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에 가면 배모양을 하고 있어 배산이라고 하기도하고
미인의 눈썹처럼 아름다운 산이라고 부르는 아미산이 있다
조선의 대학자이고 풍수지리에 능통했던 서거정 선생님이
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순창을 평가했는데 이곳에
" 산경표 " 라는 지리서의 저자로 알려지신 여암 신경준 선생님이 계신다
신경준 선생님은 숙종 때 순창읍 가남리 남산마을에서 태어나셨으며
영조 임금님 때 최고의 지리학자이자 실학자이시다
여암 선생님의 산경표는 산 줄기를 이어가는 선 산행 ( 종주 산행 )으로
백두대간 종주가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되어서
국내 산행 방식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재능이 뛰어나신 분으로
네 살에 천자문을 읽고 다섯 살에 시경을 읽었으며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서 한양으로 유학을 해서 신 학문을 접했고
이 때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게 된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학문의 진리는 스스로의 사색과 경험의 결과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젊은 시절을 전국 유명한 산들을 두루 답사하면서 산수 유람을 즐기셨다
이 때의 경험이 훗날 교통 과 지리에 대한 저서 편찬에 산실이 되었다
여암 선생님은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서른 세 살까지 생활하시다가
그후 10년은 고향 순창에 계시면서 저술에만 몰두하셨는데
그때 선생님 학문의 결과물로 " 훈민정음 운해 와 강계지 " 가 태어 난 것이다
선생님은 늦은 나이 43세 때부터 관직에 계시다 오십팔 세에 순창으로 가셨는데
그때 영의정이던 홍봉한 선생님이 영조 대왕께 강력히 천거하여 다시 관직에 나갔다
영조 대왕은 선생님께 " 동국여지편람 "을 감수하여 편찬하게 하셨고
그 실력을 인정받은 선생님은 공로로 승지가 되셨다
" 그대가 부모가 없다고하니 이제 섬길 사람은 나 뿐 인가하오
나를 버리고 멀리 가지 마오 " 라고 영조 대왕이 말씀 하실정도로 신임을 하셨다
그후 영조대왕께서 항상 " 밝은지고, 곧고 확실한지고로 칭찬하던 영의정 김치인은
타고난 성품이 고결하고 도의를 지키는 의지가 곧았던 정승으로
대전통편을 펴내고 청백리로 국정을 보살폈는데
이조정낭이던 최일남의 영의정인 " 김치인 탄핵 사건 "으로 선생님 께서
충청도 은진으로 귀양살이 갔다가 육십 세때 다시 승지등 여러 관직을 하시다가
고향 순창으로 귀향을 하셨는데 영조 대왕 뒤를 이은 정조대왕께서
다시 승지의 벼슬을 주면서 세 번을 부르셨어도 그 모든 것을 사양했다
그러다가 그 다음 해 1781년 5 월 21일에 친구들 과 바둑을 두시는 중에 혼절 하시면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님께서 저술한 " 도로고 ( 전국 주요 도로와 각 지방의 주요시설까지의 거리는 물론
역로, 해로등 전국의 도로망에 대한 정보를 총 망라한 글 ) 는 특히 유명하다
실학자로써 왕명을 받아 국가적인 편찬 사업에 그의 재능 과 학식을 유감 없이 발휘하셨고
우리 산천에 대한 체계적인 파악으로 조선 후기 지리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셨던 것이다
여암 신경준 선생님께서는
순창의 아름다운 아미산의 품에 안겨 편안히 안식을 하고 계신다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가까운 순창에 계셨다는 생각을 하자 왠지 순창이 더욱 정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