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 건양대학교병원 장례식장
우리는 지금 오주용 씨루스 형제님의 장례 미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먼저 갑작스런 비보에 경황이 없으실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인을 하느님 품으로 보내드리면서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이 크실 텐데요. 장례를 치루는 동안 그 마음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하며 이제는 고인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편히 쉴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병마와 싸우며 투병생활을 하셨던 씨루스 형제님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의탁하며 견뎌내셨습니다. 제가 본당에 부임한 이후로 주일 미사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으셨는데 몸이 불편해도 항상 밝은 표정이셨습니다. 그러다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최근에는 봉성체를 받으셨습니다.
사실 어제도 봉성체를 기다리다 갑자기 응급실로 모셨고 이후 중환자실로 옮겼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22시경 선종하셨습니다. 밤 9시경 부인과 통화할 때 병자성사를 어떻게 할지 내일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선종 소식을 접하고 형제님과의 추억을 떠올려 보니 일년 반을 넘게 만났지만 형제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불편하신 몸으로 주일 미사에 꼬박꼬박 나오시는 모습이 본당에 부임한 제 눈에 금방 띄었지만 그저 악수하며 안부를 묻는 정도였습니다. 봉성체를 다닐 때도 대화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섣달 그믐날 찾아뵈었을 때에도 25년 전 찍은 가족사진을 보며 옛 추억에 잠기곤 하셨습니다.
씨루스 형제님은 장교로 복무하면서 부인을 만나 결혼하여 1남1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다가 서울 가락동 성당에서 1984년에 부인이 먼저 수산나로 세례를 받으셨고, 1987년에 형제님과 두 자녀가 안토니오와 비비안나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직업의 특성상 자주 이사를 다니다가 90년대 후반, 현재 사는 계룡아파트에 정착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정림동 성당이 신설되면서 소위 말하는 “군인정신”으로 본당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봉사하셨습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네요. 다방면에서 뛰어나셨다고 하니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점점 몸이 굳어져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어쩌면 선종하는 순간까지도 답답해 하셨을지 모릅니다.
말 한마디면 일사천리로 모든 게 해결되는 생활을 하셨던 분이라 작금의 현실을 더 부정하고 싶으셨겠죠. 그러기에 더욱 간절하게 하느님께 매달리셨습니다. 벗어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주실 분은 하느님 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이제는 우리도 고인이 그토록 바라던 하느님 곁에서 천상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하며 보내드려야겠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유가족이 느끼는 슬픔과 괴로움이 크겠지만 장례를 치루면서 고인과의 관계 안에서 쌓인 모든 것을 풀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잘 풀어 헤쳐서 좋은 추억만 고이 간직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봉헌하세요. 그동안 씨루스 형제님이 자신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기워 갚았지만 혹여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로 채워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주님! 오주용 씨루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씨루스와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