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세; 휘 哲(철) 상약국직장(尙藥局稙長)
ㅣ
二세; 휘 靖(정) 장작감(將作監)
ㅣ
三세; 휘 思全(사전) 수태위 문하시랑평장사(守太尉 門下侍郞平章事)上柱國.
ㅣ 三韓後壁上功臣 시호 莊景公(장경공)
四세; 휘 弁(변) 이부상서(吏部尙書).............휘 烈(열) 孝人 御筆賜名(효인)
(어필사명)
장경공의 묘소는 개성성남장미산록와곡(開城城南醬薇山麓瓦谷)임이 밝혀?다.강잔묘는 무근거함이 들어났다.장경공의字(자)는 恤世(휼세)이시고 휘 思全은 선종왕의어필사명이며 六十三세에 퇴조하시고 七十一세에 서거하시다.장경공의 그 선대가 耽津縣人(탐진현인)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부조 양위가 따로 발현되었으니 공의 해주최씨 분파설은 어불성설임이 밝혀지다
※장경공묘지석참고요(국립광주박물관소재)
上祖四世五位(상조사세오위)의奉香(봉향) 강진문중에서는1800년경 강진 비파산에 소위 장경공를 설정하여 봉향을 해온바와같이 역사적인 엄연한 고증인 묘지명 발현으로 강진묘는 무근거함이 명백해졌기에 묘지명에서 밝혀진 개성묘가 실전되었으며 다른 上祖四위 墓도 미상이니 강진묘는 정리하고 五위를 設壇(설단)봉향함이 지당하며 묘지명 발견직후에 개최된 전국 대종회에서도 이와같이 결의했었다. 처음에는 광주 수원 강진에 분산 설단키로 합의하였지만 결국은 관향지인 강진에다 五위를 설단 봉향키로 종의를 모왔으나 강진문중의 무원칙한 방해고집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선조 궐향의 죄과를 무릅써 오다가 강진과 합의,설단은 백년하청이기에 더 이상 천연할수없어 묘지명 발현후의 대종회 결의에 의하여 이미 설단 봉향해오던 장경공단이 소재한 무양서원옆에 1975년가을에 四위단을 가설하여 매년 음력3월6일 장경공 기일에 참여 문중이 합동 봉향, 묘지명 발현후에 유림제현의 발기로1928년무진에 광산군 비아면 월계리(현 광주광역시광산구월계동)에 武陽書院(무양서원)을 건립하고 장경공을 주벽으로 매년 음력9월6일에 유림향사하고 있으며 강진군 군동면 라천리 소재의
康德祠(강덕사)에서도 장경공을 주벽으로 향사하고있다.※일반 사당은 도내 4대 향교의 찬동을 얻으면 건립할수 있으나 무양서원은 전국 200여향교의 찬동의로 건립할수 있었던것은 장경공께서 그만끔 애국 절의와 학덕이 숭고하시었기 때문이라하겠다. 강진문중에서 종의되로 五위 설단을 하였드라면 사리에 합당하고 전국 族人은 강진으로 머리를 숙이고 壇의 봉향에 참여 할것이며 따라서 전국 耽津崔氏는 대동 단결이 되었을것이다. 또한 수년전에 강진에서 대동보편수를 제의했을때 五위 설단을 할 용단 내렸더라도 만시지탄은 있으나 대동보도 성립되고 대도단합될 절호의 기회가 마련 되었을것이다.통일이 빨리되어 개성 장미산 와곡 시조묘 참배할수있어으면한다
※해주최씨 최온 분파설은 무근거 근거자료없음.고려사,고려사절요참조 해주최씨족보
配位 순천김씨설은 장경공의 배위가 순천김씨로써 신라 경순왕 십세손이라하나 장경공과 연대차이는 약15ㅇ년밖에 안되는데 약300년의차이가 있어야할 십세손이란 모순될 뿐만아니라 순천김씨족보에도 아무런 근거 기록이 없다
해주최씨분파설: 沖ㅡ惟吉ㅡ思全이라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