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연천군 왕징면 나룻배마을에 여장을 풀고 잠을 청하였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개구리 울음소리 정겹다.
아침 기상 시간이 즐겁다. 대기의 기운이 서늘하고 임진강의 강바람이 청량하다.
오늘 첫 여정 비무장지대에 있는 미수 허목의 묘소를 가기위해 주민등록증 군부대 검문소에 제출하고 메르스 검사를 받았다. 귓가에 열감지기를 대고 체온검사를 하는 것이다. 체온이 37도 38도가 되면 출입이 제한되는데 우리 일행 무사통과
살면서 말로만 들어봤던 민통선을 처음 지나본다. 민통선 내의 전원풍경, 저지대 무논에 벼가 심어져 있고, 구릉지대를 따라 옥수수, 콩, 인삼등을 재배하고, 간간히 야산자락에 농막이 눈에 들어온다. 지극히 평화로운 시골풍경이다. 개발의 손길이 더딜 수밖에 없었던 덕으로 지금은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어린 시절 고향마을의 전원풍경을 그대로 느껴볼 수 있었다.
미수 허목의 묘소는 민통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좌우로 산세가 안온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미수 허목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과 대척점에 서서 당쟁의 중심에 서 있던 남인의 영수이다. 묘비와 망주석과 문인석에 총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6.25 동란 때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민통선을 나와 오전 기행을 시작하였다. 비무장지대를 따라 만들어진 평화누리길 11코스, 미산면 동이리에서 차를 내려 강가로 들어섰다. 임진적벽길을 따라 올라간다. 약 60만년전 중기 홍적세에 분출된 용암에 의해서 형성된 주상절리의 독특한 강변풍경이 전개되고 있다.아침 나절의 햇빛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고 강바람이 시원해서 걸을만하다. 자갈 모래가 섞여진 작벼리길을 십여리 걸어서 제방에 올라서고, 제방을 2킬로 정도 걸어 우정리 임진교에 도착하여 어깨 짐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였다.
열한시반, 점심시간으로는 애매하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었고, 아직 다리 힘이 탄탄하여 여력이 충분하였다. 점심 전 까지 한 시간 여 정도로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임진강을 따라가는 숲길, 바람 선선하고, 울창한 나무 그늘과 방향이 좋은 야생화와 새들의 울음소리는 도보여행의 즐거움이다.
오후 한 시가 넘고, 한 시반이 지나도 숲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허기지고 지쳐가는 시간이다.
한 걸음이라도 빨리 가볼 까하는 마음으로, 본대와 달리 강변 쪽으로 향하는 능선 길을 따라 내려왔다. 웬 걸! 사람의 발걸음이 드물다 했더니 길이 끊어졌고, 다시 돌아서서 사이 길을 찾아내 숲길을 내려서니 제방에 이른다.
제방 끝에 이르니 범상치 않은 정경이 펼쳐진다. 아! 삽상함이여
클라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 음악의 품격만큼 잘 가꾸어진 정원이 전개된다. 허기짐과 피로가 일시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조심스러워 선뜻 발걸음이 망설여진다. 우리 세 사람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정원 안에 진입을 하였다, 먼저 그곳에 들어와 있는 다른 관광객들과 합류를 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파악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연천군에서 조성한 공원일까 하다가, 나중에는 서울에 돈 많은 부자가 만든 고급레스토랑 정도로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정문을 나와서 보니 그 유명한 허브빌리지였다. 전두환의 아들 전재국이 소유였다가 국가에 압류되었다던
실컷 눈을 호사시켜주고, 사진 찍고, 입장료 거금 칠천 원을 아낀 것이다.
도보여행의 일탈이 아니면 어느 곳에서도 느껴볼 수 없는 찌릿함이고 통쾌함이었다.
오후세시 늦은 점심을 먹고, 백마고지 기념관을 향했다. 백마고지는 395미터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철원평야에서는 전략요충지였다. 6.25동란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고, 열흘사이 주인이 일곱 번 바뀌었으면 피아 수만 명의 사상자를 냈던 격전지였다. 철책선 안에 있어 실제로 가 볼 수는 없는 곳이고, 백마고지가 잘 보이는 곳에 기념관이 세워져있다. 한반도의 내륙산악지방에 이렇게 너른 평야가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고, 여기에 궁예가 태봉국의 수도를 삼았다던 역사적인 설명도 충분히 수궁이 갈만한 사실이었다.
