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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동쪽으로 도약하는 디딤판 마련하기
발칸반도는 유럽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맥이 척량산맥과 산줄기를 이루고 있고, 간선도로가 거의 없고 정복로라고 불릴만한
길은 단 하나도 없음. 4세기에는 비잔틴제국령으로 있다가 헝가리제국이 건설됨. 16-17세기 오스만제국이 침략하면서
지금의 코소보/알바니아지역은 이슬람문명이 섞임. 발칸반도의 섬들은 베네치아공화국이 점령하여 수백년 유지되어 있고,
19세기 그리스가 건국되면서 터키제국과 양분된 형태를 띄고 있음.
발칸반도는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고 지중해와 흑해가 만나는 하나의 육상기지요 해상기지임.
( 1940년 당시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친독일파는 루마니아/헝가리/불가리아 연합군 지지파는 그리스/세르비아 중립국은 터키)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삼국협약에 조인하면서 레닌그라드전투에 동원된 동맹국으로 자국영토에 독일군 주둔함.
유고슬라비아는 중립을 고수.
(무솔리니의 그리스 모험)
그리스군은 병력수가 모자라고 불가리아에 맞서 트라키를 방어하기 위해 분산배치되어 히틀러가 이길것으로 전망함.
1940년 이탈리아군은 나름대로 근대적인 전차와 전술, 그리고 병력을 지니고 있었음 (그러나 리비아전투나 이디오피아전투에서
보듯 그다지 유능한 군대는 아님. 오히려 이디오피아전쟁에서는 패배하여 유럽에서는 2급군대로 평가됨)
발칸반도의 중요성은 크지 않음.(실제로 다른 자료나 역사책에서는 발칸반도전투보다 파르티잔의 활동만 나옴)
이탈리아가 그리스군에 고전하였고, 영국군이 전투기를 파견하면서 히틀러는 독일군을 파견키로 함.
영국군은 테살로니카기지의 공군기지를 갖고 있었으며, 그리스의 보크사이트의 45% 주생산지로 알려줘 있었으나
말그대로 생산지이지 이것을 운반할 수송시설과 공장은 없음.(전략적 가치가 없음)
독일군은 실제로 유고지역과 발칸반도에 병력을 2개사단만 배치하였고 나머지 18개사단은 비독일군(알바니아/루마니아
현지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헝가리인으로 구성함)
영국은 전략적 측면에서 군대파견보다는 지중해 봉쇄와 공군력으로 대항함. 즉 병력을 파견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
(여우가 들판에서 잡혀 죽었다)
1941년 1월 발칸반도에서 영국군이 그리스 섬을 중심으로 타란토의 이탈리아 기지를 공격함.
1940년 11월 11일 밤 남부군항 타란토에서 영국항모 일러스트리어스호에서 스워드피시 21대가 어뢰로 배를 공격하여
전함3척과 순양함2척을 대파하여 해전사에 항모의 시대를 알림.
12월에는 이집트에서
웨이벌의 이집트원정군이 이탈리아군을 패배시킴. 트브룩항이 넘어가면서, 독일군이 참전하였고 아프리카군단이 파병한
계기가 됨. 웨이벌이 평문으로 여우가 들판에서 잡혀 죽었다라는 것은 영국군이 이탈리아군 13만명을 포로로 잡으면서
무솔리니를 놀린것. 이탈리아군의 패전에는 지위관들의 무능과 무솔리니가 직접 지휘를 해서, 집중배치보다는 분산과 전역에
걸쳐 병력배치를 하는 바람에 영국군에게 밀림.(특히 이탈리아군의 전차가 영국군의 전차보다 방호력이나 포력이 약함)
승리요인은 영국군의 기습공격과 사막전의 활용임. 웨이벌의 2개 사단이 그라지아니원수의 이탈리아 제10군 7개 사단을
앨어게일라에서 격파함. 이탈리아군의 L3/33전차는 1차대전용으로 기관총2정만 달려 있는 전차로 CV33은 1934년에 생산된
것으로 13.2밀리 기관총을 2정 장학한 지금으로 따지면 장갑차량임. 에티오피아/스페인내전/알바니아 점령전에 사용되어
독일2호전차에도 밀리고 영국마틸다2호전차에도 밀림. 장갑도 얇고 대포장착이 아님
영국중전차인 마틸다2전차를 막기엔 역부족임. 1938년 생산된 것으로 40밀리 2파운드포가 1문 대전차 Pak36대전차포에는
관통되지 않은 두꺼운 장갑이 있음.
