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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제20강 무지역무득.
https://youtu.be/uNLxwoPnqe0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20강 無智亦無得
오늘은 무지역무득에 대해 말하겠다.
무지, 지혜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
글이 압축돼 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 깨달음이다 하는 그 어떤 실체도 없고
그러므로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도 없다 그런 말이다.
오늘 우리들은 깨달음을 얻는다 하면
깨달음이란 것이 마치 구슬처럼 어디 있어서 그걸 발견하고 깨달았다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 그 출처를 얻었다 라는 것을 움켜쥐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잘못 착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다시 말해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상대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 한 생각을 일으켜서
딱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상을 딱 지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이라도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즉 주관이 객관화시켜 버린다.
파란색 안경을 끼고 벽을 보니 흰 벽이 푸르게 보인다.
그럴 때 저 벽이 푸르다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푸른 것은 바로 안경(나의 업식)으로 인해 나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그 벽이 푸른 것은 아니다.
그처럼 남편이 술 먹는다고 나빠 하지만 실로 그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술 안 먹었으면 좋겠다 하는 내 생각대로 안 되니까,
내가 그 사람을 나쁜 인간이라고 한 생각 일으키고 相을 지어버린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나쁘기 때문에 내가 그 나쁜 인간을 알았다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사람이 크게 반성을 하고 나한테 용서를 빌어야 문제가 해결된다
이렇게 우리는 늘 자기가 일으킨 생각에 사로잡혀서 세상이 그렇다 보고 그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이나 하느님 도움을 청하지요.
이것은 꿈 속에서 강도에게 쫓기는 사람이 강도로부터 나를 구해달라고
하나님이나 부처님에게 비는 것과 같다.
부처님 본래 가르침은 꿈에서 깨는 것이다.
이것이 꿈이다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꿈에서 깬 뒤 그것은 꿈이었고 그것은 무지였고 사로잡힘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 꿈 속에 강도가 있고 깨면 그 강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강도는 본래부터 없다. 다 한 생각이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무지로부터 그 사로잡힘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텅 빈 줄 알았다 이 말이다. 헛것이다.
내가 이것이 진짜인 줄 알고 그 동안 집착했는데 알고 보니 가짜다.
그럼 이 가짜를 벗겨내니 그 속에 진짜가 따로 있다 자꾸 우린 이런 생각을 한다.
왜 ? 우린 꼭 뭐가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뭐가 없다면 허전해서 안 된다. 이게 문제다.
그래서 무아가 제대로 이해된 적이 없다. 어렵다.
내가 지금 아라고 생각했던 것은 가아 가짜다.
그래서 가짜인 줄 알고 봤더니 그 안에 진짜가 따로 있더라.
그러니 그 진아를 내가 발견해야 하겠다. 자꾸 이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가르치는 분들 많다. 왜 그럴까? 뭐가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가짜를 진짜인 줄 알고 집착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짜다.
가짜란 말은 진짜의 반대말이 아니다.
가짜란 말은 없는 것, 텅 빈 것이다 그런 말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한 것이다.
무릇 형상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 그 허망하다는 말은 허망하다는 뜻이 아니다.
텅 비었다. 실체가 없다 그런 말이다.
실체가 없다 라는 것을 마지막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일체 함이 있는 법, 이 말은 상이 있는 것은 이 뜻이다.
그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
이 말은 꿈. 깨어 보면 아무 것도 없다. 환영, 신기루. 아무 것도 없다. 착각이다.
물거품. 그것도 겉은 부풀어 있지만 보면 아무 것도 없다. 그림자 이것도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我라고 할 것이 없다. 空이다 이 말이다.
그러나 금강경에 공이란 단어는 안 쓴다.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아침 이슬 같다.
아침 이슬이란 것이 있지만 금방 해가 나면 없어진다.
번갯불 같다. 번갯불도 있는 것 같다 없어진다.
앞에 것은 무아고 뒤에 것은 무상이다. 다 합해 공이다.
텅 비어 있다. 있는 것 같은 데 없다. 모두 착각이다 그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허망하다 그러는 것이다. 있는 줄 알고 풀어보니 없다.
귀신을 만나 놀랐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귀신은 없다. 헛것을 봤다 .
그게 若見諸相非相 만약에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卽見如來다.
相 실체가 있는 줄 알았는데 非相 실체가 없고 텅 빔을 본다면 부처를 보는 것이다.
이게 곧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있는 대로 정확히 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편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다.
