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현재와 슬픈 빈자리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창비, 2016.
1996년 『푸르른 틈새』로 등단한 작가 권여선은 이번엔 소설집『안녕 주정뱅이』를 선보였다. 『안녕 주정뱅이』는 총 일곱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었고 ‘술’을 매개로하여 다양한 인물들을 끌고 나가는 점이 특징이다. 작가는 우연치 않게 각각의 단편에서 ‘술’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해서 표제작을『안녕 주정뱅이』라고 정했다고 한다. 소설집은 <봄밤>을 시작으로 <삼인행>,<이모>,<카메라>,<역광>,<실내화 한 켤레>,<층>으로 엮어져 있다.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술을 마신다. <이모>에 나오는 시이모님은 일주일에 소주 한 병을 <봄밤>의 영경은 패트병 소주를 통째로 들고 마신다. 술을 마시고 주정하는 인물도 <삼인행>에 나오고 <역광>의 그녀는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신다.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과거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일곱 편의 단편들은 대부분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재현되어 있다. 특히, <이모>의 윤경호는 췌장암에 걸려 문병 온 조카며느리에게 지나온 삶을 서술한다. <카메라>의 관희도 맥주를 시켜놓고 직장 동료였던 문정에게 동생의 죽음을 아슬아슬하게 암시한다. <실내화 한 켤레> 경안은 14년 만에 갑자기 방문한 친구들과 소주와 위스키를 마시고 여고시절의 외면당했던 장면들을 떠올린다.
작가 권여선(1965~)의 작품으론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등이 있으며 2007년 오영수 문학상을 받았고 <사랑을 믿다>는 2008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녀의 삶의 명제는 이렇다. ‘고독하라’,‘가난하라’,‘끝내 명랑하라’다. 8년 간의 공백기간 동안 고독했고 그 힘이 소설을 쓰게 했다고 전한다. 단편 <이모>가 작가가 꿈꾸는 삶이며 가난해도 괜찮을 때 끝내 명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작품 안에 그려내는 인물들과 그녀가 희망하는 삶들이 오롯하게 오버랩 되는 장면들이 곳곳에 연출된다. 그러나 『안녕 주정뱅이』에 드러나는 인물들의 삶은 느닷없는 고통으로 숨이 막히고 말문이 열리지 않는 상황들과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권여선.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다. <봄밤>의 영경은 이혼 후 아이마저 뺏기자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수환은 신용불량자로 자살을 저울질하며 하루를 버티지만 극심한 류마트즘 관절염에 걸린다. 둘은 친구 재혼식에서 만났고 서로를 애틋하게 보듬는다.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했다.’(p.28) 그렇지만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은 둘을 결국 갈라놓고 만다.
권여선.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철저하게 비극적이다. <카메라>의 관주는 ‘사진을 배워서 찍고 싶다’는 문정의 말에 카메라를 산다. 카메라 테스트를 하러 나가 불법체류자와 얽히게 되고 관주는 돌길에 머리를 찧고 죽고 만다. 돛단배 같던 창창한 청년의 죽음에 누나는 운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술에 취한 눈동자는 공허할 따름이다. <이모>의 삶 또한 처절하다. 남동생 도박빚을 다 갚고 평생을 홀로 산 이모는 결국 자신으로 산 온전한 삶의 기간은 고작 2년뿐이다. 2년을 위해 처절하고 긴 시간을 견디어야 했다.
『안녕 주정뱅이』는 하나같이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한다. <삼인행>의 주란은 건강보험료 조정이 안 되어 계속 전화통을 붙들고 있고, <봄밤>의 수환도 전 아내에게 재산을 모두 뺏겼다. <실내화 한 켤레>경안은 선미에게 계속 경멸을 당하고 만다. <역광>의 그녀는 불안장애로 자신보다 타인의 삶을 상상하며 살아간다.
환청, 망상, 간경화, 강박장애, 손떨림, 끝없는 갈망, 기억상실 등은 알코올이 주는 잔인한 중독이다. 중독은 끊임없이 인간을 추락시킨다. 『안녕 주정뱅이』는 결핍의 상처와 심연의 깊은 슬픔을 가진 빈자리를 술로 가득가득 채울 수밖에 없다. 자신이 휘발되어 버린 사람들에게 권여선은 마지막으로 작은 위안을 부여한다. 격렬했던 삶이어도 끝내 그렇게 헛헛하지는 않게 남겨 둔다. <이모>에게는 시트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시이모의 손을 잡아주는 조카며느리를, <삼인행>은 “우리 다시는 서울로 못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지 않나?”(p72)는 이별의 취기를, <봄밤>은 늦게 찾아 온 각별한 인연을, <카메라>는 슬픈 사랑의 추억을 주고 간다.
권여선은 분명 소설을 썼음에도 그녀가 만들어 낸 인물들은 허구의 존재처럼 보이지 않는다. 『안녕 주정뱅이』을 읽고 나면 인물들이 독자의 마음 안에 선명하게 살아 존재할 것이다. 만약 내면에 빈자리가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깊은 심연을 감당해내야 한다. 이것이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녕 주정뱅이.
<서평-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