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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좡 여행3 - 주장에서 운하를 걸어서 도교사원을 구경하고는 박물관에 가다!
어제 2023년 10월 28일 수향마을 퉁리(同里 동리) 에서 택시 영업을 하는 승용차를 타고 30분을 달려서
저우좡(주장) 의 호텔에 도착해 배낭을 맡기고는 나와 운하에 가서 沈廳檢票口 (심청검표구) 에서
표를 사는데 입장료 문표는 100위안이지만 60세 이상과 20세 미만은 반액인 50위안 이라 표를 끊습니다.
얼굴 사진 까지 찍으니 후 문표 앞 면에는 반액 표시 가 적혀있고 뒷면에 얼굴 사진이 보이니.... 다른 사람이
이 문표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는가 본데, 너무나도 좁은 골목길로 50미터 를 가니 운하인데 관광객
들이 어찌나 많은지 인산인해라.... 홍예교인 부안교 다리를 넘으니 中市街(중시가) 거리도 사람에 치입니다.
술빵과 과자를 사서 점심 대용으로 먹으면서 걷다가 다른 가게에서 소고기 육포 를 20위안어치를 사고
다시 골목길을 걸으니 비단을 판다는 가게가 보여 들어가서는 가짜 실크 스카프 를
10위안(1,800원) 에 구입고는 조금 더 걸어서 징허도원 (澄虛道院) 이라는 도교 시원으로 들어 갑니다.
도교(道敎) 는 중국의 민족 종교 로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도가는 사상 이고 도교는 여기에 여러 토속신앙을 혼합하여 종교 로서 발전
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통치자인 황제와 도가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노자를 신봉한다고 하여 '황로사상' 또는 '황로교' 라고도 합니다.
외국에서는 도교를 종교 로 파악하니 유교 보다는 종교적 색채가 훨씬 진한 편으로, 유교 처럼
종교인지 아닌지 논란이 되진 않으며..... 도가 자체가 세속적인 유가와 달리 탈속적인
특성이 있는데다가, 다양한 중국 신앙 까지 집대성해 담아놓았기에 확연히 종교임이 드러납니다.
종교로서 도교는 삼국지로 유명한 장각의 태평도 (太平道) 와 장릉의 오두미도 (五斗米道) 를
시초로 남북조시대에 구겸지가 기틀 을 마련하였으며 당나라 시대에는 국가에서 장려하는
종교로 힘이 세지기도 했는데, 현대 도교는 전진교(全眞敎) 와 정일교(正一敎) 등이 있습니다.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등 동남아와 화교 세가 강한 지역에서는 이 종교의 사원 또는 도교와 관련된 장식을
민간 건물 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 도교는 재래의 토착 제천신앙 처럼 불교에 흡수 되었고,
일본에서는 음양도와 슈겐도 형성에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도교 자체는 독립교단으로 출현하지는 못했습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나름대로 자연 현상을 설명해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 과 같은 원시 종교들이 생겨났으니.....
이 중에서 도교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원시 종교 형태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 입니다.
자연 현상의 원인을 '자연 그 자체에 깃든 신비한 힘' 으로 생각하고, 자연에는 정령 혹은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영력이 강한 사람이 자연의 신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팔신제(八神祭) 혹은
강산제(江山祭) 등 의례를 행하고 도신(跳神: 굿), 점복(占卜), 금기(禁忌), 조험 (兆驗: 재앙이나 큰
사건의 징조를 알아채는 것), 참위(讖緯: 예언), 부주(符呪: 부적과 주문) 와 같은 무속문화 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원시 종교의 무속 문화 는 민간신앙에 머무르다가 오두미도의 성립으로 도교에 흡수 되어
부록파(符籙派) 를 형성했으니, 도교의 부록파의 내용은 민간에서 크게 유행하여
민간도교의 중심 흐름을 이루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도교 부록파는 조선의 정감록 입니다.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중국에는 신선방술이 유행 하였으니 방선도(方仙道) 라고 하고 이걸 익히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방사(方士) 라고 불렀으니 이들의 목표는 불로장생을 위해 신선 이 되는
것이었기에.... 이러한 방선도의 목표는 도교가 형성될 때 도교의 핵심 내용 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또 이런 본능에 충실한(?) 목표 덕분에 도교가 민간에서 크게 유행할 수 있었고 상류층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었으니 목표가 오래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늙지도
않으면서 편안하게 오래 사는 것' 이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듯 합니다.
