰라 섬 북서쪽 해안가에 해적이 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적 그리고 해적에서 농민으로 전환한 프랑스인이 살기 시작했다.
반 아이티주의의 출현과 내용
스페인―프랑스 전쟁에서 패한 스페인은 1697년 리스윅(Ryswick) 조약으로 이스파뇰라 섬 서쪽의 1/3을 프랑스에 양도하게 된다. 1700년대가 되면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는 프랑스의 투자로 상당히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아이티는 사탕수수를경작하면서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흑인 노예가 수입되었다. 이에 따라 아이티는 대부분 흑인으로 구성되는 국가가 되었다. 아이티에서의 농업은 설탕생산을 하는 노동집약적 수출농업이었기 때문에 노동 강도가 높고 노동시간도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티 흑인 노예들은 자유를 위해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도망가게 되었고,도미니카공화국은 이러한 흑인 노예에게 자유인 신분을 허용하였다.
이에 시간이 흐르면서 흑인이 증가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도미니카 공화국은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물라토)이 증가하게 되었다.
1791년에 이르면 흑인 노예의 가혹한 노동이 극에 이르면서 아이티 수도에서 흑인 노예의 반란이 발생한다.
이에 영국과 스페인이 아이티를 도와 노예제를 폐지시킨다. 이에 반감을 가진 프랑스 군이 도미니카공화국을 점령하면서 1795년 바젤(Basel) 조약으로 스페인은 도미니카공화국을 프랑스에 양도한다.
이후 나폴레옹이 아이티에 프랑스 군대를 파견했으나 아이티 노예반군의 승리로 1804년 프랑스로부터 정식으로 독립하게 된다.
프랑스 치하에 있었던 도미니카공화국은 이후 푸에르토리코와 쿠바의 도움으로 스페인이 되찾게 된다.
그러나 1822~1844년 22년 동안 아이티가 도미니카공화국을 지배하면서 도미니카공화국인의 아이티 흑인에 대한 역사적 반감이 첫 번째로 형성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 잠수함 기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미국이 아이티(1915~1934년)와 도미니카공화국(1916~1924년)을 점령했다.
이때 아이티인들이 도미니카공화국을 왕래하면서 인종적 갈등이 발생하여 두 번째 역사적 반감이 형성된다.
세 번째 역사적 반감은 도미니카공화국의 트루히요 대통령(Rafael L. Trujillo 1930~1961년)이 1937년 아이티와의 국경지역인 다하본 인근에서 아이티인 1만 2천 명을 사살하는 대학살을 계기로 잠재적으로 존재하던 반 아이티주의가 공식적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이처럼 1937년 대학살 이후 트루히요 대통령의 지시하에 지식인들에 의해 반 아이티주의가 체계적으로 정립된다. 반 아이티주의의 주요내용은 이렇다.
아이티는 문화적으로 아프리카 특징이 강하고, 종교도 아프리카 특징이 강한 부두교이며, 인종적으로 흑인성에 기반을 둔 정체성으로 규정한다. 도미니카공화국은 문화적으로 스페인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종교는 유럽의 가톨릭이며, 인종적으로는 백인성에 기초한 정체성으로 규정한다.
결론적으로 도미니카공화국의 스페인 전통과 백인성이 아이티의 아프리카적 흑인성보다 우월하다는 얘기다.
이처럼 반 아이티주의는 도미니카공화국 국민들에게 인종적 화합이라는 인상을 주고, 도미니카공화국 사회의 인종적ㆍ사회적 불평등을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동원된 이데올로기다.
설탕농업과 반 아이티주의
카리브 해는 일자리와 관련하여 다양한 이주가 발생하는 지역이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설탕농업 지역인 바테예스(Bateyes)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한 아이티인의 이주는 사회적ㆍ인종적ㆍ문화적 분리가 존재하는 공간에서 도미니카공화국인과 아이티인 사이의 인종차별을 보여 준다.
카리브 해에서 노동은 인종차별 개념을 형성시켰다. 특히 설탕 붐 시기에 사회적 차별과 인종적 거리감이 훨씬 확대되었다. 인종차별은 대농장에서 필요했다. 가시적으로 명확하게 노동자와 지주에 속하는 노동을 구별해 줄 필요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부터 설탕농장에 아이티 이주민이 출현하면서 도미니카공화국의 제당산업에서 노예적 노동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반 아이티주의 이데올로기는 도미니카공화국에 도착한 아이티인을 노예와 비슷한 조건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으로 몰아냈다. 이에 따라 도미니카공화국에 도착한 아이티인은 제당산업에서 필요한 값싼 노동자 처지가 되었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아이티인의 이주는 도미니카공화국 자신의 대척점으로서 아이티를 위치시켰다.
이에 우리/그들의 이분법으로부터 누가 국민의 일원이고 누가 외국인인지를 구분하는 국민의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 즉 타인이라는 위협의 현시를 통해 국민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이것이 아이티 이주민과 도미니카공화국 사이에서 형성된 사회적 관계다. 이러한 관계는 인종주의를 대표하는 이항 대립적 양국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상상 속의 적으로서의 아이티 개념은 과거에 대한 새로운 표상에 기초한 국민정체성의 핵심적 요소였다.
이에 반 아이티주의는 도미니카공화국 역사에서 아이티에 대항하는 도미니카공화국 국민의 정치적ㆍ문화적 자율성을 위한 투쟁으로 재인식되었다.
이러한 아이티에 대한 적대감은 양국의 경제적 특징과 인종적ㆍ문화적 특징에 기초한 차이와 이분법 구성에 의한 것이다. 이에 뒤처지고 가난한 아이티와 근대적인 도미니카공화국의 대비적 이미지를 촉진시켰다.
도미니카공화국의 ‘혼혈, 스페인성, 가톨릭’은 아이티의 ‘아프리카, 흑인성’으로 대칭화되었는데, 이는 검은 피부에 대한 도미니카공화국의 인종주의적 편견을 반영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도미니카공화국은 흑인성을 ‘다른 국경’인 아이티에 전가했다.
이에 도미니카공화국인과 아이티인 사이에 이항대립이 구성되었다.
예를 들면, 백인 대 흑인, 스페인 대 아프리카, 가톨릭 대 이교도, 문명인종 대 야만인종 등이다. 아이티의 아프리카 후손이 원시적 조건과 결합된 것이다.
이러한 차별은 아이티의 전통, 아이티계 흑인 도미니카공화국인, 아이티 이주자에 대한 인종주의, 쇼비니즘 그리고 계급적 편견에 의한 것이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아이티인의 사회적 주변화와 배제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아이티인들이 고통 받고 있는 국민적 유래와 인종적 상위는 보다 나은 삶을 성취하기 위한 아이티인들의 가능성과 자원 접근성의 어려움 때문이다.
불법적이거나 비밀스런 방식으로 아이티인이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입국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은 자연스럽게 설탕농장과 건설부문 등 힘들고 저임금인 작업에 투입되거나, 커피, 카카오, 쌀 생산부문 등 다른 농업분야에 종사하게 된다.
문화적인 요인들에 의해 많은 아이티인들, 특히 여성과 아동은 가정에 주로 머물게 되고, 이에 이들의 도미니카공화국 사회에 대한 접촉은 제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로 이들은 스페인 어를 잘 모른 채로 도미니카공화국 사회와 문화에서 주변화된다. 다른 한편, 도미니카공화국 국경 반대편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빈곤을 피하기 위해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이주한 아이티 이주 여성은 최종적으로 설탕농장에서 일하게되고, 결국 극한 빈곤에 처하게 된다. 이들은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값싼 노동력의 생산도구로 여겨진다.
또한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태어난 아이티 아동은 정치적인 제도 속에서 보다 처참한 경험을 하게 된다. 도미니카공화국 정부가 아이티 아동들에게 출생 증명서를 발급해 주지 않게 되면서 아이티 아동은 법률적 행위주체로서 자격이 미진하여 공식교육 제도에 참여할 수 없도록 원천적으로 봉쇄되기 때문이다.
유엔의 1998년 자료에 따르면 도미니카공화국에 약 50만 명의 아이티인들이 거주하는데, 이 중에서 2만 5천 명만이 출생증명서를 보유하고 있다. 도미니카공화국 정부에 의한 이러한 처분은 아이티 공동체가 도미니카공화국의 사회적ㆍ경제적 위계질서에서 신분상승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그 의미가 있다.
아이티인이 낮은 보수를 받는 힘든 직업에만 종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절한 식량, 주거, 교육 등에 대한 접근권이 필요하다.
도미니카공화국 전국 문맹률은 15.5%이지만 설탕농장 부락인 바테예스의 문맹률은 34.5%로서 큰 편차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바테예스 주민의 30%는 어떠한 공식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반 아이티주의 비판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반 아이티주의에 대한 비판은 첫째, 아이티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 피상성, 둘째, 도미니카공화국보다 가난한 국가에 대한 기회주의적 비겁함, 셋째, 아이티 이주자 범죄와 관련된 것이다.
아이티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 피상성은 아이티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과 관련이 있다.
도미니카공화국에는 역사적 기원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흑인성을 부정하기 위한 구실로 친 스페인주의에 의거한 이데올로기적 기초가 구성되어 있다.
도미니카공화국의 보수적 사상이 아이티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면 다룰수록 더욱 ‘피상성’의 신화를 사용한다. 이 신화는 아이티인의 행위에 대해 도미니카공화국인의 생각과 행동을 단정하는 이데올로기적
고정관념과 가치 개입적 편견에 따라 아이티인의 존재를 정의한다.
아이티와 관련하여 도미니카공화국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것은 아이티에 대한 경멸이라는 것이다.
이에 피상성은 신화가 되었고 아이티인의 행동을 정형화시키고자 하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보수적 지식인에 의한 올가미가 되었다.
도미니카공화국의 보수적 사상은 아이티가 부분적으로 도미니카공화국의불행에 책임이 있다는 측면에서 인종주의적 배제를 조성하고 있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신화는 가장 가난한 도미니카공화국 인이라도 아이티인 앞에서는 경멸과 최상의 거만함으로 행동하는 집단적 무의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두 번째 비판은 도미니카공화국의 애국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의 비겁함에 관한 것이다.
문화적으로 타국에 침입 당한 경우에 침략을 당한 국가는 가치와 습관을 변모시키는 정도까지 침략국의 관습, 가치를 받아들여만 한다. 그러나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아이티인의 출현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티인은 1세기 이상 도미니카공화국에 존재했지만 문화적으로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도미니카공화국 인은 아이티인 친구가 없기 때문에 아이티인이 도미니카공화국 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단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도미니카공화국에 사는 대부분의 아이티인은 파편화된 󰡐시민󰡑으로서 이주민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단순하게 말해서 도미니카공화국 인은 아이티에서 오는 모든 것을 거부하지만 값싼 노동력과 교역은 예외로 인정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 문화적으로 보다 위협적인 것은 미국문화의 침투다.
이것은 도미니카공화국에 위협이 되지만, 그링고(미국인)는 백인이고 부자라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모든 도미니카공화국 인이 아이티보다는 미국의 가치를 더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비판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아이티인의 가상적 범죄에 대한 것이다.
아이티인의 범죄는 최소이고 아이티인의 범죄에 대한 과장으로서 아이티에 근거하는 모든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인종주의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아이티인의 이주는 문제이지만, 부르주아, 지식인 특히 국가는 위선적이고 불명확하며 비윤리적으로 처신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노동하는 아이티인은 아무 권리도 없이 반노예 조건에 있다는 것을 감추지 말아야 한다.
세계에서 도미니카공화국의 아이티 이주자처럼 권리를 보유하지 못한 이주자도 없을 것이다.
트루히요와 반(反)아이티 민족주의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독재자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관철시키는 사람이다.
20세기 라틴아메리카에는 이런 독재자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인물은 아마도 도미니카공화국의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Rafael Leonidas Trujillo Molina, 1891~1961)일 것이다.
트루히요는 그냥 독재자가 아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독재자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반대파의 숙청, 비밀경찰(SIM), 언론 탄압, 부정축재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자신을 우상화하고자, 생전에 도미니카공화국 곳곳에 동상과 기념물을 건립하는가 하면, 공공교육 기관은 물론 일반 가정도 초상화를 걸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936년에는 수도 산토도밍고를 ‘트루히요시’(ciudad Trujillo)로 개명할 정도로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다보니 웃지 못할 일도 더러 벌어졌다. 트루히요는 1937년 대선을 앞두고 야구를 좋아하는 도미니카공화국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먼저 기존의 프로야구팀 리세이 타이거즈(Los tigres del Licey)와 에스코히도 라이온즈(los Leones del Escogido)를 병합하여 트루히요 시 드래곤즈(Dragones de Ciudad Trujillo)를 창단했다.
도미니카공화국의 강팀을 합병한 것으로는 부족했던지 트루히요는 미국, 쿠바 등지에서 3만 달러라는 거액을 들여 프로야구 선수를 영입했다. 투수 사첼 페이지(Satchel Paige)는 연봉 6천 달러, 나머지 선수
들은 연봉 3천 달러를 지불하기로 계약했다.
요즘 연봉과 비교하면 액면가로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였기 때문에, 미국 프로야구 관계자들은 도미니카공화국의 에이전트와 영사를 고소하여,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했다.
이렇게 영입한 야구선수들로 구성된 ‘트루히요 시 드래곤즈’가 1937년 국내 시즌에서 우승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도미니카공화국 재정으로서는 연봉 3만 달러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프로야구는 1937년 시즌 이후 폐지 되었고,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951년에야 다시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리그가 재개되었다. 이렇게 트루히요는 단 한 번의 우승을 위해서, 야구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트루히요 치하에서는 야구계만이 아니라 일반 가정도 쑥대밭이었다. 미라발(Mirabal) 세 자매처럼 정치적인 암살, 고문, 추방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측근들의 충성심을 여자 상납으로 시험했다.
이런 측면의 트루히요는 페루 출신의 스페인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가 쓴 소설『치보의 파티 La fiesta del Chivo』에 잘 나타나있다. ‘치보’는 ‘숫염소’라는 뜻으로,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이 트루히요를 가리켜 사용하던 별명이었다.
대다수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이 그렇듯이 이 작품 또한 복잡한 구조로 전개된다. 그러나 소설은 우라니아(Urania)의 에피소드로 시작되고 또 마감된다. 우라니아는 트루히요 시대에 상원의장을 지낸 아구스틴 카브랄(Agustin Cabral)의 딸이다.
