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르다도 귀하다는 거짓말
교회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설교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보통 설교의 결론은 이렇게 난다. "마리아도 중요하지만, 봉사하는 마르다도 귀합니다. 교회에는 마르다 같은 일꾼도 필요합니다."
솔직히 말하겠다. 이것은 틀린 해석이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마르다의 봉사를 칭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못 박으셨다. 그런데 왜 강단에서는 자꾸 "마르다도 귀하다"고 가르칠까? 이유는 간단하다. 마르다가 없으면 교회가 안 돌아가기 때문이다.
2. 교회 성장의 비밀: 갈아 넣기
나는 회사를 운영한다. 조직의 성장 원리는 단순하다. 끊임없는 '이벤트'와 '행사'다. 행사로 사람을 모으고, 그들에게 역할을 주어 소속감을 만들고, 그들을 다시 행사의 주체로 세우는 무한 루프. 이 굴레 속에서 조직은 성장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도 이와 똑같이 흘러간다. 절기에 맞는 수많은 행사들을 기획하고, 성도들에게 '일'과 '책임'을 부여한다. 일을 잘 해내면 "믿음 좋다"고 칭찬하고, 직분을 준다. 신앙 연수가 찰수록 책임감의 무게는 더해지고, 어느 순간 임계점에 다다른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은 사라지고, 눈앞에 처리해야 할 '일'만 남는 순간. 예배의 감격은 온데간데없고, "이번 행사는 또 어떻게 치르나" 한숨만 나오는 순간. 나는 이것을 <교회 번아웃 증후군>이라 부르기로 했다.
3. 마르다가 필요한 교회 vs 마리아가 필요한 예수님
안타깝게도 교회는 마리아보다 마르다를 더 원한다. 왜냐하면 마르다가 많아야 행사가 잘 돌아가고, 교회가 빨리 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마르다가 아니라 마리아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꼭 필요한 한 가지'는 화려한 행사도, 완벽한 시스템도 아니다. 오직 '주님 발 앞에 앉아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일하는 사람은 넘쳐난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없다. 교회가 무너지는 이유는 일을 덜 해서가 아니다. 머리 되신 주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 열심으로만 움직이는 '통제 불능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교회에서 들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목사의 명령이라고 가르친다. 목사가 시키는 것을 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가르친다. 목사들이 예수님보다 교회 조직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교회 구성원들이 맡은 바 역할에서 잘 버텨줘야 교회 조직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교회 조직이 크게 성장하면, 그 공로는 목사가 받고 은퇴할 때 권리금을 챙겨가기도 한다. 그렇게 교회 안에 수많은 마르다들이 생산된다.
4. 불법을 행하는 자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고 권능을 행해도,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셨다. 심지어 그것을 '불법'이라고 하셨다. 열심히 사역했는데 왜 불법인가? 그 안에 '주님의 뜻(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 묻지 않고 내 생각대로, 내 야망대로, 교회 성장을 위해 벌인 모든 일은,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불법이다. 주인에게 묻지 않고 자기 맘대로 일하는 종? 그건 종이 아니라 반역자다.
그런데 강단에서는 뭐라고 가르치는가?
"목사 말 잘 듣는 게 순종이다." "교회 일 열심히 하는 게 하나님 기쁘게 하는 거다."
착각하지 마라. 성도는 목사의 종이 아니다. 교회 시스템의 부속품도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종이다. 종이라면 주인(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야 한다. 목사 통해서만 들어야 한다면, 그건 개신교가 아니다. 중세 카톨릭으로 돌아가라.
5. 사역의 총량 = 자원하는 마음의 총합
그렇다면 교회 일은 누가 합니까? 여기 아주 중요한 원칙이 있다. "교회 사역의 총량은, 성도들이 자원하는 마음의 총합을 넘어서선 안 된다."
만약 자원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럼 그 사역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주일학교는 해야죠, 그래도 찬양팀은 있어야죠, 그래도 점심밥은 먹어야죠..." 아니, 멈춰야 한다. 억지로 쥐어짜 낸 헌신으로 유지되는 시스템은 '거품'이다. 그 거품이 성도의 재생산을 도리어 막고 있다.
당장은 교회의 화려한 행사나 프로그램, 폭발적인 양적 성장에 제동이 걸릴 것이다. 불편할 것이다. 그래, 차라리 불편해지자. 밥 안 주면 굶고, 교사 없으면 아이들과 같이 예배드리고, 반주자 없으면 무반주로 찬양하면 된다. 그 불편함 속에서 예수님 발 앞에 나아 듣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 자리에서 주시는 감동과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게 진짜 성도들에 세워지는 과정이다.
6. 닥치고 들어라
이후 마리아는 귀한 향유옥합을 깨서 예수님 발에 붓는다. 이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건 이전에 이미 자신의 죽음을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나는 곧 죽는다. 나의 죽음은 생명을 위한 죽음이다. 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깝게 있던 제자들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인지 아는가? 안들었기 때문이다. 안듣는다. 왕관을 쓰시고 세상을 호령할 예수님을 기대했기 때문에 그런 얘기는 듣고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듣는다. 눈을 마주하고 조용히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을 사모함으로 듣는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조용히 자신의 가장 소중한 향유옥합을 깨서 예수님 발에 붓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마리아를 찾으신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는 사람. 예수님의 마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 예수님의 꿈을 이루고 싶은 사람. 그러나 없다. 성령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에게 성령을 구한 제자가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오실 예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저 교회를 키우고 싶어한다. 그거 키워서 뭐할 건가.
교회 키우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말고, "주님, 지금 마음이 어떠십니까?" 묻는 사람. 창의적인 기획력, 화려한 행사 다 내려놓고, 잠잠히 주님 발치에 앉을 수 있는 사람. 제발, "이거 하면 좋아하시겠지?" 지레짐작으로 일 좀 벌리지 마라. 그냥 좀 닥치고 물어봐라.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나는 꿈꾼다. 목사의 '가방 모찌' 같은 성도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야성 있는 성도들이 가득한 교회. 일 중독에 빠진 마르다들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 발치에 앉은 마리아들의 교회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