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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3 | 그냥 4 | 2008-10-13 오전 10:00:05 |
이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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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소절 읽고 하루를 시작해볼까합니다^^ 모두 멋진 한주 홧팅입니다 헤헤^^
어머니가 나에게 문학과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인문적인 지식을 전수했다면, 할아버지는 나를 과학과 기술, 그리고 간단한 토목공학의 세계로 안내한 장본인이었다. 윈필드 스콧 니어링(윈필드 스콧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도 한다)은 모리스런 마을의 탄광 및 벌목 사업의 감독자였다.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 그리고 턱수염이 덥수룩한 할아버지는 급진적인 사고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체제 순응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어느날 한 감리교 목사와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목사가 "식사 전에 기도를 잠깐 드려도 괜찮을까요?" 하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오. 기도한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소"
할아버지는 모리스런에 커다란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다. 집 뒤쪽에는 장작 창고, 마차 차고, 목재를 쌓아놓은 광, 닭장, 온실, 그리고 목재와 금속 가공을 위한 연장들이 비치된 큼지막한 작업장이 여러 채 있었다. 작은 개울을 건너면 할아버지가 괭이질로 시간을 보내던 채소밭이 있고, 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마구간과 외양간도 있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 집에서 4백 피트 가량 떨어져 있었다. 전화가 들어오기 전인데도 할아버지는 구리선으로 두 집을 이어 '임시 전화'를 연결해 놓았다. 구리선은 어른 주먹 두 개 정도 되는 크기의 송,수화기 상자에 연결되어 있고, 선 끝에는 작은 놋쇠 단추가 달려 있었다. 전화를 걸려면 연필같이 단단한 물체로 놋쇠 버튼을 누르면 된다. 그러면 그 신호가 구리선을 타고 저쪽 집으로 전해지고, 그것을 신호로 서로 통화할 수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 우리 마을에 처음으로 진짜 전화기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수세식 화장실과 전기, 그리고 자전거가 하나 둘씩 마을에 소개된 것도 그 즈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석유 등잔이 유일한 조명 수단이고, 마차나 썰매가 운송 수단의 전부였다. 할아버지의 소일거리는 크게 세 가지였다. 제도실에서 설계를 하고, 작업장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제작하고, 매일 밤 서재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서재는 규모가 어마어마했는데, 여행기, 자연과학서, 경제학서, 역사물, 전기물, 동방 종교, 그리고 형이상학 등에 관한 책들을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정기적으로 뉴욕으로 나가 브렌타노 책방에 들렀는데, 그때마다 몇 상자씩 책을 사왔다. 디킨즈, 새커리, 월터스콧, 뒤마, 바자크, 빅통 위고, 셰익스피어 등과 유명한 영미 시인들의 전집은 특히 질 좋은 가죽으로 장정된 귀중본들이었다. 그 당시 우리가 살던 군을 통틀어 할아버지는 가장 많은 장서 보유자로 알려져 있었다.
우리 육 남매는 집 밖으로 책을 가지고 나가는 것만 제외하고는 할아버지 서재에 언제든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우리는 책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서재에서 베르슈왈레의 한 권으로 된 세계사 책을 발견했다. 사오십 권짜리 세계사 책도 따지고 보면 개략만 다루는 것일 텐데, 한 권으로 되었으니 그저 요점만 간추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와의 접촉이 거의 없던 시골학교 학생에게 그 한 권짜리 세계사 책은 나름대로 폭넓은 조망과 낭만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 책을 열심히 읽었고 두툼한 분량의 노트까지 만들었다. 1899년 당시 서툰필체로 써둔 가로 3인치 세로 5인치짜리 카드를 나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그 이후로 세계사에 관한 책은 초보적인 냉용이건 어려운 내용이건 언제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 남매는 할아버지의 서재에만 파묻혀 지내지는 않았다. 우리는 할아버지를 도와 정원과 작업장 일을 했는데, 말이 '돕는' 것이지 연장 같은 것을 아무 데나 던져놓거나 못 쓰게 만들기 일쑤였다. 친할아버지 윈필드 스콧 니어링이나 외할아버지 피터 G.재브리스키 두 분 다 건축 기술자였다. 친할아버지는 철로를 건설했고, 외할아버지는 집과 건물들을 건축했다. 두 분 모두 손재주만 가지고 일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머리를 이용해 이론을 배우는 데까지 나아갔다.
