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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탁스 (DOTAX) 원문보기 글쓴이: 도삼
이창호 14세 시절
신산(神算) 이창호 九단의 유년기 시절부터 세계최고가 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꽤 글이 긴데 읽고 있으면 마치 무협소설을 읽는듯한 재미가 있네요.
바둑을 잘 모르셔도 읽어보시면 꽤 재밌으실 겁니다.
그럼 즐감하세요~
이창호 이야기 (1)‥‥‥‥‥‥‥‥‥‥‥‥‥‥‥‥‥‥‥‥‥‥ 2001. 6. 12. 火
이창호 이야기 (6) ‥‥‥‥‥‥‥‥‥‥‥‥‥‥‥‥‥‥‥‥‥‥ 2001. 8. 1. 水
<비행기가 싫은 이유>
이 학교는 명문대학의 부설학교답게 교육이 엄했다. 바둑이 목표인 창호라 하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나가야했다. 창호는 곧 한국기원 연구생에도 적을 올렸다. 연구생 5급을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종로의 한국기원에 나갔다. 이때가 오후4시. 이때부터 연구생들과 대국을 하고 7시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84년이라면 조훈현 9단이 두번째로 '전관왕(全冠王)'의 위업을 달성한 그 다음해였다. 조 9단은 어쩌다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 창호를 불러 그날 둔 대국을 복기하도록 시켰다. 놀랍게도 창호는 가끔 복기를 틀렸다. 그 실력에 복기가 틀리는 것을 曺 9단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의 원생 시절 순발력과 기억력이 뛰어난 조훈현은 3판의 대국을 동시에 기록한 일도 있었다. (曺 9단은 또 어린 시절 바둑공부 대신 만화를 보고 놀다가 선생이 오늘 둔 바둑을 복기해보라고 하면 두지도 않은 바둑을 즉석에서 만들어낼 정도로 순발력을 갖고 있었다)
창호가 복기를 잘못한 것은 타고난 수줍음과 '겁'떄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낯선 곳, 낯선 환경에 대한 어색함을 창호는 못견뎌했고 그래서 성장한 뒤에도 낯선 곳에만 가면 진땀을 흘리곤 했다. 창호가 비행기 타기를 싫어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행기는 낯설고 위험한 존재이기에 창호와는 애당초 궁합이 맞을 리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창호는 해외에 나가면 배탈부터 났다. 처음엔 음식 탓이려니 했다. 과보호를 받고 자란 소년들은 편식도 많으니까 외국에 오면 배탈이 나는 것이라고 나는 지레 짐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창호는 음식이라면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었다. 집안 어른들이 저건 먹지마라, 이건 몸에 좋으니 많이 먹어라 하면 그냥 말없이 따라주곤 했지만 스스로 음식을 가린 적은 없었다.
해외에서의 배탈은 순 '신경성'이었다. 이렇듯 수줍고 내성적이며 적응이 더딘 소년이 속으로는 산(山)을 움직일 정도의 승부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전주에선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을 다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는 꽤 많은 것을 혼자 해야했다. 걱정이 되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매주 교대로 올라왔다. 선생님 집에서 잠도 함께 잤다. 창호는 지금도 두분의 사랑에 대해서는 미소지으며 이야기하곤 한다. 어머니에 대해선 큰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과보호'라곤 하지만 어린 시절엔 역시 몸이 자주 부딪혀야 정도 깊어지는 것일까.
<복기가 틀리는 천재>
창호는 11월에 입단대회에 나갔다가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열심히 공부했으나 실력은 아직 크게 모자랐다. 그날 창호는 집 근처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혼자 눈물을 흘렸다. 한국기원 기사실에도 창호의 탈락 소식은 전해졌다. 창호의 재능에 반신반의하고 있던 기사들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신동이라더니 진도가 느리네. 하긴 전에도 천재라는 애들이 많았지."
"아직 아홉살이야."
"조훈현은 아홉살 때 입단했잖아."
"그때와 지금이 같은가. 하긴 그애는 너무 뚱뚱하긴 하더라. 눈도 조는 것 같고."
서봉수 9단만은 다른 소리를 했다. 거리의 기원에서 뒤늦게 바둑을 배워 18살에 겨우 프로가 됐으면서도 조훈현과 3백번 싸워 1백번을 이긴 서봉수. 몸싸움에 능한, 낭인 특유의 독특한 실전감각을 체득하고 있는 이사람은 어느날 연구생실에서 창호가 바둑두는 것을 멍하니 구경하다가 소리나게 무릎을 쳤다. 창호가 떠난 뒤 그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 친구가 끝내기를 하는데 한집 이득보는 수순이 기가 막히네. 대단한 재주야."
사람들은 초반이나 중반의 감각을 귀하게 치는데 서봉수는 한집 버는 수순에 감탄하고 있었다. 독설가 기질의 서 9단은 평소 "한집은 하늘이요, 두집은 땅."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래서 한집에 그렇게 감동하느냐고 반문하자
"그림 잘 그리면 (포석 잘 하면) 뭐하나요. 그런 수가 진짜 재능이지요. 9단의 수였어요. 지금은 약하지만 다른 수들도 곧 9단이 된다는 의미지요."라고 말했다.
서봉수는 어떤 의미에서 이창호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즉 이창호를 너무 높게 평가한 탓에 서봉수는 이창호에게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쉽게 무너지고 만다.
<이창호를 알아본 서봉수>
그날 눈물을 흘린 뒤로 창호는 계획을 세웠다. 연구생끼리 리그를 벌여 승률 70%를 넘기면 급이 올라가로 30%면 떨어진다. 창호는 석달에 한급씩 올린다는 목표를 정하고 공부시간을 늘렸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잠잘 때에도 미안하지만 새벽 한두시까지 어김없이 공부를 했다. 선생님 집의 서가에는 무수한 책이 있었고 그곳이 창호의 보물창고였다.
85년 가을, 창호는 연구생 중 가장 먼저 1급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11월이 되자 입단대회에 나갔다. 12명이 풀리그로 겨루는 본선.
첫날 긴장한 가운데 전력을 기울였으나 성적은 3전 3패였다. 이튿날은 2연패.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입단을 고대하는 전주의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라서 또 울었습니다." (이창호)
선생님 앞에서 복기를 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었고 선생님의 질문에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모기소리처럼 작아진 목소리도 이젠 아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손가락과 바둑돌로만 의사를 전달했다. (훗날 조훈현 9단과 창호는 도전기를 치른 뒤에도 손으로만 복기하는 것이 습관이 된다. 패배한 조 9단이 입을 열어 계속 질문하는데 승리한 이창호가 진땀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바람에 선생님에게 너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창호는 자기 방에 들어가 선생님이 지적한 패착들을 집요하게 살폈다.
"몰라서 실수한 수들은 별로 느낌이 없었습니다. 경솔함 때문에, 그러니까 손이 불쑥 나가는 바람에 빚어진 실수들 때문에 거듭 후회하고 자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창호)
입단대회에서 창호는 이 5연패 이후 6연승을 거둔다. 그냥 6연승이 아니라 5연패 후 6연승이란 점이 신선했다. 뭔가를 새롭게 터득해서 갑자기 실력이 늘었을리는 없다. 다만 포기하지 않고 거듭 반성하며 끝까지 최선을 다한 끝에 얻은 승리였다. 말없고 뚱뚱하고 느린 창호에게 '뒷심좋은 아이'라는 이미지가 추가되었다. 번쩍이는 천재는 아니지만 만만치않은 구석이 있다고 다시보게 되었던 것이다.
<뒷심좋은 아이>
창호는 마치 시계추처럼 정해진 코스를 오갔다. 발자욱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 9단의 부인 정미화(鄭美和)씨가 거듭 강조하듯 이렇게 조용한 아이는 세상에 다시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이층에서 내려왔다가 고개를 숙이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창호는 타고난 모범생이었고 타고난 수도승이었다. 그래도 자정이 넘어 사위가 고요해지면 창호의 방에서는 어김없이 바둑돌 놓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곤 했다. 다시 1년이 지나 이듬해 8월이 됐다.
한국기원에서 새로운 제도의 입단대회가 시작됐다. 지금까지는 일반 강자들도 참여했지만 한국기원은 바둑계의 백년대계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18세이하의 한국기원 연구생만 입단대회에 출전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꿨다. (이 제도는 기회균등을 주장하는 여론에 밀려 입단대회는 3년 후 일반인에게도 다시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연구생 중에서 가장 세다는 평가였기에 창호의 입단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어린 창호는 근심속에서 대회를 맞이했다. 낙관(樂觀)보다는 비관(悲觀)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그의 천성이었다. 창호는 또다시 첫날 두판을 내리 졌다.
그림자처럼 대회장 주위를 맴돌던 창호의 아버지가 창호에게 다가와 "져도 괜찮다. 기회는 다음에도 있다."고 위로했다. 창호는 비감한 심정이 되어 속으로 "다음엔 기회가 없다."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아버지의 위로에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창호는 아버지를 보면 편안함이랄까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창호는 6연승을 거둬 6승 2패로 1위를 한다. 5승 3패로 2위를 한 김원(현 프로 6단)과 함께 드디어 프로의 문턱을 넘은 것이다. 만 11세 때였고 한국에선 조훈현 9단 다음의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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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7) ‥‥‥‥‥‥‥‥‥‥‥‥‥‥‥‥‥‥‥‥‥‥ 2001. 8. 7. 火
<프로입단 - 첫 엘리트 코스>
창호에게 바둑을 가르쳤고 그를 데리고 다니며 바둑두는 모습을 보는 것을 만년의 낙으로 삼았던 창호의 할아버지는 병상에서 창호의 프로입단 소식을 들었다. 그는 창호의 선생님인 조훈현 9단이 창호와 대국을 통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 본래 일본식의 내제자란 그런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 불안해서 견딜 수 없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울에 오면 창호를 데리고 나와 전영선 7단에게 지도대국을 받게 했다. 일종의 비밀 과외수업인 셈인데 아무튼 그같은 지극정성을 통해 창호의 할아버지는 소망을 이뤘다.
그렇게해서 한국땅에선 엘리트코스를 밟은 첫 사관생도가 탄생하게 됐다. 한국의 프로기사들은 대개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프로기사로서는 이창호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입단이 확정되자 창호는 전주로 내려가 제일 먼저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는 폐암이었다. 창호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고 말한다. 그해 10월에 수술을 했고 11월에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운명 직전 그는 서울에서 시합중이던 창호를 애타게 찾았다고 한다. 아들에게는 "창호가 세계제일이 되도록 뒷바라지를 잘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창호의 아버지 이재룡씨는 3년뒤 창호가 TV바둑에서 첫 우승을 했을 때 창호에게 이 유언을 전해주었다.
창호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할아버지와 이렇게 헤어졌다.
<80년대 바둑계 흐름>
창호가 참여한 86년 무렵의 프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한국바둑의 역사를 얘기하자. 일본 기타니(木谷) 도장 출신의 조남철 9단이 한국에 일본식 현대바둑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것은 1945년 무렵이다. 그 뒤를 역시 기타니 도장에서 공부한 김인 9단이 이어받아 60년대 말까지 일인자로 군림했다. 일본기원 5단이던 조훈현이 72년 군복무를 위해 귀국하면서 한국바둑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제대로 공부한 진짜 무서운 실력자가 돌아왔다고 떠들썩했다.
이보다 먼저 조훈현과 동갑인 서봉수가 프로가 되자마자 도전자가 되더니 내친 김에 명인 타이틀을 따내는 유명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 두사람이 이후 15년간을 싸운다. 조훈현은 1인자, 서봉수는 2인자. 두사람은 끝없이 도전기를 벌였다. 이른바 '曺 - 徐 시대'인데 바둑잡지같은데서조차 "똑같은 주인공의 똑같은 연속극"이라며 지루함을 숨기지 않았다.
오랜 독재정치에 염증을 내는 사회분위기 탓인지 정상에 오래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악한에 비유되기도 했다. 그런 속에서도 曺 9단은 3번이나 '전타이틀획득'의 업적을 달성했으며 기술적인측면에서도 한국바둑의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삭막하던 曺 - 徐 시대>
徐 9단은 부족한 실력을 타고난 근성과 실전능력으로 보충하며 끈덕지게 덤볐다. 만리장성 너머 멀리 시베리아까지 쫓겨 갔다가도 반드시 돌아와 조 9단의 타이틀을 뺏어내곤 했다. 훗날 생명력이 강한 한국식의 바둑을 미(美)를 중시하는 일본스타일과 견주어 '한국류' 또는 '잡초류'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서 9단은 그 원조 격인 셈이다. 일본유학을 거치지 않은 서봉수의 이름 앞에는 '순국산'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인기도 물론 높았다.
'도전5강'이라 불리는 집단이 있었다. 5명의 젊은 강자들인데 처음엔 '신흥5강'이란 이름이었으나 부디 曺 - 徐에 도전해서 타이틀을 따내라는 팬들의 염원 때문에 곧 도전5강으로 불리게 됐다.
그러나 이들은 번번히 서봉수의 벽에 가로막혔고 간신히 서봉수를 돌파해도 조훈현만은 단 한번도 꺾지 못했다.
프로들은 점차 曺 - 徐의 대국을 경원했다. 바둑의 명소였던 운당여관에서 도전기를 하는데 프로기사가 왼종일 단 한명도 찾아오지 않는 일도 있었다. 여러개의 방이 가득차서 대국이 끝난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밤샘을 하곤 하던 김인시대에 비할 때 훨씬 삭막한 풍경이었다.
