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 '천호가톨릭성물박물관' 개관
다양한 모양과 색상의 구유에서부터 다른 표정의 성모상들. 그리고 먼 옛날 쓰인 듯한 특이하고 오래된 성사 도구들까지. 세계의 진귀한 성물을 한곳에 모아놓은 전주교구 '천호가톨릭성물박물관'이 성탄 대축일을 열흘 남짓 앞둔 14일 전북 완주군 천호성지에서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개관했다. 성물(聖物)은 가톨릭 전례에 쓰이는 거룩한 도구이자, 신앙의 여러 표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교회 예술품이다. 성물박물관은 성물로 하느님 가르침을 느끼도록 해주는 복합 전시공간으로 설계 단계에서부터 성물이 전시될 위치를 고려해 지어졌다. 한국교회에선 처음 마련된 성물박물관을 찾아 성물이 전해주는 신앙의 신비를 체험했다.
글ㆍ사진=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 ▲ 2층 강생실 한편 커다란 동굴에 마련된 성탄 구유. |
| ▲ 천호가톨릭성물박물관 전경. |
| ▲ 이병호 주교가 신자들과 함께 천호가톨릭성물박물관에 전시된 성물들을 감상하고 있다. |
| ▲ 고유의 풍을 지닌 한 구유 성물. |
강생에서 부활까지
건축면적 584㎡, 지상 2층 규모인 회색빛 박물관은 1층 베드로관과 2층 바오로관으로 나뉘어 꾸며졌다. 그 가운데 2층 바오로관 강생실은 그림 성경 속 아기 예수가 눈앞에서 탄생한 듯 강생의 신비를 다양하게 드러내고 있다. 세계 진귀한 성물 1000여 점을 소장한 박물관답게 구유의 아기 예수와 성가정은 세계의 구유와 성가정 성물의 전시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커다란 동굴 속 베들레헴 마굿간 구유를 지나면 여러 나라의 구유가 눈에 들어온다. 추운 알래스카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는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고, 일본 전통의상을 걸친 요셉과 성모님도 이채롭다. 가장 누추하지만, 보기만 해도 마음 따뜻해지는 세계 구유를 보며 사람으로 오신 사랑의 하느님 아기 예수를 떠올릴 수 있다.
2층 바오로관은 △강생 △수난 △부활을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수난실은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만나 고통의 신비에 동참하는 공간이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한 후 십자가 수난길에 오른 예수님 모습이 차례로 전시돼 있다. 한쪽 벽면에 꾸며진 차가운 쇠창살 속 뾰족한 가시관은 처형 당시 예수의 고통을 보여주듯 사실적이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지나면 눈부시도록 하얀 공간인 부활실이 나타난다. 대천사가 손을 뻗고 있는 이 공간은 승천한 후 하느님 곁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예수님 사랑이 느껴지는 곳이다. 미사ㆍ성사ㆍ순교
2층 바오로관이 강생에서 부활까지 그리스도 신비를 다양한 성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면 1층 베드로관은 미사를 비롯해 일곱 성사에 사용되는 각종 제구와 성물들을 전시한 공간이다.
베드로관에 들어서면 먼저 한가운데 작은 제대 위 금빛 성경과 성광이 눈에 띈다. 이를 중심으로 양편에 열두 제자 목상이 십자가와 성경을 들고 군중에게 설파하듯 역동적으로 서 있다. 벽면을 따라서는 일곱성사와 관련한 성물들이 가득 진열돼 있다. 성물 하나하나를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이곳에 전시된 성물들이 본당 성물방에서는 보기 어려운 가치와 예술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순서대로 관람하다 눈길이 멈춘 곳은 우리나라 순교성인의 이콘 작품.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해 이곳에 묻힌 이명서(베드로)ㆍ정문호(바르톨로메오) 등 성인을 그린 이콘으로 만나보는 것도 이채롭다. 화려함에만 치우치지 않고, 우리 순교 역사도 함께 돌아볼 수 있는 순간이다. 뒷편으로 기도방과 소성전이 있어, 침묵 가운데 신비를 묵상하도록 했다. 국내 최초 성물박물관
이곳에 성물박물관이 건립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희귀 성물을 소장해온 오문옥(루치아)씨가 2008년 교구에 성물 1000여 점을 기증하면서다. 그해 이곳 성지에서 성물 전시가 열렸고, 5만여 명이 다녀갔다. 이후 교구는 지자체와 협의해 신앙문화유산을 소중히 간직하고 신앙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 건립 계획을 세웠다. 총 공사비 26억 원 가운데 50%는 국가에서 지원받았다. 박물관 설계는 서울대 건축학과 김광현(안드레아) 교수가, 시공은 (주)원주건설이 맡았다.