열네 살때인 1961년 도미니카공화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가 마흔 아홉이 되어서야 귀국하는 우라니아. 이토록 오랜만에 귀국한 그녀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옛날 아버지는 ‘치보’의
집에서 파티가 있다면서 우라니아를 트루히요 집으로 보냈는데, 사실은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아버지가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70살 먹은 트루히요에게 미성년의 딸 우라니아를 상납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비록 소설이지만 개연성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당시 외무부 장관을 비롯하여 많은 트루히요 측근들이 주기적으로 아내를 상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망나니 짓을 서슴지 않은 트루히요가 무려 31년 동안이나 권력을 유지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호니 아베스 가르시아(Johnny Abbes Garcia)라는 냉혈한이 진두지휘하는 비밀경찰(SIM)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반공을 내세움으로써 미국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지켜준 덕분이었을까? 둘 모두이다.
특히 1961년 트루히요의 암살에 미국 CIA가 개입했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미국의 영향력은 결정적인것으로 보인다. 트루히요가 미국으로부터 토사구팽당한 이유는 1960년 6월 베네수엘라 대통령 로물로 베탄쿠르(Romulo Betancourt)를 차량폭탄으로 암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59년의 쿠바혁명 실패공작에 진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는 트루히요는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제거한 것이다.
그러나 트루히요가 제거되었고 곧바로 도미니카공화국에는 민주주의가 실현되지는 않았다. 트루히요 체제의 잔당(殘黨)이 아니라 본당(本黨)이 트루히요 사후부터 1996년까지 도미니카공화국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사실, 트루히요 체제는 물리적인 힘과 외교력만으로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치밀하게 조작된 역사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써 가능했다.
도미니카공화국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 모토는 콜럼버스, 스페인문화전통, 문명, 가톨릭, 원주민으로, 인접국가 아이티와 차별화된다. 아이티는 아프리카 문화전통, 야만, 부두교, 흑인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국경조자 모호하던 국민국가형성 시기에 아이티가 한때 지배했던 사실을 들어, 야만국 아이티가 호시탐탐 문명국 도미니카공화국을 노리고 있으므로 항상 경계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낸다.
실제로 트루히요는 1937년 도미니카공화국의 사탕수수농장 계절노동자로 일하던 아이티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아무도 모른다.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1만5천에서 2만정도로 추산할 뿐이다.
이때부터 트루히요 정권은 본격적으로 역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식민 시대부터 도미니카공화국에는 고귀한 가문의 스페인 백인과 원주민만이 살았으며, 흑인노예는 오로지 아이티에만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새빨간 거짓이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는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야구선수들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세미소사를 포함하여 수많은 도미니카공화국 국민들은 모두 흑인의 후예이다.
이런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미니카공화국의 지배엘리트들은 원주민을 이용했다. 즉,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의 피부색이 검은 이유는 이 섬에 거주하던 타이노(Taino) 원주민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또한 역사 왜곡이다. 타이노 원주민은 콜럼버스가 이 섬에 도착한 직후 멸종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미니카공화국의 반(反)아이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왜곡과 날조의 산물이지만 인접국 아이티에 대한 인종적ㆍ문화적 우월감을 심어준다.
따라서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지배계급의 이념을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하며, ‘흑인’이라는 말은 오로지 아이티인을 지칭하는 말로만 사용한다.
그리고 트루히요 시대에 이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1961년부터 1996년까지 무려 일곱 번이나 도미니카공화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호아킨 발라게르(Joaquin Balaguer, 1906~2002)였
다.
현재 도미니카공화국은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성취했다. 그러나‘계몽적 독재자’ 호아킨 발라게르에 대한 칭송만 드높고, 역사 왜곡과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아직도 미약
하다.
아이티, 프랑스, 미국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심 재 중 교수
2010년 9월
올 1월에 강력한 지진이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인근 지역을 거의 초토화시켜 버렸다. 23만 명 이상이 죽었고, 160만 명 정도가 집을 잃었다.
지진이 아니었더라도 아이티의 사회 경제적현실은 이미 암담한 수준에 가까웠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이런저런 지표들을 들먹이는 것조차 거의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다.
어쨌든 지진이 일어난 직후에 국제사회는 약 100억 달러에 가까운 무상원조를 아이티에 약속했지만,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제로 집행된 액수는 애초에 약속된 금액의 약 2~3%에 불과하다고 한다.
게다가 처음부터 예견되었던 일이긴 하지만, 원조금의 효과적인 관리와 집행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국가를 통치하고 관리할 만한 능력이 아이티 정부에 없다는 사실이다.
흑인노예 반란을 통해 1804년 독립을 쟁취하였고 ‘세계 최초의 흑인 독립공화국’이라는 명예로운 지칭까지 누려 온 아이티가, 독립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온전한 국가 기반조차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최근에 카메룬 출신의 저명한 탈 식민주의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인 아쉴 음벰베는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 반세기를 즈음하여 이루어진 『리베라숑』과의 인터뷰에서 “아이티의 유령이 아프리카에 떠돌고 있다”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주권을 되찾은 지 50년이 넘었지만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아프리카를 떠나 살고 싶어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그는 아프리카 독립 50년의 역사가 실패의 역사였다는 자신의 결론을 뒷받침해 줄 분명한 증거를 찾아낸다.
물론 음벰베가 보기에도 그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독립 이후에도 지속되어 온 서구와 아프리카국가들 사이의 신식민주의적 지배―종속 관계에 있다.
예컨대 풍부한 천연자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중앙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자체적인 국가 발전의 여건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 대륙을 통틀어 그 나라들의 현실이 가장 암울하고 비극적인 까닭이 무엇일까?
역으로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말리 같은 나라에서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민주주의가 실천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독립 직후에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아프리카 흑인민족주의 이념을 주창한 많은 정치지도자들(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 같은 이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이 현지의 기득권 계층과 군부 세력, 그리고 서구 열강의 공모 앞에서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 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음벰베가 염려하는 것은 “아이티처럼, 앞으로 150년이 더 지나도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온전한 주권을 획득하지 못하는 사태가 오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아프리카
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정치문화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것, 요컨대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아이티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아니다. 전 국민의 70~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 국가이고, 남미와 미국 간 마약거래의 중간거점 역할에서 파생되는 경제 효과를 괄호치고 나면, 저임금에 기초한 전자제품 조립과 섬유 산업이 국가 경제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다.
그럼에도 아이티는 근대 이후 지금까지 식민―신 식민 지배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해 왔다. 그래서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노엄 촘스키는 음벰베와 유사한 관점에서, ‘고통 받는 국가 아이티의 비극’을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역사적ㆍ국제적인 관점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이유는 오늘날 아이티가 겪고 있는 불행이 결코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적 사건이나 현실에 대해 대부분의 보수적 미디어가 제공하는 ‘왜곡
된 초상’ 때문에 ‘세계의 진실이 가려져 왔을 뿐이라는 얘기다.
예컨대 촘스키의 입장에서, 아이티의 비극이 지속되어 온 역사적 문맥은 명백하다. ‘정의상 필연적으로, 정치적ㆍ경제적 권력을 독점한 엘리트 집단들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해병대’를 주둔시켜 아이티의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고 공언하지만, 그것은 아이티인 자신들만이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을 보여 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아이티 사태’ 앞에서 촘스키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국제사회, 특히 프랑스와 미국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인정과 그에 대한 ‘배상’이다.
7월 14일은 프랑스의 가장 큰 국경일인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이다. 그런데 올해 7월 14일에는 프랑스에서 작지 않은 사회적, 정치적 해프닝 하나가 있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몇몇 활동가가 프랑스 외무부 웹사이트를 고스란히 복제한 다음,거기에 프랑스 외무부 대변인의 ‘대혁명 기념일 특별담화’라는 가짜 동영상을 올려놓았던 것이다.
동영상의 핵심 내용은 대략 이렇다. ‘오늘날 아이티의 불행은 단순히 지진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 온 국제적 역학관계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는 향후 50년에 걸쳐 아이티에 170억 유로를 보상금으로 지불하겠다는 내용의 기본조약을 아이티와 체결하였다.
이는 1804년 아이티 독립 직후에 현지의 프랑스 본국인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가 요구해, 1825년부터 1947년까지 아이티가 프랑스에 지불한 바 있는 9천만 골드 프랑을 그간의 인플레와 이자를 고려해 환산한 금액이다.’
곧바로 프랑스 정부는 그 해프닝의 주모자들을 고소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8월 16일에는 프랑스의 일간지 『리베라숑』에 동일한 액수의 ‘배상’을 프랑스에 요구하는 전 세계 지식인들의 공개서한 하나가 실렸다.
90명이 넘는 서명자들 중에는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 알랭 바디유, 자크 랑시에르, 영화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의 요구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요구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이티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과오와 책임을 환기하는 데에는 상당한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프랑스가 스페인에 뒤이어 지금의 아이티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7세기 중반부터였다.
17세기 말에는 루이 14세가 스페인으로부터 이스파뇰라 섬의 서쪽 1/3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을 인정받으면서 생도맹그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생도맹그의 경제는 사탕수수와 인디고,담배 플랜테이션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카리브의 흑진주’라는 별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의 생도맹그는 프랑스 대외무역의 1/3, 프랑스가 아메리카에서 얻는 수익의 70%를 담당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이 생도맹그로 끌려왔다. 끔찍한 노동환경과 가혹한 처우 때문에 평균 수명이 10년을 넘지 못했다고 하니, 흑인노예들의 생존환경이 어떠했을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생도맹그의 흑인노예들에게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해 준것이 바로 보두교 신앙과 의식이었다.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 속에서, 보두교 신앙에 기초한 노예들의 결집력을 바탕으로
1791년 노예반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란 진압을 위해 파병된 나폴레옹 군대를 격퇴시키고 1804년 1월 ‘아이티’ 독립공화국을 선포한 이후에도, 아이티의 정치 지도자로 부상한 이들은 거의 모두가 물라토이거나 해방노예 출신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프랑스식 문화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프랑스에 의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노예반란의 첫 번째 지도자가 된 투생 루베르튀르(북부의 저택 노예 출신으로 프랑스 어와 라틴 어를 구사)만 하더라도, 1801년 노예제를 폐지시킨 장본인이었지만 새로 만든 헌법에서는 가톨릭을 유일한 공식 종교로 인정하였다. \\
보두교가 탈주노예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분파주의를 조장해서 중앙 권력을 무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염려때문이었다.
투생이 나폴레옹 군대의 포로가 되어 프랑스의 주 감옥에서 숨지자, 투생의 휘하 장군이었던 북부의 장 자크 데살린(해방노예 출신으로 프랑스 군대의 장교였다가 반란군에 가담)과 남부의 알렉상드르 페티옹
(물라토로서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제휴하여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흑인노예 반란을 통해 수립된 국가를 쉽게 승인해 주지 않았다. 특히 유럽의 열강들은 노예제의 유지에 뜻을 같이했고, 그들에게 아이티의 사례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신생국 아이티는 독립하자마자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아이티 입장에서는 국제사회로부터 국가 주권을 인정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옛 식민 본국인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는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옛 식민지 백인들을 위해 아이티는 프랑스에 1억 5천만 프랑을 지불”하라는 칙령(1825)을 공표하였다(1844년에 9천만 프랑으로 감액). 아이티 국가 총수입의 10년 치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초대 통령을 거쳐 황제에 즉위한 데살린이 암살된 뒤에 북부에 따로 왕국을 세웠던 앙리 크리스토프(해방노예로 호텔 식당의 요리사 출신)는 프랑스의 사절을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총살시켜 버린 적도 있었다.
반면에 남부에서 페티옹의 후임으로 시작하여 남북을 다시 통일시킨 부아에 대통령은 프랑스 함대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아이티는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빚’을 갚느라 진력이 났고,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국가 통합을 이루고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써야 할 재원을 독립국으로서의 주권을 ‘사는’ 데 써 버림으로써, 국가 전체의 안정이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하여, 독립 200주년을 앞둔 2003년에는 아리스티드 당시 대통령이 이자까지 계산하여 총 217억 달러를 배상ㆍ환불해 달라고 프랑스에 요구함으로써 국제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다.
프랑스에 대한 ‘배상’이 끝난 뒤에도 아이티는 끊임없이 대외부채에 시달려 왔다.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 현재 아이티의 총외채는 8억 9천만 달러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어려운 상황의 중심에 바로 미국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19세기 내내 아이티의 상황은 계속되는 쿠데타와 반란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의 아이티는 철저히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고(절대적인 규모 자체는 미
미하지만, 오늘날 아이티 대외무역의 85% 이상이 미국과의 교역이다), 그 미국의 영향력 밑에서 점점 더 절망적인 상태로 빠져들어 간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은 아이티의 정치적 혼란과 자국에 대한 채무 불이행을 명분으로 1915년 아이티에 군대를 파병하였고, 그 이후 1934년까지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철수시킨 뒤에도 뒤발리에 부자의 30년에 걸친 독재체제(1957~1986)와 협력하면서, 소위“추악한 부채”(그 기간에 아이티의 부채는 근 20배 가까이 증가하였는데, IMF,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 등이 차관 형식으로 제공한 돈 중에서 뒤발리에 일가가 빼돌린 액수만 최소 6억달러 정도로 추산된다)를 누적시켜 나가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미국을 등에 업은 IMF와 세계은행이 신 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을 주도하면서 쌀, 설탕,옥수수 등의 미국 잉여농산물이 밀려들어 왔고, 아이티의 농업경제는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아이티의 쌀 생산량은 이전의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내수의 절대량을 미국 산 쌀로 충당하게 되었다.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인 아이티가 일본, 멕시코, 캐나다 등에 뒤이어 대표적인 ‘미국산 쌀 수입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사실 뒤발리에 정권 시절부터 IMF는 주기적으로 ‘시장 자유화’를 위한 아이티의 경제개혁에 재정적 지원을 해 왔다. 그리고 1990년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미국의 지원하에 일어난 1991년 쿠데타의 목표 중 하나도 아리스티드 정권의 ‘급진주의적’ 개혁에 제동을 걸고 뒤발리에 시기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
1992년 6월 아이티의 군사정권은 세계은행의 관리였던 마르크 바쟁을 수상에 임명하였다. 그는 IMF의 후원을 받아 뒤발리에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지냈고 미국의 지지 하에 1990년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결국 바쟁이 수상으로 있는 동안, 4천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약식 처형되었고, 6만 명 이상이 미국과 도미니카공화국 등지로 망명하였다.