1830년대 뉴욕 주의 한 농장에서 자란 친할아버지는 도끼질 솜씨가 남달랐다. 그분은 숲속을 거닐거나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나무며 관목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다 외우고, 나무들의 성장과 용도를 잘 알고 있었다. 목공일이라면 언제든 질리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할아버지의 작업장 옆에는 건조가 잘 되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쌓아놓은 판자더미가 늘 있었다.
할아버지는 가구며 배, 심지어는 마ㅏ와 썰매에 이르기까지 못 만드는 것이 없었다. 집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당신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의 일로 기억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배를 만든 적이 있는데, 노가 두 개 달린 진짜 배로 어린 나로서는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내 일은 할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구멍에 구리 못을 끼우는 것이었다. 못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으면, 할아버지가 가벼운 망치로 박아놓었다.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서부터는 망치질을 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할아버지는 독학으로 성공한 분이다. 1829년 뉴욕 주 시러큐스 시 인근의 한 농장에서 태어난 할아버지는 시골학교에 두해 다닌 적이 있는데, 그가 받은 정규교육은 이것이 전부였다. 어느 해엔가 독립기념일에 폭죽놀이를 할 때였다. 우리는 할아버지에게 어렸을 때 독립기념일 날 무엇을 하고 지냈냐고 물었다. 할아버지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감자밭에서 잡초를 뽑았지"
할아버지가 스무 살이 갓 지났을 때, 측량기사단이 농장 근처에 와서 캠프를 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도끼질에 능한 벌목꾼을 구했는데, 할아버지가 바로 거기에 뽑혔다. 몇 주 뒤 트랜싯 기사가 예기치 않게 병에 걸렸다. 기사단의 수석엔지니어가 할아버지에게 "자넨 도끼질을 잘하던데, 트랜싯(수평각과 연직각을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한 기계)을 다뤄본 적이 있나?" 증조부로부터 토지 측량법을 약간 배운 바 있던 할아버지는 그렇게 해서 트랜싯 기사로 승진하였다. 낮에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식으로 할아버지는 열심이었고, 그 결과 엔지니어 보조 자리를 따냈다.
이들은 다리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마침 장마철이 되었다. 불어난 물이 작업 현장까지 위협하게 되어, 물이 넘치지 않을까 밤낮 없이 수위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할아버지는 낮시간 동안 수위를 관찰하는 일을 했다. 그런데 첫날 저녁에 수석엔지니어가 밤에도 근무를 할 수 있겠느냐 물었다. 둘쨋날 밤 역시 그는 할아버지에게 물이 불어가는 것을 관찰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셋쨋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사흘 밤 사흘 낮을 잠 한숨 못 자고 고박 뜬눈으로 새운 것이다. "그때 난 계속 걸었단단. 만일 어딘가에 주저앉기라도 하면 그대로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 거야."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한 말이었다.
다리가 다 만들어지고 기사단이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뉴욕 주 엘마이러 시에서 기사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수석엔지니어에게 말했다. "당신이 추천서를 쓰지 않는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외라는 것도 있을 테고, 만일 이번에 추천서를 몇 줄만이라도 써주신다면, 엘마이러에 가서 자리를 얻는 데 아주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자 엔지니어가 말했다. "아니, 자네라고 예외를 두지는 않겠네. 하지만 내가 직접 엘마이러로 가서 자네 취직을 부탁해 보지." 그는 말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학교라고는 두 해 다닌 게 전부였던 할아버지가 꾸준한 노력과 독학으로 마침내 중요한 건설공정을 책임지는 어엿한 토목 기사가 된 것이다.
할어버지가 맡은 공사 중에는 홍수로 다리와 철로 일부가 떠내려간 비치 천 철도의 복구 작업이 있다. 할아버지는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홍수가 나지는 않을 것으로 계산하고, 당장 급한 대로 강가에 임시 철로를 부설하고, 나중에 이것을 기반으로 튼튼한 철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일정한 간격으로 땅에 묻고, 거기에 세로보를 세우고 침목을 연결해 철로를 깔았다. 여러 사람이 달려든 결과, 임시 철로는 오래 걸리지 않아 이용하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완성되었다. 이 작업을 점검한 한 기관사는 처음부터 할아버지의 의도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침목들이 다 들고 일어설 거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래도 기차만 달리면 되는 거지 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철로 건설을 성공적으로 끝낸 것을 인정받아, 할아버지는 모리스런 석탄 광산의 현장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석탄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석탄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이익은 날로 불어갔다. 뉴욕 주 코닝 시에 위치한 본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급전을 보내왔다. '생산 또 생산, 생산에 박차를 가해 빨리 석탄을 보내주기 바람.' 광산은 전쟁특수로 활기를 띠었다.
