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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여행가문 얼굴이네
“용선아, 넌 꼭 가난한 집에 시집가라.”
“왜요?”
“왜냐하면 너는 성격이나 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혹시나 잘되는 집에 시집갔다가 뭔 일이 틀어지면 자칫 며느리 잘못 얻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가 어려운집에 시집을 가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하다보면 어느 날 조금 나아지게 되는 가정형편이 모두 네 덕으로 돌려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
워낙 어릴 때부터 나서는 것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 많은 나를 아주 잘 아시는 우리 아버지는 혼기가 꽉꽉 찼는데도 아직 시집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고모에게 ‘결혼은 해야한다’라고 긴 설득을 하실 때마다 항상 내게 들려주신 말씀이었다.
“저 사람이 네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애-, 한번 만나보지 그러니?”
대학에 자판기를 설치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나보다 10살이나 많은 아저씨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며 내 친구들이 건넨 말이다. 늘 아버지가 고모에게 말했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사람과는 되도록 결혼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나는 10살이나 많다는 그 아저씨에게 별반 관심이 없었는데 내 주위의 친구들은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벌써 다 갖춰진 사람인데 결혼만 하면 호화롭게 하고 싶은 것 맘껏 하고 살수 있게 되는 것 아니냐고 그런 복이 어찌 네게 굴러 들어왔냐고 다들 부러워했다.
그래서일까 호기심이 약간 생긴 나는 아저씨가 점심을 사주겠다고 하면 친구인 현경이나 성은이를 동반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같이하기도 했고, 그 아저씨의 고급 승용차의 폭신함을 느끼며 드라이브도 했다.
그렇게 두어달 쯤 되었을까?
어느날 밤, 부천에 살고 있는 나를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편안한 승용차에 앉아 김포공항을 돌아 원종동으로 가고 있었는데 우리 차 앞에 만원버스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일차선 도로라 버스가 다시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보였던 버스 안의 장면 때문에 나는 이 10년 차이 나는 아저씨와의 이별을 결정하게 되었다. 바로 만원 버스 안에서 서로가 넘어질까 부축하며 서 있는 젊은 연인들 때문이었다.
‘내가 이 사람과 만약 결혼을 한다면 난 절대 함께 고생했다는 추억은 갖게 되지 못할거야... 늘 이렇게 편한 승용차에 앉아서 이 아저씨가 만들어 놓은 것들에 신세지며, 이 아저씨의 군림을 받게 될 수도 있고-’
동시에 여러 가지 상상들이 되면서 결국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그 아저씨를 큰길가에 세우고 아주 예의 있게, 그리고 정중하게 내가 왜 아저씨와 사귀고 싶지 않은지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은 지금의 남편을 만난 이야기다. 대학 축제 때 걸개그림을 기획했었는데 그 당시 왠만한 기획사들은 강의실 9칸을 가릴 정도의 사이즈는 300만원 이하로는 불가능하다는 견적서를 가져 왔다. 그래서 아는 친구들을 통해서 걸개그림 그려줄 사람을 찾다가 소개 받은 사람이 지금의 남편, 31년차 함께 살고 있는 한재식씨다.
처음 우리가 만났던 카페는 아주 좁고 어두침침한 곳이었다. 빨간 전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마를 거의 마주 대야 할 정도로 가까이 앉게 되었다. 이번에도 총무부장이었던 현경이와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우린 너무 가까이에 있는 그 사람의 얼굴에 넋 나간 얼굴을 하고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무조건 오케이 표정을 짓다가 마침내 걸개그림 주문이 이루어졌다.
“너, 그 사람 눈 봤어? 우와- 정말 이쁘지?”
“아냐, 눈보다 난 입술이 더 이쁘더라. 어떻게 남자 입술이 그렇게 이쁠 수가 있을까? 우와, 정말 잘 생겼지?”
카페를 나와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흥분하여 자기 본 그 사람의 인상에 도취 되었다. 그 사람은 재료비만 받고 그려주는 대신, 두가지 조건을 걸었다. 하나는 같이 작업하는 후배들에게 밥과 술 사주기, 두 번째는 우리 둘 중에 한사람은 매일 작업하는 곳에 들러서 잔심부름 해주기.