같은 시기에 CIA는 아리스티드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이라는 여론을 조성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3년에 걸친 군사정권의 통치 끝에, 1994년 미국은 2만 명의‘평화유지군’을 아이티에 파병하였다. 미국은 소위 ‘민주주의복원’을 내세우며 아리스티드를 권좌에 복귀시켜 주었지만, 실제로 아리스티드는 ‘1996년의 남은 임기까지만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IMF의 요구에 철저히 따른다는 조건’하에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비상 경제재건 계획」이라는 이름 하에 강력한 시장 자유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새 아리스티드 정부는 국제금융기구들로부터 차관을 받아 기존의 외국 채권자들에 대한 국가 채무의 연체금을 정산해야 했다. 또한 IMF와 세계은행의 경제재건 계획은 재정적자 축소를 목표로 강력한 긴축 정책(교원감축, 의료인력 감축 등)을 강요하였다.
이는 이미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던 아이티의 공공서비스를 거의 완전히 와해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국가 시스템 자체를 마비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리스티드는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라발라스’ 당을 이끌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2004년 2월의 쿠데타로 다시 해외 망명 길에 올라야 했다. 선거 당시 아리스티드는 최저임금 인상, 학교 신설, 문맹퇴치 사업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국가재정과 관련된 모든 중요한 결정들은 선거 직전에 전임 정부가 IMF와 체결한 협정에 종속되어 있었다.
예컨대 2003년 IMF는‘연료 가격 유연화 체계’의 시행을 요구하여 석유 가격을 130%나 폭등시켰다. 북부와 동부에서는 교통이 마비되고 수도와 전기공급까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티드 정권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고조되고 반(反)아리스티드 세력에 대한 지지율이 상승하였다. 나아가 IMF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구실로 공공 부문의 임금을 동결시켰고, ‘해외 투자자들의 유인’을 명목으로 ‘고용시장 유연화’ 정책을 관철시켰다.
그런데 아리스티드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피신하기 직전에 발표된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아이티의 심각한 분열과 격렬한 폭동에 기여하였다.”
요컨대 미국은 소위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반군의 쿠데타를 지원한 셈이다. 그러나 CIA의 지원을 받아 반군을 이끈 주도세력은 뒤발리에 체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통통 마쿠트’ 출신 인사들, 그리고 1991년의 군부 쿠데타 기간 동안 민간인과 정치인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인물들이었다. 또한 「민주주의 공조」라는 이름의 200여 개 정치단체 연합체와 「184개 시민단체연합」(G-184)이 연대하여 반아리스티드 전선을 형성하였다.
G-184의 리더 앙드레(앤디) 어페이드는 아이티 출신의 미국 시민권자이자 뒤발리에 체제 시절 설립된 섬유ㆍ전자제품 조립기업의 소유주였다. 그의 회사는 미국 기업의 하청을 받아 상품을 생산
하면서 평균 일당 68센트를 노동자들에게 지불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어쨌든 반아리스티드 정치ㆍ시민 단체들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기금」(FND)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CIA는 반군을 은밀히 지원하고 FND는 정치ㆍ시민 단체들을 지원하는 식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아이티의 절망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미국의 역할을 최소화하려는 사람들은 ‘실제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아리스티드도 숱한 부패와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논리에 대해 촘스키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설사 아리스티드가 성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독립 100주년이던 1904년부터 지금까지 아이티의 국가는 「데살린의 노래」다. 그 이전까지는 「우리 선조들이 족쇄를 끊었을때」라는 노래가 국가로 사용되었다.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이었던 장 자크 데살린의 이름을 딴 「데살린의 노래」는 “아이티를 위해, 우리 선조들을 위해/ 하나 되어 나아가자, 단결하여 나아가자”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옛 국가는 “우리 선조들이 족쇄를 끊었을 때/ 그건 팔짱끼고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주인이 되어 일하기 위해 노예들은/ 죽음과 입맞추었다/ 선조들이 흘린 피가 우리 들판의 거름이 되었다”로 시작된다.
보다시피 독립 100주년을 계기로 좀 더 미래지향적인 가사로 바뀌긴 했지만, 두 노래 모두 ‘흑인노예 반란’을 아이티 국가정체성의 뿌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독립 200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아이티인들의 질곡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시점에서 세계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그나마 희망하고 있는 것은 ‘아이티에 약속된 적지 않은 원조금이 또 다시 서구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추악한 방식으로 재단되지 않고, 좀 더 민주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관리ㆍ사용될 수 있도록 감시하는 일’인 듯하다.■
아이티와 재해의 역사적 형성 과정
앤소니 올리버 스미스 - 미국 플로리다 대학 인류학과 명예교수.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0년 5월 31일, 리히터 규모 7.7의 강력한 지진이 페루 북부 해안을 강타했다.
이 지진으로 해안지대와 안데스 산맥 북부와 중부의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었다. 사망자만 약 6만 5천여 명. 부상자는 14만 명을 넘었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를 합한 크기의 지역에서 건물 80%가 전파되거나 반파되었다.
필자는 페루 지진 발생 몇 달 후부터 10년 동안 재해복구 연구를 시작했다.
1) 이 연구를 통해 필자가 묻고 싶던 물음의 하나는 이거였다. 페루 지진은 왜 그렇게 파괴적일까?
이런 의문에 답하려면 안데스 지방의 취약성이 형성된 역사적 과정을 살펴봐야 했다. 페루는 자연재해가 흔히 발생하는 곳이다.
그런데 페루의 식민 시기와 공화정 시기 역사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페루는 자연재해 앞에 그토록 취약한 것일까? 연구가 진행될수록 1970년의 재난은 500여 년 전의 페루 정복과 식민화 시기
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였다.
정복 이전의 페루 원주민들은 예로부터 전해 오는 문화적 적응방식(도시 거주 양식, 건축 재료, 잉여의 재분배)에 따라 살고 있었다. 이를 통해 페루의 원주민들은 고질적인 지진이 닥치더라도 일정 수준의 복원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페루의 정복과 식민화는 이러한 복원력을 파괴시켰다.
스페인 식민지배자들이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실행한 정책, 특히 스페인 식 도시계획과 건축방식의 일환이자 사회통제와 교화를 목적으로 원주민들을 새로운 정착지로 이주시킨 것은 고질적인 지진 다발 지역에서 극단적으로 위험하고 취약한 환경을 조성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식민체제였다.
식민체제는 끊임없이 잉여를 착취했고, 이는 사람들을 수세기 동안 위험에 취약한 상태로 만들었다. 안데스 지역의 세계체제 편입이 페루에 극심한 경제적 저 발전을 낳았던 것처럼 말이다.
1970년 페루 지진 이후에 발생한 대규모 재해는 하나 같이 그기원이 라틴아메리카의 발전이라는 미해결의 문제에 있음을 드러냈다—이보다 더 작은 규모의 재해도 마찬가지다.3) 니카라과의 마나과 지진(1972), 과테말라 지진(1974)4), 멕시코시티 지진(1985), 허리케인 미치(1998)와 카트리나(2005), 아이티와 칠레 지진(2010)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밖에도 여기서 논의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심각한 재해가 발생했다. 이러한 크고 작은 재해를 분석하면 그 근원이 역사 과정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에서는 국가, 지역, 지방에 따라서 위험과 취약성의 정도가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이러한 역사 과정은 각 사회 특유의 발전 속에서 발생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고 위험 지역 내의 취약한 거주 시설, 건축 법규의 부재나 아니면 주로 비공식적인 거주 부문에 대한 미약한 법집행, 그리고 개인ㆍ가족ㆍ사회의 복원력을 잠식하는 빈약한 위생 조건, 농촌과 도시 환경의 악화와 오염, 제도의 미비, 부패와 법망 회피, 사회적 지배 방식, 철저히 왜곡된 부의 분배와 같은 특정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나타났다.
즉, 재해는 우연한 사건도 아니고 신의 뜻도 아니다.
재해는 사회ㆍ경제ㆍ환경의 역사 안에 깊게 뿌리 박혀 있다. 게다가 재해는 단순한 재앙 이상이다.
재해는 시간을 통해 전개되는 과정이며, 그 원인은 역사에 깊게 박혀 있다. 따라서 재해는 재건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역사적인 뿌리와 현재의 전개 양상, 그리고 미래의 잠재성을 안고 있다. 사실상 한 사회의 재해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취약성의 패턴, 사회기반시설, 정치사회 구조, 생산양식, 이데올로기 등이 만들어 낸 필연적 사건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곳이 아이티다.
어느 면에서 2010년 1월 12일의 지진은 500여 년 전부터 형성된 지진의 절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지역의 대다수 국가가 그러하듯이, 아이티 역시 엄청난 비극과 파괴의 역사를 경험했다. 식민시대 이스파뇰라(Hispaniola)라고 부르던 섬의 원주민인 타이노(Taino)족은 1493년 스페인 이주민들과 함께 들어온 유럽의 질병 때문에 많은 수가 죽었다. 그로부터 125년 넘게 스페인과 다른 유럽 국가는 간헐적으로 이스파뇰라 섬에 관심을 보였다.
이후 프랑스 서인도회사는 이스파뇰라 섬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여 생도맹그(Saint-Domingue)라고 명명하고, 식민체제를 확립했다.
17세기 말엽에 이르러 수출용 설탕과 커피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노동력 획득을 위해 노예제도가 도입되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노예제도는 아이티를 재해에 취약하게 만든 근본적인 요소다.
18세기 말엽, 아이티의 아프리카 노예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40%, 커피의 60%를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익은 유럽인 플랜테이션 농장주, 그리고 농장주와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물라토)에게 돌아갔다.
프랑스 식민체제는 물라토가 자유민이며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고, 노예를 소유할 수 있다고 규정했는데, 이런 물라토 계급은 독립 이후 곧바로 국가 엘리트가 되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열기는 생도맹그의 유색인(물라토와 자유노예) 엘리트들에게도 전파되었다. 그래서 1790년 이들의 주도로 일련의 개혁과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곧 국가 규모의 노
예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마침내 1804년 생도맹그는 독립을 선포하고, 타이노 족이 부르던 이 섬의 명칭, 즉 아이티를 국명으로 정했다. 아이티는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노예와 토지 형태의 재산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9천만골드 프랑을 요구했고(처음에는 1억 5천만 프랑), 배상금 지불을 약속할 때까지 아이티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티는 독립 직후 프랑스의 침략 위협에 시달렸으며, 1825년 배상금 지불에 동의할때까지 프랑스, 영국, 미국의 파괴적 통상금지령에 고통 받았다.
아이티는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고리의 외채를 도입했으며, 1947년에야 채무 상환이 끝났다. 따라서 아이티는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부채와 통상금지령의 압박 속에서 겨우 명맥만 이어나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때 ‘카리브의 진주’라고 부를 정도로 이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식민지이던 아이티는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였다.
19세기 초반, ‘건방진’ 흑인 공화국을 혼내 줄 목적으로 유럽과 미국의 지도자들은 아이티를 정치적ㆍ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캠페인에 착수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부채 상환 의무를 통해서 아이티의 재원, 즉 설탕, 커피, 인디고로 벌어들인 수입을 중심부 국가—처음에는 프랑스, 1915년 미국의 침공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7) 아이티 정부와 엘리트들은 외국, 주로 미국의 착취 과정에서 브로커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엘리트들은 부와 권력을 축적했다. 반면 아이티의 자원은 바닥나고 있었고, 폭력, 군사화, 부실한 국가 운영, 부패로 아이티 주민들은 빈곤해졌지만, 아이티의 엘리트들은 사회기반시설을 구축하거
나 효과적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지난 4반세기 동안 형성된 아이티의 빈곤과 취약성의 역사적 구조는 최근에 전개된 국면으로 인해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졌다.
잔인한 파파 독(프랑수와 뒤발리에) 독재를 뒤이은 베이비 독(장클로드 뒤발리에)의 파멸적인 통치 기간에 전례 없는 규모의 외채가 누적됐다.
이는 독재자의 착복이나 노골적인 횡령 때문이었다. 도둑정치나 다를 바 없던 베이비 독의 통치 기간에 미국 국제개발처(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USAID)는 돼지인플루엔자 확산을 막기 위해 아이티의 모든 돼지를 살처분하라고 주문했다.
돼지는 아이티 농민들에게 저축이자 긴급자금이었으며, 영양분을 의미했다. 따라서 돼지 살처분은 아이티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에게 심각한 빈곤을 야기했다.
자원이 점점 더 부족해지자 아이티 농민들은 숯을 굽기 위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벌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숲이 황폐화되었다. 대지주를 지원하는 USAID 프로그램농산물 가공시설을 건립하도록 장려했다.
반면에 IMF가 도입한 관세 인하로 아이티 시장은 개방되었는데, 이는 과잉 생산한 미국의 미곡생산업자를 지원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로써 아이티의 주요 작물 생산 기반은 약화되고, 농촌 경제는 무력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아이티의 도시는 미국계 회사의 수출용 생산기지가 되었다. 농촌 경제의 파탄과 수출용 생산기지의 확대로 대규모의 아이티인들이 도시로 이주하였다.
슬럼가에 사는 빈곤한 이주자들과 산비탈에 자리 잡은 판자촌 사람들은 어떠한 서비스도 받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리고 지방 출신 이주자들의 일자리 수요는 공급을 빠른 속도로 앞질렀다. 이는 슬럼가에 밀집한 주민들의 빈곤을 심화시켰다.
게다가 지난 20년 동안의 정치적 불안정성 때문에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은 감소했다. 따라서 2010년 초 아이티가 자연재해에 놀라울 정도로 취약한 것은 당연했다.
지난 4반세기 동안 지지부진 하나마 발전을 위한 노력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것도 환경안보나 위험경감 문제에 한정되어 있었다. 비공식적 거주와 더불어 건축법규의 부재, 광범위한 영양결핍, 기아, 질병, 깨끗한 물과 전기에 대한 접근취약성, 불충분한 교육시설과 보건시설, 국가와 지방자치 차원의 서비스, 범죄와 부패는 아이티를 재해에 극도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지진학자들이 강력한 지진의 가능성을 경고했음에도 대부분의 아이티인들은 지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취약한 사회 구조 때문에 정부 추산 30만명 이상의 아이티인들이 사망하였다. 포르토프랭스에 난립한 임시 주택은 붕괴되었으며, 불충분한 기초 구호 서비스마저도 중단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위험에 극도로 노출되어 있으며, 궁핍한 환경 속에서 100만의 사람들이 피난처도 없이 우기와 허리케인 시즌을 맞이하고 있다.
