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시인/소설가
1962년 경북 달성 출생
1977년 성서중학교 졸업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 3집에 '강정 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 당선,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제7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1988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소설 '펠리컨' 발표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길안에서의 택시잡기》(1988), 《서울에서 보낸 3주일》(1988), 《통일주의》(1989), 소설 《아담이 눈뜰 때》(1990),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2),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4),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7), 《보트하우스》(1999) 등이 있고, 희곡 《실내극》 《도망중》,
산문집 《펄프에세이》(1997)와 《장정일의 독서일기》
시리즈가 있다.
도시적 감수성과 불온한 상상력으로 보듬은 꿈
장정일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합의하에 여자와 결혼을
한 작가이다. 소년원에 갔다 나와서 스스로 아버지와 흡사해지고 있다는 자각이 그러한 결심의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그는 삶 자체로부터 철저하게 반(反)리얼리즘 작가이다. 어느 글에서 그는 "모든 권력과 독재는 리얼리즘에서 나온다"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그의 소설이 리얼리즘은 물론 사회적 정당성의 근거에 대해 맞서는
맥락에서 창작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가 도시적 감수성과 불온한 상상력으로 90년대 문학의
앞머리를 열었다고 한다면 바로 그러한 작가 정신 위에서이다. 꿈 꾼 내용을 그대로 글로 옮기는 경향 역시 마찬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나타나는
성(性)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 사회의 가장 커다란 금기는 성이다. 또한 우리 나라의 경우
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따라서 성의 금기를 깨뜨리며 '아버지'로 상징되는 권력에 도전하는 것이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내용인 바, 장정일의 작품 세계의 특징이 나타난
셈이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 나타나는 배경 설명의 변주 역시 리얼리즘의 거부 위에서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이는 위계(位階)를 구성하는 가치의 전복으로 이어진다. 그가 이러한 의식 세계를 가지게 된 것은 여호와의
증인 체험과 미결수 시절 혹은 소년원에서 경험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특히 감옥 체험은 폭력이 난무하고 거기에 기반한 비역질이 횡행하는 단명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극단적 경험을 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내가 동정을 그토록 오래 지켰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왠지 성교를 하고 나면 눈이 멀 것이라는
공포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책을 읽고 싶었던 나에게 눈이 머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라는 작가 진술은 정신분석의 방법론으로 접근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홍기돈/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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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당
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 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 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 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 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각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에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 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쌍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
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웠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빠다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이 끼고 나온 삼중당
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흥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고시공부 때려 치우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 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다 나 죽으면
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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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먹는 남자
냉장고 문을 열자 희미한 야간등이 비친다
그는 채소더미 속에 묻힌 햄버거를 꺼내고
코카콜라 캔을 하나 꺼낸다 그리고
티브이를 보던 방으로 돌아와 햄버거를 싼
폴리에스터 곽을 쓰레기통에 넣고
조심스레 은박지를 벗긴다 깡통고리도 따서
쓰레기통에 곱게 넣는다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그는 약간
딱딱해진 햄버거를 한 입 베어문다 추풍령
저쪽에서는 비가 내리는지 티브이에서는
삼성과 해태의 우중경기가 보여진다 그는
천천히 햄버거와 코카콜라를 먹어치우고
방바닥에 흘린 소스를 휴지로 닦아 깡통과
은박지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린다
오늘 저녁에도 어머니는 잊지 않고 햄버거를 사 오실까
그는 어머니가 계시는 아케이드로 전화를 한다.
……엄마……나야…많이 팔았어? …집에 들어올때
햄버거 사와…그래…집엔 아무 일 없어…
전화세가 나왔어…기본요금이야…그는
발밑으로 기어들어오는 집게벌레를 신문으로 덮어
눌러 죽인 다음 쓰레기통에 넣는다
저녁에 되어 어머니께서 햄버거 두 개를 사서
돌아오셨다 그는 한 개를 먹고 한 개는
냉장실에 넣어둔다……어머니…삼성이 해태를
6대 4로 눌러 이겼어요……밤이면 그는 이빨을 닦고
자신의 방을 깨끗이 쓸고 닦은 후 이불을 펴고
눕는다 천정에 달린 형광등이 길로틴처럼 뿌옇게
빛난다 나는 내일도 햄버거를 먹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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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안에서의 택시잡기
길안에 갔다.