모리스런은 석탄회사에서 개발한 마을이었다. 토지와 길, 철로, 광산, 가옥, 학교, 상점 - 이 모두가 다 회사의 소유였다. 당시 펜실베이니아 주의 회사 개발 마을들처럼 모리스런에도 행정조직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보스는 우리 할아버지였다. 마을 살림을 꾸리는 데서 최종 결정은 바로 할아버지가 내렸다. 당시 광산회사와 광부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 노동자들 편을 든 지역신문으로 <윌리엄스포트 그리트>라는 주간지가 있었는데, 할아버지를 "모리스런의 차르 니어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만일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를 구타하는 일이 생기면, 여자는 경관에게 가는 대신에 할아버지에게 와서 하소연을 한다. 할아버지는 여자의 사정을 듣고, 남편을 불러 남자 쪽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하여 남자 쪽에 잘못이 있다고 판단하면, 할아버지는 이렇게 판결을 내린다. "여기서 일을 계속하고 싶다면, 사무실로 가서 벌금 20달러를 내게." 이 돈은 특별기금으로 모아져 일 년에 두 차례씩 마을의 주일학교들에 기부된다. 주일학교에서는 이 돈을 독립기념일 야유회 경비나 성탄절 선물과 크리스마스 트리 구입용으로 사용한다. 할아버지의 결정에 대해서는 한 번도 뒷말이 엇었다.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다면 벌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자리를 읽게 되면 주민들은 회사측 결정에 따라 열흘 안에 집을 비우게 되어 있다. 결국 할아버지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직장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집 없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전쟁특수는 1865년으로 막을 내렸다. 석탄과 목재 시장은 붕괴되었고, 가격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본사에서는 "생산 또 생산"이라는 지시 대신에 "비용 절감과 인원 감축"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노동자들은 본사에 대표를 보내 할아버지를 현장감독직에서 해고하라고 요구했다. 회사 대표인 제너럴 조지 마기가 할아버지에게 급전을 보냈다. "파업위원회가 이곳에 와서 당신을 쫓아내라고 요구하고 있소. 이 자들에게 뭐라고 하는 게 좋겠소?" 할아버지는 바로 답신을 보냈다. "전원 해고라고 말하십시요" 제너럴 마기는 파업위원회게게 돌아가, "미안하오. 니어링 씨가 당신들 전원이 해고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니어링 씨는 모리스런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오. 따라서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소. 오늘은 이것밖에 할 말이 없소." 위원회 대표들은 해고되었지만, 파업은 계속되었다. 열흘 기한을 둔 퇴거 공고가 나붙고, 남북전쟁 참전 용사들로 구성된 군대가 마을에 투입되었다. 파업자 가족들은 모두 지붕 없는 화차에 태워져 공용도로에서 3마일 가량 떨어진 지점에 강제로이송되었다. 마침 한겨울이어서 엄청난 한파가 몰려왔고, 그 와중에 여자아이가 눈더미 속에서 태어나는 사건까지 있었다. 법원은 노동자 가족들이 공용도로를 점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좀더 먼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치열한 법정 공방이 펼쳐졌다. 회사측은 군내의 이름난 변호사들을 모조리 고용했다. 그러나 조합 지도자들은 얼마전에 자격증을 취득한 한 무명 변호사를 찾아냈다. 회사측으로서는 허를 찔린 셈이었다. 그 변호사의 이름은 모트 엘리어트였다. 조합에서는 그를 고용했고, 에리어트는 회사측을 가차없이 몰아붙였다. 결국 재판은 회사측 승리로 막을 내렸는데, 재판이 끝난 뒤 할아버지는 모트 엘리어트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엘리어트, 다음번에 우리한테 문제가 생기면, 당신이 우리 편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소."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니어링 씨, 그건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엘리어트의 야망은 결국 실현되었다. 그는 스탠더드 오일사의 사무 변호사로 변호사직을 마쳤다.
남북전쟁 이후의 노동쟁의에도 불구하고 모리스런은 여전히 '빌어먹을 노조는 이제 그만'을 슬로건으로 내건 오픈샵(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도 고용하는 공장)지대로 남아 있었다. 노동자 조직가들이 모리스런을 드나들었다. 이웃 마을에서 나고 자란 걸출한 탄광 노조 지도자 존 미첼이 그 일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모리스런만은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 굳건하게 버텼다. 회사의 또 다른 방침은 나누어서 지배하라'였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마을이 갈가리 나뉘었다. 웨일즈계, 아일랜드계, 영국계, 스웨덴계, 홀란드계, 헝가리계가 각자 자기들 구역을 정해 놓고 자신들의 모국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자신들의 교회에 나가는 등 단절된 생활을 하며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적대감을 보였다.회사는 이런 분열을 조장하고 거기에서 이득을 챙겼다.