아이티 지진이 발생한 지 5주도 채 되지 않아 500배 이상 강력한 지진이 칠레를 강타했다. 진원지의 깊이가 깊었고, 위치 또한 인구 밀집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는 아이티처럼 수십만 명이 아닌, 수백 명에 그칠수 있었다.
하지만 사망자 수의 차이는 진원지의 깊이와 위치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두 나라를 특징짓는 취약성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칠레에서는 강력한 지진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정부와 국민들은 사전경보조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칠레에는 훌륭한 건축법이 1930년대에 처음으로 제도화 되었고, 이후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 아래 현대화되었다가 1985년 다시 보강되었다.
대조적으로, 아이티는 어떠한 건축법도 제정하지 않았으며, 수도 포르토프랭스 주민의 대다수는 빽빽이 들어선 슬럼가의 허술한 집에 살았다. 게다가 아이티의 만연한 부패를 감안하면, 공공부문에서 건설한 건물조차도 공학적 고려를 하지 않았으므로 건축기준 미달일 것이 분명했다. 공공건물의 높은 손상률과 붕괴율은 고위급 공무원들의 부패가 낳은 결과가 분명하다.
이들이 비리를 눈감아 줌으로써 15개의 연방정부 건물 중 13개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는 부패지수 순위에서 아이티를 168위, 칠레를 25위라고 발표했다.
발전수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양국 모두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칠레는 아이티보다 인간개발지수(HDI)가 훨씬 더 높다.
인간개발지수는 인간 발전의 세 가지 기본적 측면—건강(기대 수명), 지식(성인문맹률과 초중등학교의 등록률), 생계 수준(1인당 GDP)—에서 182개 나라들의 평균 성취도를 측정하는 혼합지수다.
「2009년 인간개발보고서」에서 칠레는 상위개발 범주에 들어가는 44위를, 아이티는 중위개발 범주에서도 밑바닥에 가까운 149위를 차지했다. 이 순위는 하위개발 범주—24개국에서 23개국이 아프리카 국가—에 가까운 것이다.
또한 이런 지표들은 칠레에는 특정 수준의 서비스를 시민에게 제공하는 기능적인 국가기구가 있음을 증명하는데, 이는 지진으로 인한 위기 상황과 그 여파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반면 아이티 정부는 재난이 발생 후 며칠 동안 사실상 찾아볼 수 없었다. 정부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하지만 아이티인과 칠레인이 재난 상황에서 보여준 행동을 보면, 시민과 국가의 관계는 약간 도발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국가가 없는 것과 다름없는 아이티에서 약탈이 없지는 않았으나 전반적으로 아이티 주민들의 대응은 사회적 연대와 자발적인 조직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집단적인 노력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조하고 도와주었던 것이다. 또 약탈자들은 공동체의 응징을 받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기구가 있는 칠레에서 주민들은 대체로 정부의 대응에 의존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자 개인주의적 충동이 우세하게 되어, 아이티보다 더 많은 약탈과 사회폭력이 발생했다.
칠레의 저널리스트 라울 소르(Raul Sohr)는 주민 사이의 사회적 연대가 약화되고 조직화 능력이 떨어지게 된 이유는 위기에 대해 집단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개인주의적 이익을 추구하기를 부추기는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신자유주의 모델의 부식 효과 탓 이라고 말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자원 제약이 공동체의 연대와 가정 내의 협력을 부식시켰고, 이것이 과거에 빈민들이 형성하고 있던 촘촘한 사회 네트워크를 약화시켰다는 연구결과는 칠레와 아이티의 재난 대응에서 나타난 차이와 일치한다.
따라서 칠레에서는 사회기반시설과 주택 재건 이상의 많은 것을 복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반면, 아이티는 재건 기반이 될 잠재적인 사회 자원이 예상보다 더 풍부할 수도 있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어떻게 지속가능하며, 취약성을 줄이고, 사람들이 가족과 공동체 차원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아이티의 재난을 야기한 복잡한 환경적ㆍ경제적ㆍ정치적ㆍ사회적 변수를 다룰 수 있을까?
즉, 아이티는 무엇보다도 경제적 재건과 복구에 힘을 쏟아야 하지만 극도의 취약성을 야기한 체제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진 이전의 정권은 지진의 여파 속에서도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영을 재정비했다.
부패와 무능의 정도와는 별개로 뛰어난 복원력을 보여 주었다. 사실, 아이티의 지진 참사는 사회적ㆍ정치경제적 역사, 특히 20세기의 역사에서 발생한 변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명확한 입증이었
다. 그리고 재해복구는 이에 대한 체제의 대응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지진을 참혹하게 만든 복잡한 요소들을 재해복구 과정에서 다뤄야 한다. 즉, 국제적 세력과 지역적 이해관계가 아이티의 재해 취약성에 책임이 있음을 인식해야 하며, 이러한 인식은 지진 참사로 드러난 징후들뿐만 아니라 재해의 주요하고 부차적인 원인까지도 다루는 정책과 실천에 반영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아이티 지진이 초래한 파괴와 죽음의 원인을 국내외적으로 재해를 야기하고 유지시키는 자본과 상품의 흐름과 경제사회적으로 굳어진 관행에서 찾는다면, 진정한 재해복구란 단지 물리적 복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티를 세계체제 내의 주변부적 위치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재해 문제를 취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 구조의 제약 속에서 환경 악화와 위험에 대한 취약성을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는 재해복구 방법을 찾아내 실천하는 것이다.
지진 발생 후, 아이티는 경제 구조를 지속가능한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얻었다. 또한 지진으로 인해 지역의 현실과 사회적 요구를 훨씬 잘 반영하도록 정치권력의 균형을 재조정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재해복구는 지속가능성을 위한 일련의 기회들이 현재의 경제적 제약 내에서 실현가능한 정책 목표로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이티의 정치경제 구조가, 비록 재해복구라는 동기와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지만, 국내적ㆍ국제적 세력이 고유의 형식과 실천을 통해 깊이 각인해 놓은 일련의 고질적인 조건과 진정으로 맞설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1월 12일 지진으로 의한 아이티의 파괴와 고통은 독립 이후부터, 아니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시작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었다.
노예제 폐지와 독립투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에서 시작된 이 과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증적으로 아이티인들이 거주하는 대부분의 지역에 심각한 취약성을 야기했다.
그러므로 지진 발생 이전이나 이후에도 여전한 아이티의 취약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현상이며, 동일한 세력이 야기하고 또 유지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아이티 원조와 국제정치
2010년 3월
이성형-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
아이티로 향한 국제사회의 원조가 본격화되면서 외교전쟁도 한창이다.
야전병원 설비를 실은 프랑스 비행기는 한동안 공항에 착륙 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프랑스 정부의 대표 주아양데는 공항 통제를 맡은 미군을 나무랐다.
“아이티를 원조해야지 점령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의 위신도 말이 아니었지만, 유럽연합도 굼뜬 대응에 발언권을 잃어 버렸다. 협의만 하다 보니 적기에 강력한 메시지와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미국은 이번 지진을 카리브 해역의 통제권을 다잡을 수 있는 호기로 보고 있다.
이미 2천명의 해병대를 포함한 1만 2천명의 대규모 파병을 통해 구호작업에 착수했다. 30대의 비행기, 항공모함 칼 빈슨, 순양함 노르망디, 구축함 언더우드도 함께 출동했다. 미국 국방부와 남부사령부(사우스컴)가 통제지휘부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의 아이티에서 구호사업과 질서 회복 업무를 맡는다.
중국도 지진 발생 후 33시간 만에 긴급구호팀 68명을 아이티로 급파했다. 국제구호 경험이 많고 지리적으로 인접한 미국에 비해 겨우 10시간 정도 늦었다.
아이티는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다. 중국 지도자들은 선의를 크게 베풀고, 국교를 정상화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카리브 해는 ‘미국의 호수’라 불린다. 여기서 미국의 국가이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아이티에서 대량 탈출하고 있는 사람들의 미국 내 유입을 막아야 한다.
사전에 차단하지 않는다면, 국내에서 시끄러운 쟁점이 된다. 인권단체들과 보수파들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부시(아버지)행정부 시절에 아이티의 군사독재를 피해 나온 대규모 보트피플 때문에 정국이 요동친 적이 있다.
30만 명(추산치)의 피난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클린턴 행정부는 독재 정부를 강제로 밀어내는 강수를 두었다. 아이티 인들의 이민유입, 인권침해, 빈곤과 구호 문제는 오래 전부터 미국 내에서 국내 이슈였다.
둘째, 이번 기회에 시장경제 질서를 착근시키고 만성적 빈곤문제를 해결한다면, 그동안 실추되었던 미국의 위신도 올라갈 것이고, 쿠바와 베네수엘라 같은 반미 국가들의 위세도 위축될 것이다. 아이티의 외채 가운데 80%를 채권으로 가지고 있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이미 외채 탕감을 선언했다. IMF 총재 스트로스-칸은 대규모의 마샬 플랜을 제안했다.
세계은행 총재 졸릭은 저임금 수출가공기지로서 아이티에 주목하고, 기업인들에게 이번 기회에 투자하라고 조언한다. 조만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재원이 아이티로 유입될 것이고, 이는 장기적으로 분명히 효과를 볼 것이다.
아이티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경쟁력이 있다. 미국 시장이코앞에 있고, 임금은 중국보다 싼 편이다. 사회정치적으로 안정만 된다면 조립가공형 산업이 번성할 수도 있다. 이미 미 의회는 2006년에 일종의 자유무역 협정인 '아이티경제개선기회법'(Haitian Opportunity for Economic Enhancement: HOPE)을 3년 시한부로 통과시킨바 있다.
산업공단을 창설하고 여기서 생산되는 제품에 한해서는 대미 수출 시 무관세 규정을 적용한다. 2008년 10월에 기회법(HOPE II)은갱신되었고 2018년까지 유지된다.
셋째, 아이티는 인신매매, 마약거래 등 온갖 불법거래의 중계지이다. 난리 통에서도 유아 납치와 장기매매가 성행하고 있다는 외신도 있었다.
또 미국으로 유입되는 마약의 중간 기착지로 아이티의 역할이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이번 기회에 쐐기를 박고자 한다. 멕시코와 콜롬비아와 연계된 마피아들이 이곳 거리에서 힘을 쥐고 있다.
미국은 이제 자신의 힘만으로 카리브를 통제하기 보다는 브라질 같은 역내 국가를 끌어들여 역할을 나누고자 한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일이 힘에 겨운 것이다. 브라질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이 목표인지라, 미국의 요구를 냉큼 수용했다. 현재 유엔평화유지군에서 브라질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미국도 그 대가로 브라질에 경제적 유인을 제공했다.
2009년 7월에 워싱턴에서는 제4차 미국-브라질 고위 경제인 포럼이 열렸다. 브라질에서는 차기 대선후보인 지우마 후세피, 개발통상부 장관 미겔 조르지가 참석했고, 백악관에서는 경제보좌관인 로렌스 H. 섬머스, 국가안보 보좌관 제임스 존스 장군이 참석했다.
미국은 회의 끝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브라질이 아이티에 투자한 의류생산품에도 무관세를 적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브라질은 12명의 경제계 대표들을 아이티로 보내 투자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또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룰라 대통령은 2007년에 공동 선언문의 제2항에서 이런 합의를 한 바 있다.
제3국에서 에탄올 생산을 시작한다. 여기서 제3국은 아이티, 도미니카공화국, 산크리스토발 이 네비스, 엘살바도르이다.
카리브 해역의 반미 지도자인 쿠바의 카스트로는 미국의 점령 작전을 비난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도 미국의 파병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3천명의 미군이 이미 도착했다고 읽었다. 마치 전쟁터에 가는 군인처럼 무장한 해병대들이라고 한다. 온갖 무기는 다 있지만, 정작 보내야할 것은 의사, 의약품, 연료, 야전병원이 아닌가! 미국은 비밀스런 방식으로 아이티를 점령하려 한다.” “길거리에서 그들을 볼 수가 없다. 그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던가? 부상자를 수색하던가? 당신들은 그들을 보지 못한다. 나도 보지 못했다. 대체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결손 국가인 아이티에는 지진 이전에 이미 9천 명 가량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1만 2천명의 군대가 투입되니, 9백만 인구에 2만 1천명의 병력이 주둔하게 된다. 2천8백만 인구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미군 숫자가 7만 명이니, 인구 당 파병 숫자는 비슷한 수준이다. 그만큼 군사화의 수준이 높다.
미국은 유엔과 역내 이해관계자인 브라질과 캐나다와 협력하여 원조 작업을 조정할 것이다. 이미 국가는 붕괴되었고, 유엔의 사무소 설비도 파괴되었다고 하니, 미군 시설이 정부를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부 장관은 아이티 방문 시에 이런 우려를 일축했다. “
우리는 (아이티 국가를) 지원하려고할 뿐이지,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부 장관도 파병은 “무정부 상태에서 아이티 인들과 무고한 외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사탕수수밭과 커피 농장의 흑인 노예들은 프랑스의 압제에서 벗어나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자유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나르 쿠쉬네는 "프랑스인들과 아이티의 역사적 유대"를 강조했다.
하지만 유대는 전혀 없었다. 미국과 프랑스를 포함하여 노예제를 인정하는 강대국들은 노예반란이 이웃으로 전파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자유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했다.
스페인의 식민지들은 모두 아이티와 경제관계를 단절했다.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미국도 아이티에 대한 국가승인을 남북전쟁시기까지 미뤘다.
아이티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는 대신에 1억 5천만 프랑의 배상금(현재 150억 유로)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 채무로 인해 아이티는 재생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변제가 불가능한 이 채무를 프랑스는 곧 미국으로 넘겼다.
독립 이후 정치질서는 국내세력에 의한 독재가 아니면 미국의 점령으로 얼룩졌다. 미국은 해병대를 파병하여 1915년부터 1934년 사이에 근 20년간을 아이티를 점령한 바 있다.