재료값과 후배들 밥값 정도만 있으면 해주겠다는 조건 외에 우리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그때 그때 필요한 것들을 수급해주기 위하여 함께 작업에 참여해야한다는 조건을 우리 쪽에서 더 달가워하며 현경이와 나는 서로 번갈아가며 그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역시 마음이 이미 넋을 잃은 상태여서인지 그의 옆에만 가면 이상한 에너지 흐름이 평소 총명한 나를 얼빠진 사람처럼 변하게 했고, 점점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은 그림쟁이는 성격이 못됐다, 먹고 살기 어렵다, 여자가 생고생한다 라는 말들이 모두 거짓임을 확신하게 했다. 특히, 일을 하는 중이나, 마무리 하는 중에 아주 조용히, 차분하게 재료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본 그의 손놀림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워낙 덜렁대고 요란스러운 나와는 전혀 다른, 그동안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만 그리는 줄 알았던 것과 달리,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 그리는 재료를 준비하고 정리하는 정성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그 사실에 한번 뛴 마음은 계속 반동 받은 그네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 말은 보름정도 매일 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낙이 사라졌단 의미이다. 모래시계 드라마가 끝난 후 그 당시 대한민국의 많은 성인들이 한동안 뭘 할지 몰라 방황했다는 말처럼 나 역시 원하던 걸개그림을 아주 저렴하게 손에 넣었는데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단지 고민은 어떻게 이 사람의 얼굴을 계속 볼 수 있을까였다.
10월의 밤이 찬기를 잔뜩 물고 있을 때 누군가 학생회 실을 노크했다.
“저어-”
“누구세요?”
“회장님 안계신가요?”
문쪽에서 나는 낯익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내밀어보니 바로 그 사람이 회색 점퍼에 커다란 가방을 크로스로 메고 학생회실 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어, 어떤 일이세요?”
“제가 낳은 새끼인데 제가 걸어야죠-”
그는 자신의 그림을 자신의 새끼로 표현하며 혹시나 수위아저씨들이 잘못 걸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직접 일하러 왔다고 했다.
그리고 4층 강의실-
현경이와 나는 강의실 책상에 펼쳐 놓은 연장들을 밖에 매달려 그림을 거는 그 사람이 달라고 할 때마다 찾아서 건네주는 역할을 맡았다. “망치!” “드라이버” “가위” 현경이는 그 사람이 무엇을 달라고 할지 아는 사람처럼 그가 원하는 것을 쏙쏙 집어 건네주는데 나는 단 한 번도 그의 손에 내 손끝을 대어 볼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아쉽고 안타까웠다.
“저어- 학교축제 때 가마니도 좀 필요한데, 혹시 이 근처에서 가마니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즈음 나는 그를 더 만나볼 기회만을 찾고 있었던 터라, 그 가마니 구하는 일이 기획부 속안이었음에도 나는 자초해서 그와의 연결을 만들어 냈다.
“저희 집에 가면 구할 수 있는데, 같이 가 볼래요?”
의외의 대답에 난 약간 당황스러웠으나 자고로 우리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그 아들을 보려면 그의 부모를 보면 된다는 말을 떠올리며 마치 청혼이나 받은 듯 혼자서 익지도 않은 김칫국물을 마시고 있었다.
“저희 집에 대문이 좀 많은데, 첫번째 대문, 두번째 대문, 세번째 대문, 어디로 들어가실래요?”
사람이 좀 귀티가 나기는 했어도 그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대문이 세 개나 있는 저택을 상상하는 나는 집의 규모도 좀 볼 겸 세 번째 대문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대답을 했다.
“아이구- 어서오세요-, 서울에서는 좀 멀지요? 얼른 들어가세요,
재식아- 나 빨리 개죽 쑤는 것 마무리하고 들어 갈테니까 어여 먼저 들어가 있어라-“
그 사람이 안내한 첫 번째 대문은 함석으로 만들어져 있는 작은 문이었고, 두 번째 대문은 사람이 들락 달락 할 때 직접 손으로 들어 열고, 닫아야 하는 좁은 문이었고, 마지막으로 그의 어머니와 인사하게 된 세 번째 대문은 함석판 위에 페인트가 칠해진, 트럭들이 드나드는 창고문이었다.
집안은 거의 운동장 수준이었고, 아버님은 군납을 하는 쌀 창고장 이었으며, 그의 가족은 그 창고에 딸려있는 블록으로 지어진 낡은 건물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 제가 뭐 도울까요?”
