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오정교회의 당회장이 된 이자익(李自益) 목사는
경남 남해군 이동면 탑정리에서
부친 이기진과 모친 박정근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이 흑사병으로 병사하여
조실부모(6살 때)한 후에 친척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친척 집도 어려워 더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
경남 하동을 거쳐 남원을 지나,
전북 전주를 지나 도착한 곳이
금산사 입구인 김제군 금산면 두정리 부락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제일 갑부인 조덕삼씨 댁에서
머슴 조덕삼은 이곳에서 비단장사와 금광 사업으로 돈을 모아
땅을 많이 가진 갑부였다.
일자무식이던 이자익은 여기서 한문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 조덕삼의 아들인 조용호가 독선생을 모시고
천자문을 배울 때 밖에서 들으면서 천자를 떼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자문을 외우라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외웠으나 보여 주고 읽어보라고 하면
읽지를 못하였다. 그는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당시 전주에 선교지부를 두고 활동하고 있던
최의덕 목사(Tate, Lewis Boyd;테이트; 1892년 여동생 최마태와 함께 내한, 전주에서 활동)는
김제, 정읍 지역을 순회 선교하고 있었는데
가끔 주말에 모악산 밑에 자리 잡은 두정리 마을에 말을 맡기고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모악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짐승들의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이 파란 눈을 가진 외국 사람이
조덕삼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조덕삼은 호기심도 있어서
이 외국인을 자신의 사랑채에 불러서 그 일행을 대접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최의덕 선교사는 평소에 이곳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전도하게 되었다.
뜻밖에 조덕삼은
자기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허락했다.
외국 사람으로 우리나라 말을 너무 유창하게 말했기 때문이었다고 하나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매 주일 조덕삼의 사랑채에서는 찬송가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고
조덕삼과 이자익은 최초로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최의덕의 조사로 있었던 최중진이
이 마을에 와서 거주하며
열심히 노력해서 점차 교세가 확장되어 갔다.
이렇게 되자 최의덕 선교사는
교인들의 학습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1차로 조덕삼, 이자익, 왕칠순 이 세 사람이 문답에 응하였다.
그러나 학습문답은 한글을 모르면 응할 수 없으므로
교회에서는 야학운동을 전개하여
문맹자를 따로 모아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자익은 한문과 한글을 배우게 되고
후에 신학교에 갈 기초를 닦게 되었다.
드디어 조덕삼, 이자익, 왕칠순은 학습을 받았고,
1900년 10월 11일 세례를 받았으며
후에는 집사 임명도 받게 되었다.
5년 후에는(1905년) 농사일과 집안일을 잘하는 것을 본
동네 김선경씨 집안에서 이자익을 사위로 맞기도 했다.
1906년 4월 10일에는
최의덕 선교사의 선교지역이 넓어지자
최 선교사는 이자익을 두정리 교회 초대 조사로 임명하였다.
더욱 교회가 성장하자 교회에서는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인인 조덕삼은 뽑히지 않고
이자익이 장로로 뽑혀
이자익은 1908년 3월 5일에 장로 장립을 받게 되었다.
조덕삼은 훌륭한 인격자로
이런 일에 불평을 하지 않고
그 해에 그곳에 최의덕 선교사를 도와
유명한 “ㄱ” 자 교회를 세우는데 크게 도왔다.
당시는 남녀 부동석이기 때문에 강대상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ㄱ”자로 길게 방을 만들어
남쪽좌석은 남자가 앉고 성경구절은 한문으로 썼으며
북쪽 좌석은 여자가 앉고 성경 구절은 한글로 썼다.
지금 이 교회는 1997년 7월 18일
전북문화재 자료 제136 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자익은 1908년 4월 1일 전라대리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15년 3월에 신학교를 8회로 졸업하여
8월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해서 1915년 9월 20일 에는
본인이 성장한 금산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1924년 13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47,8년 33대 및 34대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장로교 역사상 처음으로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한 분이 되었다.
대전노회에서는 대전노회를 창설하고
초대 노회장으로 수고하신
이자익 목사를 공로목사로 추대하는 식을 거행했다.
이 식은 1954년 12월 8일 제6회 정기노회 중 오후 6시 30분에 대전시 중동 제일 교회에서 거행되었으며
서울에서 영락교회 당회장인 한경직 목사 등
많은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는 이로부터 4년 뒤 1958년 10월 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였다.
그러나 공로목사 추대 시
오정교회에 헌납한 종은 오랫동안 종탑 위에서
교인들을 새벽기도에 불렀지만
1992년 교육관 건립과 동시에 가취를 감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