할아버지는 40년 동안 모리스런에서 설계하고 건설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아왓다. 1883년 내가 태어났을 때 모리스런의 모든 것은 완전히 할아버지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나는 자라면서 마을에서 원하는 대로 일을 골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열 살 때 회사 상점에서 주급 25센트를 받고 심부름을 하는 것이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그 상점에서 점둰과 배달부 노릇을 하고, 읍내 정육점, 대장간에서도 일했으면 길 놓는 일, 철도 건설, 벌목도 하고 측량반에서 조수 노릇도 했다.
어느날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말을 몰고 제재소 앞을 지나갔다. 아마 드때 내 나이가 열여섯이었을 것이다. 제재소 마당은 통나무와 모재로 가득 차 있었다. 통나무들이 톱질을 거쳐 판자와 각목으로 탈바꿈하고 나면, 판자는 판자더미가 있는 곳으로, 각목은 각목더미가 있는 곳으로 운반되었다. 이런 목재들은 수평 수직으로 기초를 잘 잡아서 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한쪽으로 기울다가 결국은 무너져 내리고 만다. 판자 두 겹 사이마다 목간이라고 하는 1인치 정도의 좁은 나무막대를 받쳐야 한다. 12피트짜리 판자를 받치는 데에는 세 줄의 목간이 일정한 간격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해야 새로 톱질된 판자가 바짝 마른다. 목간의 두께가 일정하고 위아래 목간의 위치가 정확하게 일치해야 판자들이 휘지 않고 곧게 마르고, 목간이 불규칙하면 판자가 뒤틀리게 된다.
제재소를 지나갈 때 할아버지는 두께가 다른 목간들이 뒤죽박죽으로 끼워진 모재더미 앞에서 말을 세웠다. 판자들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할아버지는 몹시 화가 났다. "너라면 두께가 똑같은 목간들로 판자를 정확하게 차곡차곡 쌓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좋다. 널 고용하마. 목재 야적장을 관리하도록 해라. 네가 이 일을 얼마나 잘 해내는지 보자꾸나."
톱질된 목재를 마당으로 옮겨 쌓는 일을 나보고 책임지라는 말이었다. 제재소가 돌아가고 있을 때는 적어도 여섯 명의 인력이 필요하고, 그 톱질꾼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두세명의 운반 조장이 각기 자신들의 운반 자업조와 함께 톱질된 목재를 날라야 했다. 톱질된 목재를 운반하여 쌓는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지 않으면 작업이 전반적으로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톱질된 목재가 밀려 있는 경우에는 운반과 적재를 맡은 인부들이 그 목재를 다 처리할 때까지 제재소가 일손을 놓고 있어야 했다. 나는 하루에 아홉 시간을 일하는 대가로 1달러69센트를 받았다. 목재더미가 곧게 마른 후에는 승진하여 제재소 주임이 되었지만, 하루 아홉 시간 노동에 1달러 69센트를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족이라고 해서 특혜를 누려서는 안 된다는게 할아버지의 생각이었다.
다음해 여름 탄광회사는 광산과 마을에 전기를 부설하기로 결정했다. 발전소가 건설되고 전선이 연결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채굴된 석탄은 화차 한 대에 1톤 가량씩 적재해 운반되었다. 운반 방식도 채굴장부터 수평갱까지는 대여섯 명이 함께 짝을 이루어 손으로 화차를 밀고, 지표면에서 반 마일 가량 깊이에 있는 집합장까지는 노새가 끈 다음, 화차를 끝없이 긴 줄에 매달아 할아버지가 발명해 특허를 낸 특수 기중기를 이용해 광산 밖으로 끌어내는 식이었다. 전기 모터를 이용하면 한 번에 여러 대의 화차를 연결해 끌어당길 수 있고, 이동 속도도 빨라질 것이었다.