47밀리 대전차포는 영국군의 2파운드 대전차포와 비슷하지만
포방패가 없어서 병력손실이 큼 이탈리아군의 경제력이 부족하여 박격포와 자주포, 대전차포는 낡고 사거리가 약함
영국의 공세로 인해 그라치아니장군은 독일군에 지원요청을 하였고, 독일군은 만슈타인(대장급)보다는 롬멜을 파견한
1939년 폴란드 전투시 사단장에 불과한 갓 중장을 단 지휘관임.
한편 그리스의 알렉산도스 파파고스장군은 북쪽에 18개 사단을 배치하였고 장기전에 돌입함. 독일군은 알바니아에서 형편없이
패배한 이탈리아군에게 저주를 퍼붓었고 불가리아의 도로와 교량과 철도는 너무 적고 원시적임(독일군은 주로 철도로 이동함)
침공로를 모나스티르/바르다강 등 유고남부의 철도체계를 이용키로 함.
(유고슬라비아의 저항)
유고슬라비아는 발칸반도의 산맥을 이용함. 세르비아의 장군 보라 미르코비치장군이 페타르군주를 내세워 독일군과 대항함.
1941년 OSS도너반국장이 개인특사 자격으로 유고정부를 만남. 독일군은 우선 오스트리아주둔2군을 베오그라드로 진격시킴
이탈리아육군1군은 남부 자그레브공격 헝가리군3군은 보이보디나강을 장악키로 계획함.
(유고슬라비아의 운명)
유고군은 당시 100만 병력으로 28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사단으로 편성됨. 그러나 전차대대 2개로 100대전차 기병대는 말과
황소 노새로 구성된 구식군대임. 모든것을 방어하는 자는 아무것도 방어하지 못한다는 실수를 유고군도 되풀이함.
4월6일 이미 항공기 450대 중 노후된 200대로 사용이 힘들고 첫 공습으로 제공권을 상실함.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정부에
대항해서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의 극우민족주의자들은 독립국을 선언하고 친독일정권을 수립함.
당시 유고의 사단장은 세르비아인으로 대다수가 세르비아계 4월17일까지 실제 전투와 저항은 거의 없었음.
유명한 파르티잔의 무대가 될 첫 대상자는 티토가 아닌 드라쟈 미하일로비치 제2군 부참모장으로 국왕충성파임.
1943년 까지 반독일에 거수로 게릴라 저항을 담당함.
한편, 그리스육군은 완강한 저항으로 독일군에 맞서 싸움. 현대식전차와 항공기를 가지고 영국3개 사단과 함께 싸움
그러나 그리스군의 무기와 계획에는 흠이 있었고, 그리스군사령관이 4개 사단을 메탁사스선에 집결키를 원해
그러나 유고군부대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음. 측면우회에서 공격받을시 그리스/영국군과 유고군이 포위됨.
- 보충편 내용부실로 인해 타군사전문가의 내용을 불가피 하게 인용함
1941년 4월6일 새벽 유고왕국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300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로 구성된 루프트바페의 폭격이 시작됨
1시간 30분 만에 4천명이 사망함. 이어서 방어진지와 유고왕국 공군의 비행장을 공격함.
