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
2023. 8. 13. 주일오전예배
우리 성서에는 창세기 처음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까지 여러 주제가 있을 수 있으나 저는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것은 어느 성경 한 부분에 있는 말씀이 아니고 성서 전체에 조용히 흐르고 있는 큰 대목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제 아무리 세상 죄악에 빠져있는 자라도 이 부르심에 예외를 두지 않고 기다리고 계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은 주의 백성이 잠시 시험에 빠져 주님께 멀리 있다면 더욱 하나님의 부르심은 간절하십니다. 또한 이 땅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라도 언젠가는 본향으로 부르시는 그날이 한 번씩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성도에게도 주님은 자신을 숨기지 않고 나타내시고 부르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오늘은 여러 가지 부르심보다는 이번 7,8월에 몸 된 교회 식구님들이 갖고 있는 각자의 빈들판 속에서 내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과 깊은 사귐에 들어가는 모습이 얼마나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감사할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많이 감사가 되는 시간들입니다. 우리가 갖는 이 빈들판의 사귐은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깊은 사랑의 부르심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생명적인 사귐이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 주님의 백성이라면 주님께서 언제라도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 일군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주님의 돕는 자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자원하며 헌신했던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이 오늘 주님의 마음을 따라 보냄받아 나아가길 원하는 우리 몸 된 교회와 식구님들에게 영광스럽고 힘있게 펼쳐나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의 보내심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보내심을 받고서도 어떨 때는 긴가민가 이것이 정말 나를 보내셨는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할 때는 그러한 의심은 사라지고 주님과 함께라는 믿음으로 우리의 자리를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28장에 벧엘 광야에서 야곱이 보았던 환상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천사는 날개가 있어서 굳이 사닥다리가 필요 없을 텐데 왜 주님이 이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을 보여주셨을까요? 주의 백성, 우리들을 위해서 그러하셨다고 생각이 듭니다. 천사처럼 하나님의 보내심을 이 땅에 받은 우리라도 내 스스로 움직이거나 행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길 속에서, 주님이 허락하신 그 사닥다리라는 정해진 주의 법 가운데서 행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닥다리를 오르고 내릴 때 우리의 행동은 어떻습니까? 참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잡고 한칸 한칸씩 오르고 내리게 됩니다. 주님이 길을 열어놓으셨지만 내 주님을 모시고 근신하며 보내신 이의 뜻을 헤아리며 신실하게 주의 법을 따라서 섬겨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섬김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내심을 받았어도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였다면 그 일을 아무리 대단하게 했을지라도 우리 주님은 “나 너 모르겠다” 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도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다고 요한복음에는 곳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보내셨던 삼 년의 기간뿐만 아니라 갈릴리 나사렛에서의 평범한 삶에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주님이셨고 그러한 삶을 꾸려가셨습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는 그 뿌리가 이 땅이 아닌 천국에 있습니다. 바로 농부 되신 아버지 하나님께 뿌리를 두신 주님이셨고 포도나무로 서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전에는 주님과 관계 없었던 자였는데 주님께 접붙임 받은 가지여서 주님께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주님 때문에 농부되신 아버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성도는 내 주님과 함께 그 뿌리가 천국과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만 그 뿌리가 위로 있기 때문에 이 땅에는 잠시 잠간 뛰듯 날 듯 펼쳐가는 것이 주님의 포도나무 가지된 우리의 삶이라 생각됩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성령과 신부가 가라사대 오라 하시는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부르심과 소망이십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기억할 것은 마태복음 10장에서는 밭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하시면서 추수할 일군을 찾으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도 있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빈들판의 사귐에서 우리는 내 주님 안으로 들어가 풍성한 꼴을 얻고 또 얻었습니다. 또한 주님 모시고 보내심을 받아 섬겨가는 길에도 풍성한 꼴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시는 목자가 양의 문이 되어서 목자 되신 예수님의 허락 속에서 들어가 사귐하며 꼴을 얻으면서 나아갈 때도 꼴을 얻는다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에만 순종해야 될 줄 압니다. 