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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과 안락사
나는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의도적인 죽음이라 할 수 있는 자살과 그 원인 중 하나인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자연법 윤리학과 칸트 의무론이 근본적으로 자살을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공리주의는 자살을 찬성하는 입장이다. 본고에서 연구자는 자살을 반대하는 관점을 견지하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자살에 대한 반대논변으로 자연법 윤리학과 칸트 의무론의 관점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보완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전자의 경우, 그 핵심 개념인 ‘자연적 성향’은 해석상의 자의성을 지니고 있으며, 후자는 그 윤리학이 형식적인 성격을 지닌 것처럼 자살에 대한 견해 역시 형식적인 접근을 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고통의 회피수단으로 자살을 허용하며, 심지어 자살을 일종의 권리로 간주하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를 위해 공리주의의 기본전제인 “ 고통은 회피하고, 쾌락은 추구하라”는 명제의 오류를 고통의 인간학적 의미에 천착하여 규명함으로써 자살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음을 밝힐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자살과 안락사에 대해 의무론적 입장을 지지하며 논지를 펼칠 것이다. 의무론적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은 자살을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안락사 역시 그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살이 허용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안락사를 검토하는 것은 보다 복잡하다. 그러나 결국 허용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자살과 자발적 안락사는 큰 차이가 없다. 비자발적인 안락사를 허용하는 사람들의 추론에 따르면, 자살과 자발적 안락사를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음은 죽는 자의 사정이 죽음으로 인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에 있기 때문에 동일한 믿음이 비자발적 안락사의 도덕적 허용성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적 분석을 해보면 세 가지 주요 결론이 나온다.
공리주의에 입각한 자살의 논의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살을 허용하지 않는 자연법 윤리학이나 칸트의 의무론적 관점을 거부하며, 자살을 인간의 권리라는 차원으로 접근한다. 여기서 삶을 지속하게 하는 실제적인 근거는 ‘행복’ 혹은 ‘쾌락’이다. 따라서 쾌락은 추구하고, 고통은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쾌락의 결핍이 지속될 때,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의 제창자라 할 수 있는 흄은 “자살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자살의 권리를 공리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옹호하는 논변을 편다. 그의 논의는 공리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초기의 자살론에 해당하지만 전반적으로 공리주의적 관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살을 금지하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폐기하거나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 영역을 자살에까지 확장하고 있으며, 칸트의 의무론과 같은 성격의 윤리이론에 대해서도 강하게 부정하는 공리주의적 색채를 견지하고 있다. 자살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창조자의 질서를 거역한다는 죄책감이나 비난 때문에 죽음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고 고통과 불행 가운데 생명을 연명한다고 흄은 지적한다. 이제 흄은 자살이 신에 대한 의무의 불이행이 아님을 증명한다. 흄 이외의 여러 공리주의 도덕 철학자에 논거에 의거하면 다음 세가지 주장을 들 수 있다.
첫째, 표준적 논변들은 자살과 안락사가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한가를 결정하는데 모두 적절하지 못하다. 둘째, 시도되는 자살과 살인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척도가 있으며, 그것은 죽게 되는 사람의 욕구와 어느 정도 무관하다. 셋째, 죽음을 유발하는 일과 죽음을 내버려 두는 일간의 구분, 자발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 간의 구분은 통상적으로 그것에 부여되는 것만큼 큰 의미가 없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자살의 도덕적 허용가능성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논변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생명을 처리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에 의거하는 모든 논변을 받아들이지 않듯이 이러한 논변도 거부한다. 자살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논변은 사람이 타인에 대한 것이든, 사회 혹은 신에 대한 것이든 간에 자신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사람이 갖는 특수한 의무에 의거하는 모든 논변을 받아들이지 않듯이 이러한 논변도 거부한다. 안락사에 대한 논의도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논점은 명백한 것인데, 즉 자살이나 안락사에 대한 대표적인 모든 찬반논변은 누가 어떤 권리를 소지하며, 누가 어떤 의무를 지고 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결과론적인 사고 유형인 공리주의는 따라서 이러한 모든 대표적인 논변을 거부하게 마련이다. 공리주의자들의 통상적인 기준, 곧 어떤 행위가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면 옳고 그렇지 않으면 그르다는 기준이 여기에도 적요된다. 따라서 자살이나 안락사가 욕구의 최대 만족과 최소의 좌절을 가져올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된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어서,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과 불명예를 참아내는 일을 원치 않고, 나아가 그가 더 산다고 해서 그의 가족이나 사회에 어떤 중대한 이득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하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 공리주의자들은 자살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것이다. 