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나라의 김씨는 크게는 수로왕계의 김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알지의 후손이다. 신라에서 김씨 왕계가 내려오면서 김주원의 후손인 강릉김씨처럼 도중의 인물을 분관조로 하는 성씨도 있으나 대개는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들에서부터 세계가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분관조의 세계는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신라 왕실의 후손이었던 경주김씨가 신라가 망한 후 고려조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게 되었는 지는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처음에 차지하게 된 위치에 의해 고려 시대 5백년간 더 멀리는 조선 5백년간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는 고려 태조 18년(935) 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신라를 넘겨주었다. 이에 왕건은 김부를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락왕. 정승에 봉하였다. 이 지위는 태자의 위에 있었다. 식읍 8천호를 주고, 매년 1천석의 녹을 주며 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이러한 대우는 전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물론 신라세력을 회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왕건은 큰 딸 낙랑공주를 김부에게 부인으로 주고, 김부는 백부 김억겸의 딸을 왕건의 후비(신성왕후)로 들여보낸다. 두 나라 왕실간의 정략결혼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려조에서 경주김씨의 세력은 김부의 사위인 경종과 신성왕후 소생인 안종(욱)의 아들 현종이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더욱 굳게 된다.
경종의 비 헌숙왕후는 김부의 딸이었다. 이에 경종은 즉위하자 상부. 도성령의 호를 더하고 식읍을 1만호로 늘린다. 신라의 왕족은 고려조에서 도 큰 세력을 형성,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부의 조카딸인 신성왕후는 현종의 할머니다. 이후 고려 왕실이 현종의 후손에서 이어졌으므로 고려 왕실은 신라 왕실의 외손인 셈이다. 그래서 김부식은 삼국사기 사론에서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고 그 자손이 또한 번연하고, 현종이 신라의 외손으로 빈위에 올랐으며 이 뒤로 왕통의 계승자는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의 갚음이 아니리요”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초 고려의 지배세력으로 자리잡은 경주김씨는 고려 전기 최고 문중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고려 인종조의 김부식대에 이르러 가문의 성세는 절정에 달하였다
경주김씨(慶州金氏)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 산맥은 ▲김해김씨와 ▲경주김씨다. 따라서 거의 모든 김씨는 이 두 김씨 중 어느 한쪽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두 김씨는 성은 같지만 뿌리가 전혀 다르다. 김해김씨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시조인 반면 경주김씨는 신라의 왕성인 김알지가 시조다.
경주김씨는 신라 왕실의 3성인 박, 석, 김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경주김씨의 시조 김알지도 김수로왕처럼 탄생 설화가 전해진다. 김알지는 서기 65년 신라 탈해왕 9년 금성(金城) 서쪽 시림(계림의 다른 이름)의 나무 끝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이를 기뻐하여 성을 김으로 했다.
그 뒤 김알지의 후손 미추 가 신라 13대 왕에 오르면서부터 신라의 왕성(王姓)이 된다.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넘겨줄 때까지 경주김씨는 신라 56왕 중에서 38왕을 냈다.
경순왕에게는 아홉 아들이 있었다. 마의태자로 알려진 큰 아들 김일 은 망국의 한을 안고 입산한다. 셋째 아들 영분공 김명종과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후손이 바로 경주김씨다.
경주김씨는 고려조에서도 최고 문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는다. 왕건은 큰딸을 김부(경순왕)에게 부인으로 주고, 김부 는 백부의 딸을 왕건의 후비(신성왕후)로 들여보낸다.
두 나라 왕실 간에 정략결혼을 한 것이다. 김부 의 사위인 경종과 신성왕후 소생인 안종의 아들 현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후 고려 왕실은 현종의 후손에서 이어졌으므로 고려 왕실은 신라 왕실의 외손인 셈이다.
▲영분공파
파조인 김명종은 경순왕이 나라를 빼앗긴 후 고려에서 경주군에 봉해졌다. 그의 8세손 김의진은 유학(儒學)의 종주로 평장사를 역임했다. 12세손 김인경은 문무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으로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라 시와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김명종의 6세손 김예겸이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으로 내중령을 지냈다. 김예겸의 손자 김의진은 고려 사학(私學) 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했다. 문종 때에는 참지정사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여 인재등용에 공헌하고 평장사를 역임했다.
김의진의 증손자 김영고는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와 이의방을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다. 김영고의 아들 김인경은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고종 때 조충 과 함께 강동성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을 세우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시문과 예서(隸書)로 명망이 높았다.
대안군파 파조인 김은열은 공부시랑을 거쳐 대안군에 봉군되고 그의 후손들이 여러 본관으로 분관되었다. 김은열의 8세손 김봉모는 외국어에 능하여 사신이 오면 관반사(館伴使-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정3품 벼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일에는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보았다.