84년에 유창혁이란 18세의 청년이 프로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서봉수보다는 좀더 이른 나이에 바둑을 배웠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전국 아마선수권전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그는 집안형편이 어려워 3년정도 바둑을 중단했다가 뒤늦게 프로가 됐지만 여름햇살처럼 밝고 강렬한 공격바둑으로 즉각 주목을 받았다.
유창혁은 충암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이 학교는 바둑 강자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마음놓고 바둑을 둘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어 바둑영재들이 몰려들었고 이미 많은 프로기사를 배출하고 있었다.
<충암과 유창혁과의 만남>
프로가 된 창호는 학교를 충암초등학교로 옮기게 된다. 이때부터는 시합때문에 학교를 거의 나가지 못했고 대신 충암연구회를 통해 유창혁, 양재호 등 까마득한 학교 선배들을 자주 만나게 됐다. 유창혁은 창호의 9년 선배였다.
프로가 되어 첫 시합을 가졌다. 상대는 한국 최초의 여류기사인 조영숙 3단. 그판은 이겼으나 그다음 판은 졌다. 이때부터 3번 두면 한번 정도 졌다. 프로가 됐으나 창호의 일상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바둑으로 해가 뜨고 바둑으로 해가 졌다. 변한 것이 하나 있었다. 패배의 아픔이 연구생 시절보다 몇배나 커졌다.
창호의 무표정하고 멍한 모습은 바둑동네의 화제였다. 곧 '돌부처'란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달리 이무렵의 창호는 어느 때보다 많은 괴로움을 느꼈고 아무도 없을 때는 눈물도 종종 흘렸다고 한다. 패배도 패배지만 이 소년은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맹렬히 집착했고 종종 용납하기 어려운 분노마저 느끼고 있었다.
"실력이 모자라서 실수한 것은 화가 나지 않아요. 손이 불쑥 나가서 실수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 후회와 자책떄문에 괴로워하곤 했지요." (이창호)
- 이 9단같은 신중한 사람도 손이 불쑥 나가는 경우가 있나요.
"선입견 탓이지요. 간단히 생각하고는 경솔하게도 손이 불쑥 나갑니다."
<실수없는 바둑을 위하여>
신중의 대명사인 이창호가 경솔 운운할 때는 문득 혼돈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창호는 언제나 실수에 대해 말한다. 언젠가 '바둑으로 이루고 싶은 최종적인 경지'에 대해 물었을 때도 그는 "실수없는 바둑을 한판이라도 두고싶다."고 했다.
도공은 훌륭한 도자기를 굽고 싶어하고 화가는 훌륭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한다. 장인(匠人)이라면 누구나 명품을 원하는 법이다. 이것은 프로기사도 비슷할 것이다. 창호는 그러나 자신의 바둑판 위에서 멋진 수를 찾기 보다는 실수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 그는 더욱 신중해졌고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창호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실수에 매달렸다. 그는 매일 밤 자신의 바둑을 성실하게 복기했다. 진 바둑은 패배가 납득될 때까지 계속했다. 실수를 찾아낸 뒤 이런 수를 다시는 두지 말 것을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 다음엔 이기는 길을 찾아나섰다. 미세한 바둑은 잔끝내기까지 마쳐 결과를 확인했다.
많은 실수들을 검증하면서 창호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바둑이란 실수로 이기고 실수로 진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됐다.
"바둑은 실수를 덜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가치관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지극히 실전적이고 명맥한, 어찌보면 다른 어느 것보다 현실적인 가치관이었다. 보통은 이런 인식에 도달했더라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모험을 줄이는 등의 해결책을 실행하지는 못하는게 사람이다. 뛰어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뛰어난 사람일수록 평범보다는 한계에 도전하는 법이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즐기는 법이다. 바둑의 경우 이번엔 실패하더라도 다음 판이 있으므로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모험의 가치는 충분하다. 왠만한 기재(棋才)라면 그걸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선생님들한테 못이 막히도록 듣는 얘기 아닌가.
하지만 창호는 달랐다. 11살의 창호는 실수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강인하게 실천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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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8) ‥‥‥‥‥‥‥‥‥‥‥‥‥‥‥‥‥‥‥‥‥‥ 2001. 8. 14. 火
<100점짜리 대신 80점짜리를 둔다>
창호의 바둑은 이렇게해서 이주 일찍부터 하나의 스타일을 형성하게 됐다. 처음엔 상대가 빨리 둔다면 속기도 마다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점차 모든 대국에서 제한시간을 다 쓰게 됐다. 모르는 길은 실수의 위험성이 높으므로 우선은 아는 길로 다녔다. 변화를 억제하고 견실함과 두터움을 기본으로 하여 승부를 어떡하든 장기전으로 이끌려 애썼다. 100점짜리 수를 찾기 어려우면 80점이나 70점짜리 수로 참았다. 0점의 위험이 있는 수는 아무리 근사한 유혹을 받아도 채택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의지일까, 성격일까. 이창호의 경우 이마에 핏줄을 세우는 의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아득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유전자의 무한한 파워가 공상과학의 세계처럼 다가온다.
유창혁 9단이나 조훈현 9단은 모험심이 많은 성격이어서 등산 할 때도 평탄한 길보다는 바위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바둑을 둘 때도 거친 변화를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언제나 그 장면의 최선, 즉 100점짜리를 찾기위해 전력을 기울이며 그 바람에 0점짜리를 둔 적도 없지만 자신에게 100점자리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포기한 적이 없다.
조훈현은 그게 바둑이라고 믿었다. 특히 소년들의 경우는 기세를 중히 여기고 승부를 떠나 용감하게 싸울줄 알아야 장래성이 있다고 믿어왔다. 제자에게도 그런 방향으로 가르쳐왔다. 하지만 창호는 전혀 다른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전통적인 바둑관에 따르면 창호의 방식은 정도에서 어긋난듯 보였다. 하지만 조훈현조차 그건 아니라며 말릴 수 없었다. 수도승같이 침묵하는 창호의 등뒤로 얼핏 자신도 모르는 딴 세계가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니 창호라는 아이가 강물처럼 어디론가 흐르게 놔둘 수 밖에 없었다. 창호는 프로 첫해에 7승 3패를 거뒀다.
<한국기원과 젊음의 거리 관철동>
창호는 입단 첫해의 기억으로 KBS-TV가 주최한 바둑축제가 생각난다고 말한다. 커다란 체육관에 여성, 어린이, 학생, 어른 등 수천명이 모여 온갖 종류의 아마추어 대회를 벌였고 이를 TV가 중계한 굉장한 이벤트였다. 이곳에서 초단 이창호와 3단 유창혁이 기념대국을 벌여 이창호의 승리, 승부를 떠나서 '강렬한 일직선의 공격'으로 유명했던 선배 유창혁과의 첫 대면이 오래토록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후 두사람은 한국기원의 연구실에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된다.
종로 관철동의 한국기원은 군사정부 시절이던 68년, 당시의 실력자 이후락(李厚洛)씨가 기원 총재를 맡으면서 만들어낸 아담한 5층건물이었다. 1층은 다방, 2층은 사무실, 3층은 일반회원실, 4층은 기사실과 바둑잡지 편집실, 5층은 대회장과 현현각(玄玄閣)이란 바둑전문출판사. 독재의 덕을 안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20여년간의 유랑생활과는 비교도 안되는 호강이었다.
그러나 서울 한복판이라 할 종로 일대가 번화해지고 특히 관철동(貫鐵洞)은 '젊음의 거리'로 명명되면서 부근이 온통 술집과 음식점 등 유흥업소로 넘쳐나게 됐다. 젊은이들은 어깨를 부딪힐만큼 많아졌고 음악소리가 왼종일 울려퍼졌다. 그 한복판에 고요함과 유장함의 대변자라 할 바둑의 총본산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칼했다.
87년, 그러니까 입단 2년째로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창호는 그 알록달록한 거리가 싫지는 않았다. 곁에 아무도 없을 때 좋아하는 초콜렛이나 얼음과자를 먹으면서 그곳을 걸어다니면 그런대로 재미도 있었고 마음도 편했다. 기원 4층의 기사실 옆에 작은 연구실이 하나 생긴 것은 이무렵이었다. 유창혁, 최규병 등 젊은 프로들과 어린 연구생들이 바둑을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든 방인데 창호는 대국이 없는 날이면 이곳에서 오후를 보냈다. 옥상에는 탁구대가 하나 있어 이곳에서 김영환, 정현산(작고) 등과 탁구를 하기도 했다. 유일한 운동이자 놀이였다. 윤성현은 아직 프로가 되지 못했으나 동갑이어서 곧 가까워졌다.
<창호의 트레이드 마크 - 견고한 기역자 꼬부림>
첫해엔 7승 3패. 87년부터는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면서 점점 판수가 많아졌다. 6월 30일엔 최단코스로 2단에 승단했고 이후 두달간은 15승 1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창호는 지금도 여름에 더욱 강한 면모를 보인다) 특히 8월 하순의 국기전 3차예선 결승전에선 첫번째 스승이었던 전영선 7단과 프로입단 후 처음으로 대면하여 승리했다.
평소 속기인데다 술에 절어 지내는 편이어서 시합도 대충 치르는 사람좋은 전 7단이었으나 이판만은 의외로 전력을 기울였다.
대국이 끝난 후 田 7단은 "아직은 좀더 가르쳐줄게 있을텐데 싱겁게 지고 말았다"며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이 승리로 창호는 본선진출에 성공했는데 '12살 본선'은 새로운 기록이었다. 이후 창호는 모든 부문에서 기록을 만들어나가게 되지만 실력면에선 여전히 설익은 과일이었다.
"약한데가 많은데 잘 이긴다."고 프로들은 말했다.
"포석이 특히 약하다. 행마감각도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고도 했고
"두텁게 잇고 두는 바둑. 느리지만 견고한 기역자 꼬부림은 인상적이다."는 측도 있었다.
<창호의 바둑에서 노인 냄시가 난다>
평가는 제각각이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창호의 바둑은 어린 아이의 바둑이 아니다는 것. 정신 수양이 잘 된 70노인의 냄새가 난다는 것.
80년대만 해도 해가 지면 관철동 뒷골목엔 으레 프로기사와 바둑 관계자들이 어울리는 술판이 벌어지곤 했다. '돌부처'니 '강태공(姜太公)'이니 하는 창호의 별명들이 이런 곳에서 생겨났다.
창호는 이무렵부터 상대의 대마를 잡으러가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마는 반드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생명이 숨어있는 법. 99%가 확실해도 나머지 1%가 불확실하다면 그 길은 완전한 길이 아니다. 살려주고 계산으로 간다면 100% 이긴다. 창호가 대마를 잡으러가지 않는 이유다.
그렇다. 계산상으로는 99%보다 100%가 나을 것이다. 하지만 최선을 추구한다는 바둑의 가치론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과연 옳은가. 선전수전 다 겪은 어른이라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12살 소년의 행동이요 생각이었기에 문제가 심각했던 것이다.
소년은 어른으로부터 신중함을 배우고 세월의 흐름과 시련속에서 끈기를 익힌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쓰라림을 겪으면서 타오르는 마음의 불꽃을 제어하고자 수양을 거듭한다. 그렇게 노력해도 수양이란 본시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프로기사란 직업은 끈기와 인내없이는 한시도 버티기 어렵기에 그들의 끈질김과 인내력은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그들 선배 프로들은 프로세계에 들어선지 불과 2년째인 12살의 이창호를 '어린 강태공'이라 불렀고 그의 바둑에 '노기(老棋)'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들은 아직 다른 인생경험이 전무한 이창호에게서 장구한 세월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무심한 기다림의 자세를 발견하고 경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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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9) ‥‥‥‥‥‥‥‥‥‥‥‥‥‥‥‥‥‥‥‥‥‥ 2001. 8. 21. 火
<서봉수와의 인연>
이창호는 아기자기한 저단시절을 거치지 않고 곧장 정상으로 치달았다. 허리가 약한 한국바둑계의 특징을 고려하더라도 그 스피드는 발군이어서 만 14세에 국내대회에서 우승컵을 차지했고 17세 때는 세계대회서도 우승했다. (앞으로 50년간은 이 기록이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도 창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진격을 계속했는데 그 와중에서 조훈현 9단, 린하이펑(林海峰) 9단, 조치훈 9단, 서봉수 9단,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 마샤오춘(馬曉春) 9단 등 당대의 효웅들과 특이하고도 진한 인연을 맺게 된다.
이중 서봉수는 "이창호가 나보다 상수"라고 일찌감치 인정해버린 인물이다. 창호는 아직 정상의 실력이 아니었는데 서 9단은 왜 그를 그토록 높이 평가했을까.
서봉수와의 인연은 창호가 13살이던 1988년에 시작된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88년은 바둑사에서도 획기적인 한해였다. 도꾜(東京)에선 후지쓰배가, 베이징(北京)에선 잉창치(應昌期)배가 막을 올렸던 것이다. 바둑사의 흐름을 바꿔버린 세계대회가 연이어 창설된 것이다.