냉전 시대에 미국은 오랫동안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체제를 지지했다.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파파 독(Papa Doc),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는 베이비 독(Baby Doc)이라 불렸다. 아버지는 1957년부터
1971년까지, 뒤이은 아들은 1986년까지 아이티를 좌지우지했다.
근 30년이나 유지된 독재가 무너지자, 장-클로드 뒤발리에는 국고에서 9억 달러를 꺼내 프랑스로 도망갔다. 당시 아이티의 외채보다 많은 액수였다.
하지만 외세와 독재 추종세력의 힘은 강했다. 1990년 12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해방신학자인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당선했다.
하지만 아리스티드는 9개월 만에 라울 세드라스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로 망명을 떠났다. 1994년에 빌 클린턴 대통령은 미군을 보내 아리스티드를 다시 입국시켰지만, 그 뒤에도 아이티 정국은 안정화되지 않았다.
2000년에 재선 기회를 잡은 아리스티드는 점차 국내 상황을 통제하는 힘을 잃었고, 또 국제적 지지도 상실하게 되었다. 2004년에 미국은 프랑스와 캐나다의 동의아래 반대세력을 밀었고, 아리스티드는 또 나라를 떠났다.󰏅
아이티 지진은 재건의 기회가 될 수 있을까?
강정원 ―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__
2010년 1월 12일 강도 7의 지진이 아이티를 폐허로 만들고 이제 2년6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지진 발생지에 근접해 있던 수도 포르토프랭스는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23만 명의 사망자와 30만 명의 부상자 그리고 170만 여 명의 철거민이 발생했으며, 재산 피해 역시 80억 달러에서
13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된다.
지난 반세기 인류의 그 어떤 자연재해보다도 극심한 인명 피해를 가져온 아이티 지진은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이자 동시에 독재와 쿠데타 그리고 외세에 의한 군사점령으로 얼룩진 현대사를 가진 비극적 국가라는 인식과 결합되며 인도주의적 원조의 당위성을 부각시켰다.
지진 발생 2개월이 지나 클린턴 부부의 주재로 열린 원조국 회의에서 전 세계 55개 국가는 향후 94억 달러의 무상원조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으며, 미국 정부는 2004년부터 아이티에 주둔해오던 유엔 아이티 안정화 임무단(MINUSTAH), 유엔 인도주의 업무조정국(OCHA) 등과 협조해 약 2만 명에 이르는 병력과 구호인력을 파견했다.
개인이나 NGO 등이 주도하는 사적 원조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는데, 2010년 유엔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집행된 35억 달러의 원조 자금 가운데 약 14억 달러가 사적 원조인 것으로 분류되며, 미국의 경우 2가구당 1가구가 아이티에 기부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지진 발생 이후 아이티에서 들려오는 외신 보도는 국제사회가 주도하는 아이티 재건 사업이 심상치 않은 문제점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짙다. 일례로 지난 2011년 10월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는 수백 명이 유엔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며 거리로 뛰어 나왔고, 여성, 아동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유엔군이 수많은 인권남용을 자행했다는 혐의에 급기야 미국 군사학교 감시단(SOAW) 등의 시민단체의 자체적 조사단이 파견되기도 했다.
갈등은 2010년 10월 콜레라 환자사례가 약 1백 년 만에 처음으로 아이티에서 보고되며 급격히 고조되기 시작했다. 최초로 콜레라 환자가 보고된 후 불과 몇 주 만에 콜레라는 걷잡을 수 없이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1년 만에 약 52만 명의 감염자와 7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여기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아이티 국민의 80% 이상이 콜레라 감염경로로 유엔군을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콜레라 발병은 유엔군으로 대변되는 외국 병력 주둔에 대한 적개감과 의혹을 증폭시켰으며, 시민들이 주도한 수차례의 반대 집회는 유혈 충돌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서 아이티에 파견된 미주기구(OAS) 대표인 리카르도 사이텐푸스는 “국제원조의 실패 사례를 든다면 다름 아닌 아이티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아이티는 국제원조기관과 NGO의 메카이자 실험실이 되었고, 심지어 이들이 전문적 수련을 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훈련지가 되었다”라고 비판한다.
아이티 재건 사업에 전례 없는 규모의 국제원조가 투입되고 있음에도 정작 아이티 국민이 국제사회의 개입에 이토록 적대감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티의 시민 단체를 비롯한 국내외 다양한 단체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재건 사업에 이토록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아이티는 더 나아지고 있지 않은가?
이 글은 아이티에서 지진 발생한 직후부터 현재까지 2년 6개월 동안 아이티에서 진행된 재건 사업의 현황을 살펴보고, 핵심적인 논쟁점을 짚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이티는 이제 위기 수습에서 안정적인 국가 재건으로 나아가야 하는 단계에 있다. 구호 사업의 실패가 반복된다면 그 대가가 이제는 더 혹독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 시점에서 무엇이 잘못되어왔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 먼저 아이티 재건 사업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사안을 살펴보자.
원조로 인한 종속성 증대와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의 심화
아이티에서 군대 파병과 원조를 통한 국제사회의 개입은 사실상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 18세기 자메이카와 더불어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가장 많은 양을 생산하며 카리브 해의 진주라는 애칭을 얻었던 아이티(당시의 명칭은 생도맹그)는 당시 프랑스 식민지 중 가장 많은 이윤을 창출하던 곳이었다.
흑인 노예가 주체가 된 1804년 아이티혁명은 프랑스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의미했으며, 노예무역과 식민주의에 의존하던 영국과 이웃 나라 미국에게도 간과할 수 없는 위협을 의미했다.
인류학자 미셸 롤프 트루요가 말하듯 아이티혁명은 “그 당시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흑인들이 장기적으로 심각한 위험성을 야기하리라고는 여전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른 아이티에 대한 프랑스와 미국의 응징은 실로 장기간에 걸쳐 혹독하게 가해졌다.
프랑스는 1억 5천만 프랑(현재 약 210억 달러에 해당)의 독립 배상금을 요구했고, 비록 배상금은 9천만 프랑으로 삭감되었지만 독립 이후 아이티는 반세기 이상에 걸쳐 부족한 자원의 대부분을 배상금 탕감
에 쏟아 부어야 했다.
2003년 당시 아이티의 대통령이던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가 프랑스에게 독립 배상금 명목으로 부당하게 갈취해 간 210억 달러를 상환할 것을 요구했을 때, 프랑스는 미국을 도와 아리스티드 정부를 전복시키고 국외로 추방시키는 것으로 답했다.
독립 이후 아이티에서 미국의 개입은 보다 전면적이고도 지속적이었다. 20세기 초반 약 20년에 걸친 군사점령 이후에도 미국은 다양한 국제기구의 차관을 동원해 악명 높은 뒤발리에 부자(父子)의 독재정권을 후원했다.
일례로 현재 아이티 외채의 40% 가량에 해당하는 미주개발은행(IDB) 차관은 상당부분 뒤발리에 부자 정권에서 집행되었으며, 공적 차관은 뒤발리에 부자의 정치 자금과 비자금으로 대거 전환되었다.
2006년의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아이티 국민의 절반 이상은 뒤발리에 정권 퇴각 이후에 태어났지만 당시 유입되었던 차관 때문에 태어나서부터 빚더미에서 삶을 시작해야 한다.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개입은 1986년 장 클로드 뒤발리에(일명, 베이비 독) 퇴각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다.
뒤발리에 퇴각 이후 미국의 개입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는데, 정치적으로는 아리스티드와 그가 설립한 판미 라발라스(Fanmi Lavalas) 정당을 군사력 파병을 통해 견제하고 제재하는 것이었고, 경제적으로는 수출 제조업을 위한 값싼 노동력의 제공자로서 그리고 미국농산품 판매를 위한 시장으로 아이티 경제 구조를 전면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지진 발생 이후뿐만 아니라 지진 발생 이전부터 아이티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된 사안, 특히 정치 불안과 정부의 무능력, 과도한 도시 집중화와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인구 포화와 슬럼화, 농업 경제의 붕괴,실업, 저임금 등의 문제 등의 배후로 항상 미국의 역할이 지목되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1991년 군부에 의해 아리스티드 정권이 전복된 이후 미국은 유엔을 통해 평화유지 명목으로 아이티에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주둔시켜왔으며, 2004년 아리스티드가 또다시 정권에서 강제적으로 물러나야 했을 때부터 유엔 아이티 안정화 임무단은 본격적으로 국가 기능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국제개발처(USAID)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미주개발은행(IDB) 등 국제금융기관은 무상원조와 차관을 제공하거나 또는 기존의 차관을 탕감해 주는 조건으로 미국에서 수입하는 쌀과 농산품의 관세를 낮추고, 석유 등에 대한 보조금을 폐지하는 등의 신자유주의 구조 개혁을 요구했다.
그 결과 쌀, 설탕, 고기 등을 자급자족하던 아이티는 현재는 쌀 소비량의 80%를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카리브 해 국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식료품을 미국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최저임금 역시 기존의 하루 1.75달러에서 2009년 10월 수차례의 집회와 충돌을 거쳐 3.75달러로 인상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역내 최저 수준에 불과하다.
국제 원조 기구와 금융기관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더불어 미국, 프랑스, 그리고 2004년 유엔 아이티 안정화 임무단 파병을 통해 합류하기 시작한 캐나다는 군사적, 정치적 개입을 통해 아이티를 그들의 구미에 맞게 변화시키는 데 주력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국제원조는 이들이 원하는 것을 끌어내기 위해 활용된 주된 수단이었다.
아이티 지진 발생 이후의 상황은 달라졌을까?
아이티의 국제원조는 강대국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재난 극복과 재건을 위한 국제연대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거듭나는 데 얼마나 성공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아이티 회복을 위한 임시위원회’(IHRC)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빌 클린턴의 고백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0년 3월 미국 상원 위원회에서 클린턴은 1990년대 그가 추진했던 아이티 무역 자유화 정책이 “아칸소 주의 농민에게는 약간의 이득이 되었을지라도 실패로 끝났다”고 자인하며, “그것은 실수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한 일 때문에 아이티는 자국민이 섭취할 쌀 생산 능력을 잃게 되었고, 나는 매일매일 이러한 실수의 결과를 책임지며 살아야 했다”고 고백했다.
아이티의 전 총리이자 아이티 회복을 위한 임시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인 장막스 벨리브 역시 이례적인 고백을 하는데, 그는 아이티 회복을 위한 임시위원회의 종속성을 비판하는 아이티 상원 위원들에게 “여러분이 여기에서(아이티 회복을 위한 임시위원회 문건) 종속성을 감지하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찢어버리는 편이 낫습니다. 나는 지난 18개월 간 우리가 자율적으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낙관해 왔습니다. 하지만 총리로서 이제 나는 우리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라고 고백한다.
클린턴과 벨리브의 고백은 원조의 제공자나 의사결정권을 가진 최고위 정치인들이 아이티 원조의 문제점을 성찰적이고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로도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자아비판이 실제 원조 집행 단계에서도 반영되고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단적이 사례로 2010년 미국의회를 통과한 아이티 경제 부흥 프로그램(HELP) 법령은 아이티에서 수입되는 편물과 직물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고 2억 평방미터(SME)로 생산 할당량을 증가시키는 것을 요지로 한다.
즉 아이티를 미국의 수출 제조업을 위한 생산기지로 전환시키려는 기존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심사이다. 반면 아이티의 농업을 위한 장기적 대책은 원조국이나 아이티 정부 양측 모두 찾아보기 힘들다.
아이티 정부가 발표한 원조 필요성 평가보고서에서 아이티 정부가 요구한 120억 달러의 예산 가운데 단지 0.3%만이 농수산업 분야에 할당되었다는 보도는 그 단적인 사례이다.
아이티 지진과 국제 원조가 미국의 기업들에게는 호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들도 나오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지진 발생 이후 1년 동안 미국 정부는 총 2억 달러 정도의 원조사업 하청을 주었는데, 이 가운데 2%만이 아이티의 기업에게 할당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 기업 차지였다고 한다.
또한 유엔 특수파견대(UN Special Envoy)가 집행한 24억 달러의 무상원조 자금 가운데 대부분은 공여국의 병력과 구호인력 유지를 위해 또는 유엔 소속 기관이나 국제 비정부기구의 프로젝트로 할당되었고 1%
만 아이티 정부로 할당되었다는 보도도 있다.
이와 관련해『충격 독트린』의 저자 나오미 클라인은 “재해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처럼 “재난 발생 이후 공적 영역을 향해 조율된 공습들과 결합되어 재난을 흥분되는 시장의 기회로 삼으려는 시도들”을 비판한다.
아이티 지진 이후 유입된 국제 원조는 아이티의 빈곤과 극심한 빈부격차의 주범으로 지목되던 정치적 종속과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을 심화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할 것인가?
원조가 재해 자본주의의 자양분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이어지는 논의가 이들 질문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하리라 기대해 본다.
배제적 개입과 민주주의의 문제
지진 발생 이후 아이티에서 추진되어 온 국제원조사업이 비판을 받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재건 사업과 그로 인한 일련의 변화에서 아이티 국민들이 배제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원조 기관 특히 국제 비정부기구들의 역할과 비중이 증가하고 이들 단체가 정부의 역할을 대체함에 따라 가뜩이나 허약했던 정부 기능이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진 이후 아이티 재건 과정에서 국민이 배제되고 있다는 비판은 2010년 11월의 선거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2010년 11월 선거는 지진 이후 무기한 연기되었던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진다는 점에서, 아이티 역사상 3번째의 민주적 절차에 따른 선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지진에 설상가상으로 콜레라가 발병하며 더 이상 악화될 수도 없을 지경으로 초토화된 아이티를 추스르는 과업을 수행할 정부를 선발한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선거였다.
하지만 지진으로 인해 수십 만 명이 주소지도 없이 여전히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고, 그럴 듯한 투표소나 투표인 명부조차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선거는 수많은 불안 요소를 내정하고 있었다. 불만은 임시선거중앙위(CEB)가 라발라스 당을 비롯해 십여 개 정당의 출마권을 박탈하면서 극에 달하게 됐다.
1996년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이 설립한 라발라스 당은 한때 70%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획득하며 확고한 대중적 기반을 획득한 바 있다.
