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7월 왕정(3)
왕국 말기의 위기
기조 시대의 위기는 1848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경제적 위기와 외교정책의 실책이 한데 겹치면서 정부 비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일어났다. 7월왕정은 복고 왕정의 마련처럼 국민들이 쏟아내는 악평의 도가니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1846년과 1847년에 북부 유럽 및 서부 유럽 일대는 곡물과 감자가 대흉작이었다. 곡가가 1844년의 배로 폭등하였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물자에 대한 수요의 감퇴를 초래하여 큰 불황이 엄습하였다. 노동임금이 저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업자가 많이 생겼다. 게다가 주가가 폭락하였다. 정부는 재정 위기에 직면하여 1846년 후반기에는 영국 은행으로부터 100만 파운드를 차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경제불황은 1815년 이해 최악의 것으로서 정부는 불황 극복에 전력을 다했으나 별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드디어 1848년 혁명을 맞게 된다.
기조의 대외 정책도 대내 정책을 그대로 반영하여 현상 유지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루이 필리프와 기조의 보수적인 외교정책은 프랑스의 자유주의 세력에 늘 불만을 안겨주었다. 그 까닭은 7월혁명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벨기에, 폴란드, 이탈리아의 자유주의 독립운동들이 프랑스에 원조를 간청하는데도 프랑스 정부가 일절 거기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벨기에 독립운동에는 불간섭의 원칙 밑에서 교묘히 간섭하였고, 이탈리아 문제에서도 오스트리아의 출병에 대항하여 1832년 앙코나를 점령하여 삼색기를 휘날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조의 외교정책은 보수적인 국제 질서가 흔들려서 그것이 7월왕정의 토대를 조금이라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불안한 국내 정세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는 국제 질서의 현상 유지를 바라는 유럽 열강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기조 정부의 기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40년 가을 동방 정책에서도 기조는 영국과 일전을 불사하려는 티에르 내각을 무너뜨리고 영국의 비위를 맞추었던 것이다.
기조의 외교정책은 1846년에 그 맹목성의 마각을 드러냈다. 스페인 여왕 이사벨2세(Isabell II)와 그녀의 여동생인 루이사 페르난다(Luisa Fernanda)는 둘 다 미혼이었다. 이들의 남편이 누가 되느냐는 구제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1843년에 기조와 영국의 외무대신 에버딘(Aberdeen) 사이이ㅔ 밀약이 맺어졌는데, 그것은 루이 필리프의 막내아들 몽팡시에 공 앙투안(Antoine Duc de Montpensier)과 독일의 작센 코부르크 공은 이사벨의 신랑 후보에서 제외할 것과, 루이사는 이사벨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뒤에야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이 밀약은 스페인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날카로웠던가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조가 노리고 있었던 것은 몽팡시에 공과 루이사의 결혼이었다. 프랑스는 앞서 벨기에의 독립에 즈음하여 작센 코부르크 가의 레오폴드(Leopold George "Christian Frederrick) 공을 벨기에의 왕으로 추대하고, 그에게 루이 필리프의 장녀 루이즈(Louise of Orleans)를 출가시켜 벨기에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강화한 바 있었는데, 이제 또 왕실의 혼인 관계에 의하여 스페인에도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였다. 그리고 작센 코부르크 가는 영국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의 외가이고 벨기에의 왕 레오폴은 빅토리아 여왕의 외숙이었다. 그리고 1840년에는 여왕이 같은 집안의 작센 코부르크 고타의 앨버트(Prince Albert of Saxe-Coburg Gotha) 공과 결혼하였다. 이렇게 혼인 관계가 복잡하기ㅔ 얽혀 있었으므로 스페인의 미혼 여왕과 그 동생의 결혼 문제가 중대한 외교적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1846년 6월 영국에 러셀(John Russell) 내각이 들어서서 파머스턴(Palmerston)이 외무대신이 되면서 기조와 밀약을 무시하고 이사벨과 작센 코부르크공과의 혼담을 꺼냈다. 그러나 이사벨이 결국 스페인의 카디스(Cadiz) 공작 프란시스코(Francisco de Asis de Bourbon)와 결혼하게 되었으므로 영불 밀약이 파기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기조는 몽팡시에 공작과 루이사의 약혼을 발표했다. 이것은 이사벨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후에야 루이사가 결혼한다는 밀약의 위반이었다. 여기서 영불의 화친관계는 깨졌다.