당시 동양 3국 중 가장 약체로 치부되던 한국은 후지쓰배에 3명이 출전하여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해버렸다. 그러나 應씨배에선 조훈현 1인이 출전하여 8강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에게 필패의 바둑을 역전시키더니 드디어는 결승까지 진출했다. 이것은 서울 장안의 빅뉴스가 됐다.
88년엔 또 유창혁이란 젊은이가 막강 조훈현의 대마를 잡고 타이틀을 따낸 해이기도 했다. 이런 요란한 화제들에 눌려 이해 겨울에 열린 이창호 대 서봉수의 최고위전 도전자결정전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주술에 걸린 서봉수>
창호는 서봉수라는 거목과 처음 대좌한 이 대국에서 의외로 쉽게 불계승을 거둔다. 그리고는 이 뒤로도 徐 9단에게 내리 5연승을 거뒀다. 徐 9단은 창호만 만나면 주술에 걸린듯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졌다. 창호는 당시를 이렇게 술회한다.
"내가 실수를 해서 판이 나쁜데도 徐 사범님은 더 큰 실수를 해주곤 했습니다."
徐 9단은 늦게 바둑을 배워 18살에 가서야 프로가 됐다. 그러나 타고난 승부사적 기질로 조훈현이란 천재와 15년간 3백번 이상 싸워 1백번 이상을 이긴 사람이다. 3판 중 한판꼴로 이긴 것이다. 그런 강인한 서봉수가 창호에겐 장작더미처럼 무너졌다. 왜 그랬을까.
서 9단은 누구보다도 먼저 이창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이었다. 그후 그는 이창호란 인물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창호가 자신이 몽매에도 그리던 '중앙에 대한 계산'을 해내는 것을 보고 서 9단은 엄청난 기재(棋才)가 나타났다고 단정했다.
"실전에서 그것(중앙에 대한 계산)때문에 얼마나 몸살을 합니까. 사실은 그게 전부거든요."
중앙을 얘기할 때마다 프로들은 고개를 내젖는다. 어렵기 때문이다. 徐 9단은 중앙을 가리켜 아예 '허공'이라 부른다. 손을 내저어 잡으려해도 지푸라기만 잡힐 뿐이라는 자조의 표현이다. 하기사 아무리 계산해보려 해도 막연하기만 한 중앙을 무슨 수로 계산해낼 것인가.
조금 괴짜고 외곬이지만 순진한 구석이 있는 서 9단은 자기가 갖지 못한 능력을 지닌 창호를 극구 칭송했다. 창호가 아직 기초가 부족하고 포석이 특히 약하고 접전과 수읽기에서도 약점을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무엇보다 아직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서 9단의 뇌리에는 "창호는 강하다"는 인식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중앙에 대한 특이한 능력>
徐 9단은 "머지않아 조훈현이든 누구든 창호에게 진다"고 공공연해 단언했다. 그는 일종의 자기암시에 걸려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강력한 자기암시 탓에 徐 9단은 창호 앞에만 앉으면 자신의 기량을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무너지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하나의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徐 9단의 승부호흡이다. 기본기에서 조훈현에게 뒤지는 徐 9단은 曺 9단과 싸울 때 초반엔 조심조심하며 장기전을 유도한 뒤 종반의 계산으로 승부하곤 했다. 이창호는 두터운 기역자 꼬부림이 보여주듯 徐 9단보다는 속도가 느린 기풍의 소유자였지만 승부호흡만은 비슷했다. 즉 계산력이 승부의 중요한 포인트였는데 창호가 그점에서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자 그만 심혼이 흔들려 페이스를 잃어버리곤 했던 것이다.
徐 9단은 5연패 뒤 혼신의 힘을 다해 2연승하더니 다시 5연패했고 겨우 1승을 올리더니 다시 7연패를 당했다. 서봉수에겐 이창호가 지옥사자였다. 불과 13세의 소년이 '야전사령관'이란 별호를 지닌 역전의 승부사 서봉수를 싸우기도 전에 무너뜨린 것은 신기했다. 그것이 이창호의 마력이었다. 나중에 서봉수는 조금씩 정신을 차려 그 마력에서 벗어났지만 이창호에 대한 상대전적은 2001년 8월 현재 17승 50패로 승률이 28%에 불과하다. (물론 서 9단은 이 모든 것이 실력일 뿐 자기암시가 패인일거라는 필자의 지적을 한번도 인정한 일이 없다는 점을 밝혀둔다)
<1989년의 첫 도전기>
아무튼 창호는 서봉수를 쉽게 넘어선 덕분에 88년 생애 처음 도전자가 되었고 스승 조훈현 9단과 대망의 5번기를 펼치게 됐다. '도전 5강'이 젊음을 다 바쳐 넘으려 했으나 끝내 넘지 못한 서봉수라는 벽을 창호는 이런 식으로 쉽게 넘어선 것이다.
1989년 벽두에 스승 조훈현 9단과 어린 제자 이창호의 도전기가 화제속에서 시작됐다. 사람들은 승패보다도 두사람이 어떤 심정일까 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었다. 두사람은 아침에 조훈현의 부인 정미화씨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나란히 타고와 함께 대국장으로 올라갔다. 대국 개시까지 曺 9단은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주위사람들과 느긋하게 대화를 했다. 그 앞에서 창호는 고개를 푹 숙인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린 제자와 승부를 겨룬다는게 몹시 부담스러웠다. 주위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곧 잊어버리고 좋은 바둑을 두자고 생각했다." (조훈현) "괜히 죄송스럽고 거북했다. 등에서 식은 땀이 났다." (이창호)
曺 9단은 徐 9단과 달리 창호를 아직 자신의 적수로 여기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판 가르친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창호는 쏟아지는 시선과 카메라 프래쉬에 우선 주눅이 들었다. 창호는 그리하여 스승과의 도전기 첫대국을 불과 80수만에 던지고 만다. 첫 도전기는 1승 3패로 끝났다. 하지만 내용은 자못 충실해서 제3국에선 아슬아슬한 승부 끝에 창호가 반집을 이겼고 제4국에선 화려한 대사석작전으로 국면을 리드하기도 했다. 창호는 3월에 또한번의 도전 기회를 잡았으나 이번엔 스트레이트 3연패.
바둑계 인사들은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 : 어린 비둘기 아직 재를 넘지 못한다)란 옛 문자를 들먹이며 창호가 인물은 인물이지만 조 9단에겐 아직 멀었다고 평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해에 서봉수가 조훈현을 격파하고 국기(國棋) 타이틀을 쟁취한 일이다. 徐 9단은 창호에게 꼼짝 못하고 창호는 曺 9단에게 꼼짝 못하는데 徐 9단은 어찌 조훈현을 이길 수 있었을까. 승부는 기술인가. 마음의 조화인가.
자신감이 없이는 바둑을 이기지 못한다. 빈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상대와 마주 앉을 때 승부는 이미 절반은 결정나고 만다. 승부는 물론 기술이다. 그러나 기술이 비슷하거나 아주 작은 차이일 때는 마음이 승부를 결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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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0) ‥‥‥‥‥‥‥‥‥‥‥‥‥‥‥‥‥‥‥‥‥‥ 2001. 9. 4. 火
<흑도의 소년이 주는 두려움>
1988년 창호는 연간 최고승률, 최다승, 최다대국, 최다연승 등 기록 4부분에서 모두 1위를 한다. 바둑연감을 보면 이때 세운 88.24%의 승률은 아직까지 한국기록으로 남아있다. (김인 9단이 61년 20승 2패로 90.9%의 승률을 기록했으나 규정대국수에 미달되어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창호는 이 88년부터 25연승을 거두는 등 두면 이기는 소년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확실히 새겨진다.
창호는 '지지않는 소년'이었고 '기록제조기'였다. 어린 창호는 마치 마법을 지닌 소년처럼 선배 프로들의 가슴에 공포를 심기 시작했다. 아직 꼬마인데도 노인과 같은 승부호흡을 보여주는 창호에게서 '흑도(黑道)'의 이미지를 느꼈다.
프로들은 창호의 불가사의한 인내와 행적을 지켜보며 저 땅 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볼 때 같은 두려움에 빠져들곤 했던 것이다.
1989년 4월에 창호는 드디어 한국대표로 후지쓰배에 출전하게 된다. 창호로서는 이것이 세계대회 첫 출전이었다. 도꾜 한 호텔의 넓은 홀에서 추첨식이 거행됐다. 사회를 맡은 늘씬한 여성 아나운서는 아직 뚱뚱하고 조그만 꼬마에 불과한 창호를 보고 이런 아이가 어떻게 세계바둑대회에 나왔을까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그녀는 일본 여성 특유의 싹싹한 어투로 창호의 상대자로 뽑힌 왕밍완(王銘琬) 9단에게 "아직 어리니까 살살 좀 다뤄주세요"라고 말했다.
한국기사들과 관계자들은 "그렇게는 안될걸, 어디 혼좀 나봐라."하며 속으로 웃었다. 왕밍완 9단은 최근 일본의 본인방이 되는 등 강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으나 당시만 해도 정상급에겐 한수 처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에 비할 때 창호는 비록 조훈현에겐 졌지만 창호의 저력으로 미뤄볼 때 왕밍완이 크게 고생할 것이고 무척이나 당황하게 될 것이란 확신 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다.
<어디 한번 혼좀 나봐라 - 세계대회 첫 출전>
그러나 이튿날 창호는 계산의 명수요, 돌부처다운 끈질긴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매우 싱겁게 져버렸다.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창호를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일까. 그렇더라도 국내 강자들이 창호를 동자귀신 보듯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승부가 끝나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반집승부를 내다보고 인내를 하는 그의 계산력과 불가사의한 정신력은 김인 9단도 일찌기 인정한 것이 아닌가.
한데 어찌하여 왕밍완 정도에게 그리 쉽게, 허무하게 질 수 있단 말인가. 王 9단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선 우리가 이창호에 취해 이창호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 반성도 했다. 무엇보다도 창호는 그 여성 아나운서의 말 그대로 아직은 14살 어린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이후로도 창호는 외국무대에 나가면 잘 졌다. 처음 보는 상대에겐 특히 약했다. 1992년 이후, 그러니까 한국에서 1인자가 된 뒤에도 중국의 차택무(車澤武)라는 무명기사에게도 졌고 중국을 떠나 막 유랑을 시작한 여성강자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에게도 완패했다.
이바람에 창호라는 천재 소년을 실컷 자랑하고 그의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크게 놀래주고 싶은 우리의 기대감은 번번히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렇다면 창호가 외국에만 나가면 힘없이 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똑같은 세계대회라도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에선 창호가 강했다)
<창호의 해외징크스>
창호는 비행기 타는 것을 꺼려했고 낯선 곳에서 자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도 거북해했다. 이중에서도 비행기는 창호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창호는 바둑에서 보듯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승부사에게 이런 표현을 하면 믿기지 않겠지만 필자는 창호가 겁이 많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겁이 많은데 어떻게 승부사냐고 되묻는다면 이렇게 답변하고 싶다.
"본래 하수의 특징은 겁이 없다는 점이다. 두려움을 모르면 일류 승부사가 아니다. 두려움을 알되 그걸 뛰어넘는 자가 최고의 승부사다."
아무튼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창호에게 비행기라는 존재는 매우 싫고 불확실한 존재였다. 창호는 비행기를 꺼렸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면 스트레스를 받아 배탈이 나곤 했다. (창호는 외국을 자주 다니는 지금도 국내 지방대국에선 무조건 기차를 타고 다닌다)
이런 고약한 컨디션에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나면 창호의 그 무서운 집중력도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창호가 외국에 가서 유일하게 찾는 곳은 전자오락실이었다. 아버지 이재룡씨가 항시 동행하며 돌봐줬지만 이재룡씨 역시 사람들과 어울리는 형이 전혀 아니어서 두 부자는 조용조용 방에 있거나 전자오락실에 가거나 했고 식사도 여럿이 어울리는 곳을 피했다. (나는 창호가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 힘든 성격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물론 잘못됐다. 창호는 머지않아 누구보다 팬들과 잘 동화하고 후배들과도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게 됐으니까.)
외국에 가면 배탈이 자주 나서 처음엔 창호의 식성이 몹시 까다롭구나 짐작했으나 본인에게 물어보니 의외로 "라면이건 뭐건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했다. 배탈의 원인은 비행기와 낯선 시선, 즉 '외국'에 대한 스트레스였다. 부동심(不動心)의 달인이라는 창호에게도 이렇게해서 하나의 장애물이 생겼으니 그것이 곧 '해외징크스'였다.
<전략가 이창호>
창호는 이무렵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처음 보는 외국 기사에겐 거의 졌다. 그러나 두번째 만나면 거의 이겼다. 창호에게 '전략가'란 별명이 붙게 된 것은 이때문이었다. (창호는 한번 지면 약한 상대라도 내가 왜 졌고 상대의 강점은 무엇인가 면밀히 연구한다. 화가 나서 진 바둑을 쳐다보기도 싫어하는 기사도 있는데 창호는 정반대였다. 창호는 이윽고 상대의 장점과 약점, 자신의 실책들을 확인하고 그걸 머리 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가 다음에 만나면 여지없이 깨뜨렸던 것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창호를 전략가라 부르게 되었지만 사실은 프로기사라면 누구나 이런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훈현 9단에게 지고 일본에서도 졌으나 창호는 다시 줄기차게 승수를 쌓고 있었다. 밤이 되면 선생님의 바둑을 연구했다. 선생님은 그의 마음속에 거대한 장벽으로 가로막고 있었고 강한 승부심을 지닌 창호는 반드시 선생님을 뛰어넘고 싶었다. 창호가 曺 9단의 바둑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리하여 창호는 드디어 조훈현이란 거대한 벽을 넘어서게 되지만 그때가 되서도 일본은 이창호의 바둑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평했다.