방선도의 방사들은 심선파 (尋仙派) 와 수선파 (修仙派) 로 나뉘니.... 심선파는 "심산유곡에 숨어
있는 신선을 찾아가 신선이 되게 해달라고 하고 영약도 전수받자!" 는 파벌로, 삼신산
같은 신선들이 모여사는 가상의 장소를 상상해내어 진시황을 미혹했으니 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의 오악(五岳) 과 같은 명승지와 심산유곡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수선파는 명산대처에 은거한 뒤 스스로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방파이니 이들
은 연구를 통해 도교의 신선이론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심산유곡에 들어가 각종 광물과
약초 등을 이용해 몸을 깨끗이 하여 신선으로 만들어 주는 불로장생약 을 찾고자 노력 하였습니다.
이들의 신선이 되는 수련법이나 불로장생약 제조법 은 이후 중의학(中醫學) 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의 연구는 이후에 여러 사상적 보완을 거쳐 외단을 제조하거나 내단을 수련하는 방법에
향을 끼쳐 도교의 단정파(丹鼎派) 를 형성하였으니 심선파와 견주면 생산적인 편이었지만, 시대상의
한계를 이기지 못했는지..... 수은을 불로 불사의 약 으로 여기고 장기간 복용하다가 단명하기도 했습니다.
방선도 측의 이론을 보면 중국 본토 보다 삼신산, 봉래산 등 한반도와 만주, 발해만 일대를
포함한 동북방 일대가 성지 로 두드러지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방선가들의 주 출신 및
활동지역이 이쪽이었기 때문으로 방선도는 동북방 지역 사머니즘 과의 유사성이 짙습니다.
<태평경> 은 <열선전> 에 따르면 조사(祖師) 인 백화(淸和) 를 요동인 으로 적었고, 그 후계자인 간길(干吉),
궁숭(富崇) 등도 이민족 문화가 강한 발해만 출신으로, 방선가들은 지금으로 치면 의사 겸 무당 들
이었는데, 그러니까 중국 본토 사람들이 아니라 백두산(장백산) 에서 요동에 이르는 만주 지방 사람들 입니다.
1115년 여진족들이 金(금) 나라 를 세우자 자기 민족의 발상지는 장백산(백두산) 이며.... 그 천지의 물이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 유역이 천년이 넘는 삶의 근거지라, 1172년에 금나라는 장백산(백두산)
에 제 를 올렸으며 1193년에는 장백산(백두산) 을 開天宏聖帝(개천굉성제) 로 이름(존호)을 지어 올립니다.
청나라 강희제 는 장백산(백두산)을 만주족(여진족)의 발상지 라 1677년 12월에 백두산을 "장백산지신" 이라
부르며 백두산 천지에 손수 올라 직접 제사 를 올렸는데...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도
"만주족은 장백산을 청나라 시조 누루하치가 탄생한 곳 이라 하여 신성시하며 제사를 지낸다" 고 적었습니다.
“장백산(長白山) 동쪽 포이호리 연못 에 사고륜과 정고륜, 불고륜(弗庫倫) 천녀(天女) 셋이 목욕을 마쳤을때,
신작(神鵲)이 붉은 과일 을 막내 옷에 떨어뜨리니 입에넣자 홀연 뱃속으로 들어간후 임신이 되어 남자아이
를 낳았는데 어머니는 아이신고로(愛新覺羅 애신각라) 로 성(姓) 을 삼으라, 하늘이 너를 탄생시킨 것은
난국을 평정하도록 함이니 물흐름을 따라 가라고 하며 배를 띄운뒤 태우고.... 어미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
다산 정약용 도 ‘백두산은 산해경에 불함산, 지리지에는 장백산이다’, ‘청 황제가 오악(五嶽) 에 백두산을 더해
육악으로 삼고 제사 지내니 존귀함과 중대함이 옛날에 비할 비가 아니다’ 라 했는데, 고려와 조선의 왕들이
백두산에 직접 오르지 못한건 고려 초기 국경선이 황해도에서 원산 이고, 조선 초기 국경선이 평안북도 3분지
2와 함경남도 3분지 2이니 그 너머 백두산 지역은 천이백년간 우리나라 영토가 아닌지라 갈수없었는가 봅니다?
