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장에서 일하는 유일한 남자이고, 아저씨로 불린다. 쌀과 모싯잎을 담글 때, 박스와 소금이 필요할 때, 기계가 고장나면 직원들은 어김없이 '아저씨'를 호출한다. 납품이 없는 날엔 힘쎈 아저씨가 있기에 공장 일은 조금 더 늘어난다. 서울과 경기 지역으로의 배달을 하는 12시간 정도의 운전보다도 공장에서 일하는 게 어떤 때는 더 힘들고 피곤하다. 내가 없는 날에는 40kg의 쌀을 들어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지게차까지도 척척 운전하더니만 나만 보면 어찌된 일인지 가냘프고 연약한 여자들이 되어 버린다.
공장에서의 하루가 더 힘든 것은 화장실 때문이다. 공장은 두 개동인데 하나엔 생산시설들이, 다른 하나에는 사무실과 창고, 식당, 화장실이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화장실이 남녀 공용이라는 데 있다. 남자용 소변기, 좌변기, 세면대와 샤워기가 모두 한 공간에 있는 구조인데다 남자라고는 나밖에 없으니 이용하는 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더욱이 변기에만 지하수를 사용하는데 지난 겨울 추위에 펌프가 얼어 자주 고장나자 좌변기에만 상수도를 연결하고 소변기로 통하던 관은 막아 버려서 나로써는 화장실 가는 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변기의 깔개를 올리고 볼일을 보더라도 혹시라도 흔적이 남아 있으면 어쩌나 싶어 휴지와 물로 뒷처리를 확실히 해야 했다. 소리 역시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여서 점심시간이나 휴식 때를 피해 일하는 중간에만 화장실을 찾았다. 더욱 난감한 것은 큰 일을 해결해야 할 때였다. 부부간에는 변기의 깔개에서 느껴지는 서로의 체온이 아무렇지도 않지만 공장에선 여러모로 눈치가 보였다. 결국 큰 일은 되도록이면 집에서 보고, 작은 일은 건물에서 30미터쯤 떨어져 있는 닭장 옆에서 해결하고 있다.
'제발 앉아서 싸라.' '서서 누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이다.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해.' 한두 씩은 부부간에 이런 다툼을 한다고들 한다. 나 역시 아내의 원망과 짜증에서 벗어나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은 아닙니다.' '한 발짝만 앞으로. One Step Forward. Please!' '고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고속도로 휴게소 남성 화장실 소변기 위 벽면에 붙어있는 글귀들이다. 또한 평생 교육원의 남자 소변기처럼 절묘한 위치에 파리나 꿀벌 그림을 붙여 놓거나 감지기를 설치하여 소변의 세기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한 곳까지도 있다. 기발하고 재미는 있지만 이래저래 괜스레 움츠러드는 게 사실이다.
언젠가 전날의 과음 탓인지 일하는 내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지만 편해지지가 않았다. 점심에 뜨끈한 된장국으로 속을 달래고 나자 또다시 신호가 왔다. 화장실로 달려 갔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차마 빨리 나오라고는 못하고 제발 제발하면서 공장 마당을 뱅뱅 돌뿐이었다. 아득한 시간이 지나고 이윽고 물소리가 나자 재빨리 화장실을 차지했다.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어느 화장실에선가 봤던 문구 하나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신이 사색(思索)을 즐기는 동안 밖에 있는 사람은 사색(死色)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