프랑스는 국제적 고립을 면하려고 동유럽의 전제 국가들에 접근했는데, 그러한 외교정책은 7월왕정의 성격상 자기모순이었다. 따라서 기조는 국내의 빗발치는 반대 여론에 직면하게 되었다. 기조의 외교정책의 맹목성이 드러났다.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자유주의적 입헌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들은 원조의 손을 프랑스에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영국에 기대하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기조의 외교정책은 결코 현명하지 못하였다. 7월왕정의 자유주의적인 국가 체제에 모순되는 외교정책이 오래갈 리가 없었다. 결국 1848년 2월혁명으로 그 외교정책도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기조의 7월왕정은 1846년을 고비로 내정과 외교에 모두 실정의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가장 치명적인 실정은 유권자의 범위를 제한하는 정책이었다. 사실 투표권자의 재산 자격은 1814년에도 1830년에도 엄격한 객관적 기준에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집권층의 자의로 설정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는 1840년대에 유권자의 재산 자격을 낮추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재산 자격을 낮추는 동시에 교육 수준이 높은 층과 국민방위대로까지 참정 범위를 넓히면 7월왕정의 정치적 기반이 그만큼 더 넓어져서 왕국의 기초가 더 공고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기조는 참정권 범위의 확대에 극력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극히 한정된 20여 만의 유권자가 정부의 온갖 실정과 스캔들의 책임을 지고 모든 비판의 화살을 맞아야 했다. 7월왕정의 참정 제한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었던가는 영국 및 벨기에와 비교해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영국은 1832년 선거법 개정으로 전체 국민의 26분의 1이 유권자였고, 벨기에는 86분의 1이 유권자인 데 대하여, 프랑스 유권자는 1839년 선거에서 전체 인구의 170분의 1에 해당하는 20만 뿐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을 경험한 바로 그 프랑스에서 이 시대착오가 과연 얼마나 더 계속할 수 있을까?
1846년을 고비로 잇달아 일어나는 경제적 불황과 외교적 실패에 더하여 선거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을 때, 고관과 대기업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독직 사건과 사회적 스캔들이 심심치 않게 세상을 놀라게하였다. 전직 대신 두 사람이 현역 장군 및 광산업자와 결탁한 독직 사건으로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는가 하면, 군용 빵 제조업자가 공금을 횡령하여 곡물에 투기한 사건이 발각되어 파리의 빵값이 폭등하고, 또 정부기관지 <레포크(L'Epoque)>의 주간이 10만 프랑의 뇌물을 받은 사건도 일어났다. 그러한 독직 사건들만이 아니라 상원 의원인 어느 공작이 젊은 가정교사와의 치정 관계에서 아내를 모살하는 끔찍한 사건도 일어났다. 국민의 갖가지 불만이 사회의 밑바닥에 가득할 때는 그와 같은 부패와 독직 사건들은 개혁가들과 반정부 운동가들에게 다시 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법이다.
프랑스의 반정부 세력은 영국의 활발한 곡물법 반대 운동을 본받아 1847년 7월부터 개혁 연회(banquet de reforme)의 방식으로 선거법 개정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연회 방식은 적어도 세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첫째, 신문광고에 비해 비용이 덜 들고 법의 규제를 받지 않았고, 둘째, 유력한 정예 분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고, 셋째, 반정부 세력이 유력한 전국 각지를 차례로 선동할 수 있었다. 이 개혁 연회는 그것을 발기한 사람들의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전국에 70회나 개혁 연회를 개최하는 가운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그 반향이 널리 번져갔을 뿐만 아니라, 드디어는 자유주의적 개혁이ㅔ 머물지 않고 궁극적 혁명 즉 1793년 헌법으로의 복귀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흥분한 군중이 “국민공회 만세”나 “로베스피에르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파리 제12구의 개혁 연회가 1848년 1월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집회 금지령을 내렸다. 이 금지령은 불법이라는 항의가 양당에서 빗발쳤으나 기조 내각은 끄덕하지 않았다. 개혁파는 연회 개최를 한 달 뒤 2월 22일에 열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혁명적 행동이 시작되었다. 연회 참석을 신청하는 반정부 세력이 쇄도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공화주의자들의 신청이었다. 공화파는 나롤 그 세력을 강화하여, 이제 시가행진 계획까지 수립하였다. 22일이 가까워질수록 광범한 개혁 운동이 폭발한 것이 분명해졌다. 21일 정부는 시가행진은 물론 집회의 금지령을 내렸다. 개혁가들 중 온건파는 후퇴했으나 공화파는 후퇴하지 않았다. 공화파 가운데는 무력 항쟁을 주장하는 자마서 있었다. 22일 파리는 “개혁 만세! 기조 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거리를 메웠다. 그러나 정부군은 한 사람의 희생자도 내지 않고 시위 군중을 제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부 쪽은 아무도 사태가 더 악화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시위는 지난 10년간 늘 있지 않았느냐는 것이 그들의 견해였다. 그러나 그날 밤 과격파의 지도자들은 무력 봉기를 조직하고 있었다.