김봉모의 아들 김태서(金台瑞)는 고종 때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아들 김약선(공부시랑), 김기손(평장사), 김경손( 추밀원 부사) 3형제가 유명하다.
▲판도판서공파
파조 김장유는 고려 말에 정국이 혼란하자 충청도 보은 땅에 은둔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장유의 후손에서는 정랑 김효정의 아들인 조선 중종 때의 명신 김정 이 뛰어났다.
그는 조광조와 더불어 중종 때에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하여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서른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일화가‘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정언 등을 거쳐 순창군수로 나가 있을 때 그의 옛 글벗인 승정원 승지 이항 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
그 편지는 직함을 갖추어 쓰고 도장을 찍었으며 우정 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서 하명하는듯한 글투였다. 이에 김정 은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를 써 넣었다.
"서당에서 같이 배우고, 옥당에서 같이 있다가 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병든 이 한 몸이라 천상에서 화려한 직함인 승지 이씨여 편지 쓸 즈음에 옛 벗 생각을 했는가."
이 시에 앙심을 품은 이항 은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김정 의 죄를 추론하는데 앞장섰다. 그 외에도 그가 제주도로 귀양 가다가 해남 바닷가 노송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한다. 36세로 사약을 받을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하다.
▲태사공파
파조 김인관은 고려 예종 때 조산대부로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에 올랐다. 김인관의 9세손 김자수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안동에 은둔하였다.
김자수의 9세손 김홍익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서 순절했다. 아우 김홍욱은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앞서 인조 때 사사된 민희빈 강씨(姜氏)와 그녀의 어린 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 친국(親鞠)중에 장사(杖死) 되었다.
김홍욱의 손자 김흥경은 영조 때의 상신(相臣)이었다.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은 영조 때의 부마(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이면서도 겨우 두 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법도 없이 청빈하게 살다가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인 이주를 양자로 삼았다.
참찬 이주 의 손자인 추사 김정희는 학문에 있어서 실사구시를 주장했다.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켜 특히 예서와 행서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김부식은 고려 문종과 의종 대에 걸쳐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유명하다. 그는 인종이 즉위하자 왕실 외척임을 빙자하여 권세를 쥐고 군신의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일삼던 이자겸의 방자함을 충고하여 이를 시정하게 했다. 김부식은 42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1145년(고려 인종 23년) 왕명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正史)인‘삼국사기(三國史記)’50권을 완성하여 바치는 등 이름난 문장가로 송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대장군파
파조 김순웅은 고려 초에 상장군을 거쳐 대장군을 역임했다.
▲병판공파
파조 김덕재는 김은열의 12세손으로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보좌공신에 책록되고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함경도 정평에서 은둔하였다.
▲장사랑공파
파조 김존일은 김은열의 16세손으로 고려 말에 장사랑에 올랐다.
본관 경주는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 사로(斯盧), 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경주김씨는 조선시대에 모두 1,21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문과 203명, 무과 277명, 사마시 542명, 역과 82명, 의과 36명, 음양과 34명, 율과 6명, 주학 38명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1,736,798명이다.
경주김씨는 영분공, 대안군, 장군공에서부터 따져도 1천년 이상 된 문중이다. 그 숫자도 1백70만 명 이상이므로 분파도 많다.
크게는 김명종의 후손이 영분공파, 김은열의 후손이 대안군파, 김순웅의 후손이 장군공파로 3분된다.
영분공파는 영분공의 11세손 김인경을 파조로 하여 명암공파라 한다. 김인경의 후손에서 김충유의 후손이 두계공파, 김충한의 후손이 수은공파, 김충보의 후손이 시어사공파, 김충일의 후손이 밀직공파다.
그리고 월성부원군에 봉해진 김천서의 후손이 월성부원군파, 김상한의 후손이 부사공파, 김정심의 후손이 현령공파, 김남보의 후손이 병조판서공파, 김남분의 후손이 판삼사사공파, 김남길의 후손이 평장공파, 김남귀의 후손이 밀직부사공파이다.
대안군 김은열의 후손은 본파 외에 몇 개의 분파가 있다. 김장유의 후손이 판도판서공파이고 거기에서 다시 김황의 후손이 참교공파, 김혁의 후손이 사직공파, 김광의 후손이 장암공파, 김정의 후손이 충암공파이다.
대안군의 증손 김렴의 후손에서 김덕재의 후손이 병판공파, 김문기의 후손이 백촌공파, 김존일의 후손이 장사랑공파, 김인찬의 후손이 익화군파로 나누어진다.
