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종교심성과 문화 안에서 가톨릭교회의 실천과제’에 대한 논평문
김동원(수원교구 상현동 본당 ․ 신부 ․ 영성신학)
먼저 “한국인의 종교심성과 문화 안에서 가톨릭교회의 실천과제”라는 주제로 좋은 논문을 발표해 주신 오지섭 교수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향을 시사 받을 수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논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논문의 주제는 한국인의 종교심성과 문화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며, 교회는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하는 과제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살아 있는 삶으로서의 종교 실현”이라는 관점과 과거 역사의 전통 종교의 문화 전통의 맥락에서, 2007년 가톨릭신문 창간 80주년 기념 신자 의식 조사 보고서를 이용해서 삶으로서의 종교이지 못하는 가톨릭의 현재 모습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파악하여 분석하여 주셨습니다.
(1) 연령별 분포에서 신자 구성 연령대가 점차 높아지는 점에서 노화 현상과 젊은층의 종교적 무관심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교육 수준별 분포’에서 전체 국민 교육 수준보다 가톨릭 신자의 학력이 높게 나타났고, ‘입교동기’에서도 과거 ‘마음의 평화’보다는 시대와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른 다양한 내용들이 입교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계층의 신자들의 수준만큼 깊이 있고 폭 넓은 종교 내용을 제공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2) 영성생활과 신앙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양적 성장 반면에 소속감, 종교성, 신앙의 투신도가 낮아지고 있으며, 탈제도화 현상과 신흥영성 운동의 증가에 대하여, 영성에 대한 갈망에 비하여 기존 종교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인간이 지닌 초월 추구의 본성에 근거하여 인간에게 초월 추구의 삶의 의미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영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3) 토착문화 및 이웃종교에 대한 가톨릭 신자의 의식과 태도에 있어서, 한국인은 여러 종교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포용적인 ‘조화와 공존 의식’의 긍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다원주의 시대에 이웃 종교와의 접촉이나 정보 수용에 대한 관심 증대를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토착화와 올바른 영성을 정립하기 위하여 이해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종교라는 것이 본래 인간에게 궁극적인 삶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는 관점에서 기존의 종교 개념이 종교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에 가장 큰 방해가 되며, 현대 종교 개념의 문제점은 물상화(物象化, reification), 즉 “종교를 하나의 사물로 생각하여 그것을 어떤 체계를 지닌 객체적 실체로 생각하게 되면서” 교리와 의례와 제도를 중시하는 현재의 종교 개념은 본래의 생명성을 상실하고 형식적인 제도와 추상적인 교리에만 집중하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호머 헐버트(1863-1949) 교수의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당할 때는 영혼숭배자이다.”라는 관점에서, 외래종교로서 유교와 불교는 조화와 공존 의식을 지니며 토착화되었던 배경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파악하였습니다.
-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는 ‘유교는 현세적 학문이고, 불교는 내세적 신앙’이라는 고유한 역할과 영역을 분담하며 병존하는 인식이 형성되었습니다.
- 고려시대에 ‘유교의 가르침’,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개체적 인식이 아니라 ‘둘 모두 인간에게 궁극적인 의미를 주는 가르침’이라는 전체적인 인식은, 주자학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유·불 공존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 조선시대는 어느 모로 보나 절대적인 배불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자들은 불교에 대하여 깊은 교류를 유지하고 있었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외유내불(外儒內佛)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한국의 종교전통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불 공존의식은 현대와 달리 제도에 갇힌 ‘물상화한 종교개념’을 지니지 않고, 초월적 진리의 궁극적 의미와 무한한 생명성을 경험하게 해 준 결과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따라서 현대 한국 가톨릭이 당면한 표면적인 여러 가지 문제들의 공통점은 곧 ‘물상화’의 문제로서, ‘조사보고서’는 가톨릭교회가 삶의 종교로서의 의미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적 무관심 현상과, 양적 성장의 그늘과 영성의 갈망은 더욱 심화되는 문제를 확인시켜 준다고 보았습니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조화·공존 의식과 가톨릭교회의 실천과제:
한국인의 종교심성과 문화에서 나타난 유교와 불교의 조화와 공존 의식에서 출발하여 ‘함께 하는 교회, 참여하는 교회’를 지향하는 현대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물상화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하여 토착화와 영성의 심화를 위한 노력을 제안하였습니다.