그가 더 살게 되면 고통과 불명예를 피하고자 하는 그의 중대한 욕구가 좌절될 것이며, 그가 더 살게 됨으로써, 좌절된 욕구를 상쇄시키고서 충족될 다른 욕구도 없다. 여기서 도출한 결론은 자살과 안락사 구분 없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발적/비자발적 안락사도 구분하지 않는다. 다른 상황(인생을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된 사업 실패로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는 경우)을 생각해 보자. 이 경우 그의 생각, 느낌과 무관하게 그의 죽음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할 수 없다. 일시적 불행으로 그의 남은 여생을 잘못 판단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다시 설계함으로써 여러 욕구들이 충족될 수도 있는데, 그가 죽게 될 경우, 그러한 욕구가 좌절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이 유발되는 것은 도덕적으로 그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위의 경우들 중 한 경우에서는 공리주의자가 당사자가 하려는 것을 옳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 경우에서는 그른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볼 때, 공리주의적 입장은 당사자 개인의 욕구나 의사결정과는 다소 독립적일 수밖에 없는 각 상황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항은 특정 당사자의 죽음이 타인들의 욕구 충족과 좌절에 어떤 함축적 의미를 갖는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린 타인들의 생명에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되리라고 기대할 만한 어떤 근거가 있을 경우 공리주의자는 그 사람이 자살을 하든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죽여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그릇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이것은 자살과 안락사의 옳음과 그름에 대한 공리주의적 기준이 해당 당사자의 욕구와 어느 정도 무관한 것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이상의 두 가지 논점은 세 번째 결론을 도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첫 번째 경우의 불치의 병을 다시 생각해 보자. 공리주의자들은 당사자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행위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그 사람의 연명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의거하고 있다. 따라서 누가, 어떤 식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그르다고 말할 것이다. 죽음이 누구에 의해 실행되든, 그 방식이 어떤 것이든 그르다고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공리주의자들은 특정인의 죽음이 모든 이의 관심을 고려해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숨을 빼앗는 모든 형태의 일이 그르다고 생각 할 것이다. 따라서 공리주의자에게는 인간 생명을 빼앗는 행위의 도덕적 성격은 그 생명이 그것을 살아야만 하는 본인에게 갖는 성질과 그의 삶이 그에 의 영향을 받는 자에게 함축하는 의미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에 반박하며 내 의무론적 입장을 펼치자면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의무론적 사고는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당사자의 권리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의무론적 관점에서 중대한 문제는 위협받는 당사자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어느 경우이며, 그 권리가 침해 될 수 있는 것은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자살과 안락사의 경우,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음이 죽음을 당하는 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근거에서 그릇된 것인지 아닌지의 경우이다. 이에 의거하여 볼 때, 의무론자는 자살의 도덕적 허용가능성을 별 어려움 없이 정당화 할 수 있다. 생존권이 침해되는 사람과 침해하는 사람이 동일인이기 때문이다. 의무론자의 논변에 있는 중대한 몇 가지 논점에 대해 주목해 보면 첫째, 의무론자의 논변이 전제하는 바는 만일 자살이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반대할 만한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일이 죽는 자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일일 것이라는 점이다. 국가의 권리나, 신의 권리에 대한 침해는 문제되지 않는다. 둘째, 자살 행위가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허용 못할 게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살하는 일이 그릇될 경우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권리들 중 일부를 포기할 수 있다. 그렇게 했을 경우, 타인이 그것을 침해했다는 것을 근거로 그릇된 행위를 한다고 할 수 없다. 넷째, 자살 행위가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하다고 주장함에 있어 의무론자는 그러한 행위가 합리적이거나 현명한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같은 논변이 자발적 안락사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쉽게 연장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첫째, 동일한 원리를 그대로 적용. 둘째, 대리인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첫째와 관련해, 자살의 도덕적 허용가능성에 대한 의무론적 논변의 요체는 자살 행위에 함축되어 있는바 자신의 생명이 빼앗겨도 좋다는 데 동의함으로써 죽는 자는 생명권을 포기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정당하다면, 그러한 동의에 따라 누가 행위하느냐 하는 것은 별 상관이 없다. 이는 또한 대리인 원리를 제시한다. 다른 누가 나의 요청에 따라 대리인으로서 내 생명을 끊는 일 또한 허용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자발적 안락사는 자살의 연장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따라서 한 행위의 도덕적 허용 가능성에 대한 정당한 근거는 다른 행위에 적용될 수 있다. 비자발적 안락사는 의무론적 관점에서 볼 때 당사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자발적인 까닭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보아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할 만한 다른 경우도 있다. 때때로 우리는 문제된 사람이 그럴 능력만 있다면 죽여 달라는 요청을 함으로써 자신의 생명권을 포기하리라는 아주 강한 신념을 느낄 때가 있다.