상대편의 존재가 있다면 있는 그대로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상으로 그려 보게
된다. 그 갭이 크면 클수록 실망하게 된다. 또 나는 이런 인간이다 하고, 자기를 예쁘게 그린다.
대부분 다 자기를 좋고 예쁘게 그린다.
그래서 자기를 너무 자신이 잘 그려놨기 때문에 어딜 가도 잘난 척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자기가 봐도 좀 실망스럽다.
이렇게 너무 잘난 척하지만 자신에 대해선 열등의식이 있다.
현실이 자기를 보는 것은 열등의식이고 자기가 그려놓은 상은 잘난 척이다.
늘 이 열등의식과 우월의식 사이에서 있다. 모든 사람들이 양쪽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가 서고 어떤 때는 기가 죽는다.
그 갭이 크면 클수록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자기는 자기를 너무 잘 그려놨는데 현재의 자기는 말도 좀 신통치 않고 얼굴도 그저 그렇고
이래서 너무 실망이 큰 거다.
그래서 자기 상과 현실의 상 사이에 갭이 너무 크니 자신에 대해 실망하게 되고
그 실망이 커져 보기 싫어지면 문 밖에도 안 나간다.
내가 안 보는 것이 아니라, 남 보기 부끄럽다 안 나갈라 그런다.
그러다 나중엔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 하고 자살한다.
그 다음 상대에 대해 내가 그린 것과 상대 사이에 갭이 너무 커지면 실망하고 미워한다.
보기 싫다 안 볼라 그런다. 헤어지고 안 보면 되는데 안 볼 수 없다.
안 보는 방법은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게 살인이다.
그러니까 자살과 살인은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살생하지 말란 말은, 살인을 해서도 안 되지만 자살을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남은 가족에 돌아갈 영향을 고려할 때 살인과 자살 중 어떤 것이 업보가 더 크냐 하면 자살이 더 크다. 일체 중생을 위해 내 한 몸 던지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다.
그것은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기 보기 싫다고 죽어버리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병이다.
그래서 생명경시 사상을 가지면 살인도 일어나지만 자살행위도 늘어나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자꾸 착각한다. 이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런데 깨달음을 잘못 이해해,
‘가’를 버리고 ‘진아’를 발견하고 불성을 찾는다면서
마치 몸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같은 것을 찾으려 한다.
그러면 有我에 빠진다. 브라만 사상으로 돌아가버린다. 이러면 무아도 공사상도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런 오해 착각을 하지 말라 그러는 것이다.
내가 무지 깨달음도 없다 하니 잘못 알아듣고 아무리 노력해도 못 깨닫는다 없는 거다
그런 뜻으로 알아들으면 안 된다.
깨달음이라 할 때 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가’를 버리고 ‘진아’를 찾고
뭔가 깨달음의 실체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착각이다.
無智亦無得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도 없다.
나와 여러분들 모두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되면,
무지, 바로 한 생각 사로잡힌 데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 자꾸 얻으려 한다.
깨우침은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놔버리는 것이다.
내 것이라 하지만 알고 보니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집착할 바가 없다.
나다 했지만 알고 보니 나다 할 것이 없다. 그래서 집착할 바가 없다.
내가 옳다 했지만 알고 보니 옳다 할 것도 없다. 이게 무아. 무소유. 무아집이다.
이걸 깨쳐서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자유와 행복을 얻는다.
그런데 우린 그렇지 않다. 돈에 집착하고 권력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인기에 집착한다.
그래서 기필코 그것을 얻어야 한다. 그러니 거기엔 내가 있고 내 것이 있다.
이런 집착 때문에 우리가 괴로움에 빠져 있다.
그러나 본질을 꿰뚫어보면 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도는 어떻게 구하나?
道를 돈 구하듯 구한다.
道라는 게 있어 내가 어떻게든 고생하더라도 道는 얻겠다
이런 식의 도를 한다.
그래서 부자가 되려고 마음 먹었는데 30년 사업에도 부자가 못 됐다. 실패다.
부자가 되겠다고 원을 세웠는데 사업에 성공을 못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돼서 출세하겠다고 원을 세웠는데
30년이 지났어도 아직 한 자리 못했다.
그럼 실패한 거다. 인기를 얻으려 했는데 못 얻었다. 그러면 절망에 빠진다.
이런 관점에서 道를 구한다.
내가 수행을 해 도를 얻어 깨우쳐야지 한다.
그런데 10년 지나고 30년이 지나도 도를 못 얻었다. 그러면 다리 뻗고 운다.