김인관의 후손은 태사공파이다. 거기에서 다시 김자정의 후손이 전서공파, 김자수의 후손이 상촌공파, 김자공의 후손이 우재공파, 김수량의 후손이 송재공파이다.
상촌공의 후손은 다시 손자대에서 네 개파로 나누어진다. 김영년의 후손이 판관공파, 김영원의 후손이 좌랑공파, 김영전의 후손이 사승공파, 김영유의 후손이 공평공파다.
장군공의 후손은 조선 개국공신 김균의 후손이 계림군파, 김후성의 후손이 현령공파, 김영로의 후손이 연동공파이고, 김순의 후손이 춘거공파이다.
이외에 고려국초에 주장으로 임명된 김위영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김부식 계통이 호장공파다.
영분공 김명종은 경순왕이 손국한 후 경주군으로 봉해졌으며 동생 김은열은 공부시랑을 지내고 대안군에 봉해졌다. 김순웅의 계대는 분명치 않으며 장군을 지냈다.
고려 시대의 인물로는 김부식과 그의 집안을 빼놓을 수 없다. 김관은 주장 김위영의 손자이며 김부식의 아버지다. 시문에 뛰어나 박인량과 그가 지은 시문을 모은 <소화집>이 송나라에서 간행되기도 했다. 선종 때 예부시랑을 거쳐 국자제주, 좌간의대부에 이르렀다. 부필, 부식, 부의(부철)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또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김부필은 선종 5년 문과에 급제, 예종 2년 윤관의 여진족 정벌 때 병마판관으로 출정했다. 김부회는 어려서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으로 추밀원사를 따라서 송나라에 사행하여 명문으로써 송나라 황제 철종의 찬사를 받았고, 예종 때 예부낭중이 되었다.
그 때 요나라가 여진을 치려고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모든 대신이 찬성했으나, 아우 부식과 함께 윤관의 여진정벌 직후이므로 출병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역설했다. 직학사에 올라 왕을 비롯하여 보문각 유신들에게 경사를 강론, 이름을 떨쳤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자 동지추밀원사, 정당문학, 한림원학사승지가 되고, 1127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로 승진, 뒤에 수태위개부의동삼사비서성사, 주국에까지이르렀다.
김부식과 경주김씨
김부식은 경주김씨 인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고려 때 귀족관료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안서대도호부의 사록, 참군사가 되고, 직한림, 우사간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1122년(인종 즉위) 빈문각시제로 있을 때 이자겸이 임금의 장인으로서 군신의 예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자 이를 충고하여 시정케 했다.
박승중, 정극영과 함께 예종실록을 수찬, 호부상서, 한림학사, 승지, 평장사를 거쳐 수사공에 올랐다.
그는 인종조에 묘청의 난을 진압한 장군으로도 유명하다. 1134년(인종 12년) 묘청이 도참설로써 왕을 설득하여 서경에 천도하려고 하자 극력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이듬해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로써 중장군이 되었다. 이어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을 반도들과 내통했다고 하여 죽였다.좌군장 김부의와 우군장 이주연과 함께 출전하여 10여개월 만인 이듬해 2월 성을 함락, 난을 평정했다.
그 공으로 한충정난정국공신에 봉해지고,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 상주국겸 태자태보가 되었다.
묘청의 난을 역사상 제일의 큰 사건으로 평가하는 단재 신채호 등은 김부식 등을 사대주의자로 단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묘청의 난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문벌귀족 세력과 이에 대항해 새로이 세력확장을 꾀해 보려는 서경세력과의 정치적 충돌이며 아울러 金의 압력에 대한 대한 반발에서 초래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야 한다.
사대주의자 운운은 사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고려시기의 지배사상에서 가장 충실했던 한 모습임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김부식은 그후 집현전태학사, 태자태사 등을 다시 겸했고, 1142년에 벼슬을 물러나자 동덕찬화공신이 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군개국후에 봉해졌다. 사후 중서령에 추증, 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는 문장가로도 이름이 있었다. 송의 사신 노윤적이 왔을 때 관반으로서 이를 맞이했다. 같이 왔던 서긍이 문장과 고금의 음악에 통달한 그를 보고 감탄하여 고려도경에다 그의 집안을 소개, 송황제에게 바침으로써 송나라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업적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초의 정사 삼국사기의 편찬을 주재하여 오늘에 남기고 있는 점이다. 치사한 후 왕명에 의해 그의 집에 삼국사기 편찬실을 설치하고 국사를 감수하여 오늘에 전했다.
그는 인종실록의 편찬을 주재했고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 및 진악공중수청평산문주원기 등을 지었다. 문집 20여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