- 논문은 한국인의 종교심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외래종교인 유교와 불교가 한국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조화와 공존의식을 보여주었다는 맥락에서 분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타종교에 대하여 조화와 공존의식을 갖게 한 한국인의 원형의식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런 의식이 역사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노력의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중요한 내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 앞으로 토착화 연구에 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과거 유교와 불교는 접촉과정에서 조화와 공존의식을 바탕으로 궁극적인 의미를 주는 생명력을 발휘했다는 관점에서, 천주교 역시 타종교에 대하여 과거의 배타적 관점과 태도가 아니라 조화와 공존의식을 통해서 현대의 물상화 문제를 극복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과거보다 훨씬 급속도로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데, 과거 유·불이 보여준 조화와 공존 의식만으로도 다양한 계층을 포용하며 깊이 있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생명력을 제시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 유교와 불교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제공하여 준 것은, 조화와 공존 의식보다는 각 종교가 지닌 고유한 정체성의 결과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피상적인 조화와 공존 의식은 오히려 혼합주의로 말미암아 종교가 제시할 수 있는 고유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흐리게 할 소지가 있는데, 포용성을 유지하면서도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지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톨릭교회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와 접촉하면서 격렬한 논쟁과 박해의 투쟁과정을 겪었지만, 이벽과 같은 초기교회의 지도자는 마테오 리치 신부의 보유론적 입장을 수용하여 천주교를 설명하는 조화와 공존 의식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복음 자체가 다른 문화와 사상을 평가하면서 충돌을 겪는 가운데서도 선하고 긍정적인 점을 수용하여 뿌리를 내리는 생명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리고 초기 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박해를 무릅쓰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신앙과 교리 설명은 신자들에게 궁극적인 의미와 생명력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기 교회 신도들이 역사에서 보여준 신앙과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물상화의 문제를 해소하는 한 가지 좋은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을 찾는 데에 있어서 광암 이벽 선생의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참고할 만한 가치가 크다고 생각하여 말씀드립니다.
광암 이벽 선생은 유교 사상의 바탕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소화하여 저술한 <성교요지>에서 선비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광암 이벽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정도(正道)로 제시하여, 중용(中庸)에 나오는 성(誠)사상을 근본으로,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거짓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공경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속담은 성실한 마음과 자세야말로 모든 일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실(誠實)한 자세로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따라서 자기 생활의 영역에서 해야 할 바를 실천하도록 역설하였습니다.
광암 이벽 선생의 사상은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조화와 공존 의식이라는 맥락에서, 교회가 현대적으로 해석하며 적용할 때에 포용성을 발휘하면서도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신(修身)은 개인의 영적쇄신과 성화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내적으로 자신을 닦아 가는 과정에서 생명력을 체험하도록, 영성생활의 정신이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발휘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齊家)는 가정의 화목과 성화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는 가정의 붕괴 현상은 날로 심각해지는데, 이에 대한 교회의 대처는 매우 미력한 실정입니다. 제가의 정신은 인간의 가장 기본 공동체인 가정에서 가족들이 기도 생활과 복음을 실천함으로써 복음화되도록 합니다.
치국(治國)은 ‘하느님의 나라’를 사회에서 구현할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교회가 세상에서 구현해야 할 이상을 제시하고 있으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목적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비전을 신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평천하(平天下)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봉사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현대는 글로벌 시대로서 국제간의 교류와 접촉은 날로 빈번해지는 비해서 우리 교회가 해외 선교나 국제적인 구호사업을 관심을 갖고 실천하기 위한 투신은 빈약한 실정입니다. 교회는 가톨릭이라는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보편성’의 자세로 편협한 민족주의 국수주의를 벗어나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생명력을 신장시켜 나갈 수 있는 방향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교요지>에서 답이 제시되어 있는 것과 같이, 교회가 얼마나 성실한 자세로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의지를 갖고서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것인가가 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