아 ! 내가 30년이나 수행했는데 道도 얻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이런다.
그때의 깨달음이란 포장만 다른 것뿐이지 돈과 진배 없다.
그렇기 때문에 30년을 했는데도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괴로움이 생긴다.
수행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일체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텅 빈 것을 아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데도 내가 괴롭다 한다. 왜 괴로울까? 하고 보니 뭔가를 움켜쥐고 있다.
아! 하고 탁 놓으면 바로 번뇌가 사라지고 괴로움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말한다. 스님! 괴로워 죽겠습니다. 왜? 요즘 수행이 잘 안 되요.
애가 말을 안 들어요. 남편이 말을 안 들어요 한다.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이라 하는데.
(수행은 절, 좌선, 염불, 공부, 호흡 그런 걸 의미한다.)
수행이 안 돼서 괴롭다니?
이게 바로 수행이란 상에 빠진 것이다. 뭔가 상에 집착해서 하면 괴로움이 생긴다.
하지만 그 본질을 꿰뚫어보고 놓아버릴 때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이를 이름하여
수행이라 하는 것이다.
수행이 안 돼 괴롭다=> 이런 말은 수행이란 상을 짓고 그 상에 집착했다 이런 말이다.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수행 병에 걸려 있다.
돈병 출세병에 걸려 돈을 얻고자 지구를 몇 바퀴 돌고 출세를 하려고
온갖 데 줄 서고 하듯 道를 구한다고 온 천지를 돌아다닌다. 이건 방황이다.
바로 자기 마음을 봐야 하는데 밖으로만 본다.
미얀마 가면 될까 인도 가면 될까? 이렇게 구하러 다닌다.
그런데 본질은 구할 것이 없다. 그걸 깨우쳐야 한다. 정 반대로 돼 있다.
그러므로 經을 잘 읽어야 한다.
無智亦無得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을 바도 없다.
그 다음 以無所得故 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그런데 우리는 얻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 얻는 것을 돈만 얻다 이제는 권력을 얻으려 한다. 그러다 권력 별 것 아니다.
이젠 명예를 얻으려 한다. 에이 ! 명예도 별 것 아니다. 도를 얻어야지.
이런 식으로 얻으면 이것은 도가 아니다.
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한 법도 얻을 바 없는 줄 알아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제법이 텅 빈 줄 알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움켜쥘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이 보리살타는.
是故 空中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는 소승교설의 잘못된 점
즉 법상을 짓고 법집을 일으키는 것을 비판하고
본래의 부처님 가르침 대로 돌아오도록 인도해 주는 구절이다.
첫 번째 단락은 대승의 진실에 대한 얘기 제법이 공함을 가르치고
두 번째 그 관점에서 봤을 때 소승의 법집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은 다시 대승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찬탄하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첫 문단에서 대승의 위대함. 대승의 핵심사상을 말할 때
관자재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여서
조견오온개공 오온이 모두 공임을 깨달으시고
도일체고액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 말을 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만 그러시냐? 아니다. 모든 대승보살은 다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여기 보리살타는 이런 말이 나온다. 엄격히 말하면 보리살타 앞에 제 자가 붙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제보살은 제보리살타는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다.
관세음보살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대승보살은 다 이렇게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보리살타의 보리는 음역이고 살타는 사트바의 음역이다.
보디사트바: 깨달은 중생. 그러니까 중생에 큰 마음을 내어 깨닫겠다고 원을 세운 자다.
그래서 이 보리살타는 보디사트바인데
금강경에선 어떤 사람이 보디사트바인가 하면 => 발심한 자. 발보리심 한 자.
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한 자. 위 없는 깨달음을 얻겠다고 참 마음을 낸 자다.
그런 선남자 선여인을 보디사트바라 한다.
그러니까 보리살타가 곧 보살이다. 이를 줄인 말이 보살이다.
모든 보살 마하살 依般若波羅密多故 관세음보살만이 아니라 모든 보살들도 다 무슨 수행을 한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한다.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그런 수행을 한다.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는데 자신의 무지를 바로 깨쳐서 해탈해버리는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한다.
앞엔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이렇게 했는데, 여기서는 줄여서 의반야바라밀다 이렇게 쓴다.
표현만 다를 뿐이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으로 반야바라밀다를 닦아서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
확 깨쳐버리니 아무 거리낌이 없다. 강도에 쫓기던 사람이 눈을 번쩍 뜨니
마음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마음에 아무런 장애가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그게 바로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다. 보통 우리는 마음에 걸림이 많다.