길안은 시골이다.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 왔다, 라고
나는 썼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서두를 새로 시작해야 했던가?
타자지를 새로 끼우고, 다시 생각을
정리한다. 나는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은 아름다운 시골이다.
그런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 왔다.
별이 뜬다.
이렇게 쓰고, 더 쓰기를
멈춘다.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나는 끼워진 종이를 빼어,
구겨 버린다. 이놈의 시는
왜 이다지도 애를 먹인담. 나는
테크놀러지와 자연에 대한 현대인의
갈등을 추적해 보고 싶다. 종이를 새로
끼우고, 다시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에서 택시를 기다린다.
길안에 택시가 오지 않는다.
모든 도시에서 나는 택시를 잡았었다.
그러나 길안에서 택시잡기 어렵다.
쓰기를 다시 멈춘다. 너무 딱딱하지
않은가? 모든 문장이, 다.
로 끝나는 것이 이상하게도 번역투의
냄새를 풍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그런 지적을 많이 들었지 않은가?
쓰던 종이를 빼어 구기고, 한 장의 종이를
다시 끼웠다, 나는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에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모든 도시에서 쉽게 택시를 잡았건만
길안에서 택시잡기 어렵고
어느새 어두워진 길목마다 별이 쏟아진다.
문득 길안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다시 쓰기를 멈추었다. 좀더
매끄럽게, 좀더 구체적인 풍경묘사로부터
서두를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길안의 시골풍경을 묘사한 다음
택시가 서지 않는 곳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여행자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묘사해 내야 한다.
나는 종이를 빼어 구기고, 새로운 종이를
끼워, 이렇게 쓴다.
길안에 산이 높고
그 물이 맑다. 길안에 나무가 푸르고
나뭇가지 위에 비둘기떼가 지어올린 흰구름은
마치 건축같이 아름답고 웅장하다.
멀리서 바라봄이 아니라 길안 가운데 있을 때
길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행자는 독일빵같이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길가에 내려놓고, 택시를 기다린다.
이쯤에서 쓰기를 잠시 멈춘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시작으로서는 적당히
내 구미를 돋우는 것 같고, 독자로 하여금
계속 읽어내려 가게 할 만큼 경쾌하다.
이제 길안에 밤이 내려오며, 나는 이 여행자를
존재론적 자기인식에 이르게 할 작정이다. 나는 쓴다.
웬일인지 꽤 오랫동안 택시가 오지 않고
택시를 기다린 시간만큼, 저녁이 가까워 왔다.
이름모를 잎새들의 흔들림,
여행자는 자신이 혼자임을 느낀다.
이름모를 새떼가 햇빛 한 조각씩을 물고
서쪽으로 지고, 연이어
모래단지를 엎지른 듯 이름모를 별들이 흩어졌다.
사십 년간의 도시생활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익힌
동식물과 별자리 이름을 깡그리 잊게 했다. 모두가
이름 모를 것들. 여행자는 갑자기
심한 부끄럼에 휩싸인다.
쓰기를 더 멈춘다. 여행자의 고독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그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인가? 사십 년간의 도시생활이,
생경스레 튀어나온 것은 아닌가? 나는 출판사의 사장이자
시인인 한 선배로부터, 비약이 심하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구체적이지 않은 시는
내 자신이 질색이다. 지금껏 쓴 것을
빼어버리고, 다시 종이를 끼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쓸 결심을 한다. 나는 쓴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사십년간 살았던
한 오십대가 있어 오랫동안 찾아보지 않았던
고향에 온다. 길안... ....
나는 한숨을 쉰다. 종이를 홱
빼어 던진다. 이놈의 시가 나를 골탕먹이는군.
모순성을 갈파하고자 한다. 즉 테크놀러지를 이용할
때의 편리성, 그로 인해 그것에 종속되어가는
현대인들을. 그리고 덧붙여, 테크놀러지에
노예화됨으로서 테크놀러지를 이용할 수 없는
자연적인 상황에 부딪쳤을 때 보이는 현대인의
초조한 반응을 묘사하고 싶었다. 어떻게 될까?
그런 상황 앞에서 비로소 테크놀러지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겠고, 도리어 테크놀러지화 되지 않은
자연에 대해 신경질 부릴 수도 있겠지.