인상이 좋으신 그의 어머니는 처음 보는 처녀의 친절함에 약간은 경계를 하고 계셨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데려온 눈 큰 처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그냥 너그럽게 웃어주시는 싼타 할아버지 이미지를 갖고 계셨다.
그러면서 아버지 말씀대로 두 분을 살펴보게 되었다.
조용조용히 나누는 말씀 소리, 마주보는 다정한 눈빛, 특히 이 사람을 대하는 두분의 모습에서 아들로써 믿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합적으로 이런 다정한 부부 사이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사람은 크게 어긋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으로 기쁘게 저녁을 먹고 있는 사이, 그의 아버지는 의정부 주변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수소문해 가마니를 구해주셨고, 감사하게도 아들의 손님이라고 그 가마니를 실어 명동에 있는 우리 학교까지 운송을 해주셨다.
그것이 그의 부모와의 상견례였고, “사람을 알려면 그의 부모를 봐라”고 하신 우리 아버지의 지침을 따른 것이 되었다.
“저어- 애인 없으시죠?”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그는 그냥 웃었다.
“웃는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겠죠?, 그럼, 우리 연애한번 해 볼래요?”
그는 여전히 나의 당돌한 질문에 그냥 웃고 서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 거침없이 팔짱을 끼는 내가 좋았는지 그는 팔꿈치를 살짝 벌려주면서 말없는 동의의 몸짓을 해 주었다.
“우리 이번 주엔 우리 이모 한번 가 뵙자”
늘 무뚝뚝인 재식씨가 처음으로 제안한 일이다.
이모들이 공주에 사신다면서 일요일 아침 일찍 공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자고 했다.
공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잠시 후 내렸다. 그리고 한참을 걸었는데도 그 이모네 집은 눈에 띄질 않았다.
“재식씨- 이모네 댁은 아직 멀었어?”
“아니, 저기 저 집 보이지? 저기야”
초록색 기와가 잘 입혀진 멀리서 보기에도 꽤 커보이는 집이었다.
아무래도 나를 의식한 초대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그는 나를 잡으며-
“ 그 집 아니야- 여기야”
그러면서 돌아서는 재식씨가 들어서는 집은 그 초록색 기와를 얹은 제법 커보이는 집옆에 기대어 있는, 그 초록색 집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여겨질만한 시골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분명히 봤다. 내 손목을 이끌며 앞장 서고 있는 재식씨 등뒤로 부처님에게나 있을 법한 후광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아마 이때 쯤 나는 이 사람과의 결혼을 혼자서 은근히 상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왠지 이렇게 자신감있는 사람과 함께 라면 결혼해서 살다가 정말 어려워지더라도 초라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연애는 아무런 문제없이, 누구의 의심도 없이 자연스레 한 가족이 되어가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물론 기정 사실화된 결혼이어서인지 가끔은 연예인들이 하는 아주 특별한 청혼이벤트는 고사하고, 근사한 찻집이나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아니 그냥 이 사람 좋아하는 소주한잔 하면서라도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또는 “아침에 눈을 뜨면 네 얼굴을 처음으로 보고 싶다” 또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하나로 불렸을면 해”라는 말뿐인 청혼의 절차도 없었다는게 아쉽기는 했지만, 양가 상견례이후 우리보다 더 친해진 아버님들 관계 덕분에 우리는 정말 양가의 축복아래 약혼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아이를 가졌다.
오빠와 단둘이였던 나는 늘 결혼만 하면 힘 닿는대로 아이를 낳을 거라 했는데 막상 일을 하면서 결혼생활을 하다 보니 힘 닿는대로란 말은 사라지고, 네 다섯명 정도만 낳으려고 작정했었다.
그리고 첫아이-, 종윤이.
