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레도 여행이야기
중세의 영화와 엘 그레코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도시 스페인의 톨레도를 찾아서……
타호강 건너편에서 바라다 본 톨레도는 「황금기둥으로 만든 배」처럼 물위에 흐르는 옛도시는 헐벗은 검붉은색 땅 위에서 아직도 흘러간 영화를 버리지 않는다. 더러는「황금 대좌 위에 떠 있는 배」처럼 생긴 도시라고는 하지만 그 모습은 중세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 진 곳이 없다. 왕성의 탑이 돛단배의 기둥처럼 보이고 이슬람문화와 카톨릭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펼쳐진 전경도 옛날 그대로다. 사막의 고원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타호강과 그 뒤를 병풍처럼 에워싼 붉은색과 갈색이 뒤섞인 바위산은 엘 그레코의 작품「톨레도의 전경」과 너무도 똑같다. 황량한 구름 위에 차분히 서있는 역사 도시 톨레도, 일찍이 톨레도에 반해서 그곳에 살면서 불후 명작을 수 없이 남겼던 엘 그레코의 숨결은 어느 곳에나 남아 있다.
톨레도라는 이름은 원래「성으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뜻이다. 필립2세가 마드리드로 도음을 옮기기까지 1천년 동안을 스페인의 고향으로 자리를 지켜 왔다. 711년 부터 4백년동안 이슬람교도에 의해 지배 됐던 비운을 겪었던 탓으로 고딕식 사원과 무어풍의 왕궁과 성벽 등이 살아서 있다. 톨레도는 역사의 도시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인 셈이다. 전략지로 천연 요새였던 톨레도가 오랬동안 도읍으로 남아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톨레도의 강과 성벽은 이 지방을 지키는데 알맞은 곳이어서 어느 쪽이든 이베리아 반도를 길게 흐르는 타호 강 유역을 차지하려는 지배자는 이곳을 찾았다. 톨레도의 문화는 독특하다. 카톨릭시대에 살면서 여전히 이슬람교도로 남아서 그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을 「무테하르」라고 부르며, 반대로 이슬람교도의 통합 아래 살던 그리스도교도를 「모사베라」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두 문화는 대립하기 보다는 서로 보완해서 오히려 더 격조 높고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했다. 트란시토 교회는 로마 네스크 조(調)이 지만 종 루는 이슬람 첨탑이다. 당초 이 교회는 유태교회였다고 하니 이질적인 문화가 부딪칠 때마다 새로운 유산을 남겼던 것이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카데드랄 대성당은 스페인 카톨릭의 본부다. 무려 90m높이의 종루가 시내를 굽어 보는 이 성당은 원래 모스크였지만 13세기에 성당으로 개축하면서 15세기까지 그 공사가 진행되어 오늘에 이른다. 얼마나 많은 신도들이 눈물로 그들의 죄를 참회하면서 대리석 기둥을 어루만졌던지 손가락에 패인 자국이 많다. 톨레도를 스쳐간 온갖 문화가 남긴 유산이 바로 대성당이다. 대체로 프랑스 고딕풍으로 세워졌다. 스페인 수석 주교가 머물고 있다는 한 신부의 설명이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1만여 명의 신도가 한꺼번에 미사를 드리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성당안의 보고(寶庫)에 있는 성찬현치 대(聖饌顯置臺)는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높이 3m, 무게 200kg에 달한다. 금은보석 등으로 세공되어 옛 스페인의 영화를 전해주고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황금도 섞여 있다.
