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후(任元厚)의 초명(初名)은 임원애(任元敱)이다.
과거에 급제하였고, 인종(仁宗) 초에 여러 차례 옮겨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으며, 합주(陜州)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개성부(開城府)로 옮겼는데 모두 치적이 높았다. 왕이 임원후의 딸을 맞아 비(妃)로 삼으니, 드디어 〈임원후를〉 예빈소경 어사잡단(禮賓少卿 御史雜端)으로 임명하였으며 갑자기 참지정사(叅知政事)로 발탁하였다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바꾸었다.
묘청(妙淸)과 백수한(白壽翰)이 간사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니 임원후가 상서(上書)하여 그들을 죽여서 화근을 끊을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답하지 않았다.
다시 참지정사 판공부사(判工部事)가 되었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서경(西京)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서를 내려 임원후와 김부식(金富軾)을 중군수(中軍帥)로 임명하였으며, 곧이어 임원후에게 명령하여 도성에 머물며 지키게 하였다. 후에 동덕좌리공신(同德佐理功臣)의 칭호와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부(開府儀同三司 檢校太傅)를 하사하였다. 곧이어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삼았다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고쳤는데, 〈임원후가〉 표문을 올려 최진(崔溱)에게 양보하려 했으나 〈왕이〉 답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어 전주(銓注)를 매우 공정하게 하자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여 이르기를, “산도(山濤)도 이보다 더 잘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후〉 수태보 판서경유수사(守太保 判西京留守事)를 더하였다.
의종(毅宗)이 즉위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고 정안후(定安侯)로 봉하였으며, 조회할 때 〈임원후에게〉 전각에 올라와 절하게 하니[行禮] 간관(諫官)들이 논박하였다. 드디어 선충안사좌리동덕(宣忠安社佐理同德功臣) 칭호와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상주국 정안공(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守太尉 上柱國 定安公), 식읍(食邑) 2,000호, 식실봉(食實封) 600호를 더하였으며, 부(府)를 설치하여 수령부(壽寧府)라 이르고 요속(僚屬)을 두었다. 〈의종〉 10년(1156)에 죽으니 68세였다.
임원후는 도량이 넓고 깊었으며 풍채에 위엄과 무게가 있었다.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였다. 재상이 되어서도 근검하고 청렴결백하였으며, 10년 동안이나 부귀를 누렸다. 묘청의 요망한 말을 재상들이 모두 따르고 믿었는데, 임원후만은 홀로 물리치고 따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의 현명함에 감복하였다.
아들은 임극충(任克忠)·임극정(任克正)·임보(任溥)·임유(任濡)·임항(任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