본사에서 파견한 가벨스라는 기술자가 전기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가벨스는 읍내 호텔에 묵으면서 현지 사람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읍민들은 의심과 분노의 눈길로 이방인을 바라보았다. 가벨스 씨는 유감스럽게도 성격이 냉랭했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를 애먹였다. 인부들과 마을 사람들은 가벨스에게 짓궂은 장난을 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일을 하러 갈 때 각자 양철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 양철 도시락에는 칸막이가 있어서 위칸에는 차를 아래칸에는 마른 음식을 넣게 되어 있었다. 어느날 아침 가벨스가 발전소 한 구석에 도시락을 내려놓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그러다가 티타임에 물 좀 먹으려고 사무실로 돌아왔으나 도시락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도시락을 찾아보았으나 헛일이었다. 그때 발전소를 책임지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가벨스, 바닥은 그렇게 샅샅이 뒤지면서 왜 머리 위는 안보는 거요?" 그말을 듣고 가벨스가 고개를 들었다. 천장 꼭대기에 있는 마룻대에 그의 양철 도시락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도시락을 뒤집어 못으로 마룻대에 박아 놓은 것이었다.
한번은 가벨스와 이부들이 묵직한 전선을 탄광의 주 갱도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일 자체가 간단치 않은 데다 가벨스가 인부들의 협력을 끌어내지 못해 일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가벨스는 전기 설비에 관한 것이라면 모르는게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나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게다가 탄광 안에 전선을 설치하는 일은 광부들의 근무시간이 끝난 야간에 할 수밖에 없는데, 야간 작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날 나는 곡식 한 짐을 배달하고 나서 점심을 먹으로 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요즘 뭘 하며 지내니?" 할아버지가 내게 불쑥 물었다. 나는 상점에서 마차를 몰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 가벨스라는 작자가 지금 같은 속도로 일을 계속하다가는 백 년이 지나도 탄광 안에 전기가 들어가지 못할 게다. 네가 오늘 저녁 5시에 가서 그 자의 인부들이랑 같이 일을 하지 않겠니?"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내내 오후 5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주일에 6일씩 야간 작업을 했다. 그러는 사이 인부들의 태도가 바뀌어 협력이 잘 됐다. 우리는 하나의 팀이 되어 같이 작업을 했다. 내가 가을 학기를 위해 그곳을 떠나기 전에 탄광 안에 전선이 설치되었다.
열여섯의 나이에 나는 할아버지의 분쟁 조정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나랑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들과 말썽없이 잘 지냈다. 내가 제재소를 책임지고 있을 때의 일인데, 어느날 미국으로 갓 이민온 헝가리인 두 명이 제재소에 들어왔다. 그들은 영어를 못하고 나는 헝가리어를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통용되는 일상적인 방법은 주임이 삽을 들이대고 땅을 가리키며 "이봐, 이거 가지고 가서 빨리 일해"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맹세코 주변 사람들에게 명령이라는 것을 한적이 없다. 두 헝가리인이 나타났을 때, 나는 그들에게 삽을 건네주고 그들과 함께 작업 장소로 갔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서 삽을 받아들고 내가 직접 삽질을 해서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시범을 보인 다음 도로 삽을 넘겨주고 돌아왓다. 30분쯤 지나서 다시 그곳으로 가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일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뜻으로 다시 한 번 시범을 보인 뒤 그들이 일을 마저 하도록 두고 돌아왔다. 나는 모리스런에서 여러 가지 일에 관여했었지만, 한 한 번도 인부들과 말다툼을 한 적이 없었다.
독학으로 엔지니어가 된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은 곧 훌륭한 스승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도실에서 쓰는 도구들에서부터 숲에서 쓰는 도끼, 또는 작업장에서 나무나 금속을 다룰 때 쓰는 연장에 이르기까지 공구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훌륭한 기술자들이 그렇듯이, 그는 늘 자신의 일에 대해 앞질러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곤란한 문제들을 미리 예견하여, 실제로 그런 문제가 터질 즈음에는 이미 해결책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스로 터득한 뚜렷한 철학이 있고, 여러 분야에 걸쳐 깊이있는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면, 어떤 분야에서든 독창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불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절하고 끈기있으며, 기다림이 필요할 때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쯤에서 내 할아버지 윈필드 스콧 니어링께 경의를 표하고, 다음 스승 얘기로 넘어가 볼 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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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결정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세번째 인물은 펜실베이니아 대학 워튼 스쿨의 경제학부 학과장인 사이먼 넬슨 패튼 교수였다.
허걱! 시간이... 아이몰라.... 그래도 재밌다^^ 낼 읽어드릴께요 히히 |
이정화 | ㅎㅎ 읽는거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 저 오타 수정 안했거든요 오타 많이 찾아주세요^^ 어느곳에서든 분리해서 다스리는것이 편한가봅니다 거기에서 콩고물이 많이 떨어지나요 ㅎㅎ 에잇 왜 갑자기 광주의 일이 떠오르는지... 모두 힘찬 한주 되자구요 아싸!! 히~ 수고욤! 2008-10-13 10:0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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