2004년 쿠데타로 라발라스 지지자나 활동가는 투옥과 암살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에도 제도권 밖에서 머물러야 했지만 다수의 아이티 국민에게 아리스티드와 더불어 라발라스 당은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 정책이나 식민주의적 외세의 점령 그리고 뒤발리에 정권으로 대변되는 전통적 엘리트 계층과는 대척되는 가치와 변화를 상징해왔다.
라발라스 당을 비롯해 십여 개의 정당이 제외된 채 치러진 선거에서 상당수의 유권자들이 투표권 행사를 거부했으며, 결국 23%라는 전례 없이 낮은 투표율 속에 선거는 진행되었다.
논란은 이어진 대통령 결선까지 지속되었으며, 미셸 마르텔리는 17%라는 초라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선거감시단으로 활동했던 미주기구와 카리브 공동체(CARICOM)는 투표과정의 논란과는 무관하게 아이티의 선거를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의미 있는 성과라고 평가했다.
선거 과정에서 빚어진 배제는 지진 이후 아이티 재건 사업 전반에서도 발견된다. 지진 발생 이후 소집된 수차례의 원조기관 포럼에서 정작 아이티 대표를 위한 자리는 없었으며, 아이티 정부를 대행해 원조기금 관리와 재건 사업을 책임질 아이티 회복을 위한 임시위원회의 회원 자격은 약속한 원조액 규모나 탕감을 약속한 차관 규모에 따라 결정되었다.
비록 아이티는 공동의장을 맡은 벨리브 전 총리와 당시 대통령 프레발의 거부권을 통해 일정 비중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아이티의 재건에 직접적으로관여하고 있는 시민 단체나 기관이 참여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국제 원조 기관과 아이티 원조 기관 간의 소통의 부재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국제 원조 기관과 아이티 지방 단체들 간의 자금력의 차이도 원인으로 작용하지만, 크레올어를 구사할 수 있는 외국인 실무자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이와 관련해 아이티에서 활동하고 있는 브라질 인류학자 리베이루 토마즈는 국제 원조 기관이 아이티 구호 단체와 협력하기보다는 경쟁구도를 형성하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원조 기관이 빈곤 극복보다는 위태로운 상황과 빈곤이라는 상태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국제 원조 기관이 주도하는 재건 사업에서 아이티의 시민 단체와 시민이 배제되고 있지만, 아이티 민중은 전통적인 공동체와 연대의 문화에 의존해 자체적인 재건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자생적인 재생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지진 발생 이후 약탈과 범죄가 난무하는 무법천지로 아이티를 묘사하던 외신과는 달리 아이티 민중은 신속히 연대를 통해 위기에 대처했다.
약탈자들은 공동체 규율에 따라 엄중히 처벌되었고,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은 비통함 속에서도 폐허에 묻힌 생존자 구조에 몰두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심하거나 또는 무능력한 정부를 대신해 자체적인 경비대를 조직했으며, 여성과 아이가 폭력에 노출되지 않도록 그리고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가 방치되지 않도록 협력했다.
아이티 민중의 자생적인 연대의 노력은 재건을 위한 보다 지속적이고 제도적인 단체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지진으로 발생한 역내 피난민(Internally Displace People)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농민 단체가 결성되었고, 역내 피난민의 인권과 주거권 확보를 위한 단체도 조직되었다.
또 살아남은 아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도록 자체적인 자금을 조달해 교사를 모집하고 교실을 정비하는 단체도 생겨났으며, 난민 캠프의 여성과 아이들을 성폭력과 인권유린에서 보호하기 위한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들 단체의 활동은 아이티 재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지만, 문제는 이들이 보유한 제한된 자원만으로는 상황을 호전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아이티의 재건을 위한 아이티 민중의 자생적인 노력들이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국제 원조 자금의 집행 단계에 이들이 결정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할 것이다.
사회적 약자와 피난민의 인권
아이티 재건 사업에서 현재 가장 논쟁이 되고 있는 사안은 피난민의 주거지 확보 문제와 피난민을 비롯해 여성과 아동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인권 유린 문제이다.
아이티 지진으로 인해 피난 상태에 내몰린 인구는 현재 약 170만 명으로 추산된다. 피난만 가운데 상당수는 20세기 후반 농촌경제 붕괴로 인해 수도 포르토프랭스로 이주해온 도시 빈민이다.
이들 대부분은 지진으로 생계의 터전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척을 잃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현재 아이티에는 총 1300여 개소의 피난민 임시 캠프가 세워져 있고, 이 중 860개가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배치되어 있다. 이들 임시 캠프는 약 40만 가구를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된다.
피난민에게 선택의 폭은 많지 않아 보인다. 고향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으로 권고되기는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는 이들도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당장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막막하기 마련이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새로운 주거지를 자력으로 확보하는 것 역시 현실성이 거의 없다. 임시 캠프가 유일한 생계 대책인 피난민에게는 공권력 또는 임시캠프 주둔지 소유주에 의한 강제 철거라는 즉각적인 위협 이외에도 기아, 폭력, 성폭행, 질병 등의 무수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올해 출판된『구조 이행: 지진 발생 이후의 아이티』라는 책의 공저자로 참여한 마크 슐러는 임시 캠프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아이티 피난민의 증언을 토대로 임시 캠프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슐러에 따르면 캠프에서의 삶은 2차적인 정신적 외상을 입는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두 번째 지진”을 겪는 것으로 표현되곤 한다. 텐트는 불과 20센티 간격으로 비좁게 설치되어 있으며, 임시 캠프의 절반가량이 어떤 상하수도 시설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피난민은 플라스틱 병에 물을 담아 또는 공개된 장소에서 몸을 씻는다. 비좁은 주거 공간, 사적 공간의 부재, 상하수도 시설뿐만 아니라 전력 시설 등의 부재는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최소한의 조건을 박탈할 뿐만 아니라 전염병 확산과 성폭력 등을 유발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식량 배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권 유린의 사례도 빈번하다. 식권 배급 소식에 반나절 아니 꼬박 하루를 잠도 자지 못하고 줄지어 기다리는 것은 다반사이고, 식권 분배자는 대가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피난민의 상황은 현재 아이티가 직면하고 있는 두 가지 절박한 과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인간적인 얼굴을 한 원조에의 요구이다. 지진으로 삶의 터전과 가족들을 잃은 이들에게 주거, 식량,교육과 같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여성과 아동 등 기존의 사회적 약자와 재난 이후 등장한 피난민이라는 새로운 사회 집단이 아이티 재건 과정에서 가장 취약한 상황에 노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또한 보다 장기적인 과제는 지방 분권화이다. 지진발생 이전부터 수도 포르토프랭스는 아이티 인구의 3분의 1이 밀집된 포화 상태였다.
포르토프랭스의 하부시설과 생태조건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인구가 20만에서 30만 사이라는 연구 결과를 고려하면, 수용 범위를 10배 이상 초과했다는 의미이다.
아이티 지진을 천재(天災)라기보다는 인재(人災)로 해석해야 할 근거이기도 하다. 피난민의 장기적인 주거지 확보는 지방분권화라는 장기적이고도 포괄적인 틀 안에서 진행되어야만 또 다른 참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티의 지진은 아이티 사회의 굴곡과 식민주의의 기나긴 역사가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되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경험이다. 하지만 지진의 참혹함만큼 재난에 대응하는 아이티 국민들은 강한 생존력과 연대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진 이후 재건 사업은 아이티에게 생존을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이 배제된 정치구조, 자급자족 능력을 박탈하는 신자유주의 개혁, 농촌과 도시의 불균형, 비정부 기구에 의한 국가 경영으로 특징지어지는 기존의 발전 모델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재건 사업이 성공을 거두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티 국민이 변화를 요구하고 변화를 주도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면, 국제사회는 어떠한가? 국제사회는 변화할 의지가 있는가?
국제사회는 아이티와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는 우리가 대답해야 할 차례이다.
아이티 지진과 콜레라 그리고 종교갈등
2011-03-03
조영현 교수 -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2010년 1월 12일에 발생한 아이티 지진은 25만 명 이상의 사상자와 수백만의 이재민을 낳았다.
19세기 서구 열강의 탐욕스런 침탈과 20세기 미국의 군사 개입과 점령이 오늘날 비운의 아이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환경재앙은 21세기에도 아이티는 계속 저주받은 섬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라는 암울한 예언을 확인시켜주는 표지가 되었다. 지진 직후 보건 분야 전문가들은 처참한 지진으로 재앙이 끝나길 바라는 것은 단지 소망일뿐이며, 재앙의 후폭풍이 아이티 주민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같은 해 10월 중순 경 아이티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급속히 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현지 언론보도에 의하면 성탄절까지 12만 명 이상이 감염되었고 2600명이 사망했다.
전염병의 피해는 주로 지진이 발생한 지역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콜레라의 창궐은 지진 피해로 실의에 빠진 주민들에게 두려움과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보건 관련 전문가들은 이번 콜레라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면 감염자가 60만 명, 혹은 그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콜레라에 대한 두려움은 동시에 종교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남부 해안도시 제레미에서는 부두교 사제들이 사악한 마술을 이용해 콜레라를 퍼트린다는 이유로 마녀사냥 식 처형을 당했다.
여사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중들은 부두교 의식을 행하는 사제들을 교수형이나 화형에 처했다. 부두교에 반감을 가진 이들은 전통 칼인 마체테(machete)를 가지고 부두교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중부지역의 플라투에서도 같은 일들이 발생했다. 12월 초에 12명의 부두교 신봉자들이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었고, 성탄절까지 전국적으로 총 45명이 살해되었다.
부두교와 그 종교의식이 콜레라 확산의 원흉으로 몰리고 있다. 지방정부가 나서 콜레라와 부두교 의식이 무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했지만 부두교 추종자들에 대한 종교박해를 막지는 못했다. 부두교 지도자들은 살인에 가담한 사람들과 책임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은 경찰과 정부 공무원들을 비난했다.
종교 갈등은 이미 지난 1월 대지진 참사 직후 재난을 선교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여러 종교단체의 움직임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 환경재앙 이후 전 세계적인 원조의 손길이 이어졌지만 인력과 생필품 지원의 상당부분이 종교단체에 맡겨져 있었다.
식량과 구호물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갈등이 드러났다. 기독교 단체들은 구호 식량과 의약품을 부두교 신도들에게 나눠주지 않아 개종을 유도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구호물품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많은 부두교 신도들이 서둘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기독교 단체들은 모든 지진 피해자들에게 물품을 나누어주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부두교 추종자들이 사악한 길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로 인도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아이티 전문가들은 재난을 종교의 세력 확장과 선교로 이용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종교 갈등이 심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지난 2월과 3월에는 지진 참사로 사망한 사람들에 대한 부두교 종교의식에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 나타나 종교의식을 방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곳으로 돌을 던지거나 그 주변에서 소리를 지르며 의식을 방해했다.
심한 경우엔 부두교 제단이나 의식 장소를 파괴하고 종교 상징물들에 소변을 뿌리기도 했다. 그러자 부두교 최고 지도자 막스 보보리(Max Beauvori)는 기독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국가적 재난 사태 앞에서 이런 갈등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하지 않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지진으로 인한 대참사 이후 아이티에서는 환경재앙을 야기한 것이 부두교 때문이라는 루머가 퍼졌다. 부두교 부적 때문에 목숨을 구했다는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피에르 다비드(Pierre David) 목사처럼 부두교 때문에 대재앙이 닥쳤다고 설교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지진으로 인한 참사가 사악한 신을 믿는 아이티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식민시대 한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1791년 8월 14일 부크만(Boukman) 이라는 흑인 부두교 사제가 아이티 사람들 앞에서 돼지를 제물로 바치고 그 피로 섬의 수호신과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에는 프랑스로부터 자유를 얻게 해주면 200년 동안 섬의 신령을 숭배하고 그에게 봉사할 것 이란 내용이 포함되었다. 며칠 후 이 의식을 시발점으로 대규모 흑인 봉기가 일어났고, 13년 후인 1804년 아이티 흑인들은 중남미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다.
역사상 첫 흑인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 부두교 협정을 기념하기 위해 아이티의 수도엔 돼지 모양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2005년 부두교 추종자은 다시 200년간 계약을 연장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도들은 부두교 때문에 아이티는 ‘사악한 신에게 헌정된 국가’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기독교도들은 미신적 요소를 제거하고 아이티를 깨끗하게 정화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부두교를 미신과 우상의 종교로 파악하는 한 앞으로도 두 세력 간에 충돌은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대지진과 그 재앙 후에 닥친 전염병, 그에 따른 사회적 불안, 그리고 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에 아이티는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최근에 치러진 대선과 부정선거 의혹이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절망에 휩싸인 아이티 사람들 사이에 “우리가 믿을 것은 이제 신 뿐이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지진이나 콜레라의 창궐의 원인을 종교와 연결시키고, 재난을 선교와 종교 세력 확장에 이용하려는 시도는 아이티에 또 다른 재앙을 부를 수 있다.
아이티의 보두교와 정치
심재중 ― 서울대학교 불어권 문화연구소 연구원
아이티 독립 200주년이 되는 해인 2004년 2월 28일에 아이티의 대통령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대통령직에서 쫓겨나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그 직전까지도 수도 포르 토 프랭스의 거리에는 ‘예수, 투생 루베르튀르, 아리스티드: 아이티 민중의 절대 신앙’이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들이 나부꼈다. 플래카드 문구의 제일 앞에 나오는 예수의 존재가 말해 주듯이, 오래 전부터 아이티의 정치 역학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아리스티드는 해방 신학 계열의 가톨릭교회 신부 출신 대통령이었다. 그렇지만 아리스티드는 2003년에 토착 민중 신앙인 보두교(속칭 부두교)를 아이티의 공식 종교로 인정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또한 아이티 독립의 영웅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는 민중의 상상력 속에서 보두 신앙의 최고 정령인 파파 레그바(Papa Legba)와 동일시 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이렇듯 아이티의 현실 속에서 종교와 정치는 참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역학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위 ‘콜럼버스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된 그 관계의 긴 여정을 간략하게나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캉달과 투생 루베르튀르‘아이티’라는 이름은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스파뇰라 섬에 살았던 아라왁 인디언의 말로 ‘산이 많은 땅’을 의미했다.
