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론
자벌레論
―임보·홍해리의 시 「자벌레」
임채우
1
우리詩의 임보 시인께서 근 20여 년 동안 펼치고 있는 짧은 시 쓰기 운동의 일환으로 세 번째 4단 시집 『수수꽃다리』를 발간하셨다. 시가 꼭 길어야 좋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쉽게 접하고 읽힐 수 있는, 대중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시집이라 하겠다. 또한 우리詩 이사장직을 오래 수행하신 홍해리 시인께서 자신의 시업 50년을 중간 결산하는 의미에서 시선집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를 상재하셨다. 그는 그간 20여 권의 시집을 발간하셨고, 시선집을 이미 세 권이나 기획한 바가 있다. 먼 길 가는 이는 자신이 어디만큼 와 있는지 관심이 많은 법이다. 짧은 여정이라면 어디 있든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러나 한평생 나그넷길이라면 노년에 가까울수록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은 앞으로 얼마나 더 갈 수 있겠는가 하는 일종의 조바심도 한축 낀다.
우리 시단에 전설 같은 두 분의 우정에 대해선 아름다운 미담이 넘쳐흐른다.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고 길 건너 저만치 떨어져 오가기를 40년, 한때 한 분은 난에, 또 한 분은 수석에 한눈팔던 기왕지사가 있기도 하지만, 40년을 줄곧 같은 길 걸어오면서 빚은 두 분의 우정은 진한 매화주향이라고나 할까. 초록이 동색이라는 말도 있지만, 두 분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색으로 치자면 보색補色 관계라는 말이 오히려 적합하다. 당자의 시 한 편을 보기로 하자.
한때 나는 난초에 미쳐 살았다
그때 임보 시인은 돌을 안고 놀았다
내가 난을 찾아 산으로 갈 때
그는 돌을 찾아 강으로 갔다
내가 산자락에 엎어져 넝쿨에 긁히고 있었을 때 그
는 맑은 물소리로 마음을 씻고 깨끗이 닦았다
난초는 수명이 유한하지만
돌은 무한한 생명을 지닌다
난을 즐기던 나는 눈앞의 것밖에 보지 못했고
그는 돌을 가까이하여 멀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의 시는 찰나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의 작품에는 영원의 향수가 향기롭게 배어 있다
한잔하면 나는 난초잎처럼 흔들리는데
그는 술자리에서도 바위처럼 끄덕없다
난과 수석이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조화란 어떤 것인가, 차이는 또 무엇인가
눈 밝은 가을날 석란화 한 점 가만히 들여다보며
넷이서 마주앉아 매실주 한잔씩 기울이고 있다.
― 홍해리 「난蘭과 수석壽石」 전문, 『독종』(2012. 북인)
이 시에서 두 분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자신의 시는 찰나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는데, 임보의 시에는 영원의 향수 가 배어 있다고 한다. 한잔하면 난을 쫓는 자신은 난초잎처럼 흔들리지만, 수석을 좋아하는 임보 시인은 바위처럼 끄떡없 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이 졸고는 두 분의 시에 나타난 차이점을 같은 제재, 같은 제목으로 발표한 시 「자벌레」를 통 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자벌레란 자벌레나방의 애벌레를 말한다. 사전에 나와 있기를, 몸은 가늘고 긴 원통형이다. 가슴에 세 쌍, 배에 한 쌍의 발이 있다. 꽁무니를 머리 쪽에 갖다 대고 몸을 길게 늘이기를 반복하여 움직인다. 자벌레란 미물은 시인들이 즐겨 다 루는 시의 소재다. 아마 우리 현대시에 자벌레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백석이 1936년에 펴낸 첫 시집 『사슴』의 시 「산山비」일 것이다.
산山뽕닢에 빗방울 친다
멧비들기가 닌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들기켠을 본다
이 시의‘자벌기’는‘자벌레’를 말한다. ‘벌기’는‘벌레’의 평 안, 함경, 경상도 지방의 방언이다. 이 짧은 시는 백석이 장자莊子 의 무위자연을 연상하며 지은 시편인 듯하다. 자벌레가 자연 의 먹이사슬이라는 생태계 속에서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는 동작이 독자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부각된다. 홍해리의 자벌레는 어떤 모습일까? 자벌레만큼이나 짧은 그 의 시를 보기로 하자.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다시 쌓았다
무너뜨린다.
그것이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한평생의 길,
山은 몸속에 있는
무등無等의 산이다.