4월8일 독일- 헝가리군 이탈리아군의 공격이 시작됨 24개사단과 1,200대 전차 동원 독일 제2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 동원
4월10일 크로아티아아 독립을 선포함
4월12일 베오그라드인근에서 페테르2세가 도망침
4월13일 베오그라드 점령
첨가해서 클라이스트기갑집단군단은 7개 군단으로 구성됨 폴란드/프랑스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풍부한 군대
구데리안의 제19장갑군단과 라인하르트의 제41장갑군단으로 구성된 독일군의 모든 기갑부대의 집결지 아르덴전투에서 승리
25작전으로 명명된 추축국의 유고왕국침공은 세르비아지역을 방어하던 유고왕국주력이 클라이스트기갑집단에 붕괴하면서
10일만에 전쟁이 끈남.
목적은 바바로사적전에 앞서 친 슬라브적 성향을 보이고 추축국에 반대하는 유고왕국을 먼저 공격하여 배후차단이 목적임
원래부터 사이가 나쁜 이탈리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와 연합하여 사방에서 공격함.
통상 독일의 야전군은 4-6개군단인데 비해 제1기갑집단은 3개의 장갑군단으로 편제하여 병력이 20%적고 전차가 30%로 많음
화력과 기동력이 기존의 30% 더 강한 군단임.
제공권은 독일군의 JG54부대가 유고왕국의 적기 376대를 격추함. 4월17일에 제공권 장악
유고왕국은 병력/무기/자재/전술이 부족한 군대로 대포는 1차대전용으로 사용되었고 대부분의 수송수단은 말이었음
전차와 대공무기는 매우부족하였음. 2개 전차대대는 103대의 르노FT17전차로 독일의 판터2-3호에 당함.
공군은 국산 IK3 독일/이탈리아/영국/프랑스 1차대전용으로 416기를 보유하였음 신형기체는 없었음
유고왕국군대는 동원령에 의해 보병28개 사단/기병3개 사단/ 32개 독립연대로 구성되었으나 미편성 및 부대배치가
느려서 실제 배치병력은 11개 사단임.
특히 유고4군의 경우 50%라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되어 투항함. 유고4군 7군은 크로아티아에 배치됨.
4월10일 4군 7군이 반란을 일으켜 자그레브점령함.
독일공군은 제4공군 7개 전투단으로 구성되어 폭격기의 1/4이 융컷흐 JU-87로 구성 Do17/Ju88융커스 폭격기는 15분
마다 베오그라드를 폭격함 유고왕국의 공군은 1940년 독일에 60대의 Do17구입하였으나 스피드가 느리고 화력도 약함.
제3폭격기 연대와 제63폭격기연대는 영국과 이탈리아전투기로 구성됨
승리요인으로 잘 훈련된 군대와 기갑군단 그리고 제공권의 장악이 핵심임.
1) 제공권 장악
2) 유고왕국의 분열
3) 독일군/추축국군의 3개방면에서 기습공격
(그리스의 붕괴)
독일군 68만명의 병력 1200대의 전차 700대 항공기
이탈리아군 56.5만명의 병력 463대의 항공기 163대의 전차
그리스군 43만명 20대 전차
영연방군 62,612명 100대의 전차 300대의 항공기
4월6~7일 전투에서 독일군이 유고군의 메탁사스선을 깨뜨리고 포위전을 하면서 4월9일 그리스군이 항복함.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마음대로 유린한것이 승리의 요인.
4월6일 메탁사스라인에서 독일군 저지
메탁사스라인 그리스군 7만명으로 동부마케도니아군으로 구성됨. 170킬로미터로 구성
독일의 2개 산악사단의 공격을 받아 저지함. 2100미터의 산으로 구성되어 독일군이 점령하기 어려웠음
4월7일 불가리아 국경에서 독일제6산악사단이 2100미터의 산을 넘어 테살로니카에 도달함
테살로니카 점령 후 메탁사스라인의 그리스군 항복 (현재 마케도니아공화국)
4월9일 영연방군이 올핌푸스와 테살로니카에서 저지하였으나 독일군의 전차사단에 밀림
4월10일 영연방 6만명과 그리스 2만명의 군대가 테르모필레로 후퇴함.