"이창호가 일인자라 하지만 아직은 이른 감이 있다. 이창호의 바둑은 조훈현만을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느낌이고 그것이 다른 기사에게도 유용한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창호의 바둑엔 분명 그런 요소가 있었고 또 일본에서의 전적이 영 나빴기에 일본이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은 일면 타당한 점이 있었다.
이창호 이야기 (11) ‥‥‥‥‥‥‥‥‥‥‥‥‥‥‥‥‥‥‥‥‥‥ 2001. 9. 7. 金
<생애 첫 타이틀은 KBS 속기에서>
1989년 8월 8일, 창호는 드디어 KBS - TV가 주최한 바둑왕전 결승전에서 김수장 9단을 2대 0으로 꺾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만 14세에 세계최연소 타이틀홀더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승부세계에는 "우승해본 사람이 우승한다."는 말이 있다. 우승 문턱에서 아깝게 좌절하는 기사들은 많다. 바둑 내용만을 보면 이긴 것과 전혀 다름없는 패배로 인해 아깝게 우승을 놓친 기사들이 많다는 얘기다.
'도전5강'이 바로 그렇고 김수장 9단도 그중 한사람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도전5강이란 조훈현 1인체제, 나아가 曺 - 徐시대를 제발 좀 끝장내 달라는 팬들의 염원으로 탄생한 이름이다.
그 5명의 이름은 장수영 9단, 서능욱 9단, 김수장 9단, 강훈 9단, 백성호 9단등이다. 백성호 9단 대신 정수현 9단등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튼 이들은 무수히 결승전에 올라갔고 도전기를 치렀다. 그러나 큰형에 해당하는 장수영 9단은 준우승만 8회, 서능욱 9단은 준우승만 무려 13회를 했다. 김수장 9단도 준우승만 3회, 정수현 9단도 한번의 준우승.
강훈 9단은 준우승을 7번 했지만 우승도 딱 한번 했다. 이것이 바로 도전5강의 유일하고도 귀중한 우승이다. 바로 1986년 박카스배에서인데 그러나 결승전 상대가 조훈현 9단이 아니고 이미 정상에서 밀려난지 오래된 김인 9단이라서 조훈현을 꺾는다는 '도전5강'의 정신과는 거리가 있었다.
강훈의 단 한번의 우승을 끝으로 도전5강은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져갔다. 그들은 조훈현과 서봉수라는 두 장벽을 넘는데 끝내 실패했을 뿐더러 뒤를 치고 올라온 유창혁과 이창호라는 두 강력한 신예에 쉽게 덜미를 잡혔다.
김수장 9단이 이창호 9단에게,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김수장 7단이 이창호 4단에게 속기바둑 결승전에서 패배한 사건은 말하자면 '도전5강'의 완전한 퇴진을 의미하는 이정표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또한 이창호가 세운 '14살, 타이틀획득'의 기록은 다시는 깨지기 힘든 전무후무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바둑계를 흥분시켰다.
<이창호라는 불가사의, 그리고 살인적인 대국수>
창호가 주는 또다른 이미지 즉, 뚱뚱하고 말이 분명치않고 눈빛이 흐릿하고와 같은 바둑 고수답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뭔가 분명치 않은 기색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4살 우승'은 창호가 진정 놀라운 천재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줬다. 어느 누구도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 '14살'이란 나이가 바둑에 종사해온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던져준 것도 사실이다.
필자 역시 "바둑은 진정 도(道)나 예(藝)라 할 수 있는가. 바둑이 예도라면 어떻게 세상 경험도 전무한 14살 소년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단 말인가."하는 격렬한 의구심에 휩싸이곤 했다.
필자는 이무렵 곧잘 불가사의(不可思議)란 단어를 사용하곤 했다. 사실 창호는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하지만 창호는 불가사의란 네글자로 덮어버리기엔 너무도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1988년에 최고승률, 최다승, 최다대국에 연승부문마저 휩쓸었던 창호는 1989년에는 전반 6개월동안에만 무려 67국을 두어 53승 14패라는 발군의 기록을 세운다.
이창호는 이해에 모두 111국을 두어 84승 27패의 전적을 거두는데 이 111국은 연간최다대국 부문에서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다. 4단시절인지라 창호는 거의 모든 기전에서 1차예선부터 참여했고 계속 이겨 타이틀전까지 치렀기 때문에 대국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이다.
어린 소년의 이같은 '살인적인 대국'은 '기사생명 단축'과 결부되어 바둑가의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창호는 그러나 이듬해인 90년에도 109국을 두었고 오늘날에도 매년 70국 이상의 많은 대국을 소화하고 있다. 주위에선 작은 기전엔 나가지 말라고 하고 본인도 그랬으면 하는 눈치지만 대회를 주최하는 측에선 최고 인기기사인 이창호를 반드시 출전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거절을 못하는 이창호로서는 힘든 강행군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본인이 힘들게 출전을 거절하는 경우 선배기사를 통해 출전 교섭이 들어오고 그러면 창호는 결국 굴복하여 대국에 나서곤 했다. 다행히 어렸을 때 우량아 상을 받았던 타고난 체력이 창호에겐 큰 도움이 되어왔으나 1989년에 기록된 연간 111국이란 이 살인적인 대국은 앞으로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기록인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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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2) ‥‥‥‥‥‥‥‥‥‥‥‥‥‥‥‥‥‥‥‥‥ 2001. 9. 11. 火
<"이젠 창호가 알아서 하겠지">
이창호가 '기록제조기'란 새로운 별명과 함께 바둑판 361로(路)의 난제들을 일직선으로 돌파해가고 있던 1989년 9월, 싱가포르에선 한국의 최강자 조훈현 9단과 중국 최강 네웨이핑 9단의 제1기 잉창치(應昌期)배 결승전 최종국이 벌어지고 있었다. 2대 2에서 벌어진 마지막판. 서울과 베이징(北京)은 이 한판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결과는 曺 9단의 불계승. 한국바둑계에 전대미문의 대사건이 벌어졌다. 서울의 매스컴은 만화와 사설까지 바둑으로 뒤덮혔다. 조훈현의 집에 TV 카메라 부대가 들이닥치고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처럼 조금은 유치하고 조금은 감동적이기도 한 가족들의 만세 장면과 손가락으로 'V'자 그리기 장면을 촬영했다.
그날 밤 늦은 시각, 曺 9단은 불도 켜지 않은채 호텔방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우승컵이 한쪽에서 웅크리고 있었고 테이블엔 40만달러짜리 수표가 든 하얀 봉투가 뎅그렇게 놓여 있었다. 曺 9단은 말이 없었다. 고요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가 방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신문기사를 위해 曺 9단의 심정을 들어보려 들렀던 나는 바다 밑 같은 분위기에 동화되어 함께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曺 9단이 어둠속에서 침묵을 깼다.
"이젠 창호가 알아서 하겠지"
曺 9단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말에 응축되어 있는 뜻은 풀이하자면 이랬다.
"일본과 중국 바둑은 하늘처럼 높아서 우리의 상전 같은 존재였지만 나는 그들을 물리쳤다. 이렇게 물리치리라고는 나 스스로도 믿지 못했지만 기적같이 그 일을 해냈다. 앞으로는 누가 그 힘든 일을 해낼까. ······그 일은 그만 생각하자. 창호가 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曺 9단의 어투는 착 갈아앉아 있어 40만달러짜리 우승컵을 막 따낸 사람치고는 어딘지 우울해 보인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승부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에 뜻밖에도 창호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의 어조는 차분하여 묘한 서글픔마저 띄고 있었던 것이다.
"창호는 믿을만한가" 하고 내가 묻자
曺 9단은 "그럼, 믿을만하지." 했다.
9살 때 프로생활을 시작하여 근 30년간 쉬지않고 달려온 曺 9단은 인생의 정점에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빛나는 성공,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온 오랜만의 휴식에 망연해졌던 것일까. 문득 외로워졌던 것일까. 아니면 이제부터 끝없이 이어질 제자 이창호와의 피나는 승부를 이때 이미 본능적으로 예감했던 것일까.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의 예감>
한국에서 바둑은 3번의 도약을 통해 스포츠 등 다른 분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1980년 조치훈의 명인쟁취가 처음이었고 1989년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이 두번째였다. 세번째가 이창호의 등장인데 이중 가장 화려하고 요란했던 것은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이었다. 그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장내를 가득 메운 기자들 앞에서 거창한 회견을 했고 꽃다발을 목에 걸고 시내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이런 식의 카퍼레이드는 한국에서 조 9단이 마지막이었다. 曺 9단은 이튿날인가 TV 출연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방송국에 나갔다. 집을 비워둔 채였다. 그날 曺 9단 집에 도둑이 들었다. 절묘하게 허를 찌른 날카로운 도둑이라며 웃고 말았지만 참으로 씁쓸한 사건이었다.)
曺 9단은 서울에 오자마자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를 차례로 무찌르고 3연속 타이틀방어에 성공했다. 응씨배 우승을 통해 曺 9단은 더욱 강해진 느낌이었다. 바둑계에선 '19로의 마술사'라 불리던 그에게 '바둑황제'라는 칭호를 새로 선사했다.
바로 이무렵, 그러니까 프로입단 3년째인 89년 12월에 이창호 4단이 다시한번 최고위전의 문을 노크하며 슬며시 나타났다. 어언 4번째 도전이었다. 12월 11일의 첫판에서 창호는 놀랍게도 6집반승. 이창호는 영화속의 로마군처럼 큰 방패를 일렬로 세우고 창날만 내민채 착착 진군해 曺 9단을 쓰러뜨렸다.
바둑이 시작되기 전에 창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특유의 죄송한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바둑이 시작되자 철가면을 쓴 기사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일년 전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4번째 도전 - 철가면을 쓴 이창호>
제2국은 그러나 曺 9단의 불계승. 혼전에 말려들어 손쓸새 없이 져버리고 말았다. 3국에선 다시 이창호의 불계승. 이판에서 창호는 명국이라 할만큼 완벽한 바둑으로 승리를 거뒀다. 창호가 2대 1로 앞서자 바둑계 인사들은 문득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늙은 스승이 제자에게 지고 나서 허허 웃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스승이 정상의 위치에 있을 때 제자가 진검승부를 펼쳐 그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바둑이건 스포츠건 다른 분야에선 본 적이 없다.
스승이 제자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는 모습은 이것도 인연이요, 운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낯설고 이상하여 상상하기조차 힘든 모습이었다.
바둑계 밖에선 이창호라는 정체불명의 소년과 스승 조훈현의 맞대결을 놓고 벼라별 얘기가 다 떠돌았다.
몇몇 팬들은 제자가 어떻게 스승을 이길 수 있느냐, 바둑계는 예의도 없느냐고 한국기원에 항의했고 그럴 때면 한국기원은 "일본 바둑계에선 제자가 스승을 이기면 은혜를 갚는 것이 된답니다."고 대답해줬다. 그러나 일본에선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얘기는 늙그막의 스승이 제자와 만나 대국을 벌이고 제자가 힘없는 스승을 꺾어 잘 배웠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을 두고 은혜를 갚는다고 말한 것이다. 정면 승부를 펼쳐 제자가 이기는 것을 말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스승과 제자가 피나는 승부를 벌인 경우는 조훈현 - 이창호가 바둑 사상 처음이었다.
용호상박의 싸움끝에 최종국인 제5국이 1990년 2월 2일 관철동의 한국기원에서 열렸다. 포석에서 뒤진 이창호는 시종 비세에 몰렸으나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인생역정을 무수히 겪어본 장년의 승부사처럼 자리를 꽉 차고 앉아 괴이하고 줄기찬 승부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창호는 결국 자신의 능기인 '장구(長久)한 기다림'과 '완벽한 계산력'을 십분 발휘하여 역전 반집승을 거두게 된다.
<4번째 도전 - 철가면을 쓴 이창호>
그렇다. 반집이었다. 이창호가 이후 무수히 엮어낼 반집의 드라마. 수많은 초일류 기사들을 악몽 속으로 몰아넣었던 반집 역전승의 드라마는 이렇게 첫번재 테이프를 끊었다.
창호는 이리하여 생애최초로 신문기전에서 우승했다. 공교롭게도 최고위(最高位)는 20년전 曺 9단이 타이틀 사냥을 시작할 때 최초로 손에 넣었던 바로 그 타이틀이었다. 이튿날 매스콤은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이창호 보은(報恩)의 타이틀획득'
1990년에 접어들자 신문의 바둑란에 '4인방시대'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의 4강시대라는 뜻인데 왜 의미가 좋지않은 '방(坊)'자가 들어가게 됐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정치에서의 오랜 독재가 빚어낸 언어의 굴절현상일까. 높은 사람들이 지겹도록 싫은 나머지 바둑에서 정상에 군림하는 4사람의 강자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일까. 지금까지도 서울에선 이 네사람을 4인방으로 부르고 있지만 한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중국만은 문화혁명시절 악역을 담당했던 4인방과 구분하여 4천왕(天王)이라 부르고 있다.