1804년 1월1일 세계 최초의 흑인 독립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섬의 원래 이름인 아이티를 국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697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식민지 시절, 아이티는 생도맹그(Saint Domingue)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생도맹그는 ‘카리브의 흑진주’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이 카리브 지역의 가장 번성한 식민지였다.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생도맹그는 프랑스 대외 무역의 1/3을 차지했고, 아메리카에서 프랑스가 얻는 수익의 70%를 산출했다.
한 해 평균 22만 톤 규모의 배 1,500척이 설탕, 커피, 인디고, 가죽을 가득 싣고 생도맹그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특히 사탕수수 농장의 엄청난 노동력 수요 때문에 생도맹그는 노예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1785년에서 1789년 사이에 15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수입하였고,1789년 한 해에만도 55,000명을 수입하였다. 물론 그 중 대다수는 제당 공장이 밀집해 있는 북부로 보내졌다.
생도맹그의 흑인 노예는 열악한 노동 환경과 가혹한 처우 때문에 평균 10년 이상을 연명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프리카 선조로 부터 물려받은 정령 숭배 의식, 소위 보두 의식이 그들에게는 정신적인 안식처 역할을 해 주었다.
흑인 노예들을 따라 아프리카의 신들도 아메리카로 이주해 온 셈인데, 거기에 가톨릭적인 요소가 접목되어 만들어진 종교가 바로 보두교이다.
예나 지금이나 보두 의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북을 중심으로 한 음악과 춤, 그리고 신들림의 경험이었다. 또한 보두교 사제는 자연의 이법과 질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춘 치료사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보두 신앙에 기초한 영적‧실천적 능력을 갖춘 노예들이 점차 흑인 공동체의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노예들이 밤중에 모여 춤추는 의식을 금지’한 프랑스 왕의 칙령(1704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두교는 노예제의 억압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래서 탈주 노예를 중심으로 1791년에 시작된 흑인노예 반란에서도 보두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해 8월의 어느 날 밤, 북부의 한 아비타숑(플랜테이션보다 규모가 작은 농장)에 위치한 부아 카이망(Bois Caiman)의 산속에서 보두교 사제인 부크망(Dutty Boukman)을 중심으로 노예들의 반란 결사 의식이 치러졌다. 돼지를 죽여서 그 피를 나누어 마시는 의식으로 그들은 서로간의 유대를 확인하였다.
실제로 그런 의식이 치러졌는지, 그리고 부크망이 그 자리에서 했다는 말(“백인들의 신을 물리치자. 우리의 눈물을 마르게 하고 우리 가슴 속의 자유의 외침에 귀 기울이자.”)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보두신앙이 강력한 동원력을 발휘하였고 노예들 사이의 결집과 유대를 강화시켜 주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보두교는 노예의 공동체 의식과 정체감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보두 신앙은 노예들에게 언젠가는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나 아프리카적인 영성의 세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리고 그런 희망과 열망을 상징하는 최초의 신화적 인물이 바로 탈주 노예 마캉달(Francois Mackandal)이었다.
마캉달은 아프리카 기니아 태생의 노예였는데 사탕수수 압착기에 팔이 끼는 사고로 한쪽 팔을 절단한 불구자였다. 산속으로 달아나서 18년 동안 백인 지주들에 대한 약탈과 살상을 일삼았다.
아이티의 작가 드페스트르(Rene Depestre)는 마캉달을 기리는 시에서, 단신으로 산악을 달리며 농장의 우물에 독을 풀고 사탕수수밭에 불을 지르는 용맹한 모습으로 그를 묘사하였다. 마캉달의 가장 큰 무기는 산천의 초목을 재료로 만들어낸 독약이었고 보두교 사제로서의 신비한 능력이었다.
결국 탈주 노예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지금의 캅아이시엥(Cap-Haitien) 광장에서 처형당하였다. 그렇지만 화형을 당하는 순간에 새가 되어 날아가 영생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캉달은 자유를 위한 투쟁과 반항의 표상으로 아이티 민중들의 마음속에 강렬한 흔적을 남겼고, 지금도 보두교 부적에 등장하는 수호 정령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1791년의 노예 반란에서 시작된 투쟁이 1804년의 독립으로 구체화된 이후에도, 아이티는 공식적으로 여전히 가톨릭 국가였다.
왜냐하면 노예 반란의 동력은 보두교였지만, 현실의 정치 역학 속에서 새롭게 지도자로 부상한 이들은 모두가 물라토이거나 해방노예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프랑스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투생 루베르튀르만 하더라도, 1801년에 노예제를 폐지시킨 장본인이었지만 새로 만든 헌법에서 가톨릭을 유일한 공식 종교로 인정하였다.
보두교가 탈주 노예 공동체들을 중심으로 한 분파주의를 조장해서 중앙권력을 무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반면에 가톨릭은 사회‧국가적 동질성의 확보, 풍속의 순화, 민중들의 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다. 투생이 나폴레옹 군대의 포로가 되어 프랑스의 주(Joux) 감옥에서 숨지자, 투생의 휘하 장군이었던 북부의 장 자크 데살린(Jean Jacques Dessalin, 해방노예 출신으로 프랑스 군대의 장교였다가 반란군에 가담)과 남부의 알렉상드르 페티옹(Alexandre Petion, 물라토로서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제휴하여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런데 독립과 함께 황제에 오른 데살린은 1805년의 제국헌법에서 “어떠한 종교의 우월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명시하였다. 그리고 식민시대 이후 가톨릭교회가 누려왔던 제도상의 여러 가지 권
리와 특권을 박탈해버렸다.
그렇지만 데살린을 제거하고 대통령이 된 페티옹은 1807년 헌법에서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인정하였다.
가톨릭과 보두교
그런데 국제사회는 흑인노예 반란을 통해 수립된 국가를 쉽게 승인해 주지 않았다.
특히 유럽의 열강들은 노예제의 유지에 뜻을 같이 했고, 그들에게 아이티 사례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또한 서구의 시각에서 보면 아이티는 문화적으로도 보두교 같은 미신이 횡행하는 야만적인 국가였다.
신생국 아이티는 독립하자마자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아이티 입장에서는 국제사회로부터 국가 주권을 인정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옛 식민 본국인 프랑스는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옛 식민지 백인들을 위해 아이티는 프랑스에 1억 5천만 프랑을 지불”하라는 칙령(1825년)을 공표하였다. 그것은 아이티 국가 총수입의 10년 치에 상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데살린이 죽은 뒤 북부에 따로 왕국을 건설했던 앙리 크리스토프(Henri Christophe, 그레나다 출신의 해방노예로 호텔 식당의 요리사였다)는 프랑스의 사절을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총살시켜버렸다. 반면에 페티옹의 후임인 부아에(Jean Pierre Boyer) 대통령은 프랑스함대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아이티는 19세기 내내 그 빚을 갚느라 진력이 났고,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국가통합을 이루고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사용해야 할 재원을 독립국으로서의 주권을 ‘사는’ 데 써버림으로써, 국가 전체의 안정이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 200주년을 앞두고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이자까지 계산하여 총 2,100억 달러를 배상‧환불해 달라고 프랑스에 요구하여 국제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도 1860년의 화친조약(콩코르다)을 통하여 국가승인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대신에 아이티는 가톨릭을 국교로 인정하고 교회에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아이티는 명실상부한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국가이기로 말하자면, 이미 오래 전 식민 시절부터 대부분의 아이티인은 가톨릭 신자였다. 다만 준 국가기구이자 공식적인 종교로서의 가톨릭과 민중의 신앙 행위로서의 가톨릭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두 번째 조항에는 노예에 대한 가톨릭 교리 교육과 세례가 흑인 노예를 소유한 모든 이들의 의무로 규정되어 있었다. 식민 본국의 입장에서 그 규정은 아주 중요했다. 노예의 개종이 노예제에 대한 유일한 알리바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자들은 대개 세례의 의무만을 지켰고, 흑인 노예들도 자기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가톨릭 신앙을 실천하였다. 민중은 가톨릭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면서 동시에 보두 신앙도 유지하였다.
민중의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과 보두교의 경계는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다. 보두교 사제조차도 자신의 역할과 가톨릭의 성사 의무 사이에서 갈등을느끼지 않았다.
보두교 속에 아프리카적인 정령 숭배와 가톨릭의 다양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현상을 학자들은 흔히 ‘의도적인 공생’으로 설명하곤 했다. 흑인 노예들의 입장에서 교회와 권력의 눈을 속이기 위한 위장이었다는 해석이다.
그렇지만 민중들이 보두 신앙의 연장선상에서 가톨릭 의례의 효력을 믿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노예들은 세례 성사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심지어 현지 태생의 흑인들은 자신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bosal)을 경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후자들도 서둘러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를 받은 뒤에는 ‘날림 세례’를 받았다는 놀림의 대상이 되곤 했다. 또한 보두교 사제들도 영성체가 자신들의 권능을 강화시켜 주리라고 믿었다. 그 외에도 보두교의 가톨릭적인 요소는 아주 많다.
그런 사정은 최근의 현상인 신교의 확산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 농민들, 하층민들의 경우, 개종은 기독교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보두 정령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방편인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치료가 실패하면 운강 자신이 환자나 그 가족에게 개종을 권유하기도 한다. 또한 유명한 운강의 도움을 받으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그 바람에 재산을 날리고 절망한 사람들도 기독교로 개종한다.
포(hounfo)를 도배하다시피 한 채색 그림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중들은 가톨릭 성인들의 형상을 빌어 보두 정령 로아(loa 또는 lwa)들을 기렸다. 정령들을 모시는 의례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물건들도 먼저 가톨릭 식으로 축성을 받았고, 성수도 사용되었다.
전례력도 유사해서, 크리스마스는 보두교에서도 가장 성대한 의식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또한 보두교 신자들은 노한 정령을 달래기 위해 중세 가톨릭의 고행과 유사한 속죄 행위를 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가톨릭의 의례를 ‘대행’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당지기나 전도사처럼 피상적인 교리 지식을 갖춘 엉터리 사제들이 그들이었다. 가톨릭 영성체나 장례 의식은 운강이나 맘보의 권한 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혼종적 양상 때문에 보두교는 가톨릭과 지배 권력의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 1835년에 만들어져서 1987년 종교의 자유가 인정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던 형법 조항 하나는 “미신적인 의례를 하다가 현행범으로 잡히면 6개월에서 2년까지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런 조항이 그다지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특히 1860년의 화친조약 이후로, 가톨릭 교회는 공식적으로는 보두교를 미신으로 규정하고 배척했지만 민중들의 실제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간간이 미신타파 운동이 벌어지고 1896년에는 캅아이시엥의 주교를 중심으로 ‘반 보두교 연합’이 결성되기도 했지만 (“보두교는 공공의 적이다. 아이티는 아프리카의 주술사들과 춤이 아직도 남아 있는 아메리카의 유일한 나라이고, 아메리카의 수치이다.”) 별 효과는 없었다.
가톨릭교회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은 1940년 무렵의 일이다. 교회는 레스코 정권의 공식적인 지원 하에 국민들에게 반미신서약(“집안의 모든 우상들을 처분하겠다... 아이들도 미신을 믿지 않도록
기르겠다...”)을 강요하였고, 보두교 사당인 운포를 헐고 보두 의식에 사용되는 물건들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에 대한 반발로 농민들이 미사에 불참하고 여론도 부정적으로 돌아서자, 정부는 교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1950년을 전후해서야 보두교는 다시 햇빛 속으로 나올 수 있었다.
뒤발리에와 아리스티드
보두교는 일반적으로 ‘부두교’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어 왔다.
미국점령기에 허리우드 영화를 통해 만들어진 ‘부두교’의 이미지는 악마적인 주술과 잔혹하고 음란한 희생제의, 식인(食人) 의식 등을 특징으로 하는 야만적인 원시 신앙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티를 찾는 미국 관광객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보두 의식이었다.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보두교의 사당인 운포는 쇼가 벌어지는 무대로 전락하기도 했다.
19세기말에 유럽인들이 쓴 책들 중에도 보두교의 부정적인 이미지 형성에 기여한 것들이 더러 있었다. 보두 의식과 관련하여 영아 살해나 식인 풍속을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는 믿기 어렵지만, 하층 민중들에게는 아이들을 잡아먹는 사악한 주술사에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학자들이 ‘부두’ 대신에 ‘보두’(아프리카 다호메 지방의 부족 언어로 ‘정령’을 의미하는 단어였던 ‘보둔’에서 유래한 이름)라는 명칭을 쓰는 것도 그래서이다. ‘부두’라는 명칭이 실상을 왜곡하는 과장된 이미지를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어쨌든 보두교가 그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털어버리고 아이티 민족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1930년대의 일이다.
장 프리스 마르스(Jean Price Mars)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종의 흑인 민족주의, 소위 ‘토착주의’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의사이자 민속학자였던 프랑수아 뒤발리에(Francois Duvalier, 일명 파파독)도 미신타파 운동에 반대하고 보두교를 민족 문화의 일부로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일련의 글들을 발표하였다.
1956년에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출마했을때, 가톨릭교회가 반공개적으로 그에 대한 불신을 표명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30년에 걸친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 체제 내내 교회와 국가는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요컨대 가톨릭에 대한 뒤발리에의 정책은 현지 출신의 주교단을 구성하여 교회를 국가 권력 아래 두려는 시도, 소위 ‘가톨릭교회의 토착화’로 요약될 수 있다.
‘민족 교회’, ‘토착화’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정치권력에 복종시킨 다음, 뒤발리에는 국가를 하나의 인종과 그 인종을 대표하는 지도자에게 종속시키는 히틀러식 전체주의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는 ‘아이티는 흑인 국가’라고 선언하였고, 농촌의 보두교 사제들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조직하여 권력의 대리인으로 사용하였다. 일종의 친위 민병대 조직인‘국가보위대’, 그중에서도 특히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가6) 바로 그들이다.
그런 점에서 뒤발리에 체제는 ‘악마론적 상상력의 제도화’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뒤발리에 체제의 흑인주의는 대다수 흑인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몇몇 악마적인 세력들의 탓으로 돌리는 비이성적·
비합리적 현실 인식을 일반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아이티의 전 역사를 흑인 종족의 구원의 역사로 신비화하면서 동시에 그 구원을 한 흑인 지도자의 형상 위에 고정시키는 전략―그것이 바로 뒤발리에 체제가 기층의민중 문화, 특히 보두교를 활용하여 구사한 전략이었다.
