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쿠시마 트레킹
부산일보 기사 입력일 : 2014-07-17
야쿠시마=글·사진 김승일 기자
수천 년 된 '원시숲' 시간의 굴레를 벗다
인간은 시간의 포로다.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100년. 그 시간 속에 살다가 사라져야 하는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영혼이 떨린다. 그리하여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게 숙명이다.
그래서일까. '시간의 숲'으로 불리는 야쿠시마(屋久島)는 경외감을 자아낸다. 일본 각지에서 발걸음이 몰린다. 일본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 거기서도 배를 타고 2시간 더 내려가야 나오는 외딴섬을 불원천리 찾는 이유는 뭘까. 신비의 섬, 정령의 숲, 물과 이끼의 고향 등으로 묘사되는 이곳에 가면 수령 수천 년의 삼나무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1천 살이 안 된 스기(杉·삼나무)는 아예 '고스기'(小杉·어린 삼나무)라 뭉뚱그려 말한다. 2천 년 이상 묵어야 '야쿠스기'(야쿠시마의 삼나무)로 쳐주고 별칭도 부여된다.
신비의 섬, 정령의 숲, 물·이끼의 고향
곳곳에 1천~2천 년 아름드리 삼나무
초록 채색에 사방 풍광이 만화경 같아
초록에 지쳐 눈이 부신 이끼의 숲 어딘가에서 툭 하고 정령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만화경 같은 공간을 거닐었다.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는 듯한 즐거운 착각에 모처럼 자유를 만끽했다.
■정령이 머무는 세계자연유산
제주도의 4분의 1 크기인 야쿠시마(500㎢)는 섬 자체가 거대한 산이다. 최고봉 미야노우라다케(宮之浦岳·1,936m) 주위를 1,500m가 넘는 암봉들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다. 1천m 이상 되는 봉우리만 46개. 규슈에서 가장 높은 산 8위까지 여기에 몰려 있다. '바다 위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까닭이다.
야쿠시마는 1993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섬의 90%를 덮고 있는 삼림은 독특한 기후와 토양, 식생이 나타나고 있다. 열대와 온대가 만나는 북위 30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산악지역으로 오를수록 온대를 거쳐 한대까지 차례로 나타난다. 고지대 화강암 위에서 자라는 삼나무들은 영양분이 거의 없고 기온도 낮은 가혹한 조건 속에서 극소 성장한 것이 장수로 이어졌다.
야쿠시마에서는 한 달에 35일 비가 온다는 말이 있다. 연간 최대 강수량이 1만 1천㎜이니 과장도 아니다. 자연히 물과 이끼가 넘치고 신령스러운 풍경까지 만들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이곳을 무대로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만들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게다가 해발 1,300m에 살고 있는 '조몬(繩文)스기'는 신비감에 휩싸여 있다. 새끼줄 문양을 뜻하는 '조몬'은 일본에서는 신석기시대를 가리킨다. 즉, 조몬스기란 살아있는 신석기시대 삼나무라는 뜻이다. 추정 연령은 여러 설이 있지만 최고 7천200년이다. 대부분 조몬스기를 보러 온다.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멀리 설치된 나무 덱에서 뒤태만 볼 수 있고, 그것도 밀려드는 행렬 때문에 여유롭게 사진 한 장 찍기도 어려운 데도 끊임없이 몰려든다. 이 현존하는 '선사' 앞에서 다들 어떤 의미를 되새기고 돌아가는 것일까.
■신비로운 원시 숲길
"자칫 셔틀버스를 놓치게 되면 하산을 못 하게 될 수도…."
가이드가 전날 잔뜩 겁을 준 탓에 전원이 오전 5시 호텔 로비에 모였다. 산행 들머리인 아라카와(荒川) 등산로 입구로 가는 등산버스가 출발하는 야쿠스기 자연관까지 가려면 도리가 없다고 했다. 셔틀 등산버스는 오전 5시부터 20분 간격으로 4차례만 운행된다. 당초에는 시간을 맞추려 오전 4시에 출발하려 했지만 다행히 밤늦게 택시가 수배된 덕분에 아라카와로 직행할 수 있어 한 시간이 절약됐다.