죽음이란 데 걸리고, 시체에 걸리고, 무덤이란 데 걸린다.
그러다 보니 묘지 옆을 지나면 두려움이 생긴다.
마음에 걸림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두려움이 없다 말씀하셨다.
성난 코끼리가 몰려와도, 앙굴리말라가 칼을 들고 죽이러 와도...
부처님은 ‘여래는 두려움이 없다’ 말씀하셨다.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 없다는 말이다.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말은 마음에 분별이 없다는 말이다.
우린 분별이 있나 없나? 있다.
잘 나고 못 나고 늙고 젊고 잘 하고 잘 못하고 온갖 분별을 일으켜서 좀 좋으면 가져가려 하고
싫으면 버린다. 우리들이 일으키는 이 분별은 그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죽 끓듯 한다.
부부가 같이 살면서 조금 마음에 들면 우린 천생연분이다,
그러다 조금 마음에 안 들면 전생에 원수였나 봐,
늘 이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늘 분별에 끄달려 산다.
그런데 부처님께선 분별이 없다.
걸식을 하러 나가서 바라문이 욕을 해도 부처님은 빙긋이 웃으신다.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별이 있기 때문에 늘 경계를 갖고 시비를 한다.
마음에 장애가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는 이 말은 괴로움이 없다는 말도 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顚倒 뒤집어지고 거꾸로 되는 걸 말한다 夢想 꿈 속의 세계.
이 顚倒夢想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전도몽상에 집착해 있는 것은 바로 경계에 끄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상대가 뭐라 하는 소리에 끄달리고 말에 끄달리고 모양에 끄달려서
눈이 뒤집어진다. 그리고는 나쁜 놈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쁜 놈인가 아니면 내가 나쁘게 생각하는 것인가?
내가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나의 분별이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내가 그런 한 생각을 지은 것이지 그 사람이 본래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한 생각에 확 사로잡혀버리니 그 놈이 나쁜 놈이 된다.
나는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고 정확히 봤다 이렇게 된다. 딱 뒤집어져 거꾸로 된다.
이걸 전도몽상이라 한다.
이 전도몽상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이 말이 원리다. 이 말이 뭘까?
무지로부터 깨어났다 이 말이다.
전도몽상으로부터 멀리 떠났다 이 문장을 앞 문장과 비교해본다면
조견오온개공과 똑같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밝게 비춰봤다.
이 말은 전도몽상에서 멀리 떠났다. 전도몽상에서 깨어났다 이 말이다.
그러니 앞에선 度一切苦厄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가 되고
여기서는 究竟涅槃 마침내 열반에 이르렀다가 된다.
그러니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을 열반이라 하는 것이다.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열반이다.
그러니까 마침내 열반에 이르렀다는 말이나,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나 다 같은 말이다.
표현방법이 다를 뿐 똑 같은 문장이다.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다시 돌아가서 관자재보살 대신 보리살타가 들어왔다.
사실은 이 앞에 제가 붙어 ‘제’ 보살마하살이 돼야 한다.
그 다음 앞에서는 ‘행심반야바라밀다시’ 했는데 여기는 ‘의반야바라밀다’ 했다.
그 사이에 조금 설명이 들어가야 한다.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이게 들어가 있고
위에는 그런 말 없이 바로 조견오온개공 이렇게 했다.
여기서는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이다.
그러니까 원리전도몽상이나 조견오온개공이나 같은 뜻이다.
앞은 도일체고액 여기는 구경열반이다.
핵심은 관세음보살만이 아니라, 모든 대승보살은 다 이렇게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이런 뜻이다.
그런데 모든 보살마하살만 그러냐 ? 보살은 아직 부처가 아니다.
그러니까 대승보살만 그러냐? 아니다.
모든 부처님도 사실은 다 이렇게 수행을 해서 위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까 이 반야바라밀다를 굉장히 강조한 말이다.
이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해서 우리가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닫고 열반에 들 수 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대승보살은 반드시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
그런데 보살만 아니라 모든 부처님도 다 그렇게 수행을 했다.
그래서 三世諸佛 이것도 정확히 말하면 시방삼세제불이라 그랬다.
삼세는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를 말한다. 시간을 통 털어 하는 말이다.
공간을 통 털어 하는 말은 시방이라 한다.
十方은 동남서북과 4유(북동 북서 남동 남서)= 8방 여기에 上下를 더해 10방이 된다 .