1986년에 뒤발리에 일가의 독재 체제가 무너지고 1990년에는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 Bertrand Aristide)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티의 사회·정치적 변화를 주도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아이티 가톨릭 교회 내의 ‘티 레글리즈’(Ti Legliz. 작은 교회) 운동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교회’ 운동은 60년대 후반부터 라틴아메리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해방신학에 기초하여 몇몇 진보적 사제들이 펼친 일종의 ‘기초공동체’ 운동이었다.
1980년에 빈민교회 운동이 시작되고, 1983년에 교황이 아이티를 방문하여 “이곳에서 무엇인가가 변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도 그러한 변화의 또 다른 국면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뒤발리에 체제의 폭력과 에이즈보다 더 위험한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겠다고 서원을 한 빈민 출신의 흑인 사제 아리스티드가 등장하였다.
아리스티드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권력자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수입원으로 국가를 독점하려 한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아이티는 전제적이고 약탈적인 국가였다. 그런데 역사상 처음으로 기층 민
중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바로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아리스티드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티드는 1990년 12월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1991년 9월의 쿠데타로 미국에 망명하였다. 1994년에 클린턴 정부의 도움으로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그 후 ‘판미 라발라스’(Fanmi Lavalas) 당을 만들어 2000년 의회선거에서 다수당이 되었지만, 부정선거 시비로 정치적 곤경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해에 두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사임을 요구하는 반대세력의 요구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대통령령으로 2003년 4월에 보두교를 아이티의 공식 종교로 인정한 것도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조치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기층 민중의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하여 자신의 지지 기반을 넓히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두교의 공식 종교 인정은 개신교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개신교는 침례교, 오순절교를 중심으로 나날이 교세를 확장해 가는 중에 있다.
결국 2004년의 정치적 혼란을 구실로 미국이 개입하고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외국으로 망명한 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포르 토 프랭스의 독립기념박물관에 난입하여 보두교와 관련된 미술품들을 불태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아리스티드의 ‘포퓰리즘’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가톨릭의 헤게모니 상실과 일시적인 국가권력의 약화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예컨대 1990년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아리스티드는 자신의 출마를 신과 민중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고 규정하였다.
신과 민중, 그리고 자기 자신 사이에 등가관계를 세우면서, 독재자를 처벌한다는 사명을 중심으로 민중의 정치적 상상력을 종교적으로 재구성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를 해방신학자로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신=민중=아리스티드’라는 등식을 민중들의 뇌리에 각인시킴으로써 그는 ‘현실을 신학화’하는 데 성공했던 셈인데,
이는 ‘신학을 정치화’하고자 했던 해방신학의 입장과는 오히려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2004년의 아이티 독립 200주년이 갖는 상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좌파 성향의 대표적인 중남미 정치 지도자들인 카스트로, 차베스, 룰라 등이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음미해 볼만한
일이다.
210일의 썸머: 아이티공화국에 대한 단상
최우석 - 서울대학교
아이티로 떠나며
필자는 2011년 8월부터 2012년 3월까지 210일 간에 걸쳐 아이티(Haiti)에 머물렀다. UN군의 일원으로 아이티에서의 평화유지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아이티를 이야기하면 많은 이들이 정보 기술을 뜻하는 IT로 알아 듣기 십상이었다. 이제 오해를 줄이는 요령으로, ‘아이티’ 뒤에 ‘공화국’을 꼭 붙여서 ‘아이티공화국’이라 말하곤 한다.
일부에게 잘 알려진 바처럼 공화국으로서 아이티의 역사는 짧지 않으며, 그 긴 도정은 놀라우리만치 영광스러웠다. 프랑스가 거칠게 착취하던 척박한 식민지에 불과했던 불모의 땅에서 기성의 세계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에 대한 갈 데 없는 분노가 그저 폭발하는 소요에 그치지 않았으며, 걸출한 지도자의 도움으로 정치하게 고무된 열망과 희망에 의해 창출된 혁명이었다. 공화국 아이티는 그렇게 탄생했다.
1804년. 프랑스 시민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외치며 프랑스 공화국을 이룩한 지 겨우 12년 지났을 뿐이다. 유럽에서는 이제 겨우 근대성이라는 것이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대부분 국가의 전제정은 여전히 공고했다.
이때 아이티의 흑인들은 흑인 최초의 식민지해방투쟁을 이끌었으며, 성공적인 노예혁명을 통해 공화국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이 이루어낸 공화국의 양상은 공화주의의 이념에 그 어떤 경우보다 근접해 있었다.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공화국이라면 어느 누구도 노예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서구의 많은 공화주의자들은 노예제의 실체에 대해 침묵하거나 말을 돌렸다.
그 당시 노예제는 근대의 핵심적인 근거인 소유의 규칙을 지탱하며, 제도화된 인종적 위계를 수호하는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성립한 아이티공화국은 자폐적이던 공화국과 근대의 자기규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확대시키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유럽에게 이와 같은 쾌거는 그들이 갖는 물질적 제도적 실체의 모순을 극명히 드러내는 치부에 불과했다. 서구 중심의 역사에서 아이티 혁명은 함구된 채 마치 없는 존재가 되거나, 혹은 격하된 채 동시대 여러 혁명들의 아류가 되어야만 했다.
2011년 7월, 인천에 위치한 국제평화지원단에서는 아이티 재건 지원단 4진 파병 교육이 한창이었다. 초청된 연사는 1804년 혁명의 200년 후 아이티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티가 한국 전쟁 당시 UN의 일원으로 한국에게 상당액을 원조해준 나라임을 강조하며, 이제는 우리가 폐허에서 일어서는 비결을 전수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거듭하였다. 아이티는 한국에게 시혜적인 우월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아이티를 대하는 세계의 일반적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몇 편의 책을 통해 진흙 같은 혼란과 교란 속에서 진주와 같이 빛나는 아이티를 만난 나의 귀에 연사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서구의 폭력적 무관심 가운데 공화국이라는 정체가 아이티 에서 어떤 자율성을 갖고 끝없이 변모하여 새로운 양상에 이르렀을지, 그에 대한 상상으로 가슴이 뛸 뿐이었다.
아이티공화국과 아이티 사람들
비행기에서 발을 내딛는 바로 그 순간 팍팍한 열기가 엄습하며 온 몸을 감싼다. 의외로 버틸만하다. 눈 앞에 펼쳐진 허허벌판. 하늘 높게 솟은 야자수. 그리고 허허벌판의 끝에 들어선 난민 캠프도 눈에 들어온다.
지진이 난 지도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데, 도처의 앙상한 잔해들은그나마 정돈된 것인지, 여전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도시 곳곳의 을씨년스러운 폐허 위에 잡초마냥 살아가는 아이티인들의 생존력 혹은 생활력은 볼 때마다 경이로웠다.
그들은 마치 땅에 얹힌 채 사는 사람들 같다. 아이티 사람들뿐 아니라 아이티의 많은 것들이 그 땅에 뿌리 하나 내리지 못하고 그저 얼기설기한 가건물 마냥 어색하게 대지에 놓여 있다는 인상이 강한 것이다.
모든 것이 뿌리 뽑힌 지진 이후의 풍경을 지켜보았기에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그들의 삶과, 민둥산 정상까지 들어찬 집들부터 강에 강물 대신 가득 들어찬 쓰레기에 이르기까지, 박토 위의 모든 것들은, 또 무엇인가 이들을 쓸어 간다면, 그저 무력하고 망망하게 쓸려갈 것만 같다.
아이티 민중들이 그들이 지금 발 디딘 땅마저 그 의미를 논하기 쉽지 않을 텐데, 정부를 비롯한 상부 구조의 기구들이 그 땅 위에 금을 긋고, 그들과 땅에 대한 행정과 관리를 논한들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지 의문이다.
아이티 정부와 아이티 민중들 사이의 간극은 크다. 이는 그들이 먹고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아이티 인구 중 몇몇은 자기 가게를 갖고 있지만 대다수가 실직자들이다. 운이 좋으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
도시의 경우에는 공사 현장에 일용직으로 투입되기도 한다. 도로 옆으로 쭉 늘어선 가판과 노점들에서 직접 구한 과일이나 소채류를 팔기도 한다.
또 도로 곳곳에 돌아다니며 물과 음료수를 팔기도 한다. 아이티의 교통상황은 제대로 된 신호등도 잘 없을 정도로 워낙 열악하기 때문에 정체가 일상인데, 도로에 갇힌 운전자들이 이들의 주된 고객이다.
상황이 좀 나은 이들은 자가용을 개조하고 장식하여 탑탑(tap tap)이라는 교통수단을 운영하기도 한다. 한국으로 치면 시내, 시외 버스 기능을 하는 교통 수단이다. 탑탑은 낮이든 밤이든 사람들도 가득 붐빈다. 그들은 어디에서 어디론가 분주히 다닌다. 탑탑을 왜 저렇게 열심히 타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지 항상 의아하다.
국가의 공식 경제라는 것이 분명 있기야 하지만 쉬이 체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혹 공단이나 공공사업 현장을 볼 수는 있다. 주민들이 그와 관계 맺는 방식은 조금 독특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의 한 정유 시설 앞에서는 국가 주도의 공공 사업으로 도로 건설이 ‘오랫동안’ 한창이었다. 흥미롭게도 지역주민들은 되려 도로 건설을 반대하고 나섰고, 밤이 되면 건설된 부분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 이유인 즉, 만성적인 도로 정체로 정유사의 수송차가 멈추어서면 주변 주민들이 몰려나와 기름을 조금씩 훔쳐서 되파는 것이 그들의 생계 수단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쉬이 생각하는 공공성이라는 것, 그리고그 성격을 표방하며 내세우는 국가의 행정이라는 것은 아이티인의 전유적삶 앞에서 모호하고 확정 불가능한 것으로 녹아 내려 버린다.
아이티 정부와 그 국민들 사이의 괴리는 아이티 정부의 무능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아직도 건설 중인 그 도로를 따라 수도에서 40km 정도 서쪽으로 가면 한국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레오간(Leogane)이라는 농촌 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지진 당시 진앙이 위치했던 곳으로 지진으로 지역의 85% 가량이 파괴되어, 이곳 주민들은 수도에 비해 경제적으로 더욱 열악한 처지다. 농촌이지만 기반 시설이 다 파괴되어 농사 짓는 경우
가 흔치 않다.
부대 담 너머로 마을을 보고 있자면, 나무 그늘 아래 하루종일 앉아 쉬는 남성들이 많이 보인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이 없다고 한다. 주로 여성들이 생계를 책임진다. 거리에서 막 딴 듯한 망고를 비롯한
열대과일 몇 개를 펼쳐놓고 파는 정도이다.
지진 이후 아이티 정부는 레오간과 같은 농촌 지역을 전략적으로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천명했다. 밀려오는 수입산 농산물과 빈번한 자연 재해 등으로 철저히 붕괴되어 버린 아이티의 농촌과 농업을 되살리겠다는 취지였다.
시간이 흐른 지금 관개 및 기반 시설조차 개선된 바 없이 열악했던 그대로다. 개선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또한 아이티 정부의 몇 안될 개발정책 마저 국민들의 의지에 반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이티 북부 카라콜(Caracol)에서는 미국정부와 미주개발은행의 지원, 그리고 한 한국 의류 업체의 투자를 유치해 공단 조성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 사업은 지진 재건 사업의 가장 가시적인 성과라고 평가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아이티 현지에서는 온갖 잡음과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장소 선정부터가 비판의 대상이다.
카라콜은 지진 피해가 거의 없던 곳이고, 주민들은 조용히 농사를 짓고 있었다. 국제 사회로부터 답지한 지원금 중 엄청난 액수가 도움이 절실한 곳이 아닌 이런 평화로운 농촌 지역에 투입되었고, 주민들은 자신들이 일군 터전을 영문도 모르고 빼앗겨 버렸다. 열악한 노동 환경과 파괴될 자연 환경에 대한 문제제기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도시의 시장조차 이 사업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 감감하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노동자가 되어서도 과거의 목소리를 결코 잊지 않을것이라고 말한다. 아이티의 어느 곳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이곳도 역시 끝없는 소작쟁의와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국군 부대에 배정된 레오간 출신 현지 통역인 필리프는 국가 재건의 모든 역량을 수도 재건을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고, 한국의 공병부대도 차라리 수도인 포르토프랭스로 가야 한다고 습관처럼 말하고는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과연 레오간과 같이 수도 아닌 곳에 사는 이들에게 국가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수도 사정이 딱히 나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 도시에는 30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피난민 캠프에서 처절한 삶을, 여전히 살아가는 중이다. 삶이 개선되리라는 전망은 희박하다. 그들이 그런 삶에 익숙해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다행이며, 한편으로는 비극이고, 한 마디로 놀라운 기적이다.
수도의 피난민들이 기적을 행하는 동안 수도 거리 곳곳에 공허하게 나부끼는 마르텔리 현 아이티 대통령의 플랑만이 어딘가 존재할 국가 기구를 드러내고 있다.
다시 아이티를 떠나며
귀국 비행기 안에서 7개월 전 국제평화지원단에서 했던 상상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지난 기대가 결코 헛된 것은 아니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국토 전반의 처참한 풍경만 보자면 아이티공화국은 실패국가가 맞다. 그러나 실패국가라는 규정의 낙인만으로는 이 땅과 이 사람들을 설명할 수 없으리란 점 또한 명백하다. 이제 이곳의 시공간과 사람들에게
국민국가라는 근대적인 경계는 의미 없어 보인다.
아이티공화국이라는 상부의 구조가 민중 자신들의 욕망과 어긋나기 시작하여 이름만 너덜너덜 남은 껍데기가 되어갈 때, 그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를 극복하며 자구의 삶을 개척해 온 것이다.
무정부의 저 혼란스러운 상황과 최저의 생계속에서도 아이티인들의 얼굴에 활력 찬 웃음이 가득 차 있다.
이는 한 국가의 실패가 아이티 민중들의 실패가 아니므로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행복이란 불가능할 것 같은 그곳에서 싹트는 아이티 민중들의 웃음을 보며 무엇이 진정으로 튼튼한 행복일지를 다시금 생각한다.
아이티의 혁명적 전통의 정통성을 판단하는 최종 심급은 오직 민중이다. 민중의 활력이 그들이 보다 행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가시적으로 구성해내리라
지금 이순간에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없이 강렬한 여름 햇살과 주렁주렁 열린 초록빛 망고에 대한 그리움은 이 믿음에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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