종윤이가 한달이 되면서 우리는 시댁에서 분가를 했고, 미아리에 집을 얻어 우리 세식구만의 오붓한 나의집이 생겼다. 만삭까지 일을 해서인지 아이를 낳으면 절대 바깥일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매일 11시면 자기네집 청소해 두고, 아이들 데리고 우리집에서 하루종일 진을 치는 이웃 언니들 뒤치다꺼리가 재미없다 느껴진 날, 길에서 우연히 할머니 한 분을 만난다.“할머니? 이거 장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그분은 그 당시 메이커였던 “한스와 그레텔”이라는 상표를 붙인 모자와 목도리 세트를 팔고 계셨는데 나는 종윤이를 위해 하나 고르려다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종윤이와 나의 또다른 삶이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재식씨가 출근하기 전에 종윤이를 맡기고, 세 정거장 정도 떨어져있는 그 할머니댁에 가서 한 세트에 4000원하는 것을 10개정도 가져왔다. 그리고 부지런히 청소며 빨래를 다 해놓고 점심 먹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시장에 가는 시간에 맞춰 종윤이를 포대기로 업고, 종윤이 유모차에다 아침에 가져온 그 모자와 목도리 셑트 10개를 싣고, 한세트에 6000원 한다는 가격차림표를 몇 개 적어서는 시장어귀로 나갔다. 시장엔 상권이 있어 아무나 자리를 펼수가 없는데 아이를 업고 있어서인지 장사하시는 분들이 조금씩 귀퉁이 자리를 내 주어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6개월이었던 종윤이는 시장에 나가서 서 있기만 하면 잠을 잤고, 매상은 하루에 한두개는 기본으로 팔렸으니 매일 저녁은 남편의 월급을 축내지 않고 내가 번 돈으로 꾸릴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성실하게 본 할머니는 이제 노점을 할 수 없는 정상품 메이커가 달린 아이들 겨울철 오리털 잠바를 같이 해보자고 손을 내미셨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하고자 하면 않되는 일이 없다고 여기던 터라 나는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시장의 시금치장사 할머니께 작별인사를 하고, 제법 의기 양양하게 유명메이커 방문판매를 시작했다. 이번엔 뒤에는 종윤이를 업고, 어깨에는 아이들 겨울잠바를 서너개 담은, 부피가 있음직한 커다란 가방을 걸었다. 당연히 방문판매의 처음 고객은 잠바를 입을 만한 아이가 있는 친척이나 친구들이었고, 점차 그분들 소개로 매상은 생각한 것보다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잠바 하나를 주문받아 대학동기네에 갔었던 날이었는데, 점심까지 맛있게 차려주면서 그 친구 하는 말-
“그런데 너네 신랑은 니가 이런 일 하고 다니는 거 아니?”
“처음엔 몰랐지만, 지금은 알지. 가끔은 그 사람도 회사에서 주문을 받아가지고 올 때도 있는걸. 그런데 왜?”
“아니, 그냥.. 내가 만약 너처럼 아이업고 이렇게 행상하고 다닌다고 하면 우리남편은 당장 때려치라고 할 것 같거든-”
다른 날과 달리, 물건도 팔아서 기분도 나쁠 일이 없는데 지하철 유리창에 비춰진 내 모습은 무척 초라해 보였다. 돈이 없어서도, 뭔가를 해야만 해서도 아닌, 그냥 좋아서 시작한 일이긴 했는데 그 친구의 말이 계속 뇌리에 떠오르면서 남편에게 자꾸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코피가 터졌는데 주변 사람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그 서러움이란...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녁상을 차렸다.
“그런데, 당신은 왜 내가 종윤이 업고 시장에서 장사를 할때나 지금처럼 행상을 하는데도 말리지를 않아?”
“왜에-? 말려야 되는 거야? 난 당신이 그 일을 재밌게 하는 줄 알았었는데. 왜 힘들었어? 난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 늘 신나게 해서 행상이든 노점상이든 즐거워 보였는데. 난 그게 당신의 힘이라고 생각해. 어떤 일이든 자신감 있게, 재밌게, 즐겁게 하는 거”
말이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날 이후, 나는 남편 덕분에 나의 위상을 다시 세웠던 거 같다. 나는 어떤 일을 하든 당당하고, 재밌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4개월 후 겨울이 깊어지면서 행상은 마쳤고,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놀이방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놀이방을 시작하면서 둘째 종하를 임신했는데 종하를 출산하면서 우리는 좀 더 규모 있는 사랑아이 생태놀이학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종하와 세 살 터울의 막내 종은이도 태어났고, 밀레니엄의 바람이 부는 겨울이 되었다.
“우리가 서울에 사는데 서울 한번 걸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거 좋겠다. 내일 해보지 뭐”
그래서 바로 토요일인 다음 날 아침 8시, 걸으면서 먹을 이것 저것들을 챙겨 배낭에 메고, 친구 아들 창규까지 아이들 넷을 데리고 우리 부부는 돈암동의 우리 집을 시작으로 해서 광화문을 지나 대통령 할아버지가 사는 청와대 앞에서 사진도 찍고, 남대문을 거쳐 남산으로 올라가서 을지로를 지나 성대앞에 도착하자 밤 11시가 되었다.