공리주의자와 달리 의무론자는 자살과 안락사에 대한 대표적(혹은 표준적)인 논증의 대부분에 합의한다. 나아가 의무론에 따르면, 자살이나 안락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당사자의 판단에 강하게 의존한다. 즉 그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갖는 가치에 대한 제삼자인 우리들의 판단과는 무관하다. 또 한 가지 차이는 자발적인 안락사와 비자발적인 안락사와 같은 구분에 중대한 의의를 부여한다.
어떤 것이 맞다 규정지을 수 없지만, 의무론적 입장에서 보면 두 가지 입장이 충돌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안락사 허용 여부는 국가의 생명보호 의무와 개인의 죽을 권리 사이의 충돌 관계 속에서 논의된다. 개인의 자율에 기초하여 그의 죽음을 처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관계, 즉 인간이 자신의 현존 속에서 사회적 존재로써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인간들과 맺는 관계와 동떨어져서 생각 할 수 없다. 인간은 고유한 정체성과 정신을 가진 존재로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고, 그 속에서 인간적 생존조건도 필요로 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바로 이 한도 내에서 국가의 생명보호 의무는 그 효력을 발한다. 반대로 국가의 생명보호 의무가 발동되기 시작하면 개인의 생명처분권을 적극적으로 인정해 줄 수는 없게 된다. 이것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헌법상의 인간존엄에 부합하는 결론이기도 하다. 국가의 생명보호 의무는 형법상의 촉탁,승낙 살인죄와 자살관여죄 규정들을 통해 구현된다. 하지만 법체계의 논리상 규법적으로 생명처분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더라도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것은 아니다. 소극적 안락사, 간접적 안락사 혹은 판례에서처럼 무의식 상태의 환자의 경우 적극적인 생명처분권과는 별개로 자기결정권이 작동할 여지는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생명권 보장이 더 이상 치료가능성 없이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한계에 놓인 개인에게 생명을 유지하라는 잔혹한 요청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가 개인의 생명권을 온전히 보장해 주지 못 할 때, 생명보호를 위해 국가가 짊어져야 하는 사회적 비용의 부담을 개인에게 부과시켜 개인의 자기결정권이 자유롭게 발현될 수 있는 기회들을 감소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종교적 논의를 떠나 법적으로 보면, 인간이 자신의 생과 죽음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죽을 권리’라는 개념은 자신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국가가 관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불과하지 자신이 죽을 권리가 있으므로 죽여 달라고 청구할 수 있는 적극적 권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 죽을 권리로부터 바로 적극적 안락사의 권리가 추론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따라서 죽여 달라는 요청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으므로 안락사라는 특별한 한계상황이 설정되어 있더라도 적극적 안락사는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추상적인 관념론으로서 이상적이기는 하나 인간사회의 현실적. 사실적 문제를 도외시한 것으로서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훼손할 수 있는 법적 권리는 아니더라도 사실상 처분할 수 있는 지위로서의 권능 내지 자격은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권능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적극적 안락사의 허용근거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실상 처분권으로서의 자기결정권 행사는 자신이 직접 실시하거나 또는 타인에의 위임을 통해 간접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보장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와 같이 안락사를 인정하더라도 죽을 의사를 가진 자가 자신을 살해하도록 허용하거나 요청할 자격을 가질 뿐 그로부터 자신을 살해할 권리가 당연히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권리로 인정하게 될 경우 법적으로 그 권리의 상대방, 이를 테면 환자로부터 안락사 시술의 촉탁을 받은 의사에게는 안락사 시술의 의무가 발생한다고 해야 하는데, 이는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죽을 의사를 가진 자에게 자기 자신을 살해할 권리는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자격 내지 권능은 인정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격의 행사로 인해 타인 또는 사회의 법익에 대한 침해나 남용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이를 형법적으로 금지시켜야 할 것이고, 이러한 가능성이 없거나 있더라도 제도적으로 거의 차단이 가능하도록 보완이 된다면 금지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엄격한 허용요건과 절차 하에서 적극적 안락사를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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