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재혼에 대한 성경적 이해
신명기 24장 1-4절에 나오는 이혼의 모습은 첫째, 이혼을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합법적인 절차로 인정하고 그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둘째, 음행 이외의 이유의 경우에는 이혼을 제정하거나 허용조차도 하지 않는다. 셋째, 쉽게 이혼하는 것을 격려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요점은 이혼이나 재혼이 한번 행해지고 나면 그것을 수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급한 행동을 막으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명기 24장 1-4절은 비성경적 혹은 불법적인 근거에서 주어진 이혼을 말하는데, 그러한 이혼은 합법적이지만 죄악된 것이다.
이 구절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신명기 24장 4절에서 아내는 두 번째 결혼 때문에 “더럽혀”졌기 때문에 첫 남편과 재혼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녀의 첫 남편으로부터의 이혼은 법적으로는 합법적일지 몰라도 성경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혼이 적절하고 죄 없는 것이었다면 그 이혼으로써 그녀는 두 번째 남편과 죄 없이 재혼하도록 자유롭게 되었다. 그녀는 첫 남편과 계속해서 결혼생활을 하거나 화해를 해야 하는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이 그녀를 “더럽혔다”. 우리는 만일 그녀가 두 번째 남편과 이혼으로 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남편의 죽음으로 헤어졌을 경우에도(3절), 그녀가 더러워졌기 때문에 다시 재혼을 못한 것으로 보아서 그녀는 두 번째 이혼으로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두 번째 결혼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오직 두 번째 남자와 성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더러워졌다기 보다는 오히려 결혼서약을 깨뜨린 것 때문에 더러워졌다. 여기에는 간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명기 24장에서 잘못된 일은 두 남자가 한 아내를 차례로 가졌다는 태도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여호와께서 신명기 24장에서 혐오스럽고 더렵혀짐으로 이어진다고 부른 것은 결혼의 연속보다 더 깊은 것이다. 신명기 24장의 아내는 두 번째 남편과의 성적 관계 때문에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죄악된 이혼(합법적이지만)으로 인해서 일어난 두 번째 결혼과 성적 관계로 인해서 더렵혀진 것이다. 첫 번째 이혼은 천박한 이유였기 때문에 죄악된 것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결혼도 죄악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재결합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죄악 된 이혼은 첫 결혼의 언약을 정말로 깨뜨렸다. 간음은 항상 결혼 언약을 깨뜨려서 제 3자를 상황 속으로 개입시키므로, 둘만이 서로를 위해서 하기로 한 언약에서 제 3자에게 권리나 특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으로 간음은 결혼 언약이 아직 영향이 있을 때 일어난다. 그러므로 언약은 깨어졌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이혼한 상태로 그대로 있을 권한이 없다. 그들에겐 재결합을 통한 재혼으로 다시 화해할 수 있는 소망이 있다. 그것이 핵심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화해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지 않아야 하며 또 다른 간음을 하지 않기 위해서도 재혼을 하지 않아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할 수 있다면,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할 수 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재혼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재혼을 허락하시는가, 반대하시는가? 격려하시는가, 묵인하시는가? 성경에는 배우자가 죽은 후에 재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반대하는 것이 없다. 다음 성경구절들을 살펴보자.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 7:3하)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 7:39)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 5:14)
바울은 과부들이 재혼하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유혹, 불명예, 참견 그리고 교회가 과부들을 돕기 위해서 불필요한 짐을 지는 것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현실적인 이유들과 하나님의 이름의 증거를 위해서,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교회에게 주었다. 즉 재혼 그 자체에 대해서 잘못된 점을 찾는다거나 문제점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재혼이 권고된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바울은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가진 과부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재혼을 명령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 7:8,9)
분명하게 재혼의 개념은 신약의 교회에서 매우 좋게 받아들여졌다. 그것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의혹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서 볼 때 바울이 교회가 재혼한 사람을 장로나 집사로 임명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바울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보기 드문 구문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는데, 그는 한 사람이 몇 번 결혼했는지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몇 명의 아내를 가졌는지에 대해서 염려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구절은 엄격히 말해서 오직 하나의 해석만을 허용한다. 장래의 장로나 집사는 결혼생활을 비롯한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다처주의자이어서는 안된다. 즉 이 구절은 어떤 한 주어진 시간에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한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했으나 그것이 절대로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일부다처주의자인 개종자가 그의 아내들을 버리기 전에 그리스도의 지체로 들어오게 허락되었지만 직분자가 될 수는 없었다. 직분자의 생활은 반드시 모범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일부일처제로서의 결혼의 모범을 교회에서 지키기를 원하셨다. 일부다처제는 그 당시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과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맥락에서 재혼한 사람들을 직분자로 임명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재혼에 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은 첫째, 일반적으로 재혼은 허락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격려되었고 명령되기도 했다. 신약시대에서 재혼은 좋게 보아졌다. 둘째, 이혼 후의 재혼은 허락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정확히 그의 배우자로부터 놓인 경우에는 죄가 없다고 분명히 선언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경우에 이혼 후에 재혼 할 수 있는가? 먼저 간단한 원리는 적절하게(성경적인 규정에 따라서) 이혼한 모든 사람들은 재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복잡한 원리는 바르지 않게 이혼한 사람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의 배우자에게 아직도 화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 또는 적절하게 이혼했으나 다른 의무들이 있는 사람들은 그 의무들을 이행해야 하며 그때야 비로소 결혼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개종자들과 회개한 기독교인들의 과거의 문제가 이혼과 재혼에 관한 토론에서 자주 거론된다. 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결코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살인, 아주 속된 음란 등을 용서하시는 것이 분명하므로, 교회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용서는 개종 후에 범죄한 회개한 믿는 자의 경우일지라도 정결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위로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들과의 완전한 친교에 대한 회복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후 2:7,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보다 더욱 크신 분이시다. 또한 우리의 간음과 이혼의 죄보다도 더욱 크신 분이시다. 즉 죄는 가증스럽지만, 은혜는 가장 가증스러운 죄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롬 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