새로운 종이를 끼우고, 나는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이 아름다워 나는 울었다.
길안에 어둠이 내렸다.
길안에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길안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생각을 한다.
길안이 불편해진다.
길안이 내 모든 약속을 퍼지르고 앉았다.
길안이 불안하다.
연을 띄우고, 잠시 멈춘다. 이 어조로 쓰느 거야.
독하게 마음먹는다. 누가 뭐라건 말건
이런 생각을 한다. 우표를 모으는 우표수집가가
자신의 스토크 북 속에 우표를 수집해 두는
일같이, 시쓰기 또한 내 가슴속에
시를 모아 두는 일일 것! 새로운 시를 쓰고 싶은
열망은 우표수집가가 자신의 스토크 북 속에
없는 볼리비아산 나비 우표를 간직하고 싶어하는
그 열망 이상의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우표
수집가가 아무리 구하기 어려운 귀한 우표를 구해
간직한다한들, 그 때문에 세상이 바뀌지 않듯
시인이 아무리 좋은 시를 쓴들, 또한 세계는 변함
없는 것. 우표수집가와 시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위대한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때 우리는 우표수집강 ㅣ
그, 성취의 기쁨을 위해 시를 써야 하낟. 이렇게
밑도끝도 없는 생각을 하곤, 나는 다시 타자기를
두드려 갔다.
길안의 바깥에 있을 때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빼먹던 생각을 한다.
길안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
길안 벗어날 수단이 없구나.
길안이 불쾌하게 느껴진다.
길안의 산과 물이 역겨워진다.
길안의 나무들이 유령같이 곤두섰다.
아아 상종못할 자연
이해 못할 자연이다.
길안의 비문명이 공포스럽다.
연을 띄우고, 잠시 쉬기로 한다. 여행자는 이미
충분히 불안해졌고, 그는 테크놀러지화되지 않은
길안의 자연상태에 대하여 추악을
느끼고 있다. 그러면 이쯤에서
그가 가야할 곳에 대한, 현대인의 회의를
끄집어 내면서 이 시를 마무리하자. 나는
쓴다.
그러나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가?
내가 가야할 거기가 어딘가?
택시를 쉽게 잡기 위해
택시잡기 어려운 이곳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할
그곳은 어딘가?
과연, 길안으로 떠나 다시 길안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길안에서 처음으로
길안 바깥이 불안으로 닥쳐온다.
나는, 너는, 모든 길들은
어디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 있을 데가 없다.
다 썼다, 3연의 시.
나는 그것을 읽어 본다. 엉망이구나.
한숨을 쉰다. 이렇게 어려운 시.
이렇게 하기 어려운 일을 하며, 한평생
사는 것이 내 꿈이였다니! 나는
방금 쓴 3연의 시를 찢는다. 커피를 한
잔 끓여 마신다. 생각이 이어졌다. 유년시절에
계집애들이 하던 고무줄놀이가 아닐까, 시 같은
것은. 점점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 자꾸
고무줄 높이를 높이면서 고통을 즐기는 것,
고통을 즐기는 것! 이 밤 기어이,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를 쓰고야 말겠다. 나는 무섭도록 새하얀
종이를 끼운다. 다시 쓴다.
풀이 우거진 자리에
한 무전여행가가 검은 슈트케이스를 든 채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늬엿늬엿 해가 지고 있었지만
택시는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행가가 쉽게 포기할 것 같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쓰자 아침이 밝고, 나는 세수를 하러 일어선다.
하룻밤 꿈을 꾼 듯. 밤샘한 어제가
어릿하다. 더운물에 찬 물을 알맞게
섞는다. 생각이 떠올랐다.
물과 물이 섞인 자리같이
꿈과 삶이 섞인 자리는, 표시도 없구나!
나는 계속,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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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간다
알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강정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같이 환한 얼굴 빛내며 꼭 내가 물어보면
금방 대답이라도 해줄 듯 자신 있는 표정으로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 내가 아는 사람들은
총총히 떠나간다, 울적한 직할시 변두리와 숨막힌
슬레이트 지붕 아래 찌그러진 생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제비처럼 잘 우는 어린 딸 손잡고 늙은 가장은 3번 버스를
탄다
무얼 하는 곳일까? 세상의 숱한 유원지라는 곳은
행여 그런 땅에 우리가 찾는 희망의 새가 찔끔찔끔 파란
페인트를 마시며 홀로 비틀거리고 있는지, 아니면
순은의 뱀무리로 모여 지난 겨울에 잃었던 사랑이
잔뜩 고개 쳐들고 있을까?