― 홍해리 「자벌레」 전문, 『비밀』(2010. 우리글)
이 시는 4단시 운동을 펼치고 있는 임보의 말마따나 언어의 절제미를 살린 4단시이다. 이 시의 1, 2연을 보면 자벌레가 기어가고 있다.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가 허물고, 다시 쌓았다가 스스로 허문다는 자벌레의 무한반복의 생명현상을 보여준다. 이것이 자벌레의 존재 실상이다. 이 실상을 바라보며 시인은 자벌레의 존재 의미를 사유한다.
자벌레가 자신의 몸으로 산을 쌓았다가 허물고, 다시 쌓았다가 허무는 행위는 시시포스의 신화를 연상케 한다. 시시포스는 저승에서 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데, 그 바위가 정상에 다다르면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영원한 형벌을 되풀이한다. 알베르트 카뮈는 그가 떨어 질 줄 알고도 바위를 밀어 올린다는 것과 밀어 올린 바위가 굴러 떨어졌을 때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인간 승리라고 평가했다. 시시포스가 정상에 바위를 올리는 과업을 목표라 한다면, 그것이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유보당하고 있다. 자벌레 역시 자신의 몸으로 산을 만드는 것을 목표라 한다면, 그의 경우에는 자의에 의해 그것을 스스로 유보하고 있다. 자벌레의 경우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허무의 초극으로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자벌레 스스로 목표를 유보하는 자발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도자기를 굽는 도공이 가마에서 막 구어 낸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절대적 미감에 의해 과감히 깨뜨려버리는 행위와도 같다. 또한 어렵게 정상에 오른 산악인이 스스로 내려오는 행위와도 같다. 그가 만약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머무른다면 정상의 깃대는 될지언정 이후의 가치 있는 삶을 연장할 수 없다. 그들은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오르고, 내려오기 때문에 다시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대부분의 예술 행위도 마찬가지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쓰고, 한 권의 시집을 상재한 뒤 그것에 만족하여 머무른다면 더는 가치 있는 예술 행위를 연장할 수 없다. 스스로 이룩한 목표를 자발적으로 해체하지 않고서는 예술은 한 발짝도 진전할 수가 없다.
자벌레가 애써 오르고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존재 실상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은 그 의미를 둘로 나누어 3, 4연에서 언급하고 있다.
3연은 자벌레의 존재 실상에 대한 외적 의미로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행위’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재다’라는 말은 ‘측정 하다, 측량하다, 계량하다, 계측하다, 헤아리다, 비교하다, 견주다, 분석하다, 판단하다’등등의 유의어로, 자신이 척도가 되어 자신의 인식 범위 안에서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삶을 영위함을 말한다. 자벌레는 일평생 자신이 측정할 수 있는 삶만큼 살아갈 뿐이며, 시인 또한 자신의 척도에 의해서 자기 삶의 범위 안에서 생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재는’이란 말은 인간의 이성적·감성적 판단 하에 영위되는 지상적 삶을 말함이며, 구체적으로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를 일컬음이다.
4연은 자벌레의 존재 실상의 내적 의미인 ‘무등無等의 산’은 무엇을 말함인가? 전라도 광주에 가면 무등산이 있다. 시市의 경계 안에 우뚝 솟은 산으로 그 안에 입석대며 서석대 등의 비경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멀리서 보면 고만고만한 산봉우리들이 마치 무덤을 이루고 있는 듯하여, 미당未堂의 대표작 「無等을 보며」에서도 죽음의 이미지가 짙게 깔려 있다. 원래 ‘무덤산’이었는데 ‘무등산’으로 변했다는 속설도 있다. 아무튼 광주 사람이 사랑하는 무등산은 평등주의이다. 잘났든 못났든 사람은 모두 죽음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무등無等의 산’은 평등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무등無等’이란 ‘차별이 없다, 계급이 없다’라는 의미보다는 ‘무애무득无涯无得’의 경지를 말한다. 자벌레, 즉 유한한 존재가 자신의 삶을 마칠 때까지 가는 길에 막힘이 없고,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는, 오로지 본성에 충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부조리한 존재 실상에 당당하게 맞서는 인간 실존의 모 습이 바로 ‘무등의 산’이라 할 수 있다.
시 「자벌레」는 홍해리 시인의 자화상이다. 그는 이 지상의 유 한한 찰나적 존재로서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끊임없이 이 지상 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상적 삶이라는 허무의 실상에 맞서 언어의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무등의 산으로 허무를 초극하려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실로 자신의 존재 실상에 대한 명쾌한 외 적, 내적 존재 의미를 이 짧은 시 한 편에 피력하고 있다.