4월15일 할리악몬강을 독일군 전차대대가 통과하여 뉴질랜드여단이 붕괴함.
4월17일 독일군 친위사단이 그리스군 후방으로 공격해 그리스군 20만명이 알바니아와 에피루스에 갑힘
4월20일 그리스군이 에피루스에서 항복함
4월21일 테르모필레에서 영국군은 수송선을 배치하여 철수함
4월27일 아테네를 독일모터사이클 대대가 점령함
4월30일 독일군 전차사단과 친위여단이 펠레폰네소스반도에 진입함.
영연방 4만3천명이 그리스에서 철수함
1) 독일3호전차의 기갑군단의 공격으로 빠르게 진격함.
2) 제공권 장악
3) 우회공격으로 그리스군을 항복시키고, 영연방군을 후퇴시킴
(8장 공수전 크레타전투)
모든면에서 재래식전투였으나 발칸반도는 예외적인 전투임. 최초로 공수부대는 이탈리아로 1927년에 보병을 낙하산에
투입하면서 1개여단을 창설함. 그러나 붉은군대는 1937년에 대규모로 낙하산부대를 창설하면서 독일군도 1938년에 7비행단으로
창설함. 당시 낙하산엽병부대란 이름으로 첫 전투는 폴란드와 네덜란드에서 큰 승리를 이끔.
크레타는 제주도 같은 섬으로 떠있는 육상기지면서 지중해의 요새임. 제7공수사단을 이용해서 크레타섬을 점령하키로 함.
크레타섬은 영국군이 진주하였고, 낙하산연대3개연대와 1개공정연대를 이룬 제7공수사단이 공격하기로 함. 크레타섬은
영국군 1개 여단에 불과하였고 4만명 중 패주병이 대부분, 중장비와 전차도 몇대에 불과하였고 항공기는 글라디에이터 복엽기
17대(연락기)에 불과하여 제공권은 이미 독일군이 우세한 상황
(얼트라의 역할)
블레칠리에 있는 정부의 부호/암호학교에서 독일군의 에니그마를 가로채 해독하면서 정보를 미리 파악함.
5월19일에 공격하는 날짜와 위치 시간을 파악함. 그리고 낙하산병의 병력이 어느정도인지 파악함.
미리 안다는 것은 역량이라는 틈으로 크게 갈라져 있음. 장비가 부실하지만 미리 배치할 곳을 파악해서 방어함.
그날 하루에 대부분의 낙하산병이 전멸됨. 패전의 원인은 미리 정보를 아는 것도 있지만, 항공엄호와 지원병과가
거의 없었고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음.
5월22일 독일공군은 영국해군을 공격함. 제2차세계대전사 이후 영국군은 최악의 패전을 당함.
(승기를 잡은 슈투덴트)
독일군은 증강된 지원병력과 장비를 이용해서 크레타섬의 영국/뉴질랜드군을 포위함. 이 사건이후로 낙하산병의
시대는 끝났다고 공언함. 낙하산부대의 무기는 기습인데 이제 기습의 요소는 사라졌다. 특히 크레타섬은
독일군이 점령할 가치가 없는 곳임에도 4,000여명의 독일군이 사망함. 오히려 지중해의 핵심기지인 몰타는 공격도 하지 않아
독일군의 먹칠이 됨. 이후 미군은 시칠리아/프랑스/네덜란드에서 낙하산병을 이용함. 그러나 미군이나 영국군 모두
전쟁에서 낙하산병이 유용하지도 않았고 성공하지 않았음. 시칠리아/노르망디/마켓가든작전에서도 효과적이지 않음.
그 이후에는 헬기의 등장으로 헬기로 나른 것으로 전환됨.
크레타전투의 교훈
1) 미리 영연방군이 정보를 입수하여 낙하지점에서 대기함
2) 낙하산엽병의 장비가 영연방군보다 약하고 들판에 착륙하여 공격당하기 쉬움
3) 낙하산엽병 단독 전투 투입을 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