백마고지를 보고 어제 기행의 나머지를 위해 연천으로 이동을 하여 중면 상곶리에서 차를 내려 기행을 시작하였다. 마을을 지나 개울을 건너 풀숲을 헤치고 나가니 강변도로가 나온다. 오늘 남은 일정은 눈앞에 보이는 군남 홍수 조절지댐까지 가면된다. 하지만 만만치 않아 보인다. 강변의 벼랑을 기어오르고, 억새의 날카로운 이파리에 살결이 씻기어가며 험산준령을 넘어야하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변으로 가다가 도저히 벼랑길을 돌파할 수 없어 산으로 오른다. 산비탈을 개간하여 만든 화전 정도의 거친 밭에 이르러 한숨을 돌리며 이제 눈앞에 보이는 가풀막 하나만 오르면 되리라는 기대감으로 안찬 걸음으로 나섰다.
능선에 오르니 길은 끊겨서 다시 가시덤불을 헤쳐야 간신히 개간지까지 나갈 수 있었고, 또 하나의 가풀막이 기다리고 있다. 해가 길어 아직 어둡지는 않았지만 입곱 시가 넘었다. 지치고 허기가 밀려오는 시간이다. 다시 능선을 따라 오르며 힘들었던 일정을 다해 가고 있다. 길의 고마움을 다시 느낀다. 지도상에 없는 거친 산야를 오르내리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니 더욱 힘이 들었을 것이다.
철원기행
철원은 38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어 6.25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다.
옛 시절 노동당사를 둘러보고, 근처에 있는 소이산 생태숲길에 올랐다. 태산 준령이 많은 철원에 소이산은 야산이지만, 철원평야를 쉽게 감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치열한 전투지역이였던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철조망이 둘리워졌고, 지뢰밭이라고 섬찟하게 접근금지 표시가 되어 있다. 만물이 흙에 묻혀서 한세대를 지나면 자연에 동화되는 것인데, 인마 살상을 위해 뿌려진 저 무시무시한 무기는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분해되고 해체되어 자연과 한몸이 될 것인가?
인간이 만든 경계와는 관계없이 산수국은 철조망을 넘나들며 만개하였고, 간간이 빠알간 딱총나무 열매가 구색을 맞추어 어우러져 있다. 이곳 철원에는 아직 아카시아 꽃이 열매를 맺지 않고 꽃술을 달고 있다.
산자락을 돌며 숲길이 조성되어 있고, 산을 한 바퀴 거의 돌 무렵 임도와 마주 치게되고, 임도를 따라가면 정상에 오르게 된다.
전망대에 서니 끝이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철원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생태숲길의 에피소드, 내 앞에 우리땅 최연소 도반 희수군(초등 4학년)이 걸어가고 있고, 자칭 흑곰 백곰하는 희수군의 삼촌들이 앞장서 가고 있었다. 이미 그들이 일은 저질러 놓고 갔을지도 모른다. 바로 내 눈앞에서 희수가 뱀을 발로 밝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섬찟했는데, 요놈이 바로 고개를 세우고는 나를 향해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다. 까치 독사였고, 어른 뼘으로 두어 뼘 정도, 그리 크지는 않았다. 등산화발로 밀어서 길섶으로 밀어놓으니 꽁지야 빠져라고 구멍으로 숨어 들어간다. 보호색인 진한 흙색으로 위장하여 오히려 해를 당했다고나 해야 할까? 흙색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으니 모르고 밝고 간 것이다.
도피안사
통일신라시절에 창건되었지만, 세월에 묻혀 폐사가 되었다가, 6.25 후에 인근 부대의 사단장이었던 이명재 장군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어느 날 부처님이 현몽하여 꿈에 나타난 지형을 찾아보니 옛 절터였고, 그 절터를 발굴하여보니 통일신라 시대의 철불이 발굴되어 부처님을 모시고 절을 다시 세웠다한다. 이 철비로자나불은 대웅전에 모셔졌고,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석정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고석정이라는 정자였는데, 시멘트 구조물로 만들어진 운치없는 정자였다. 고석정 보다는 한탄강 협곡이라 불러본다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직탕폭포
언뜻보면 물막은 보를 넘쳐 흐르는 강물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암반단층을 흘러내리는 폭포가 확실하다. 하지만 한국의 나이야가라라는 표현은 다소 억지스러웠다.
순담계곡
삼부연폭포 겸재 정선의 실경산수에 담겨진 경관이라는데 , 보타지는 물이 아쉽다. 꽃에 향기가 없는 것 처럼
첫댓글 목포에서 스마트 폰으로 철원 연천 기행문을 읽었으나 댓글을 이제야 단다..어제 해남 집으로 돌아와 오늘에야 컴 앞에 앉았으니..
한반도 구석 구석 돌아보는 친구의 여유에 부럽다. 나는 무릎이 아파서 도보 여행은 이제 생각도 못한다. 덕분에 올려준 글 읽고 대리 만족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