중앙 예배당을 22개의 예배당이 호위하듯 둘러 있고 문에서부터 예배당 끝까지의 길이가 113m, 폭 57m라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하지 않은가, 천장에는 바로크 양식의 그림과 조각이 고풍스럽다. 온갖 문화가 스쳐가고 지배자가 바뀌었는데도 스페인의 화해는 놀랍다. 대성당 한쪽에 남아 있는 이슬람교도를 위한 기도실은 무적함대로 세계를 제패하면서도 이 교도를 포용하던 아량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스페인의 카톨릭을 대표하는 대성당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모슬렘의 기도실은 마치 종교전쟁이라도 벌이듯이 상대방을 증오하는 오늘의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준다. 이 교도 이민족 사이에도 그토록 폭 넓은 아량이 있었다니 믿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의 기질은 돈키호테의 출사표처럼 「거룩한 권능으로 선이 승리를 거두리」라고 믿는다. 시민전쟁 당시 알카사르 성은 국민파와 공화파가 서로 뺏고 뺏기는 일진일퇴의 격전장이 되었다. 성을 지키던 국민파와 군대에게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말한다. 절대로 항복하지 말라고. 『적군들은 오새를 내놓지 않으면 나를 총살한다고 합니다. 나는 스페인과 하나님을 위해 죽습니다. 적들은 나를 이용하려 합니다.』 모스카르도 대령 역시 단장의 슬픔을 딛고 분연히 외친다. 『그래 넌 자랑스러운 서반아인으로 그리스도 교도로 남아라….』 결국 아들은 죽는다. 오늘도 톨레도를 지키고 있는 알카사르 성에서는 장군과 아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던 대화를 녹음으로 담아 이곳을 찾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그 처연했던 애국심을 들려준다. 최근에는 한국어로 된 테이프도 만들어져 스페인 사람들의 의연한 조국애를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톨레도의 거리는 옛날처럼 좁고 구불구불하다. 골목에는 아직도 나귀가 다니고 타라베라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수레에 담고 걸어가는 모습도 정겹다. 여인들은 서로 소리를 높여 애기를 나누다가도 이국인과 시선을 마주치면 그 큰눈을 크게 뜨고 함박만하게 웃는다. 왕성 바로 아래에 있는 소고도베르 광장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의 장소다. 스페인에는 어디를 가나 광장과 카페가 흔하지만 이 곳 광장에는 항상 시장이 열린다. 잘 구어진 도자기를 싼값으로 구입할 수가 있다.
옛날에는 아랍인들의 시장으로 꽤나 흥청거렸던 곳이다. 톨레도에서 만난 스페인의 중세는 도시의 모습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스페인의 중세 에서 살고 있는 엘그레코의 작품은 어느 곳에서도 쉽사리 볼 수가 있다. 산토토메 성당에서, 대성당에서 , 혹은 미술관에서 숙연한 자세로 그의 예술 혼을 만날 수가 있다. 엘 그레코를 빼면 톨레도의 정신은 어디서 찾을 수가 있을 것인가. 엘 그레코는 스페인어로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이다. 본명은 도메니코스 데오토코풀로스이며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태어 났다. 크레타섬은 미케네 문명시대까지 올라가는 건축물과 석상 이 발견된 신비한 곳이다. 평생 그 섬의 신비를 항상 지니고 다녔던 엘 그레코가 톨레도에 정착한 시기는 36세(1577년)로 추정된다. 이후 생애의 후반부 38년 동안을 톨레도에서 보낸 다.
톨레도에서 그린 『에스폴리오(「聖衣를 박탈당하는 그리도」)』는 대성당 성기실(聖器室)의 제단화(祭壇畵)로 남아 있다. 이 명화는 예수가 처형당할 때 십자가에 못박았던 자들에게 옷을 빼앗기는 장면을 담은 것이다. 수 많은 군중들에게 둘러 싸인 그리스도의 모습과 성의를 찢으려는 손들이 동적인 표현으로 남아 있다. 14세기의 교회인 산토토메 성당은 그레코의『오르가스 백작의 장례』로 더 유명하다. 이 성당을 지은 후 그곳에 묻힌 백작을 기념하여 그린 작품이다. 그림을 그리기 전 2년 동안 이나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장례식에는 성 스테파노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나타나 백작을 매장하고 있다. 작품의 상반부는 천국이고 하반부는 땅위에 백작의 장례식이 진행된다. 중앙의 인문은 당시 톨레도 귀족 20명의 얼굴이라고 전한다. 왼쪽에서 일곱번째가 그레코이고 횃불을 든 소년은 그의 아들 엠마누엘일 것이라는 추정이다.
산토토메 성당의 한쪽 벽을 다 차지할 만큼의 대작이어서 작품 속의 사람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리얼하다. 생명의 승리와 죽음의 세계가 조화되어 있는 최대의 걸작이다. 상반부의 예수와 성모를 한참동안 지켜보노라면 자신도 그곳으로 올라가는 것 처럼 은혜롭다. 엘 그레코가 살던 집은 잘 보존 되어있다. 방에는 그가 사용하던 낡은 난로와 거의 부서진 의자가 주인이 없는 집을 채우고 있다. 팔레트와 이젤까지도 진열되어 엘 그레코의 체취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바로 이웃집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그레코의 작품을 보관하고 있다. 마당 한 가운데의 지하 창고 비슷한 곳을 철망으로 덮고 그곳에 동전을 던져 제대로 들어가 면 톨레도에 다시 올 수 있다는 안내자의 설명이었다. 세계 각국의 동전이 수없이 쌓여 있다. 『톨레도의 경관과 지도』,『톨레도 경관』,『성 마테오』를 볼 수가 있다. 폭풍우가 치는 『톨레도의 전경』은 도시전체가 검은 구름에 싸여 마치 승천하는 것처럼 두렵고 신비하다. 더구나『톨레도의 경관과 지도』에 이르면 작가의 눈이 시각적 이상을 일으켰다는 후, 세 평론가의 지적처럼 기상천외한 시야의 변형을 보여준다. 톨레도를 옆으로 길게 그려서 전혀 다른 도시의 모습을 남겼다.