아무튼 4강시대라지만 타이틀전에 관한한 조훈현의 아성을 여전히 철옹성이었다. 그러나 창호는 만 15살 때인 1990년 2월 27일부터 8월 31일까지 6개월동안 국내기전에서 무려 41연승을 거두어 바둑계를 경악시켰다. 이것 역시 신기록이었다. 그때까지 연승기록은 김인 9단이 25살 때인 1968년에 세운 40연승. 하지만 당시는 강자가 적던 시절이라서 이창호의 41연승은 더욱 돋보이는 기록이었다. (10년후 이세돌 3단이 32연승을 세우며 역대 연승기록 3위에 오른다. 조훈현 9단은 전관왕을 3번이나 해치운 사람이지만 연승기록은 1977년의 31연승이 최고다.)
우물안 개구리 소리를 듣던 창호가 이무렵부터 해외대국에서도 드디어 호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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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3) ‥‥‥‥‥‥‥‥‥‥‥‥‥‥‥‥‥‥‥‥ 2001. 9. 25. 火
<해외에서의 약진>
1990년 4월, 창호는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 건너가 도꾜의 일본기원에서 열린 제3회 후지쓰배에 출전했다. 그리고는 백을 쥐고 당대의 스타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9단의 대세력을 완벽하게 격파했는데 그 장면이 운집한 고수들을 놀라게했다.
<기보1>을 보자.
<기보1>
흑을 쥔 다케미야 9단은 예상대로 3연성에 이은 우주류를 펼쳐 흑1로 중앙을 크게 에워쌓았다. 백의 이창호는 지금껏 흑의 대세력이 구체화되어 가는데도 모른척 자기 모양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장면에선 더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어디로 삭감해 가느냐.
A나 B의 삭감일까. 아니다. 창호니까 더 서서히, 멀리서 삭감할지도 모른다며 의논이 분분할 때 예측을 크게 빗나가는 한수가 등장했다.
<기보2>
<기보2>의 백1을 선수한 뒤 3으로 깊숙하게 침입한 수가 바로 그것이다. 다케미야 9단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검토진들도 물론 깜짝 놀랐다. 결코 무리를 하지 않고 수도승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종반의 계산으로 승부하는 창호가 폭파전문가라 불리는 조치훈 식의 초강수를 들고 나왔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소년이 강수를 던지자 다른 사람의 강수에 비해 훨씬 묵직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아닌가. 그 수는 다가오면 다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모종의 힘이 그 수에 거역할 수 없는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
기세가 강하고 멋을 중시하는 다케미야 9단도 결국 백3의 압력에 굴복하여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공격을 포기하고 흑4부터 10까지 후퇴한 것이다. 창호는 물론 3으로 깊숙히 쳐들어갈 때 A의 절단과 B의 건너붙임등의 맥을 보며 수습을 자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3의 강수는 이창호라고 하는 소년기사를 다시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단 한수로 다케미야의 우주류를 물거품으로 만든 이창호의 저력에 외국기사들도 서서히 공포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불후의 명수로 우주류 격파>
이바둑은 서울에서는 '90년도의 명국'으로 회자되었고 훗날 바둑TV같은데서 이창호 시리즈를 방영할 때 단골로 등장하곤 했다.
창호의 다음 상대는 당시 일본의 일인자였던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이었는데 여기서는 박빙의 접전 끝에 반집을 지고 말았다. 小林은 강자답게 이창호의 끝내기에 전혀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종반전에 기막힌 묘수로 승리를 낚아챘다. 이 승부는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이창호의 뇌리에는 '강자 小林'의 이미지가 깊이 새겨지게 된다.
41연승이라는 대기록이 작성된 뒤 창호에게 '지지않는 소년'이란 별호가 추가되었다. 그 지지않는 소년이 1990년 8월에 서봉수를 격파하고 명인전 도전권을 손에 넣자 바둑계는 아연 숨을 죽였다. 최고위는 지방기전이지만 명인전은 서울의 중앙기전. 15세가 된 이창호는 이미 말할 수 없는 신비감을 토해내고 있었다. '돌부처 "강태공" 전생고수의 환생'등 그 어떤 별명도 이 어눌하고 조용한 소년의 내막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조훈현의 위기가 다가왔음을 감지했다.
그러나 조훈현은 세인의 우려를 비웃듯 '황제'다운 위용을 과시하며 이창호를 3대 1로 꺾어버렸다. 이 결과를 보고 기가(棋街)에서는 이렇게 관전평을 했다.
"조훈현이 잘 막아내고 있다. 그의 감각과 전투력은 역시 일품이다. 그러나 조만간 이창호의 신기(神氣)가 영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그 무엇으로도 이 소년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오랜 세월 부동의 1인자로 군림해왔던 조훈현에게 "막아낸다"라는 표현을 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曺 9단은 이겼지만 관전자들의 눈에 비친 그는 이미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한듯한 모습이었고 그마저도 어딘지 힘들어 보였다.
이창호의 강력한 이미지는 이미 겨울 산맥처럼 웅혼하고 아득한 모습으로 바둑계를 멀리서 포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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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3) ‥‥‥‥‥‥‥‥‥‥‥‥‥‥‥‥‥‥‥‥‥ 2001. 10. 2. 火
<바둑계를 포위하기 시작한 이창호군단>
이창호의 연승을 41연승에서 저지시킨 기사는 조훈현이 아니라 유창혁이었다. 창호는 이무렵 새로 탄생한 최대기전인 기성전 본선에서 유창혁과 만나 대 역전패를 당하고만다. 역전승의 대명사로 불리던 이창호도 유창혁의 강력한 파워 앞에서는 종종 허망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뛰어난 공격력에다 여름햇살처럼 강렬한 기풍의 소유자인 유창혁은 창호보다 9년 연상이었다. 입단시기와 단위가 비슷한데다 바둑의 명문인 충암학원(沖岩學園)의 선후배간이어서 두사람은 자연 충암연구회를 통해 자주 어울렸다. 유창혁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타입이고 어린 이창호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두사람의 기재(棋才)를 중심으로 밤낮없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그바람에 충암출신의 어린 소년기사들은 물론이고 같이 연구에 참여한 선배기사들까지도 기량이 진일보하게 됐다.
조훈현대 서봉수의 대국에선 국후복기가 별로 없었다. 설령 복기가 이루어져도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승부사가 수시로 대결해야할 적수에게 자신의 느낌과 심정을 고스란히 토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과거 일본의 막부시대 바둑 4가문(家門)은 저마다 비수(秘手)를 준비해 두었다가 쟁기(爭棋)같은 중요한 대국에서만 사용하곤 했다. 승부세계의 속성은 바로 이처럼 나를 감춰 적을 치는 것이다.
<속마음을 감추지 않는 복기>
그러나 젊은 유창혁과 특히 세상 경험이 전무한 이창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지금 알려주는 수가 다음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 것이라는 계산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들은 바둑판 위의 진실과 그걸 바라보는 자신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로했다.
유창혁과 이창호가 등장한 이후 한국에선 진정한 집단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유창혁이 불이라면 이창호는 물이었고 유창혁이 창이라면 이창호는 방패였다. 이 두사람은 서로 배우고 서로 보완하며 힘을 키웠다. 그 와중에서 많은 신수와 새로운 정석연구들이 나타나게 됐다.
이점, 즉 한국기사들이 정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한국바둑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오랜 세월, 정석은 곧 일본정석이었다. 일본기사들이 수백년에 걸쳐 만들고 다듬어온 정석들을 한국은 아무 비판이나 검증없이 그대로 사용해 왔다. 근 3만개에 달하는 정석들이 다 그랬다.
曺 - 徐시대에 조훈현은 일본어도 능하고 정보도 빨랐기에 일본에서 신수가 등장하면 누구보다도 빨리 입수할 수 있었다. 반대로 서봉수는 정보가 거의 차단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바람에 속기대국 같은데서 曺 9단이 일본에서 새로 연구된 신수를 들고나오면 徐 9단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한수를 배우는데 한판을 헌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바둑은 기술적으로 일본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창과 방패의 조화 - 그리고 한국류의 등장>
이창호가 등장하면서 우리 바둑에도 우리가 연구한 신 정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드디어 '한국류'(한국식 정석을 포함한 한국의 새 연구와 수법들의 총칭)는 한국바둑의 세계제패와 더불어 중국과 일본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상식으로 변했으니 참으로 엄청난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9월에 이창호는 전통의 국수전(國手戰)에서 조훈현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국에서의 국수는 일본에서의 명인(名人)처럼 매우 유서깊은 이름이다. 과거 조선시절에는 군(郡)의 고수를 군기(郡棋), 도(道)의 고수를 도기(道棋), 나라의 고수를 국기(國棋), 또는 국수(國手)라 불렀다. 한국에서 맨처음 시작된 기전도 바로 국수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조남철 9단, 김인 9단, 조훈현 9단등 1인자의 계보를 이어온 기사들은 평소엔 모두 김국수 조국수로 호칭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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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4) ‥‥‥‥‥‥‥‥‥‥‥‥‥‥‥‥‥‥‥‥‥ 2001. 10. 9. 火
90년 9월 7일 아침, 사제지간인 38세의 조훈현 9단과 15세의 이창호 4단은 몇발짝씩 떨어진채 한국기원 문을 밀고 들어섰다. 여드름이 돋은 창호는 언제나처람 어색하고 수줍은듯 고개를 외로 숙인채 뒤를 따랐다. 그를 향해 카메라 후랫쉬가 요란하게 터졌다.
당시 창호의 대국일정을 보면 이부근 12일동안 무려 10판을 두고있다. 전날인 6일에도 TV속기전을 오전과 오후로 나눠 두판을 두었다. 그리고는 휴식도 없이 도전기에 임했으니 실로 살인적인 대국일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창호는 단 한마디의 불평도 없었다. (최근 曺 9단이 왕위전 도전기를 기권한 사건이 있었지만 이때 사건의 단초가 된 것도 무리한 대국 스케줄과 한국기원과의 불협화음 탓이었다. 曺 9단은 불같이 화를 냈고 그 여파가 왕위전에도 미친 것이다.)
만약에 12일에 10판을 두라 한다면 어느 누구도 승복하지 않을 일이지만 창호는 아직 '소년'이었고 유독 불평 한마디 없는 소년이었다. (한국기원의 대국스케줄은 수시로 바뀌어 월별 예정표는 겨우 60%정도만 들어맞는다. 이런 환경속에서도 창호는 일인자가 된 오늘날까지 소위 불평이나 '까탈'을 부린 일이 없다. 한국기원 직원들로서는 참으로 편한 고객이 아닐 수 없다.)
창호는 오직 바둑으로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듯 보였다. 창호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을 뺏어가는 다른 두가지가 있었으니 그 하나가 막 돋아나기 시작한 '‘여드름'이었다. 창호가 어쩌다 휴식차 전주 집에 들르면 온 가족이 이 여드름에 매달릴 정도였다.
다른 하나는 '‘선생님 가족'이었다. 선생님이 아니라 가족이라 한 것은 승부에서 이기고 들어간 날, 선생님보다는 '큰 엄마'라 부르는 조 9단의 부인이나 그 가족들 보기가 더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그러니까 1990년 국수전 도전기 첫판에서 창호는 신수를 들고 나왔다. 그것이 <기보1> 백10의 젖힘. 조훈현도 11의 실전적인 속수로 맞서 30까지 진행됐는데 당시에는 "당장 교과서에 실어도 좋을 올해의 신수상(新手賞)감"이란 평가를 받았다.
눈코 뜰새없는 일정속에서도 창호의 마음이 이처럼 새로운 준비와 시도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실 한국바둑사에서 '창호 이전(以前)’과 '창호 이후(以後)'가 확실히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앞서도 누누히 얘기했지만 창호 이전에는 정석과 포석은 물론 중반정석까지도 거의 모든 것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었다. 초창기에는 일본으로부터의 정보를 누가 더 빠르게 입수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가름되는 경우도 많았다. 서봉수 9단이 "나는 정석도 몰라요"하며 고개를 내젖곤했던 것은 "나는 정보가 없어요."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일본으로부터의 정보는 단 한번도 의심받는 경우가 없는 '교과서' 그자체였다. 책방의 바둑책은 거의 다 일본책을 번역한 것이었고 정석사전에 등장하는 3만개의 정석도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창호 이후 그같은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면서 '한국류'라 불리는 격렬하고 밀착적인 많은 수들이 하나씩 의미를 띄며 정립되어 나갔다.
<기보1> 白 : 이창호 4단, 黑 : 조훈현 9단
<기보2>
<기보1>의 신정석은 이후 몇번 더 시도되다가 사라졌는데 그걸 보면 썩 좋은 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판도 불리한 가운데 진행되어 백을 쥔 창호의 패배가 예견되고 있었는데 <기보2>에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흑1은 실리로 확실히 앞서려는 조훈현 9단의 의지를 드러낸 수. 중앙을 지키면 안전하지만 미세한 국면으로 가게된다. 창호의 장기인 끝내기 승부로 가는 것은 피곤한 일이어서 아예 쐐기를 박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흑5가 패착이 되었다.
무수한 수읽기가 내포된 가운데 14, 16, 18이 '창호의 괴력'으로 표현된 수순이다. 이 수순은 아무리 뜯어봐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호만이 감지하고 있다는 '중앙의 비밀'이 이 수순에 숨어있었다. 엷디 엷은 백의 중앙이 은근히 두터움을 띄면서 형세가 소리없이 변했다.