3
다음은 임보의 자벌레를 살펴보자. 그가 칠순을 맞이하여 앞으로 자벌레처럼 살겠노라고 쓰셨다는 시 「자벌레」는 시집 『수수꽃다리』에 수록되어 있다.
순례의 길을 가는
라마승의 선승처럼
어느 성지를 향해
그리 바삐 가시는지
가사袈裟도 걸치지 않은
저 푸른 맨몸
일보궁배一步弓拜
일보궁배一步弓拜
시인은 우리 시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시가 되기 위해서 일본의 하이쿠[俳句에 준하는 4단시四短詩라는 짧은 민족시를 창안하여 몸소 쓰기운동을 펼치고 있다. 4단시는 우리 호흡에 가장 잘 맞게 기·승·전·결 네 구로 되어 있다. 한 구는 4음보 이내, 1음보가 한 구를 이룰 수도 있다. 시의 길이는 가장 긴 것이 16음보, 가장 짧은 것이 4음보이다. 이점은 일본의 하이쿠가 5·7·5라는 자수에 매여 있거나, 우리의 평시조가 35자 이내의 정형시라는 점, 한시의 오언절구, 칠언절구가 20자, 28자에 각각 묶여 있는 것보다 훨씬 융통성이 있는 일종의 새로운 정형시다. 4단시는 시가 짧아 운율이 살아 있고, 또한 선명한 이미지를 그릴 정도의 공간이 확보되며, 얼마든지 심오한 인생철학을 담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또한 수년간 수련 없이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임이 분명하다.
위의 시 「자벌레」는 4단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 승·전구를 2음보씩 두 행으로, 결구는 1음보씩 역시 두 행으로 배행하여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4단 14음보 형식이다. 한 구가 4음보 이내로 우리의 호흡에 자연스러우며, 마지막 결구는 2음 보로 변화를 주어 호흡을 느리게 하면서 선명한 이미지를 부각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시의 대상은 자벌레다. 자벌레 한 마리가 순례 길을 가는 라마의 선승처럼 가사도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일보궁배一步弓拜 (걸음마다 활처럼 몸을 굽혀서 하는 절)의 참회의 길, 수도의 길 을 가고 있다. 자벌레가 전생의 악업을 끊고, 속죄의 고행길을 가고 있는 라마의 선승으로 직유 되고 있으며, “가사도 걸치지 않는 저 푸른 맨몸”이란 무소유의 삶을 말한다. “일보궁배一步弓拜 일보궁배一步弓拜” 리듬감이 지향하는 바는 생의 신비스러움과 경건함, 또는 지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영원성을 부각하고 있다.
라마는 티베트에 전래한 불교를 가리킨다. 티베트는 세상의 끝, 히말라야의 그늘에서 신을 숭배하고, 종교적 믿음으로 환생 을 기원하는 이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티베트인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높은 산, 신들의 언덕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코나 (순례)를 행한다. 신을 향한 기도와 고행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고지대에서 하염없이 오체투지(삼보일배)로 이어진다.
티베트에서의 종교는 사원이나 사당에만 있지 않고, 먹고 말하고 숨 쉬는 그 자체라고 한다. 티베트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닌 삶이요, 전생의 악업을 끊기 위한 속죄의 고행이며, 내세의 유복한 환생을 위한 현세의 기도이고, 신과 소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성연호의 『세계의 명소』 참조)
임보 시인은 일찍이 지상의 세계와는 가치가 전도된 상상력으로 신선의 세계를 그린 시집 『구름 위의 다락마을』이라든가, 노· 장자류의 선문답 시집과 지상의 삶에 교훈이 될 만한 지혜나 처세가 담긴 잠언시집 등을 펴낸 바가 있다. 비록 일상사가 시의 대상이 된다고 하여도 그의 시 정신인 선비 정신에 따라 써야 한다는 시론을 견지하고 있어 결국 이상화되어야 할 대상으로서 현실을 그리고 있다. 이점이 홍해리 시인과 임보 시인의 차이점이다. 두 시인의 기질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홍해리 시인이 지상에서 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을 붙들고 애틋한 마음을 토로하며 덧없는 언어로 맞서는 시인이라면, 임보 역시 덧없는 삶이라는 바탕은 같으나 시인이 추구하여 마지않는 신선의 세계 나 종교, 혹은 유토피아적 인문세계를 지향하는 초월성과 영원성으로 허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 세계를 보인다.
ㅡ『우리詩』 2019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