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웨베르보고서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 뒤 각국의 공사관들이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서 사건의 진위와 일제의 관련 여부를 추궁하자 미우라는 일제와 무관한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발뺌을 했다. ”불합리한 풍설을 퍼뜨리는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보다 일본인들의 말이 더 신임할만하다.” 그러자 웨베르는 '목격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다'라고 하자 일본 공사관은 그제서야 당황하고 다시 알아 봐야 한다며 회의를 일방적으로 끝내 버렸다.
6. 이 사건이 국제적으로 비화되자 일제는 낭인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라고 축소 조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은 “일본은 깡패들이 흔히 저지른 하찮은 소란으로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은 일본인들의 잔꾀”라고 보도하여 일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7. 일본 고꾸민신문(國民新聞)은 10월17일부터 이 사건을 다음과 보도하고 일본국민들을 호도했다. “황후가 훈련대를 믿지 않았다. 비밀리에 왕궁 시위대가 훈련대를 무장 해제하고 해산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런 계획이 노출됐고 훈련대와 대원군이 밀접한 동맹을 맺고 있다 하더라도 협상이 갑자기 이뤄졌는지 혹은 오래 전에 이뤄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8일 새벽 2시40분 대원군은 공덕리 별장을 떠났다. 그를 호위하던 훈련대 1대대가 길을 잘못 들어 서대문이 아닌 신궁의 정문 광화문에 도착했다.
대원군 일행은 시위대와 궁내부 앞에 배치된 20명의 무리에게서 소총사격을 받았다. 호위병들은 총을 쏜 뒤 곧 도망쳤지만 궁내부 앞에 있던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대원군에게 덤벼들다가 사살됐다. 그는 황후가 임명한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이었다.”
“궁녀들과 황후의 거처에 다가오는 훈련대 사이에서 소란스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궁궐에 맨 처음 나타난 외교관은 일본 전권 위원인 미우라 고로 자작, 러시아 대리공사 M. 웨베르, 그리고 합중국 공사관의 알렌 박사였다. 그들은 곧 왕을 알현했는데 그때 대원군과 함께 있던 국왕은 생기가 없었다. 국왕은 그 사태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소극적인 한국사람들이 이 비극에 참여했으며 그것은 귀족들의 반목이며 인민과는 무관하다고 대답했다. 많은 고급관리들이 도망쳐서 살 길을 찾아 나섰고 내각은 모조리 교체되었다."
8. 미국 대리 공사 알렌(H.N.Allen) 등 외국공사들이 다이(William McEntyre Dye)·사바틴· 현홍택·의녀·궁녀 등으로부터 직접들은 현장의 상황은 일본군. 영사경찰. 공사관원 등의 일본인들이 황후 시해를 자행하였고 미우라가 이들의 사주자임을 간파하였다.
첫댓글 예나지금이나 반성없는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