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전라병영성 보부상 소나무
강진군 병영은 전라병영성에서 얻은 이름이다. 고려 말 이후 잦아진 왜구의 노략질을 막고 토벌키 위해 광주목(광주광역시)의 전라병영을 도강현(강진)으로 옮겼다.
광주의 전라병영은 지금의 광주비행장이 있는 송정리 고내상과 용보 마을에 있었다. 고내상은 병영의 성터라는 ‘고내성’의 성이 상으로 바뀌었고, 용보는 황룡강의 봇도랑이 마을 한가운데로 흘러서 얻은 이름이다. 지금도 황룡강과 가까운 용보 마을의 ‘성내, 성안엣들’, 바깥쪽인 서쪽 ‘성너맷들’의 옛 이름이 남아 있다.
이 고내상리의 병영이 조선 태종 17년(1417)에 강진으로 옮겼는데,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이 축조했다. 이때 마천목이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을 따라 성벽을 만들어서 ‘설성’이라고 불렀다. 또 ‘세류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중국 한나라 문제 때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한의 문제 시절 흉노를 막기 위해 패상, 극문, 세류 세 고을에 세 명의 장군을 보냈다. 그리고 문제는 그곳을 순방했다. 이때 패상과 극문에서는 병사와 장군이 성문을 열고 극진하게 대접했다. 하지만 세류는 달랐다. 문제가 군사를 보고 싶다는 조서를 보내 ‘주아부’ 장군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군영에서 말을 타고 달리지도 못했다. 장수들도 ‘군장을 차렸을 때는 절하지 않는 법’이라며 무릎을 꿇지 않고 예를 차렸다. 이때부터 군율이 엄정한 성을 세류성이라 했으니, 마천목의 전라병영성 군율이 어떠했는지를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천목(1358~1431년)은 장흥의 속현 회령 모원마을에서 태어났다. 열다섯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고향인 곡성군 오곡면으로 왔다. 어머니 병환에 마천목은 마을 앞 섬진강에 물고기를 잡으러 가서 푸른 돌을 주웠다. 그러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그 푸른 돌이 두목이라고 했다. 제발 두목을 살려달라며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고 했다. 마천목은 고기 잡는 어살을 만들어 달라 했고, 이에 도깨비들이 독살을 놓았다. 이 효자 장군 마천목의 도깨비살 유적이 오곡면을 지나는 섬진강에 있고 사당인 충정묘와 묘소는 이웃 고을 석곡면 방송리에 있다,
병영은 수인산, 성자산, 옥녀봉, 별락산, 화방산 등 크고 작은 산이 둘러싼 천연요새지이다. 이곳에 ‘난선제주도난파기’를 쓴 하멜이 1656년부터 1663년까지 7년간 머물렀다. 한국에 관한 서양인 최초의 책 ‘하멜 표류기’의 하멜은 네덜란드 자위트홀란트주 호린험에서 태어났다. 효종 4년(1653) 8월, 하멜은 무역선 스페르베르호의 포수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했다. 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고 이듬해 5월 서울로 호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다. 그 뒤 1657년부터 강진 전라병영, 1663년에 여수 전라좌수영에서 잡역을 했다. 1666년 9월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곳 병영은 보부상이 상업을 주도할 때, 조선의 상권을 주도하던 상업의 중심지였다. 당시 사람들은 ‘북은 송상(松商), 남은 병상(兵商)’이라고 했다. 북쪽에는 개성상인, 남쪽에는 병영상인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조선시대 한강 이북 지역 상권을 주름잡던 세력이 송상이고, 남쪽지역 상권을 휘감은 세력이 병상이다. 이들의 상인 정신은 도전정신, 신용제일주의, 상생주의, 근검절약과 겸손이었으니 오늘날에 다시 받들어야 할 규범이다. 이곳 병영상고는 그 병상의 맥을 잇고 있는 학업의 전당이다.
여기 병영성의 대여섯 아름의 수백여 살 은행나무, 비자나무, 느티나무는 그날의 역사이며, 진남루 성곽에도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다. 마천목, 하멜 등을 생각하며 바라보니 온통 마음을 앗는다. 그저 한 폭의 소나무 그림에 숨을 죽이나니, 세상 시름조차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