톨레도는 6세기경 서고트 왕국의 도읍지가 되면서 흥망성쇠가 수없이 오고간 역사의 도시다. 집들은 거의 밖을 향해 열려 있지 않고 안뜰을 중심으로 사방을 막으면서 지은 건물자체가 철저한 가족 중심적이고 밖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방어구조이다. 그레코에게 있어서 톨레도는 창작의 산실이 었다. 적갈색 바위에 서 있는 도시는 차가운 베네치아의 석조였다. 그레코는 톨레도를 「이상스럽게 당당한 도시」라고 했지만 그 누구도 그레코 없이는 이「모순의 도시」를 말할 수 없으리라. 만년의 작품인 『세례받는 그리스도』는 타베라 병원에 있다. 16세기에 지은 병원건물을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당초 이 작품은 타베라 병원 성당의 성화로 계획되었으나 그레코가 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그의 아들 엠마누엘이 완료한 것이다. 상단부의 그림은 그레코가 그렸지만 하단부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발의 데상도 서툴러서 엠마누 엘의 필치로 보인다. 타베라 병원에는 그레코의 작품 이외에도 디지아노, 리베라, 고에료, 틴 토렛토의 걸작이 진열되어 있다. 한 작가의 정신과 개성이 그가 살다간 도시와 함께 숨쉬었 던 예는 흔하지 않다. 톨레도와 그레코는 서로를 필요로 했던, 잘 어울리는 작가와 그의 영 원한 고향이었다.
톨레도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상공업의 중심지였던 탓인지 도검(刀劍)등 무기 생산으로도 유명하다. 어느 상점을 가도 손잡이를 금은 세공으로 치장한 긴칼이 걸려 있다. 톨레도의 검은 관광객들이 사가는 필수품이다. 손가락 크기의 작은 검을 수 없이 꽂아서 파는 기념품도 인기가 높다. 외국인에게는 매우 친절한 편이어서 한번 톨레도를 찾은 사람들은 쉽사리 잊지 못한다. 길거리에서 꽃병하나를 사도 깨지지 않도록 정성껏 포장해 준다.그 모습이 마치 예술작품을 마무리하는 것처럼 진지하다.
대체로 관광지의 음식은 맛이 없거나 질이 떨어지지만 이곳의 음식은 어느 곳보다 뛰어나다. 우리나라의 볶음밥과 비슷한 과에야와 생선, 샐러드가 푸짐하다. 소고기는 너무 크고 두꺼워 한꺼번에 먹기가 힘들 정도이다. 값도 싼편이다. 타호강이 내려다 보이는 알칸타라 다리옆의 벽돌집에서 먹은 코치밀료는 아직도 혀끝에서 감돈다. 우리나라의 어린돼지 즉, 애저라고 생각 하면된다. 다름점은 애저는 푹찌지만 코치밀료는 알맞게 굽는다는 것이다. 과일로 빚은 상르리아와 함께 먹는 맛이 일품이다. 손풍금을 켜는 악사가 즉석에서 들려주는 시와 노래도 흥겹다.
톨레도는 원형보존을 위해 새 건물을 짓는데 인색하다. 그곳에서 스페인, 아니 유럽의 중세 모습을 20세기에서도 볼수 있었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주민들도 전통보호에 철저해서 옛건물이 낡아도 고치려 들지 않는다. 심지어 전봇대도 땅속으로 묻어 버려서 도시 전체가 중세의 여름에 서있다. 주민들도 검은 색을 즐겨 입는다. 사제와 수녀들의 검은옷, 학생들의 까만 교복, 부인들의 흑의는 이 고풍스러운 도시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중세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기타의 음률과 플라멩고, 그리고 사라사데의 『집시의 달』이 흐르는 톨레도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