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적인 종교성,
곧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신 불신 간에
누구나 다 장래의 극락이나 천당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기본욕구 가운데 가장 높은 차원의 지고지선의 욕구입니다. 다만 그것 자체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욥이나 엘리바스와 같은
이들이 매우 보수적인 신앙인들이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에 가장 보수적인 신앙인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은 사단의 자식들이었습니다(요8:44)
욥은 육체 밖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겠다고 말 하는데 NIV성경에는
'in the flesh'(욥19:26) 곧 육체 안에 있을 때입니다. 육체 밖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육체 안에 있을 때 봤습니까?
육체 밖에 있을 때에 본 겁니까? 육체 안에 있을 때 봤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이게 바로 주의 영광을 보는 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신의 흙집을 벗어나서 죽음 다음 그 날에
가서 영광을 볼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고난이며 어렵고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인식이 깔려있습니다. 욥처럼 말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왜 행함이 없는가?
왜 사랑이 없는가? 그 이유는 교회가 욥과 같은 신자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과 같은 일꾼을 만듭니다. 그 동안 제자 훈련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제자 훈련의
한계점이 바로 계속 가르쳐서 욥처럼 보수적이며 완전무결한 신자를 만드는
것이므로 성경에 대한 지식만 늘어갈 뿐 도무지 사랑이 없습니다.
그건 원어를 연구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신학과 영성, 지성과 경건을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결론은 성령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성령님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의 것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경건으로 승화시킵니다.
지식으로 획득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령으로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성적 교양주의로 흐르고 맙니다. 항상 가르치면서 더 깨끗해라. 더 거룩해라.
더 열심 내라, 더욱 충성하라.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깨끗하라 이겁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보다는 우월해서 이겨먹는데 자기는 못 이겨요.
자기 속에 일어나는 송사와 변명은 못 이겨요.
욥기에서 엘리바스나 소발이나 빌닷은 계속 장군 하는데 욥은 끝까지 멍군입니다.
욥이 어디 가서 나가떨어지느냐면 욥32장에 가서 세 친구가 먼저 입이 막혀
손들고 떨어져 나갑니다. 더 이상 욥 앞에 공격할 자료가 없어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과 같이 진짜 난다 긴다 하는 엘리후가
와서 욥을 하나님께 연결시켜 줍니다. 그 만큼 욥은 인간적으로 완전하고,
말도 완전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완벽합니다. 그야말로 보수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랑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없습니다.
언제나 자신이 했다고 하지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 고백이 없습니다. 내가 다 했고, 내가 하나님 앞에 할 말 있으므로
자기는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상을 받을 만 하다고 주장하면서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이시라 내가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이런 고백을 하지 못합니다.
고난의 원인이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은 욥에게 있다 하고 욥은 하나님께 있다고 봅니다.
개인이나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응보가 맞는데 지금 이 친구들은 고난을 두고만
장군 멍군할 뿐이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습니다.
자신이 원인이면 자신에게 자책이나 자랑이 돌아가지만 바울과 같이 하나님이
원인이 되면 결과는 하나님께 찬양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의는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됩니다. 주께서 너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의롭고, 더 깨끗하고, 더 충성하고, 더 정결하고,
더 열심히 해야 만이 천국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충성의 할부금을
제대로 갚아야만 하늘의 영광에 들어가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더 낫지 못하면' 이 말은 '더 엑설란트 하지 못하면' 이 말입니다. '더 낫고
다른 차원의 의'가 아니면 이 말입니다. 그것은 욥의 의와 같은 인간의 의가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의 의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따른 의를 말합니다.
내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입니다. 믿음으로 난 의, 곧 다른 차원의 의가 아니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초수급은 성령세례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심을 알아보고 또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이심을 알아보므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이지만 천국에서는 그 보다 작은 자가 없습니다. 그는 성령이 임하시기 전의 사역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천국의 커트라인 바로 밑에 아슬아슬 한 겁니다.
그럴 수는 없지만 만약 율법에 완벽한 바리새인이 있다면 천국의 커트라인에 설 겁니다.