밤이 밝자 요소요소에 배치된 군대와 밤 사이에 조직된 무력시위대가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시시각각 격증하였다. 그런데 국민 방위대의 일부가 시위대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은 루이 필리프를 당화하게 하였다. 정규군과 경찰도 신뢰할 수 없다는 보고를 접한 왕은 드디어 오후 2시 기조를 파면하고 몰레에게 내각을 조직할 것을 위촉하였다. 기조의 실각 소식은 일반 시민을 기뻐 날뛰게 하였다. 그러나 과격파 공화주의자들은 몰레가 기조의 자리를 대처했다고 하여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1830년 때처럼 또다시 기만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무장 시위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혼란에 빠졌던 파리의 거리도 기조의 실각으로 잘 수습될 것 같았다. 그런데 23일 밤 외무부와 수상 관저 앞에서 일어난 뜻밖의 총격전이 사태를 급진적으로 악화시켰다. 그 총격전은 순식간에 50명 정도의 사망자를 냈다. 환희는 분노로 돌변하고 기대와 희망은 증오로 바뀌었다. 공화파에게 절호의 기회가 제공된 셈이었다. 국민 방위대는 전원 혁명파에 가담하였다. 24일 몰레는 조각(組閣)을 포기한다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티에르에게 조각을 위촉하였다. 그 사이 거리의 사태는 극악 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국민 방위대와 정규군이 정면 충돌하였다. 정규군의 지휘권이 마비되어갔다. 시위 군중에 포함된 정규군이 무장해제를 당하고 그중 일부가 시위 군중에 합류했다. 아침 10시 경에는 시청이 포위되고 11시경에는 국왕의 퇴위와 공화국을 요구하는 포스터가 나붙었다. 오후 1시 75세의 늙은 왕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육군 중장의 정복으로 갈아입고 왕궁에 주둔하고 있는 2개 대대의 방위대를 열병했다. 방위대는 “공화국 만세!”의 함성으로 왕을 맞았다. 왕은 별 반앙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군복을 벗었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왕위를 열 살 난 장손 파리 백작(Comte de Paris, 필리프 7세 또는 루이 필립프 7세)에게 양위한다는 성명을 남기고 18년간 군림한 왕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7월혁명에 의하여 양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는 2월혁명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났다. 두 혁명은 사흘 동안의 시위와 소규모 시가전에 의해 민중의 힘으로 혁명을 실현한 점에서 외관상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혁명이다. 7월혁명은 샤를 10세가 사태에 대비하지 않은 방심이 초래한 혁명이었지만, 2월혁명은 루이 필리프가 재빨리 기조를 파면하고 개혁파의 요구를 약속했는데도 막을 길이 없었다. 2월혁명은 왕의 방심이나 태만 때문이 아니라, 온건한 정치개혁에 만족하지 않고 기어이 공화국을 수립하고야 말겠다는 공화파의 투철한 의지와 치밀한 계획 덕분에 성공한 것이다. 의회의 다수는 파리 백작에게 왕의를 계승시키려고 했으나 의사당에 난입한 시위 군중의 폭력 앞에서 합법적 절차란 통하지 않았다. 공화파는 어떤 형태의 군주 국가도 거부하고 기어이 공화국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2월 24일 의회에서는 환성과 소란, 흥분과 파괴가 교차하는 가운데 밤이 되어서야 겨우 최소한의 의견 일치에 도달한 문서가 기초되었다.
퇴보적이고 과두적인 정부는 소멸했다......국민이 피를 흘렸다......국민과 대의원의 환호 속에 탄생한 임시정부는 잠정적으로 국민적 승리의 확보와 조직의 임무를 위임받는다. 이 임시정부는 국민에 의한 비준이 있을 때까지 공화제를 희망한다. 이 문제에 관하여 국민은 곧 자분을 받을 것이다.
이제 이들 국민은 공화정을 확정할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1815년 이래 핳ㄴ번은 보수적인 또 한번은 자유주의적인 입헌군주정을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하고 말았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 자체를 부정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자는 프랑스 혁명은 인정하였으나 상층 및 중층 부르주아의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실패하였다. 오를레앙 왕가는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국민주권의 원리를 시인하면서도 신흥 부르주아에 의한 권력 독점을 위해 지나친 제한선거를 고집하다가 무너졌다. 복고 왕정은 정통파를 만들어내고, 7월왕정은 오를레앙파를 만들어내어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정치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프랑스의 정치 무대를 차지하는 일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