오전 6시 조금 못 미쳐 들머리에 도착했다. 이미 깜짝 놀랄 만큼의 인파가 모여 있다. 20~30대 젊은이들이 대부분. 눈빛이 하나같이 진지하다. 힐링과 극복을 찾아서일까. 지난해 한라산 관음사 코스에서 만난 일군의 20대 젊은이들의 표정이 겹쳐졌다.
아라카와 입구는 벌채한 삼나무를 실어 내려오는 삼림철도 시종점이다. 별도 등반로를 만들어 환경을 훼손하느니 차라리 협궤 위를 걷게끔 하고 있다.
첫 발걸음을 떼자마자 돌연 장대비가 쏟아졌다. 야쿠시마에서 일기예보는 의미가 없다. 온 산을 초록으로 뒤덮고 있는 이끼가 왜 생겼겠나. 일본 산꾼들은 대부분 투피스 우비로 갈아입었다. 한국 사람들은? 우산을 쓴 사람, 하릴없이 비를 맞는 사람…. 야속하게도 하산할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다.
협궤를 걷다가 원숭이 떼를 만났다. 어미의 등에 올라탄 새끼원숭이는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낯선 이의 접근을 경계했다. 빗속에 주저앉아 도시락을 먹는데 이번엔 사슴이 기웃거렸다. 야생의 본분을 잃었는지, 오래 굶었는지 비닐봉지에 코를 처박고 먹을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어쨌거나 야쿠시마의 주인은 이들 사슴과 원숭이다. 주민의 숫자(1만 4천 명)를 능가하는 각각 2만 마리가 산다.
외길인 협궤에 산행객들이 몰리다 보니 정체가 일어났다. 숲해설가를 대동하고 올라가는 일본 팀과 뒤섞여 귀동냥을 했다. "이 부부삼나무는 수령 2천 년과 1천500년 된 나뭇가지가 완전 붙었어요. 이 3대삼나무는 야쿠시마 식생을 잘 보여줍니다.1천500년 전에 쓰러진 1대 그루터기 위에 1천 년 전 2대가 뿌리를 내렸다가 죽고, 현재는 350년 전 착생한 3대가 1, 2대 위에서 살고 있어요."
숲을 걷는 내내 제주도의 독특한 식생 곶자왈이 떠올랐다. 열대와 한대 식물이 공존하면서 만들어내는 원시생태계가 신비감을 주는 게 공통점이다. 그렇게 2시간 남짓 걷자 평탄한 협궤 길이 끝이 나고 가파른 숲길인 오카부(大株) 등산로가 시작된다. 다소 거칠어서 힘이 부친다.
둥치가 공동화되어 밑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윌슨 그루터기'(수령 2천 년 이상)에 들어가 물을 한 모금 들이켜 목을 축였다.
드디어 조몬스기. 장대비를 아랑곳하지 않은 수백 명이 운집했다. 높이 25.3m. 둘레는 16.4m라 성인 13명이 팔을 뻗어야 되는 아름드리다. 2005년 폭설로 가지가 부러졌는데 그 무게가 1.2t. 헬기로 들어올려 야쿠스기 자연관에 전시 중이다. 혹독한 환경 탓에 나이테 간격이 1년에 1㎜도 채 안 된단다. 그러한 1천600개가 넘는 나이테를 일일이 세어 놓은 걸 나중에 볼 수 있었다.
조몬스기에서 정상까지 길이 나 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하산길에는 여유가 생겨 느긋하게 풍경도 보고 사진도 찍었다. 22㎞를 꼬박 9시간만에 걸어 아라카와로 원점회귀했다. 대기하고, 걷고, 차량으로 이동한 시간까지 포함하면 꼬박 12시간의 행군이었다. 수천 년 된 야쿠스기에 비하면 찰라의 순간일 텐데도 참 뿌듯했다.
야쿠시마=글·사진 김승일 기자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