세례요한이 천국의 커트라인에 선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 그래서 율법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이
구원의 커트라인 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도 구원의 커트라인 밑에 있다가 통과한
사람입니다. 더 나은 의가 뭐냐면 “하나님을 만난 의”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의, 인간의
종교적인 의와 하나님을 만난 의는 다릅니다. 인간의 종교적인 의는 커트라인이 없습니다.
인간의 종교적인 의의 특징은 환경과 사정이 바뀌면 변형되고 맙니다. 상황윤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test)해 보시는 것, 온전하게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나 시험해 보시는 이유는 욥에게처럼 한 번 빼앗아 보시는 겁니다. 환난과 곤고를
줘 봅니다. 그 믿음의 집이 무엇으로 지어졌는가? 지식과 환경과 여러 가지 여건으로
만들어졌는가 그래서 그 시험을 이기고 옳다함을 인정받은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 생명의 면류관(약1:12)은 바로 시들지 않는 면류관입니다.
그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받은 사람의 특징을 가진 이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3:11-12)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3:13)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환경과 사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환경과 사정을 욥에게 뽑아버렸을 때 욥이
변질 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와 변질은 다릅니다. 변화라는 것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 날마다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주께로 가까이 가오니
하면서 날마다 변화됩니다. 그러나 변질은 형편과 사정이 좋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했다가 형편과 사정이 좋지 않으면 아이구 죽겠네 하고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형편과 사정을 뽑아 버릴 때 변질 되는 것은 나의 종교적인 의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하나님이 주신 의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송사와 변명, 장군과 멍군이 계속 일어나면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 2장은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그 속에서 계속 송사와 변명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자신 안에 송사와 변명이 일어나므로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좌충우돌이 일어나기 때문에 신앙의 내적 열매가 바깥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30세부터 48년 동안을 성경연구한 분을 만났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아는지, 탄복할 만한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이 뭔가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성경이 무슨 이야기책인 줄 알고 있고, 하나님에 관한 설명을 하는
책인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관한 책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장로님이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셨으면
지금 한국교회를 책망하실 것이 아니라 장로님의 구원이 사랑의 경지에서 한국교회의
문제를 끌어안으시고 기도해야만 장로님이 48년 동안 성경 공부하신 것이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장로님도 욥이 되려고 성경공부를 한 겁니다.
성경을 알려고 공부를 한 것일 뿐 자신의 존재와 삶을 위해 공부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욥과 같은 신앙, 욥과 같은 고백, 욥과 같은 자기 방어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생명의 능력과 다른 사람을 살리는 능력, 그 속에
사랑과 긍휼이 없는 겁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행함이 없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 문제입니다. 끊임없는 장군 멍군입니다. 어떻게 하든 사람에게 드러나는 부끄러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이것을 해소해보려고 하는 종교적인 의식의 타성에 젖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닌 겁니다. 그로 인하여 이 시대의
기독교가 행함이 없습니다. 천국에 속한 기독교가 사랑이 없어요.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욥기를 통해서 깨닫는 것은 구원 받을 사람이 과연 누군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 구원 받았네 너 구원 받았네 말하고 있지만 구원은 항상 현재진행입니다.
믿음이 상황과 형편을 구원하지 못하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극한 상황에서
나를 굳게 세우지 못하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말했습니다.
믿음은 율법을 세울 수 있지만 율법은 믿음을 세울 수 없다 믿음으로 율법을 완성해
갈 수 있지만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로 믿음이 안 됩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이 나를 세우지 못하면 그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어떤 죄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어떤 위험과
환경과 사정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욥기를 통해서 구원 받을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환하게 보여줍니다. 그 전에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다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여기고, 교회 안에 들어 온 사람은 전부 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욥기를 공부하고 나면 욥처럼
말한다든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말을 들어보면
저 사람이 바로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구나 알게 되는 겁니다.
첫댓글 할렐루아! 귀한 새명의 말씀 감사합니다. 아멘!
주께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늘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