온 우주를 통 털어 이런 뜻이다. 온 누리 이런 뜻이다.
온 누리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과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한한 미래에 이르도록 출현하신
모든 부처님들 이게 시방삼세 일체제불이다. 여기서는 그냥 시방삼세제불이라 했다.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해도 되지만 정확하게 그런 것은 아니다.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 이 3개를 합해 삼세라 한다.
그러면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는 뭘 말하느냐?
이 우주가 이 세계가 반드시 텅 빈 데서 어떤 인연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머물고 흩어져 사라진다. 이걸 성주괴공(成住壞空) 한다 그랬다.
그러니까 과거에도 이렇게 이 세계가 한 번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흩어져 사라진
과거의 대겁을 과거세라 한다. 이 겁을 장엄겁이라 한다. 과거장엄겁이라 한다.
그러면 현재는 어떠냐? 이 우주가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있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고 사라진다. 이걸 현재세라 한다. 이걸 현겁이라 한다.
그러면 미래는 또 어떠냐? 미래도 또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흩어져 사라진다.
이걸 미래겁이라 한다. 미래세 미래겁. 이걸 미래성숙겁(未來星宿劫)이라 한다.
과거 장엄겁에도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흩어져, 사라지는데...
머무르는 주겁 때 유정이 태어난다. 생명이 태어난다.
그때 인간도 태어나고 부처님도 출현한다.
과거 장엄겁에 천(千)부처님이 출현하셨다. 현재 현겁에는 몇 부처님이 출현하셨나?
4부처님이 출현하셨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4번째 부처님이다.
5번째 부처님이 미륵부처님이다. 이렇게 해서 앞으로 996분의 부처님이 더 출현하신다.
그래서 현재 현겁에도 천(千)부처님이 출현하시고 미래 성숙겁에도 천(千)부처님이 출현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천불전을 지을 때는 현겁의 천(千)부처님을 모신다.
3천불전을 짓는 것은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 3천부처님을 모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천배 정진할 때는 현재 현겁에게 한 배 한 배 절하는 것이고,
3천배를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3천 부처님에게 한 배 한 배 절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에게 한다.
또 현재 이곳 말고 다른 세계도 부처님이 계시나? 계신다.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미타 부처님.
동방정토 유리세계 약사여래불 이렇게 다른 세계에도 많은 부처님이 계신다.
이런 부처님은 여기 시방제불에 들어간다.
이 우주에는 이런 세계가 갠지스강 모래알만큼 많다.
그런데 그 정도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갠지스 강이 있고
그 모든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다. 이것이 불교에서 보는 우주관이다.
아인슈타인의 우주관은 어떤가? 태양이 있고 태양 주위에 많은 혹성들이 돌고 있다.
그 가운데 이 지구 하나 있다.
목성 토성엔 생명이 없다 해도 태양계 속 지구 하나엔 분명 생명이 있다.
다른 행성에 생명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지구 하나만 있다 하자.
그러나 이 은하계 우주에는 이런 태양계가 일천억 개 이상이 있다.
한 태양계에 하나씩만 있다 해도 일천억 개 이상이 있다.
그런데 이 대우주에는 이런 은하계 우주가 다시 일천억 개 이상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불교의 우주관은 현대의 과학적 우주관과 큰 차이가 없다.
현대의 우주관에도 이런 별들은 생성 소멸한다.
이런 데서 시방제불 그리고 또 삼세제불을 합치면 시방삼세일체제불 이 얘기다.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과거 이미 오셨고 현재 오시고 미래 오실,
모든 부처님들도 다 반야바라밀다를 행했다.
그래서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었다.
이 말은 인도 말로 번역하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다.
무상이란 이것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최고로 높다.
정등 정각은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다. 바르다는 말은 객관적 진리다.
우리 말로 타당하다 말할 수 있다. 평등하다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두루 적용된다.
보편성이다. 쉽게 우리 말로 하면 정등은 보편 타당하다는 말이다.
바르기는 한데 박사만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평등하지 못한 것이다.
즉 보편성이 없는 것이다. 지구상 모든 사람이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바르지 못했다.
진리는 바른 것이어야 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이 두 조건을 다 갖춰야 한다.
그러니까 보편 타당한 깨달음 가운데서
이보다 더 이상 없는 최고의 깨달음이 무상정등각이다. 무상정변지다.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앞에 보살들한테 얘기할 때는
제법이 공한 것을 깨닫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표현했다.
법을 깨닫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걸 합해
여기서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 이렇게 말한다.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같은 설명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