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 21,28)
교회는 오늘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엘리사벳 성녀는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깊은 신심을 바탕으로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 나가 그곳에서 사망하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하여 기도 생활과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고, 1231년 스물넷의 이른 나이에 선종한 그녀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다.
이 같은 성녀를 기억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어제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루카 복음의 말씀으로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 마치 그 날이 세상의 종말과도 같이 다가와 모든 이들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의 인물 노아와 롯의 경우를 들어 이야기하십니다. 우선 노아의 경우, 노아는 창세기 6장에서 7장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성경은 노아를 일컬어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라고 칭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던 노아는 모든 이가 죄로 타락한 시기에 유일하게 의로운 사람으로서 40일간의 홍수로 세상 모든 것을 쓸어버리려는 하느님의 뜻을 미리 알고 방주를 만들어 목숨을 구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한편, 롯의 경우는 창세기 19장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죄의 도시 소돔을 하느님께서 불벼락으로 벌하실 때, 유일하게 구원받은 인물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불타는 소돔을 뒤로 하고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뒤를 보지 않고 앞으로만 걸어가야 하는 그 때, 롯의 부인은 뒤를 돌아보고 결국 그 자리에서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는 창세기 19장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그 롯입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구약의 두 인물 노아와 롯을 등장시켜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때가 마치 그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때가 구약의 가장 큰 하느님의 벌이 내린 시기, 40일간의 홍수로 세상 모든 것을 쓸어버린 그 때, 그리고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려 소돔을 멸망시킨 그 때와 같을 것이라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노아와 롯을 등장시키며 그 날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 말을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은 그 인물의 등장만으로도 그 날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의 마음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노아 때 홍수로 모든 사람이 죽었던 것처럼 그 날 역시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인가, 또 소돔을 불벼락으로 없애버리던 그 때처럼 그 날 역시 그러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공포에 떨었을 군중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렇듯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키는 구약의 인물들을 등장시키셨던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어제 복음 말씀에서 들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이해 방식을 뛰어 넘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존재 방식은 하느님만의 특별한 사랑의 방식으로 이 세상 안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눈에는 이미 와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사랑의 실천 안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또 다시 반복하여, 그러나 조금은 다른 어조로 지금 이 순간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도래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을 변화로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급박한 어조로 예수님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그리고 그 나라의 도래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삶의 변화에 대한 급박하고도 절박함.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편, 오늘 독서의 지혜서의 말씀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이들이 왜 그 아름다움을 창조한 하느님은 알아보지 못하는가를 개탄하듯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지혜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불이나 바람이나 빠른 공기, 별들의 무리나 거친 물, 하늘의 빛물체들을 세상을 통치하는 신으로 여겼다. [...]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은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1-2.9)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정작 그 아름다운 모든 것을 창조한 하느님의 진리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그저 무서운 세상 종말처럼 맞이하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그 나라가 우리 각자에게 아름다움으로, 선함으로 그리고 진실됨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음에도 우리가 눈과 귀와 마음을 닫은 채 그것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결국 하느님의 나라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두렵고 무서운 그래서 피하고만 싶은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말씀은 어떤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진리가 드러나게 되는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때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시편19(18),2-3)
오늘 화답송의 이 말씀처럼 지금 이 순간,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하느님의 솜씨를 알려주며 그 모든 것을 낮이 전하고 밤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의 모든 것이 하느님 그 분의 놀라우신 업적을, 하느님 그 분의 나라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와 있음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처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바로 알아보고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지켜나갈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넘치도록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여 여러분의 삶이 이미 이 세상에 온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 2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