창호는 중앙에 살이 붙는 순간 역전을 확인했고 그다음엔 물샐틈 없이 밀어붙여 2집반을 이겼다. 그리고는 2, 3국을 내리 이겨 창호는 3대 0으로 국수 타이틀을 따내버렸다.
3대 2와 3대 0은 다르다. 상대는 아직 15살인데 조훈현은 어느날 갑자기 주르륵 밀려버렸다. 5년간 일인자 자리를 지켜온 조훈현과 그의 제자 이창호의 싸움은 이순간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창호의 괴력이 드디어 조훈현마저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훈현은 창호의 '뒷심'을 겁내고 그것이 국면운영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창호가 약점을 드러내는 포석 때 많이 리드해두지 않으면 언젠가 당하고 만다는 불안감이 조훈현의 대국심리를 흔들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바둑은 균형이며 조화다. 판위에서도 그렇지만 대국자의 정신도 그래야한다.
그런데 무언가를 겁낸다는 것 또는 '많이 리드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자체는 불균형이나 부조화에 가깝다. 조훈현의 바둑이 이로부터 점점 더 격렬해져 간 것은 그런 부조화나 불안을 일도양단하려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이 패배후 조훈현은 한국인의 영산인 백두산으로 날아가 유창혁 4단과 기성전 도전기를 두었는데 중국경찰의 개입으로 8수만에 대국이 중단되는등 우여곡절 끝에 2대 4로 패배하고 만다. 이창호에 이어 유창혁까지 가세하여 양면 협공에 나서면서 천하를 통일했던 조훈현의 영토는 조그맣게 오그라들고 만다. 잉창치(應昌期)배에서 우승하여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했던 曺 9단의 승부인생이 돌연 난파 위기에 직면하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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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5)‥‥‥‥‥‥‥‥‥‥‥‥‥‥‥‥‥‥‥‥ 2001. 10. 23. 火
<남편을 이기려는 심야의 돌소리>
91년 1월의 어느날, 조훈현 9단의 부인 정미화씨는 여느 때처럼 남편을 옆좌석에, 창호를 뒷좌석에 태우고 관철동 한국기원에 갔다. 그날 '대왕’타이틀이 창호에게 넘어갔다. 대국은 늦게 끝났다. 날은 어두워지고 추위가 몰아친 종로 거리에서 曺 9단은 어깨를 움추리고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채 걸어갔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혼자 서 있는 曺 9단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연속되는 패배에 대한 무력감이랄까. 대세가 기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씁쓸함 같은 것이 그의 온 몸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바둑도 졌고 그래서 曺 9단은 친구들과 어울렸다가 새벽에 귀가했는데 남편을 맞으러 나오던 부인 정씨는 때마침 2층에서 들려오는 바둑돌 소리를 들었다. 창호는 그때까지 공부하고 있었다.
그 돌소리가 송곳처럼 정씨의 가슴을 찔렀다. 늙은 시부모에 세자녀, 그리고 남편과 창호까지 아침만해도 서너번씩 밥상을 차리면서도 일하는 사람 하나 두지않고 살림을 꾸려온 그녀였다. 그 씩씩하고 명랑한 여인이 처음으로 가슴 저미는 아픔을 느낀 것이다. 그녀는 훗날 웃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가슴이 싸한 것을 느꼈지요. 남편을 이기려는 돌소리처럼 들렸어요. 그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어요."
<7년만에 자라버린 호랑이 새끼>
7년전에 대문앞에서 처음 만난 창호는 고개를 푹 숙인채 말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뚱뚱하고 눈빛은 흐릿했으며 촌티가 물씬 나는 모습으로 남편 곁에 서있었다. 뭐라 물으면 모기소리로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참 순진도 하구나 싶었다. 가혹하고 격렬한 승부세계를 곁에서 지켜봐온 터라 이 아이가 그 험난한 동네에서 어찌 버틸까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적어도 생전에 당대무적인 남편을 위협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曺 9단쪽도 마찬가지였다. 프로들이 曺 9단에게 "호랑이를 키우는 것 아냐?"하고 물으면 曺 9단은 "그래도 10년은 걸리겠지"라고 대답하곤 했다.
물론 양쪽 다 농담이었다. 동료 프로들은 연전연승하는 曺 9단에게 "너의 유일한 적은 너의 제자"라는 식으로 놀린 것이고 曺 9단이 10년이라고 말한 것은 아무리 좁게 잡아도 10년 안엔 어림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불과 7년만에 농담은 진담이 되었고 바둑계는 이창호의 깃발로 뒤덮이고 말았다.
<바둑계는 이창호의 깃발로 뒤덮히고 사제는 분가하다>
이리하여 두사람이 함께 사는 조훈현의 연희동 집은 점차 괴이한 기운으로 덮여갔다. 두사람이 바둑을 둔 날이면 曺 9단의 부인 정씨는 남편에게 승부를 물어보기도 괴롭고 쑥쓰러워 한국기원에 살짝 전화로 알아봐야 했다.
바둑잡지에 만화를 연재하는 박수동 화백은 2층에 사는 젊은 맹호가 1층에 사는 지친 청룡을 거세게 압박하는 모습을 그렸다.
정미화씨는 비로소 창호가 떠날 때가 된 것을 알았다. 曺 9단은 일본의 내제자 생활을 거친 사람인지라 일본에서 묵계처럼 내려오는 스승과 제자의 룰을 지키고 싶어했다. 제자는 성인이 되어 자립하거나 5단이 되면 내보내는게 전통이었다. 창호는 아직 그 어느쪽도 해당되지 않았다.
"제자는 제자고 승부는 승부"라고 조 9단은 담백하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입장은 어려워졌다. 당대 제일의 제자를 키웠다는 자부심과 함께 현실의 피곤함이 뒤범벅이 됐다.
창호는 타고난 무표정과 무거운 입으로 여전히 아무 내색이 없었지만 사실은 이무렵엔 창호도 괴로움의 수위가 상당히 높아지고 있었다.
1991년 2월에 曺 9단은 북한산(北漢山) 자락의 근사한 저택으로 이사를 갔다. 이때 창호도 3월의 고교입학을 명분으로 강남의 아파트로 분가했다. 한국바둑계 최초의 내제자인 이창호와 스승 조훈현은 이렇게 남북으로 헤어졌다.
<이창호, 드디어 1인자의 자리에 오르다>
그 2월에 창호는 조 9단을 3대 2로 꺾고 최고위(最高位)를 방어했고 3월엔 다시 국내 최대기전인 왕위전에서 맞섰다. 부담을 털어버린 曺 9단과 충암고(沖岩高) 1학년이 된 창호는 그 어느때보다 치열하게 격돌했다.
왕위(王位)는 이제 曺 9단에게 유일하게 남은 빅 타이틀이었다. 이 승부에 바둑계의 일인자(一人者) 자리가 걸려있었다.
3대 3으로 어울린 승부가 숨가쁘게 최종국을 맞이했을 때 조훈현에게서 대착각이 튀어나왔다. 창호는 중요한 고비에서 언제나 하던 것처럼 화장실로 가 조용히 세수를 하고 돌아오더니 曺 9단이 깜박한 절묘한 맥점을 던져 대마를 잡아버렸다.
<대국해설>
기보를 보자. 형세는 은은하게 백이 두터운 가운데 흑을 쥔 曺 9단이 분발하고 있다.
<기보1>
<1보>에서 曺 9단은 흑1로 덤벼 상변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이때 흑5로 A로 잡았으면 탈은 없었다. 5로 둔 것은 백의 봉쇄를 피하는 당연한 수로 보였는데 여기서부터 이창호의 절묘한 수읽기가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8로 응수를 본 것이 수순의 시작.
<기보2>
<2보>에서 이창호는 백1부터 9까지 과감한 사석전법을 펼치며 대마를 통째 잡으러갔다. 이창호의 바둑에선 좀체 볼 수 없는 격결한 수법이어서 구경꾼들은 깜짝 놀랐다. 백11을 선수한 뒤 13으로 넘어 과연 이 흑대마는 살 수 있느냐.
<기보3>
<3보>에서 보면 曺 9단은 문제를 쉽게 생각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1, 3으로 몬 다음 흑5로 둔 것이 그것인데 백이 A로 이으면 흑10으로 두어 쉽게 사는 것은 불문가지. 그러나 잇기 전에 6으로 먹여치는 수가 있었다. 이 간단한 맥점으로 대마는 사망했다. 흑이 B로 때리면 백은 A로 잇기만 해도 대마가 죽어있다. 9로 두면 물론 10으로 들어가 죽는 것.
曺 9단은 너무 아쉬웠던지 이후 한참 더 두었지만 대마가 죽는 이순간 승부도 끝났다.
성장한 호랑이새끼는 드디어 스승의 머리에서 일인자의 왕관을 벗겨냈다. 한국기원의 '바둑'지는 이 사건을 '이창호의 쿠테타'라고 큰 제목으로 표현했다. 돌부처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아무튼 창호가 한국의 일인자가 된 사실만은 확연했다. 이제는 아무도 창호의 태풍을 막을 자가 없어보였다.
때마침 일본의 신인왕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과 이창호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처음 추진할 때는 양측 신예최강자의 대결이라는 의미였는데 몇달 사이 창호가 정상에 올라버리는 바람에 모양이 이상해졌다. 한국쪽에선 큰 기전 우승경험이 없는 요다와 일인자라 말해도 손색이 없는 창호의 대결이 격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하는 기사도 많았지만 한국기원은 친선대결이고 또 이기면 되는 것 아니냐며 무마했다.
한국기원 관계자들이 볼 때 5번기인만큼 적어도 창호가 질리는 없어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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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6)‥‥‥‥‥‥‥‥‥‥‥‥‥‥‥‥‥‥‥‥ 2001. 10. 30. 火
<요다 노리모토에 대한 강렬한 첫인상>
요다(依田) 9단에 대한 창호의 첫 인상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짙은 눈섶에 강한 눈빛, 그리고 결연히 입을 다문 모습은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를 연상시켰다. 돌을 놓을 때는 판이 깨져라 찍어 눌렀다. 소리도 요란했다. 거의 소리가 나지않게 슬그머니 돌을 갖다놓는 창호의 눈에 요다의 모습은 마치 도끼로 바둑판을 쪼개려는 역사(力士)처럼 보였다.
본인이 고백한대로 창호는 겁이 많다. 어릴 때 선생님 집에 와서도 밤엔 무서워서 혼자 잠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창호니까 힘차게 기합을 토해내는 요다의 모습에 상당히 위축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위축 운운은 추측일 뿐이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월에 동경과 서울을 오가며 벌어진 5번기는 놀랍게도 요다의 3대1 완승으로 끝났다. 일반 팬들은 말할 것 없고 프로기사들까지도 이 결과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창호의 완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팬들은
"이창호는 해외징크스가 있다. 외국이라 실력발휘를 못한 것이다."며 자위하면서도 어딘지 떨떠름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일본에선 다시
"이창호란 소년의 바둑은 스승인 조훈현 9단을 상대하는데는 능하지만 전체적으로 아직 무르익진 않았다."
라는 말이 나왔다. 씹어보면 씹어볼수록 묘한 뉴앙스를 지닌 말이었다.
<특별대국, 이창호 3대 1로 완패>
그러나 지금와서 곰곰히 생각하면 창호가 요다에게 3대 1로 진 것은 하등 이상할게 없는 일이었다. 고수들끼리의 승부는 수(手)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좌우한다. 찰나에 일어나는 미세한 흔들림으로 승부는 결정된다. 당시 16살이었던 창호가 요다 특유의 기세에 강한 압력을 받은 나머지 그의 자랑이었던 부동심이 흔들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창호는 2년후 동양증권배에서 다시 요다 9단과 맞부딛쳤다. 실력도 더 나아졌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다시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던 상대였기에 좋은 설욕의 기회라 믿고 전력을 기울였다.
끝내기에 접어들 무렵 바둑은 요다 9단이 미세하게 앞선듯 보였으나 검토실의 프로들이나 관계자들은 창호의 승리를 믿었다. 반집이나 한집반 차이라면 끝내기의 귀신 이창호가 따라잡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믿었다. 창호도 그걸 기대했다.
하지만 요다는 조금도 밀리지 않고 버틴 끝에 1집반을 이겨냈다. 창호에게 밀리지 않는 끝내기 솜씨를 보인 요다의 모습이 이순간 한국 프로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요다가 한국기사들에게 강자의 이미지로 군림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창호의 천적 요다 노리모토>
창호가 요다에게 계속 밀린 것은 요다에 대한 오판 탓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창호는 요다의 겉모습과 그의 대국자세(돌로 판을 깨져라 내리 찍는)에서 강렬한 첫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요다는 겉모습과 전혀 다른 기풍을 지닌 사람이었다..
훗날 이창호 9단, 유창혁 9단과 함께 요다 9단에 대해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 요다는 공격적인 바둑인가.
"천만에. 전혀 그 반대다." (유창혁 9단)
- 요다는 매우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이는데.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의 바둑은 균형이 잘 잡힌 교과서적인 정법을 구사하는 바둑이다." (이창호 9단)
- 특별히 강한 대목은 어디인가.