타인의 음성은 거절하는 것이 제대로 주님을 따르는 양 된 자세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렛에서 사실 때에 가난한 집안의 큰 형으로, 큰 오빠로 살아가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형제들이 자신의 형과 오빠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주님의 빛 가운데 복음을 깨우치고 형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오빠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평범하게 보이는 어쩌면 비참하게 보이는 나사렛의 삶이지만 주님의 인격과 삶에는 남다른 빛과 생명과 성실함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에 정근모 박사님의 간증을 잠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경기고를 수석으로 입학했으나 몇 달 후에 검정고시로 고교과정을 일찍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차석으로 입학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대학 기간 동안 가난한 살림에 자기 아우들을 뒷바라지하느라 과외 교사를 하면서 가정을 지켜갔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기술자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아서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했지만 그 소식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왜 그렇게 이과생이 문과의 길을 가느냐”고 미국 유학길을 추천해줍니다. 그래서 미국 미시건 주립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건너뛰고 박사학위를 받게 되지요. 그 때가 스물세 살이었습니다. 스물네 살에 플로리다 대학교의 핵 물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학생들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꼬마 교수’라는 별명을 갖고 지내셨다고 합니다. 차후에 귀국해서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하셨지요. 지금 한국의 원자력 기술이 세계적으로 발전하는데 이바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기 사모님께 이끌려서 교회를 다녔는데 도대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안 믿어지고 하나님의 존재도 안 믿어지니까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 아픈 손가락이 있었는데 자신의 아들이 난치병에 걸려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실력 있는 과학자이지만 한없이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뭐 큰 잘못한 것 없는데, 제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고 했는데 왜 우리 집안에 이러한 어려움을 주십니까?”하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서를 읽다가 에베소서 2장 1절 말씀이 그의 냉랭한 가슴을 녹였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는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주님이 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구나! 내가 참 어리석었구나’ 하면서 그때부터 드리는 예배가 눈물의 예배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인가는 예배를 마치고 나서 더이상 체면이고 뭐고 펑펑 울면서 “주님, 저를 기억하시고 주님께서 저희 가정을 살펴주시는 것 감사합니다. 이제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그가 했던 고백은 “저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찬이기를 원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성도의 고백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잘 알듯이 엘리야 선지자도 귀한 분이시지만 사르밧 과부도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도 뛰어난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그를 공궤했던 수넴 여인도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이어갔으며, 하나님의 돕는 자로 매순간 자기가 보냄받은 곳에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다는 점입니다. 이번 우리 교회의 8월달 달력에 씌어 있는 문구를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내 주님과 함께라면 언제나 감사하리’ 우리 기억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따라 말해봅시다. ‘내 주님과 함께라면 언제나 감사하리’ 아멘!
사도바울 선생님이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주님의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지금의 튀르키예, 남서쪽에 있는 아시아로 가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그곳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두니아로도 가려고 애를 썼으나 주님의 영이 허락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도가 당연한 일이고 사도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과 관계없이 움직였다가는 주님은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복음 전파도 우리의 평범한 삶도 사닥다리라고 말했던 것처럼 스가랴 4장의 우리 주님이 성전의 기초가 되고 성전을 세울 때 좌우를 균형 잡게 해주는 다림줄이 필요하듯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절대적인 필요조건입니다. 보내심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는 길에 내 스스로가 아니라 주님의 심장과 주님의 허락 속에서 움직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얻고 살아 가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에 사도바울 선생님은 한가지 환상을 보았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에 있는 한사람이 손짓하며 말하고 있었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사도바울 선생님은 이 환상이 바로 마게도냐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인 줄 알고 인정하고 순종했습니다. 또 그 길에서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에서 고난을 받아 옥살이를 하면서 매를 맞고 착고에 채였지만 마음은 주님 모신 행복이었고 그에게서 감사와 기쁨의 찬송은 옥중을 울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어느 곳에 분명히 있겠지만 우리가 분명히 또 하나 알아야 될 것은 지금 주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이 자리가, 각자의 가정과 직장과 학교의 자리가 바로 주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리라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줄 수 있는 위치라는 것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고 주님은 우리를 보내시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