나는 기다린다. 짜증이 곰팡이 피는 오후 한때를
그리하여 잉어 비늘 같은 노을로 가득 쳐진 어깨를 지고
장석 덜그럭거리는 대문 앞에 돌아와 주름진 바짓단에 묻은
몇 점 모래 털어놓으며, 그저 그런 곳이더군 강정이란 데는
그렇게 가봤자 별수없었다는 실망의 말을 나는 듣고 싶었고
경박한 입술들이 나의 선견지명 칭찬해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강정 깊은 물에 도랄매하자고 떠났거나
여름날 그곳 모래치마에 누워 하루를 즐기고 오겠다던 사람들은
안오는 걸까, 안오는 걸까, 기다림으로 녹슬며 내가 불안한 커튼
젖힐 때, 창가의 은행이 날마다 더 큰 가을우산을 만들어
쓰고
너무 행복하여 출발점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강정 떠난 사람처럼 편지 한 장 없다는 말이
새롭게 지구 한 모퉁이를 풍미하기 시작하고
한솥밥을 지우신 채 오늘은 어머니가, 얘야 우리도
강정 가자꾸나. 그래도 나의 고집은 심드렁히,
좀더 기다렸다 외삼촌이 돌아오는 걸 보고서, 라고 우겼지만
속으로는 강정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지경
형과 함RP 우리 세 식구 제각기 생각으로 김밥의 속을 싸고
골목 나설 때, 집사람 먼저 보내고 자신은 가게
정리나 하고 천천히 따라가겠다는 구멍가게 김씨가
집작이나 한다는 듯이 푸근한 목소리로
오늘 강정 가시나보지요. 그래서 나는 즐겁게 대답하지만
방문 걸고 대문 나설 때부터 따라온 조그만 의혹이
아무래도 버스 정류소까지 따라올 것 같아 두렵다.
분명 언제부터인가 나도 강정 가는 길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한밤에도 두 눈 뜨고 찾아가는 그 땅에 가면 뭘하나
고산족이 태양에게 경배를 바치듯 강둔덕 따라 늘어선
미루나무 높은 까치집이나 쳐다보며 하품하듯 내가
수천번 경탄 허락하고 나서 이제 돌아나갈까 또 어쩔까
서성이며, 어느새 세월의 두터운 금침 내려와
세상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망각 속에 가두어놓고
그제서야 메마른 모래를 양식으로 힘을 기르며
다시 강정의 문 열고 그리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끈끈한 강바람으로 소리쳐 울어야 하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행복한 얼굴로 사람들이 모두 강정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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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눈
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그 순하고 얌전하던 눈, 동경을 담은 채로
그 순하고 얌전하던 눈, 핍박받은 것들,
저렇게 충혈해지다니.
그래, 눈은 약올랐다.
약오른 눈은 일어선다.
그것들이 네 목을 조를 때,
눈은 튀어나오고 부푼다.
가련한 것들,
그 순하고 얌전하던 눈들이,
광고들 선전탑들 영화간판들 또는 무분별한 씨 에프에 의해,
하루아침에 시들다니.
(오! 섹시, 얼마나 섹시한가, 그런 것들은?)
눈은 병들었다.
꼼짝 마, 눈으로 쏘겠어!
내 눈은 성났어!
소리치는,
그 순하고 얌전한 눈들.
가련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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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와 단식가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일과 채소 혹은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굽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해준다. 그러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 새 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 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덮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 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 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 상쇄시켜주는 것 같다. 어떡하면 한 모금의 물마저 단식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서가는 단식에 대한 연구서와 체험기로 가득하고, 그녀는 땅바닥에 탈진한 채 드러누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
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3.
어느 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게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짝 마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 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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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 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의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터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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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림과 시..그리고 블루스.. 너무 좋으네요..즐감했습니다..
유년시절에 /계집애들이 하던 고무줄놀이가 아닐까, 시 같은 것은./ 점점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 자꾸 /고무줄 높이를 높이면서 고통을 즐기는 것, /고통을 즐기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