백두산은 BC 2세기 편찬된 중국 山海經(산해경)에 不咸山(불함산) 으로 기록된후 한나라 시대에 개마대산,
위진 남북조시대에 태백산과 도태산으로 이후 백산, 삼신산으로 불리다가 금나라 때는 영웅산을 거쳐
長白山(장백산) 으로 불리웠으니.... 이는 여진어로 "골민샹기얀알린 (Golmin Šanggiyan Alin)" 곧
궤리만싸에아린(果勤敏瑢廷阿林) 을 한자로 옮기니 큰흰산(태백산) 또는 긴흰산(장백산) 으로 기록됩니다!
노자(老子) 는 도교의 최고 3신인 도덕천존 혹은 영보천존의 화신 으로 여겨지며 장자,
열자 등 도가 철학자들은 도교의 신선 혹은 조사(祖師) 로 받들어 지고 있습니다.
人能修至道,身乃作真仙
사람은 능히 도에 이를 수 있으며, 이에 몸은 진정한 신선을 이룬다.
송휘종 어제 보허사(步虛詞) 4수 중에 한 구절 입니다.
도가 사상의 핵심 개념인 도(道) 는 일단 도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녔으며, 도를 얻으면, 즉 득도
하면 신선이 되는 것 이며 또 도교의 이론 체계와 신앙은 도가 사상 을 통해서 정립되었습니다.
도교의 시작은 보통 오두미도 로 보고 도교의 창시자는 오두미도의 창시자인 장도릉 으로 보는데, 태평도가
있음에도 주로 오두미도만을 도교의 근원으로 보는 이유는, 태평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지의 군웅들에게 참살을 당해서 다 사라지고 결국에는 천사도 (=오두미도) 로 흡수 되었기 때문 입니다.
태평도는 장각이 태평경(太平經) 을 얻어 창시했으니 '도를 천하의 어머니 로 삼고, 도는 만물
을 낳는다' 는 사상과 함께 불로장생의 방술 과 신선이 될수 있는 신선술 이 실려
있었는데, 장각은 태평도를 창시하면서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니.....
십수년만에 수십만명이 가담해 36방(方)으로 만들어 '황건적의 난' 을 일으켰으나 진압됩니다.
오두미도는 '천사도(天師道)' 라고 불리웠는데, 태상노군이 장도릉을 삼천법사정일진인 (三天法師正一眞人)
으로 봉했으니 장천사라고 불렀기 때문으로 오두미도라고 불린 이유는 입교할때 신도들에게 쌀 다섯 되
를 받았기 때문인데, 교조는 노자, 주요 경전은 도덕경이며, 장도릉은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 에서
도는 하나(一)이고 "하나의 형체가 흩어지면 기 가 되고, 형체가 모이면 태상노군 이 된다." 라고 했습니다.
위촉오 삼국시대에 오나라에는 갈현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태극갈선옹 (太極葛仙翁)
이라고 불렀으니..... 그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다년간의 수련을 통해 득도한 후 상청(上淸),
삼동(三洞), 영보(靈寶) 등의 경전을 전수하였는데, 이후 증손자 갈소보가 영보파(靈寶派) 를 창립합니다.
동진 때에 도교 역사상 첫 번째 여도사이자 여학자인 위화존 은 명문가 출신 으로서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신선술에 관심을 두게 되어 천사도에 가입했으니 위화존은 도교의 양생이론을 깊게 연구하여
삼단전(三丹田), 팔경(八景), 이십사진(二十四眞) 등 양생이론을 만들었으니, 도교의 양생술과 수련법
은 의학과 함께 체계적으로 정립되었고 각 교파의 조사들이 변형하여 다양한 양생법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동진때 저명한 도학자 갈홍은 연단과 의학에 정통 했으니 신선방술과 유가의 삼강오륜 을 결합하여 충효와
인을 근간으로 불로장생할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도교의 신선이론과 수련방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연단
제조 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거두어 수나라, 당나라시기 연단술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남북조시기 육수정, 구겸지 등 도교 사상가들이 도교의 이론체계를 재정비하고 사상과 관념, 의범을 갖추고
미신 등의 사상을 개선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종교로서의 의례 등이 명확히 갖추어지고 마음수련 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전진교나 무당파 에 이르러는 외단 대신 내단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구겸지 는 어렸을 때부터 천사도를 신봉하였다가 숭산에서 수도한 뒤 위나라(북위)의 수도
로 가서 태무제로 하여금 도교를 위나라의 국교 로 삼게 하고 도교를 개혁하였으니
부조리한 법도와 쌀로 세금을 받던 제도를 없애고 신도들에게 계율을 준수하고
열심히 예배하고 수련하면 신선 이 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신천사도 (新天使道) 라고 합니다.