"특별히 강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기초가 좋고 모양이 좋다. 대체적으로 수비형이며 유리한 바둑을 닦아내는 솜씨도 좋다." (이창호 9단)
- 약점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사나운 접전을 피하고 격렬한 승부를 꺼리는데 있다고 본다. 조훈현 9단이 나중에 그 약점을 캐치하고 '흔들기'로 나가 승리한 것이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유창혁 9단)
<첫인상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이창호>
'흔들기'란 말은 1994년 조훈현 대 요다의 동양증권배 결승전 때 등장한 말이다. 당시 TV 해설을 맡았던 필자가 처음 사용했다고 생각되는데 曺 9단이 침착하고 수비적인 요다 9단을 처음부터 공격적이고 사나운 행마로 자극하여 본연의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창호는 '흔들기'와는 거리가 먼 기풍의 소유자. 더구나 첫 인상의 강렬한 영상 탓인지 아직도 그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한채 창호는 요다에게 계속 끌려다녔다.
생각하면 창호와 요다와의 천적(天敵)관계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잘 지는 창호이고 외국에 나가면 잘 지는 창호이기에 요다와의 첫 대결에서 1대 3으로 패배한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창호는 두번째 만나면 거의 다 이겨내는 사람이기에 '전략의 명수'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그런데 이런 창호의 능력도 요다에게는 철저히 가로막혔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창호지만 가끔 "요다 9단을 만나고 싶다."고 쓰라린 마음을 토로하곤 했다. 수많은 기전에서 승승장구하면 할수록 한쪽에서 요다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러나 요다와의 전적은 1990년대 후반까지도 1승 6패로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언젠가 李 9단에게 그점을 물어봤다.
- 유독 요다(依田) 9단에게 성적이 그토록 나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반드시 이기려고 하니까 더 이겨지지 않았다. 이유라면 그것이 이유일 것이다."
<요다에 대한 강렬한 승부욕>
승부욕이 문제였다고 李 9단은 말하고 있다. 위기십결(圍棋十訣)의 첫머리에 나오는 부득탐승(不得貪勝)이란 글귀가 절로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꼭 그뿐일까. 최초에 요다를 만났을 때 창호가 심리적으로 위축감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마음의 동요를 부르고 마음의 동요는 패배를 부른다. 그리하여 첫 대결에서 1승 3패. 그 이후엔 좀더 훌륭해진 실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모종의 그림자가 승리를 방해한다. 부담감과 승부욕에 어깨가 굳어버린다. 그리하여 1승 6패, 다음은 2승 7패. 이런 식으로 흘러왔던 것은 아닐까.
이창호란 이름은 마주앉은 누구에게나 강한 최면작용을 한다. 그러나 이창호 대 요다의 대결에선 입장이 바뀐다.
이창호는 '돌부처'란 별명 그대로 선천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지만 요다 노리모토란 천적만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이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창호 9단이 조치훈 9단을 이기고 趙 9단은 依田 9단을 이기고 依田은 이창호를 이기는 관계는 매우 흥미롭다.
승부와 마음의 관계는 이렇게 묘하다. 서봉수 9단은 중국바둑에 몇번 이기더니 크게 자신감을 얻었고 이것이 중국의 고수들에게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는 배경이 된다. 이창호가 당대의 거목이라 할 조치훈 9단에게 공식대국에서 6연승을 거두고 중국의 강자 마샤오춘(馬曉春) 9단에게 10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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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7)‥‥‥‥‥‥‥‥‥‥‥‥‥‥‥‥‥‥‥‥ 2001. 11. 6. 火
<한국킬러로 떠오른 요다 노리모토>
요다(依田)가 '한국킬러'가 된 것도 이창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기사들에게 무적의 강자로 뼛속 깊이 각인된 이창호를 유유히 쓰러뜨리는 요다. 신산(神算) 이창호의 끝내기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 요다. 이런 이미지는 그를 만나는 한국기사들의 심혼을 흔들어 놓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이창호 대 요다의 평생 전적을 다시 보자.
1991 특별대국 이창호(흑) 요다(백) 백 2집반승 롯데호텔 X
1991 특별대국 이창호(백) 요다(흑) 백 4집반승 롯데호텔 O
1991 특별대국 이창호(흑) 요다(백) 백 2집반승 일본기원 X
1991 특별대국 이창호 (백) 요다(흑) 흑 불계승 일본기원 X
1993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3집반승 서울 X
1993 동양증권배 이창호(백) 요다(흑) 흑 1집반승 롯데호텔 X
1998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반집승 일본 지바 X
1999 춘 란 배 이창호 (백) 요다 (흑) 백 반집승 중국 우한 O
1999 TV아시아 이창호(백) 요다(흑) 흑 2집반승 중국 텐진 X
2000 잉창치배 이창호 (흑) 요다 (백) 흑 3집승 중국 상해 O
2000 TV아시아 이창호(흑) 요다(백) 흑 6집반승 경주 O
* 종합전적 = 4승 7패
<이창호 대 요다의 평생전적은 4승 7패>
특별대국에서 1승 3패한 뒤 속기대회인 TV아시아 본선과 동양증권배 본선에서 2연패하여 1승 5패. 그 뒤로 창호는 점점 강해져갔으나 요다와는 통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벼르고 벼르던 요다를 다시 만난 것은 무려 5년 만인 1998년의 TV아시아 대회. 그러나 창호 본인의 말대로 승부욕이 앞선 탓인지 박빙의 승부 끝에 반집패를 당한다. 이리하여 1승 6패.
창호는 '역전 반집승'이 전매특허였으나 요다에게는 그의 귀신같은 추격전도 잘 먹혀들지 않았다.
1999년 중국에서 열린 춘란배 본선에서 창호는 요다에게 극적인 반집승을 거둔다. 비로소 요다란 인물이 던진 첫인상의 그물로부터 창호가 벗어나기 시작한 것일까. 이듬해 TV아시아 결승전에선 다시 2집반을 졌으나 2000년에 들어서서는 잉창치배와 TV아시아 대회서 연승하여 총 전적을 4승 7패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창호는 아직 요다에게 빚을 다 갚지 못했다. 일본의 명인이 되어 멀리있는 요다가 요즘 세계대회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바람에 만날 기회가 적어진 것이다.
요다 노리모토란 인물은 이리하여 현대바둑사에서 독특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는 조훈현 9단에게 5승 4패, 유창혁 9단에게 6승 7패, 서봉수 9단에게 4승 1패를 거두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최강의 실력자 이창호에게 7승 4패라는 압도적인 전적을 거두고 있다.
한때 '일본의 자존심' 또는 '일본 최후의 희망'으로 불린 요다 9단. 그가 앞으로 이창호와 다시 대국할 기회는 몇번이나 될까. 3번 이상 맞붙지 않는다면 그는 이창호에게 전적이 좋은채 끝난 세계 유일의 기사로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창호, 세계대회 결승에 처음 오르다>
창호와 요다가 처음 만났던 1991년에 세계바둑계는 또하나의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대는 제3기 동양증권배. 준결승에 조훈현 9단 대 이창호 5단, 린하이펑(林海峰) 9단 대 조치훈 9단, 이렇게 4명이 올랐다. 여기서 창호와 林 9단이 승리하여 창호는 생애 처음 세계대회 결승전을 갖게됐다.
9월 대만에서 결승 1, 2, 3국을 치렀는데 첫판은 林 9단이 흑으로 반집을 이겼고 둘째판은 창호가 1집반을 이겼다. 3국은 林 9단의 불계승.
16세의 나이로 세계대회 결승에까지 진출했으나 아직 무언가가 부족한 모습이었고 린하이펑이란 대가에게는 한수 밀리는 모습이었다. 창호는 그러나 林 9단과의 이 결승전 이후 승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林 9단에게 깊은 호감을 품게된다.
그리고 수줍어하는 성격임에도 창호는 林 9단에 대해서만은 스스럼없이 속마음 한조각을 내보이곤 했다.
-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은.
" 그렇게 무겁게 느낀 경우는 처음이었다."
- 무겁다는건 바둑인가 사람인가.
" 林 9단을 말하는 것이다."
<전적은 2대 2, 승부는 최종국으로>
이창호의 바둑은 네웨이핑(攝衛平), 린하이펑(林海峰),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등의 바둑과 유사점이 있다. 창호도 젊은 시절의 林 9단이 계산에서 무척 정확했음을 잘 알고 있다. 기풍도 그렇지만 창호는 바둑을 떠나 林 9단으로부터 매우 좋은 인상을 받은듯 훗날 프로기사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林 9단을 꼽곤 했다.
林 9단이 2대 1로 리드한 가운데 1992년 1월 서울에서 결승전이 이어졌다. 4국에서 백을 쥔 林 9단은 필승의 형세를 역전당해 4집반을 졌다. TV가 생중계하는등 한국 바둑팬들의 이목이 총 집결된 가운데 1월 27일 롯데호텔에서 마지막 제5국이 열렸다.
바둑은 중반이후 흑의 우세로 시종했으나 끝내기에 접어들자 점점 미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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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8)‥‥‥‥‥‥‥‥‥‥‥‥‥‥‥‥‥‥‥‥‥ 2001. 11. 20. 火
<17세 세계 최연소 챔피언>
2대 2 상태에서 벌어진 창호와 린하이펑(林海峰) 9단의 동양증권배 결승 최종국은 흑을 쥔 린하이펑의 우세로 시종했다. 종국이 가까워오고 있었으나 그 흐름은 변하지 않았고 이대로 승부는 끝날 것만 같았다.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보자.
<기보1>
<기보1> (白) 5단 이창호 VS (黑) 9단 린하이펑
흑의 반면 10집승이 내다보이는 장면에서 창호는 패를 각오하고 백1로 버텼다. 마지막 1분 초읽기 속에서 최후의 강수가 던져진 것이다. 林 9단도 1분 초읽기. 똑같은 초읽기라도 50세의 林 9단 쪽이 훨씬 힘든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흑2로 젖히고 백3 꽉 막아 패. 흑의 꽃놀이패 같지만 백이 먼저 때리는 패라는 사실을 창호는 잊지 않고있다. 흑에게 A의 절대 패감이 있지만 백에게도 B의 절대 패감이 있다.
<기보2>
<기보2>에서 창호는 위쪽 백 3점을 내주고 패를 해소해버렸다. 첫눈에 백이 대망한 모습. 그래서 검토실에서도 처음엔 바둑이 끝났다며 허탈해 했으나 계산을 면밀히 해보니 좀전보다 차이가 살짝 줄어든 것이 아닌가. 그건 다행이지만 바둑은 여전히 반면8집이 강하게 뒤지고 있어 절망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창호가 반상최대의 14로 뻗었을 때 반석같던 국면에 변화가 일어나고 말았다.
<기보3>
<기보3>을 보자. 하변 흑은 5를 선수하면 손빼도 살아있다. 따라서 흑은 5를 선수한 뒤 8의 곳에 두면 된다. 그런데 1분초읽기에 몰린 林 9단은 흑1을 선수하려고 했다. 당연한 선수이고 충분히 떠오를만한 발상이다.
그러나 순간 백2, 4가 놓이면서 흑모양이 뭉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흑1은 집을 내는데는 하등의 도움이 안되는, 오히려 자신의 공배를 메움으로서 스스로 목을 조이는 대악수가 되고 말았다. 林 9단은 부득이 7로 살아야 했고 그틈에 8은 백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바둑은 아직도 흑이 반집은 두터웠다. 그러나 흑9가 마지막 패착이었고(이수로 A에 한점 잡았으면 흑의 반집승)12로 살아가면서 백은 1집반승을 거두게 된다.
이 바둑을 보면 얼핏 운이 좋아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창호가 아니면 이런 역전이 가능하겠는가. 林 9단이 제아무리 초읽기에 몰렸어도 그리 쉽게 실수할 인물이 아니다.
불리하지만 옥쇄와 같은 성급함을 외면하고 꾸준히 수순을 비틀어 상대에게 어려움을 안겨줬기에 그것이 林 9단의 실수를 유발시킨 것이다. 또 상대가 실수했음에도 그걸 모르고 지나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를 들어 위에서 보여준 <기보3>의 흑1과 같은 실수를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창호는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林 9단을 극적으로 꺾고 만17세의 나이로 세계챔피언이 됐다. 지옥같은 한판이었고 극한의 괴로움을 이겨낸 한판이었다. 기적같은 역전승이었으나 이 한판을 진 것과 이긴 것의 차이는 컸다.
세상일은 알 수 없지만 창호가 세운 17세 세계챔피언의 기록은 아마도 50년 내로는 깨지기 힘든 기록일 것이다. 다시 이창호와의 대화.
- 이기고 나서 미안한 느낌은 없었나.
" 초읽기와 미세한 승부에 정신이 없어 바둑이 끝났을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 끝나고 복기를 오래 한 것 같은데.
" 몹시 억울하게 졌는데도 어린 나를 상대로 오래오래 복기하는 林 9단의 모습이 놀라웠다."
<가장 좋아하는 기사 - 林海峰 9단>
창호도 복기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선생님인 조훈현 9단이나 충암고 9년 선배인 유창혁 9단등 주로 대국하는 기사들이 다 어려운 사람들이다. 특히 타이틀을 뺏었거나 할 때는 더욱 어려워서 모기만한 목소리로 복기 아닌 복기를 하곤했다. 선생님이 묻는데도 계속 아무말도 하지 않는 바람에 주위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다.