사실 하루종일 걷기가 쉽지 않았음에도 일의 시작이 있으면 마무리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징징대려 하는 아이들에게 두가지 제안을 했다. 달걀빵 하나 먹고 조금 더 걸어갈래, 아니면 오늘은 여기서 차를 타고 가고, 내일 아침에 다시 이곳으로 와서 걸을래?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냥...걸..어..요” 라고 마지못해 응했다, 달걀빵 하나씩 손에 들고.
그게 시작이었다.
그 해부터 매년 여름방학, 겨울방학 일주일에서 이주일씩 우리나라를 걷기 시작했던 것이.
종은이가 여섯 살쯤 되었던 해였던 것 같다.
겨울방학을 맞아 유치원 선생님이 방학동안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물었는데 다른 아이들과 달리 우리 종은이는 “아무데도 안 가고 집에 있고 싶어요” 였다면서 담임을 맡았던 내 친구는 “야~, 너희도 극성이다.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방학때 하고 싶은 일이 집에 있고 싶어요냐, 좀 쉬면서 하지” 하며 핀잔아닌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 우리는 땅끝마을 해남을 8일동안 걸으면서 나는 아주 중요한 결정을 했다.
“가문을 만드는 일-”
이번 여행은 수영장 형님 아드님인 선호까지 합쳐서 6명이 여행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서 터미널부터 해남을 걸어서 여행한 후, 보길도로는 배를 타고 들어갔다. 보길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자전거를 빌렸다. 남편은 종은이를 목마하여 자전거를 탔고, 나머지 5명은 각자의 자전거를 탔다. 보길도에는 조선 중기 시인으로 알려진 윤선도가 당시에 유배 되어 살았던 집이 있었고, 그 집에는 윤선도의 훌륭한 글솜씨를 자랑하는 시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윤선도의 글만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형제, 친척들도 내로라하는 문장가들이었는지 집안에는 ‘윤~’으로 시작되는 다양한 사람들의 글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가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음악을 잘해도, 미술을 잘해도, 운동을 잘해도, 문학을 잘해도, 윤선도님처럼 시문을 잘해도 가문을 만들 수 있는데 나는 무엇으로 가문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러다 생각해냈다.
“여행가문”
이미 3년 정도 시작을 했고, 앞으로도 계속 하게 되면 전통이 만들어질테고, 가문이 되기 위해서는 3대가 해야 한다니까 1대는 우리 부부, 2대는 종윤, 종하, 종은이네, 그리고 3대는 그의 아이들이 하면 되는거다. 시작이 반이라고 이미 2대까지 여행을 하고 있으니 이 여행계획만 잘 세우면 분명히 우리 아이들도 그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할거란 믿음이 생겼다.
큰 아이가 중학교에 갔고, 그 다음해에 둘째도 중학생이 되었다. 3월 학부모 설명회 때 종하의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으면 학교 공부가 어렵다고 했다. 아이들마다 공부 수준이 달라서 어디에 중점을 둘지 모른다고도 했고, 그래서 학원보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런 식이라면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시간을 죽이는 짓이란 생각이 들었고, 우리 아이들을 햇볕 속에 뛰어 놀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해가 지면 학원을 보내는 게 더 나은 교육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인가 싶다. 우리의 일상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려 했던 것이. 다행히 남편도 남의 아이들 신나게 키워내다 뒤돌아보니 우리 아이가 덩그런히 우리 뒷모습만 바라보며 서있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고, 정말 착한 우리 아이들이 우리가 일하는 거 봐주느라 많이 양보한 이것 저것들을 이제는 좀 위로해 주어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방학마다 했던 18번째 폭설지역돕기 정읍을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는 3년이란 가족여행을 준비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부모님들이 이해해 주시면서 2006년 7월2일 드디어 인천공항을 통해 동굴 밖의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첫댓글 정말 멋지고 대단하십니다. 앞으로의 글도 기다리며 응원합니다!
열렬한 독자 1호 임해인 올림
이렇게 해서 여행가문이 시작된 것이군요. 저도 기다리며 응원합니다. 열렬한 독자2호 김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