수나라 이후 당나라 초기까지 연단술, 즉 외단 제조 에 대한 이론이 엄청나게 발전했고 덩달아
중국의 화학 기술 수준도 급성장했는데..... 하지만 그 결과물인 단약은 수은을 주 재료 로
한 독약이어서, 불로장생 하겠답시고 먹은 제왕 및 도사들은 정상적인 수명을 유지
하기도 힘들었으니 소현랑은 외단이 아닌 몸 안의 내단을 키워야 한다는 내단론을 주장합니다.
소현랑은 청하자라 했는데 태역 (太易) 과 단도 (丹道) 를 발명하여 ‘보장론(寶藏論)’ 이라 하였으니
그는 사람들이 영지 靈芝(=영약=외단=불로장생약) 를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는데 구하지
못할 수가 없다고 하자 “영지는 너의 몸 가운데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외부에서 불로장생약을 찾기 보다 수련을 통하여 스스로 내단 內丹 을 만들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당나라 때 도교는 불교의 이론과 사상들을 대거 흡수 하고 내단의 수련법이 크게 발전하였으니
노자의 이름이 이이(李耳) 인 것을 들어 노자를 당나라 황족의 시조 로 받들였으니, 666년 당고종
이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 라는 존호를 올렸고, 그후 754년 당현종이 '대성조고상대도
금궐현원천황대제 (大聖祖高上大道金闕玄元天皇大帝)' 라는 거창하기 그지없는 존호로 바꾸었습니다.
송나라 대에는 흥도억불 정책 으로 인해 모산파와 화산파, 천사도 가 크게 흥하였고 당시의
유명한 도사 진단은 전통적인 도가 학설을 중심으로 유가와 불가의 사상을 두루 융합
하여 체계적인 내단 이론을 만들었으며, 특히 周易(주역) 을 깊이 연구하여 도가의
문화에 유가의 사상을 흡수하였으며 또한, 남송 대에 왕중양은 전진도(全眞道) 를 창시합니다.
전진도는 유불도의 삼교합일 을 주장하고 '도덕경', '반야심경', '효경' 을 필수 경전
으로 삼았는데, 처자식과 부귀공명을 버리고 육식이나 비린 것을 먹지 않으면서
내단을 연단하여서는 고통스러운 유한한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니다.
명 대에는 태조 주원장 부터 도교를 숭상 하였으며, 랍탑도인 장삼봉이 무당산에 무당파 를 창립했으니
장삼봉은 전진의 도사였다가 종남산에서 내단을 만드는 비결을 얻고 무당산에서 수련하였는데
그는 청정한 마음으로 내단을 수련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 그 과정에서 '무武' 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장삼풍은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무당권법 을 창안했으며 육합신권을 수련하여 내가권법(內家拳法)
이라고 하였는데 이것들은 도교의 이론과 내단 수련법을 무술에 접목한 것이었으니 무당 내가권은
크게 발전하여 형의권, 팔괘장, 태극권 이 만들어지고 수많은 무술과 유파가 발생하여 그 유명한
중국권법이 형성 되었으니 오늘날 아침이면 거리와 공원에서 태극권을 수련하는 사람들 이 엄청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太極拳(태극권) 은 장삼풍이 아니고 명말 진왕정, 형의권은 명말 희제가,
팔괘장은 청나라말 동해천을 시조로 하며..... 내가삼권은 근대에 탄생한 만큼 각자
계보를 정확히 밝히고 있으며, 무당산 쪽에서 멋대로 장삼봉 이름을 쓴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공식적으로 유교를 근본이념 으로 삼는 나라였기에 비록 황족의 후원 이 있기는 했으나 국가
운영의 중심사상은 도교 보다 유교에 두고 있었고, 불교와 도교를 반반씩 중심 사상으로 잡던 당송 시대와
달리 도교의 힘은 상대적으로 낮았으니 이때 부터 국가 중심의 관방 도교는 점차 몰락하기 시작하였으며
반대로 민간신앙에서는 송, 원 시기부터 점차 대두되기 시작한 민간 도교 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도교 사원을 나와 그 다음에 운하 를 구경하면서 걸어서는 지도를 보며 찾아간 저우좡
박물관 내부에는...... 중국인들의 일상생활 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가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