창호는 그런데 林 9단과의 복기가 아주 맘에 들었던듯 이 동양증권배 최종 결승국만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창호는 자기가 둔 바둑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중요한 바둑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물으면 어제 둔 바둑도 생각이 안나요 하며 웃는다. 역시 많이 잊어버리는 것이 승부의 집중력에 유익한 것일까)
林 9단과의 바둑을 극적인 역전승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이무렵까지 창호의 승부 패턴이었다. 조훈현 9단과의 타이틀전에서도 악전고투 끝에 아슬아슬하게 역전승하는 일이 많았다.
1992년부터는 양상이 달라졌다. 유리한 바둑은 그대로 밀어붙여 이기고 불리한 바둑은 역전시켰다. 그런식으로 모든 기전을 석권해 나갔다. 여전히 포석이 약점이었지만 중반의 수읽기와 사활, 특히 끝내기에서 발군의 힘을 보여줬다.
행마가 무겁고 특히 초반엔 이상감각이 속출하는듯 보이는데 막상 맞붙으면 상대는 무형의 힘에 서서히 밀려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 1992년에 창호는 유일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유창혁에게 최대기전인 왕위전 타이틀을 내주고 만다. 스코어는 4대 3.
<유창혁, 이창호의 전관왕 필사 방어>
이때의 왕위전 도전기 최종국에서 공격의 명수 유창혁은 이창호가 추격해오기 전에 일찍부터 수비망을 격렬하게 흔드는 전법으로 값진 승리를 따냈다. 나는 그때의 신문기사에 이렇게 썼다.
- 여름햇살같이 강렬한 유창혁의 바둑이 겨울산맥처럼 깊고 아득한 이창호 바둑을 쓰러뜨렸다 -
<기보1>
<기보1> (백) 이창호 9단 (흑) 유창혁 9단
3대 3으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벌어진 1992년 왕위전 도전기 최종국이다. 백을 쥔 창호가 1로 눌러버리자 이곳은 모두 백집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창혁은 2를 선수한 뒤 4로 기어나오는 기상천외의 묘수로 백진을 흔들기 시작한다. 하는 수 없이 백5 지키자 이번엔 6의 붙임. 이 두번의 묘수에 이창호의 철석 간장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보2>
<기보2>에서 창호는 백1로 잡았는데 흑2로 옆구리에 붙인 수가 호착이어서 백의 고전은 계속된다. 흑4 때 백5가 이창호의 필사적인 강수인데 유창혁의 대응은 의외로 유연하다. 바로 살릴듯 하던 돌들을 모두 죽이는 전법으로 나온 것이다.
<기보3>
<기보3>에서 백은 다시 흑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흑6에 지키자 백모양보다는 흑모양이 월등해서 흑의 사석전법에 걸려들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7에 돌입하자 유창혁은 8, 10으로 공격하여 대세를 장악했다. 왕위는 이렇게 유창혁 차지가 됐다.
이해 실력1위는 이창호였으나 인기투표 1위는 유창혁이었다. 그리고 유창혁은 막강한 이창호의 화력 앞에서 국내 최대의 왕위 타이틀을 4년이나 지켜냈다. 2년 뒤인 1994년엔 13개의 타이틀을 한손에 쥔 이창호가 천하통일을 노리며 마지막 남은 왕위를 향해 총 공격을 감행해왔으나 유창혁은 역시 막아냈다.
창호는 기록제조기 답게 모든 기록을 경신해 나갔지만 조훈현 9단이 두번이나 해낸 '전타이틀 획득'만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曺 9단 시절보다 기전 수가 두배나 늘어난 탓이 컸다. 그리고 유창혁이란 또하나의 걸출한 인물이 그걸 막았다. 유창혁은 만18세에 늦깍이 프로가 돼서도 일가(一家)를 이룬 드문 존재였다. 그리고 창호와 유창혁은 둘 사이에 이어지는 끝없는 대전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한층 두텁게 쌓아갈 수 있었다. 2001년 11월 현재 두사람의 전적은 창호가 80승 40패로 앞서있다. 3판중 2판을 창호가 이긴 셈인데 이 승률은 조훈현과 서봉수 사이의 승률과 매우 비슷하다.
93년에 창호는 드디어 조치훈과 대면하게 된다. 또하나의 괴상한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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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이야기 (19) ‥‥‥‥‥‥‥‥‥‥‥‥‥‥‥‥‥‥‥‥‥ 2001. 12. 4. 火
<조치훈 9단과의 첫 진검승부>
창호와 조치훈 9단과의 만남은 이전에도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TV참피언이 대결하는 일종의 친선대회. 2번 만나 1승 1패였다.
93년 동양증권배 결승전에서 두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것이 이창호 - 조치훈 두 천재가 벌인 최초의 진검승부였다. 창호는 이제 막 성년으로 진입할 나이인 만18세, 趙 9단은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만40세였다.
대국장소는 제주도. 때는 바야흐로 유채꽃이 만발하는 봄. 풍광이 아름다운 제주도에서도 서귀포의 해변은 특히 근사하고 이중에서도 대국장이 설치된 하이야트호텔의 전망은 가장 멋있기로 정평이 있다. 아무튼 조치훈 대 이창호의 대결은 빅카드여서 국영TV인 KBS가 현지에 중계팀을 보내는등 법석이었다. 해설은 조훈현 9단.
스포츠라든가 다른 종목의 생중계 해설은 현역을 떠난, 선수로는 한물간 사람이 하기 마련이다. 야구의 경우 박찬호보다 공을 못던져도 얼마든지 해설은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둑만은 묘하게도 대국자보다 실력이 낮으면 정확한 해설이 어렵다.
야구에서 박찬호의 공을 보고 잘 던졌다. 또는 실수했다고 알아보기는 아주 쉽다. 하지만 바둑에서 초일류 실력자인 대국자가 정신을 집중하여 오랜 시간 끝에 찾아내는 수순을 해설자가 즉각 좋다, 나쁘다 판단해 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것이다.
미세한 바둑의 형세판단에 이르면 해설의 어려움은 점점 가중된다.
<대국장은 제주도, 해설자는 조훈현 9단>
사태가 이러하기에 조훈현 9단이 생중계 해설을 맡아준다면 방송국으로선 그보다 좋을 수 없다. 하나 현역 최고 선수들은 고사하고 신인들조차 명색이 토나먼트 기사들은 해설과 같은 외도를 꺼려한다. 기합이 빠져 승부가 느슨해지는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바둑계에선 TV해설을 맡으면 성적이 떨어진다는 것이 통설이다)
조훈현 9단은 그러나 이판의 해설을 시작으로 수많은 해설을 맡았으나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그 또한 놀라운 일이다.
아무튼 한사람은 자신의 타이틀을 차곡차곡 챙기고있는 제자요, 또 한사람은 젊은 시절 심중의 라이벌인 조치훈이었기에 曺 9단은 현장에서 직접 이판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5번기의 제1국은 흑을 쥔 趙 9단이 포석에서 리드하여 줄곧 앞서나갔으나 결정타를 던지지 못하다가 종반 대역습을 허용하여 불계패했다. 趙 9단은 그러나 이 패배 후에도 여유가 있었고 그리하여 이 한판은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1국의 패배 후에도 여유있던 趙 9단>
<기보1 - 1993년 동양증권배 결승1국>
<기보1>을 보자. 이것이 1국인데 흑이 조치훈 9단이고 백이 당시 6단이던 이창호다.
지금은 중반전 모습인데 포석에서 성공한 흑의 趙 9단이 여유있게 앞서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흑1로 공격하자 창호가 백2로 웅크린 점. 이 느리고 둔한듯 보이는 수가 실은 대추격의 발판이 된 최고의 한수였다.
다시말해 흑이 1로 두지않고 A에 붙여 중앙을 봉쇄했으면 흑의 낙승이 예고되는 국면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창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백2를 보지 않고서는 이곳이 요소인지 알기 어렵다. 흑1도 당연해 보였는데 백2가 두어지는 순간 "아! 그곳이 급소였구나."하고 모두들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趙 9단은 조훈현 9단 홍종현 8단등 한국기사들과 함께 바닷가 생선횟집에 갔다. 그곳에서 趙 9단이 曺 9단에게 농담 한마디를 던졌다.
한국말에 약간 서투른 趙 9단이 낮은 톤으로 말했기에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당신은 제자에게 너무 쉽게 져주고 있다. 그래서는 제자가 제대로 배울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요지의 말이었다. 曺 9단이 제자에게 시달린다는 소문은 趙 9단도 알고 있었기에 웃으면서 재미있게 유모어를 던진 것이지만 여러가지 뉴앙스가 담긴 한마디였다.
선문답같은 이 말을 해석해보면 우선 "져준다"는 대목에서 "창호는 아직 강하지 않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창호는 당신 조훈현을 이길만큼 강해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조훈현 당신은 창호에게 그렇게 지곤(져주곤)했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조치훈과 조훈현의 선문답>
曺 9단은 그말을 듣고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무어라고 설명할 수는 없네. 일단 두어봐."
라는 대답을 했다. 창호는 趙 9단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설익은 데가 많다. 포석도 약점이고 행마에서는 특히 曺 9단의 기풍으론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는 대목이 많다. 그러나 승부에서는 노상 지고있으니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창호의 강점은 <기보1>의 백2가 보여주듯 자세히 보지않으면 좋은 수 같지 않은 수를 꾸준히 두고있는 것인데 이것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승부호흡인데 이대목에 이르러서는 어느 누구도 창호의 길고 유장하며 느릿하면서도 끈질긴 호흡의 무서움을 제대로 전달하긴 어렵다.
"나이는 어리지만 나보다 정신력이 좋다. 수양도 더 좋아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무튼 趙 9단은 첫판에서는 졌지만 이번 5번기에서 창호라는 소년강자를 충분히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이틀후의 제2국에서는 팽팽한 접전 끝에 묘수 일발을 던져 필승의 형세를 구축했다. 하지만 趙 9단은 이때부터 창호의 승부수와 마지막1분 초읽기등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기록에 남을만한 실수를 연발하더니 '반집'을 지고 말았다.
<조치훈, 끝내기에서만 6번 연속 실수>
<기보2>
<기보2>를 보자. 이번엔 백이 조치훈 9단이고 흑이 이창호 6단이다.
중반까지 팽팽하다가 창호의 흑1이 대실수여서(그냥 3에 두어도 백은 어차피 후수로 살아야 한다) 손해를 봤다.
설상가상으로 趙 9단의 백10이 뼈속을 파고드는 통렬한 일격. 흑은 12로 잡고싶지만 백A로 두는, 흑의 자충을 유도하는 묘수가 기다리고 있어서 11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흑은 살긴했지만 후수였고 너무 크게 당하여 이번만은 소생이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기보3> = 趙 9단의 연속되는 실수
<기보3>
창호와 趙 9단은 다같이 1분초읽기. 바둑은 백의 필승지세에서 끝내기 장면.
여기서 창호는 흑1로 덤벼들었는데 여기까지 가지못하면 어차피 진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안되면 던질 생각이다. 그런데 趙 9단의 백2가 최초의 실수. 5로 씌우면 바둑은 끝이었다.
8로 A에 두었어도 역시 백이 이겼다. 12로 13에 끊었어도 백승.
이 장면에서만 연속 3번의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100수 안에 시간을 다 쓰고 나머지 200수를 1분에 두면서도 별 탈이 없던 趙 9단이 이날은 술에 취한듯 비틀거린 것이다. 스스로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보4> = 다시 3번의 실수, 합계 6번의 실수 끝에 반집패.
<기보4>
趙 9단도 속이 상한듯 3으로 몰았는데 이수가 또 실수다. 4로 끊었을 때 5로 따낸 것도 불각의 실수. 보통은 때리는 것이지만 지금은 6에 빠져야했다.
창호의 흑6이 날카롭다. 대개 이렇게 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수로 되어있지만 지금은 6으로 넘은 다음19로 재차 넘으면 흑이 오히려 이득이다. 趙 9단의 실수도 실수지만 이런 복잡한 계산을 한눈에 알아보는 창호의 능력 또한 놀랍다.
실수를 알아보는 눈이 없다면 실수는 그냥 묻힐 것이다. 승부세계에서 그렇게 묻힌 실수는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21로 A에 두기만 했어도 흑이 이겼다. 21이 6번째 실수이자 최후의 패착으로서 창호는 B의 마지막 큰 끝내기를 차지하여 기어이 반집을 이기게 된다.
<반집, 또 반집>
조치훈 9단으로선 기막힌 반집패였다. 그런데 왜 하필 반집일까. 실수가 많았으면 그 이상도 이길 수 있을텐데 왜 하필 반집일까. 패배한 쪽으로선 아예 많이 졌더라면 억울함도 덜 했을 것이다.
3국은 두달후 서울에서 두어졌는데 趙 9단은 이번에도 바둑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속 실수하여 또 반집을 지게 된다. 겉모습은 창호의 3대 0 완승. 그러나 내용은 거리가 멀다. 趙 9단은 이 패배를 도저히 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호는 이때의 얘기를 하면 "내가 세판 다 나빴는데요."하며 웃는다.
趙 9단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바둑은 분명 좋은데 왜 이겨지지 않는 것일까 하는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이 소년강자에겐 아주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을까. '반집'에 대해선 아마도 귀신붙은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천하의 대 승부사 조치훈으로서도 이창호란 소년은 불가사의한 존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