천호성지에는 성물박물관과 함께 성물공예마을도 조성돼 있어 순례객들이 성물 창작과 보급에도 동참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박물관은 인천가톨릭대 조형예술대 측과 업무 협약(MOU)를 맺어 다양한 기획ㆍ특별 전시회도 열 예정이다.
이병호 주교는 축복식에서 "성물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예술작품"이라며 "성물의 형상을 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통해 주신 하느님 뜻을 이해하고 깊이 새기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천호성지 담당 김영수 신부는 "성물박물관은 단순한 전시관을 넘어 교회 신앙문화 유산을 보존하고 전하는 곳이 될 것"이라며 성물박물관이 지역 사회를 넘어 세계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드러내고 하느님 사랑을 전하는 공간이 되길 기대했다.
박물관에 10억 봉헌한 최훈, 김혜선씨 부부
| ▲ 세상을 떠난 큰아들을 기리고자 성물박물관 건립에 10억 원을 봉헌한 최훈ㆍ김혜선씨 부부와 둘째아들 최석영씨. | 천호가톨릭성물박물관은 최훈(루카, 50, 전주 중앙본당)ㆍ김혜선(아녜스, 47)씨 부부에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곳이다. 주님 곁으로 먼저 가버린 큰아들 최석원(베드로)씨를 기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최씨 부부는 2011년 군복무 중이던 큰아들(당시 21세)을 의료사고 후유증으로 갑작스레 떠나보냈다. 유해를 이곳 천호성지 봉안경당에 안장한 부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도하며 주님과 아들을 위해 작은 성전을 봉헌하기로 했다. 부부는 박물관 건립을 위해 10억 원을 봉헌했고, 박물관 뒤편 소성전은 특별히 큰아들을 기억하는 기도의 장소로 꾸며지도록 했다. 김씨는 "사랑이 많았던 아들을 떠나보낸 후 제 삶은 곧 사순시기가 됐어요. 한동안 매일 가던 새벽미사도 빠지고 기도도 놓았지만, 결국 고통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고 지금은 주님 안에 살고 있다"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180㎝ 넘는 키에 풍채가 좋았던 큰아들은 약한 친구들을 늘 먼저 챙기는 사랑이 많은 학생이었다. 성가정이었던 네 식구는 큰아들이 눈 감기 전날까지 성무일도와 아침ㆍ저녁 기도, 묵주기도를 함께 바쳤다. 의사인 최씨는 "아들을 보낸 후 남들은 힘드니까 쉬라고 했지만, 빠지지 않고 새벽미사에 나갔어요. 기도 중에 이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고통의 신비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자식을 잃었지만 우리는 주님께 더욱 초대됐고, 고통에 걸려 넘어지기보다 영적인 힘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하고 말했다. 큰아들은 김씨 꿈에 나타나 하늘나라 멋진 궁궐에서 사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 아픈 마음을 치유해보고자 갔던 루르드 성모성지에서 김씨는 성지 위 하늘에서 엄마를 찾는 아들을 만났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주님께서 아들을 지켜주고 계심에 부부는 감사하게 됐다. 최씨는 "박물관을 짓도록 하느님께서 아들 베드로를 반석으로 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 손길을 느끼고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찾기 바랍니다" 하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