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9.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요 20:1~8
*제목; 요한복음강해(41) 부활의 첫 번째 증인
1. 지난 수요성령집회 이야기
주님이 우리의 죄값을 다 지시고, “다 이루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자리에 남아 있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한 구원은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려면, 정결한 믿음(정혼 후 과정=구원의 선언 후 과정)과 거룩한 신부의 삶(결혼 후의 아내의 삶=구원받은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신랑되신 주님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삽시다!
2. 부활의 첫 번째 증인, 막달라 마리아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요 20:1)
주님은 지난 시간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날이 바로 금요일이었으니, “안식 후 첫날” 즉, 3일 후에 약속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세상은 아직도 “어두움”(무지와 죄) 가운데 있어 주님의 부활하심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 이 부활을 가장 먼저 경험한 자가 나옵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성경에는 ‘마리아’가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나사로의 동생인 베다니의 마리아, 그리고 오늘 ‘막달라 마리아’... 당시 예수가 흔한 이름이었듯이, 마리아도 흔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여러 명의 마리아를 구별하기 위해서, 그 이름 앞에 지역 명을 기록하는 관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마리아는 ‘막달라’라는 지방출신의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낸 자입니다.(눅 8:2, 막 16:9)
이후 갈릴리에서 예수를 따르며 돕던 여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눅 8:1~2), 4복음서 모두 그녀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매장의 목격자라고 전합니다.
‘요 19:25~26’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사랑을 받았던 익명의 사도와 함께 십자가 곁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묻히는 것을 지켜본 뒤(막 15:47), 부활절 아침에 다른 두 여자와 함께 예수의 시체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으로 갔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달려갔다가 베드로와 함께 돌아왔으나 베드로는 빈 무덤을 보고 놀라 그녀를 남겨둔 채 떠났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이 마리아에게 나타났고, ‘요 20:17’에 따르면 주님께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준 베다니의 신비스러운 마리아(요 12:3~7), 이와 비슷하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예수에게 와서 향유를 붓고 죄를 용서받은 여인(눅 7:37~48)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이 세 여인을 동일인물로 오해해서 설교했고, 이후 이런 오해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 여인은 다 다른 사람입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녀가 가장 먼저 주님의 무덤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일곱 귀신을 좇아내신 후부터 줄곧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섬겼던 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와 끝까지 함께 했고, 오늘 부활의 가장 먼저 목도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항상 생명과 역사와 능력의 주인이신 주님과 늘 함께 하려했던 자였기에, 죽으신 후에도 그 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비록 무덤이라도 주님께 달려갔던 자였습니다.
늘 주님과 동행하면, 늘 주님이 내 삶의 자리에 같이하시면, 우리 삶은 주님의 은혜로 넘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날마다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과 동행하려고 애를 쓰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자가 됩니다.
둘째는 그녀가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 앞에 다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갔습니다. 십자가 앞에 그들의 믿음과 주님을 향한 부족한 사랑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와 죽음을 끝까지 지킬 정도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 주님을 향한 사랑이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도하는 은혜를 누리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주님을 이토록 사랑했습니까? 그녀가 받은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일곱 귀신’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큰 고통 가운데 있었던 그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주님이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 받은 사랑만큼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만큼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 또한 어리석음이 있었습니다.
‘11절’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요 20:11)
늘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을 크게 사랑하는 자였으나, 믿음은 아직 부족합니다.
“빈 무덤”은 울어야 할 일입니까? 기뻐해야 할 일입니까? 당연히 주님의부활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니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있습니다. 아직 믿음이 바로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은혜가 많아도 사랑이 많아도, 믿음이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또 ‘14절’에서도 그녀의 부족함이 드러납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요 20:14)
사랑이 많고 은혜가 많아도 믿음이 부족하니, 주님이 옆에 계셔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곁에 계시면서 여러분의 삶을 끝까지 이끌어가고 계신 주님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바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신은 나타내십니다. ‘16절’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요 20:16)
한 신학자는 여기서 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르시는 음성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자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비록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자신과 끝까지 함께 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향상 사랑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라보시고, 또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우리의 주님을 향한 태도와 사랑이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이 놀라운 사랑의 교감은 다음 구절로 귀결됩니다. ‘17~18절’입니다.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 20:17~18)
부활한 주님을 전하라는 사명이 부여된 것입니다. 사명은 이런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리고 주님이 깊이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사명의 유무는 주님의 사랑의 유무와 같은 말인 것입니다. (베드로로 그랬습니다.)
여러분 사명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뻐하십시오. 주님이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사명을 받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다시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사명은 사랑이고, 믿음입니다. 아멘.
첫댓글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도한 막달라 마리아의 은혜. 그 은혜를 누리려면 늘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사랑할 수밖에 없는 풍성한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주님이 곁에 있어도 알지 못하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결국 풍성한 "믿음"을 간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한 주간이 그런 날 되기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