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인천하’를 떠올리며, 태·강릉 숲길 걷기
◇ 조선왕릉 전시관 : 노원구 공릉동 313-19
- 조선왕릉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가치를 알릴 목적으로 꾸민 전시관
조선왕릉은 역사성과 우수성,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릉 전시관은 서울 근교에 있는 38기의 왕릉을 탐방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꾸며져 있다. 이 전시관은 조선왕릉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가치를 국민에게 알릴 목적으로 2007년에 착공되어 2년여의 공사 끝에 2009년 12월에 개관하여 왕릉의 역사와 문화, 예술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
이 전시관은 국왕이 승하하여 왕릉에 모셔지기까지의 국장(國葬) 절차, 산릉(무덤) 조영 절차, 국장 행렬, 왕릉에 깃든 역사와 사상, 산릉 제례를 포함한 왕릉 관리 등 조선왕릉의 역사와 문화, 예술 등을 아우르는 내용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 조선 시대까지 왕릉의 변천 과정이 간단히 패널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이를 패널, 모형, 영상 등의 다양한 전시 기법을 동원하였으므로 관람객이 이해하기가 쉽도록 전시하였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 의궤’(儀軌 :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 내용을 정리한 기록)에 대한 내용도 볼 수 있다.
왕실의 장례 절차는 일반 장례 절차와는 다르게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게 진행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국왕이 승하한 후 3년에 걸쳐 총 60단계가 넘는 절차를 밟아야 긴 국상의 예가 끝을 맺는다. 이 중 국왕이 승하한 순간에서 시작하여 능에 국왕의 관인 재궁(梓宮)을 내리는 과정까지 36가지 절차를 거친다.
◇ 태릉(泰陵) : 노원구 공릉동 313-19(사적 제201호)
- 조선 제11대 중종의 제2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
태릉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제2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 1501∼1565)의 능이다. 이곳은 최근까지 배 밭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관계로 가을이면 세칭 ‘먹골배’를 먹기 위해서 시민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다. 원래 능(陵)은 국왕이나 왕비, 추존된 국왕이나 왕비의 무덤만을 일컫는다.
문정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다. 중종의 제1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가 인종(仁宗)을 낳고 7일 만에 승하하자 2년 후인 1517년(중종 12)에 17세에 왕비로 책봉되어 명종(明宗)을 낳았다.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승하하자 명종이 12세에 즉위함에 따라 국왕의 어머니로서 8년간 발을 드리우고 명종과 문정왕후가 같이 앉아 정사를 처리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여인천하(女人天下)가 되었다. 수렴청정 기간에 정권을 잡은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 : 소윤)은 인종의 외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 일파를 공격하기 위해 윤임이 그의 조카인 중종의 8남 봉성군(鳳城君)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무고(誣告)하는 한편, 윤임이 인종이 승하할 당시에 성종의 3남 계성군(桂成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를 구실로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권하여,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킨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1553년에 명종의 나이 20세에 이르자 성인이 되었으므로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국정을 명종에게 맡겼지만, 윤원형 등의 외척이 실질적인 권력을 계속 장악하여 국정을 좌우하였다. 수렴청정을 끝낸 문정왕후는 전처럼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문정왕후는 하고자 하는 일을 한글로 써서 내관을 시켜 외전(外殿)에 내보내곤 하였다.
그때마다 명종은 이를 읽어보고 나서 처리가 가능한 것은 집행하도록 명하고, 어려운 일은 용안(龍顔)에 수심이 가득하여 고민하다가 그 쪽지를 말아 소매 속에 넣곤 하였다.
이처럼 명종이 문정왕후의 말을 잘 듣지 않자, 문정왕후는 수시로 왕을 불러,
“무엇 무엇은 어찌 행하지 않느냐.”
하고 따졌다. 그때마다 앞에 앉은 명종은 온순한 태도로 그 일의 합당성 여부를 밝히곤 하였다. 그러면 문정왕후는 버럭 화를 내면서,
“네가 왕이 된 것은 내 오라버니와 내 힘인데 지금 네가 편히 앉아 복을 누리면서 오히려 나의 명을 거역한단 말이냐.”
하고 꾸짖고, 어떤 때는 왕을 구타까지 하여 왕의 얼굴이 수척해지고 눈물자국까지 보인 일도 있었다.
문정왕후는 불교에 대한 믿음이 깊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승과(僧科)를 설치하였고, 선·교(禪·敎) 양 종을 부활시키는 등 불교진흥에 노력하였다. 문정왕후가 1565년(명종 20) 4월에 65세로 승하하니 소생으로는 명종과 4녀가 있었다. 이 해 시호를 문정(文定)이라 하고, 능의 이름을 신정릉(新靖陵)이라 하였다가 곧 태릉으로 고치고, 7월에 이곳에 예장(禮葬)하였다. 참고로 중국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능 호도 태릉이다.
문정왕후는 원래 봉은사 주지 보우(普雨)의 건의로 성종의 선릉(宣陵) 동쪽 언덕을 명당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현재 서삼릉(경기도 고양시)의 장경왕후(章敬王后)와 같이 있던 중종의 무덤인 정릉(靖陵)을 1562년(명종 17) 9월에 현재 선정릉(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기고, 문정왕후와 합장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름철의 홍수 때에는 정릉 주변까지 침수되므로, 부득이 문정왕후는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 공릉동에 따로 태릉을 만들게 되었다.
태릉의 석물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규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태릉이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은 병풍석에 구름무늬[雲彩]와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것을 둘렀고, 신상(神像)이 새겨진 위 만석(滿石) 중간에는 자(子), 축(丑) 등의 문자를 새겨 놓았다. 원래 간지(干支)를 문자로 새겨 방위를 표현한 것은 병풍석(屛風石)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는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태릉은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태릉은 병풍석 12면과 난간석 12칸 밖으로는 혼유석(魂遊石) 1좌, 망주석(望柱石) 1쌍,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2쌍 및 3면의 곡장(曲墻)으로서 위 층계를 이루고 있다. 중간 층계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마석(馬石) 1쌍, 팔각형 장명등(長明燈)이 세워져 있다. 아래층에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1쌍이 세워져 있다. 문인석과 무인석 조각은 목이 바르고, 얼굴이 큰 관계로 4등신(等身) 정도여서, 입체감이 없다.
능침(陵寢) 아래의 정자각(丁字閣)은 6ㆍ25전쟁 때 파손된 것을 199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밖에 비각(碑閣)ㆍ수직방(守直房),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태릉과 강릉의 재실(齋室)은 홍살문 서남쪽에 있었으나 1970년에 쇠락하여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태릉 푸른 동산 안의 수영장 시설이 들어섰다.
태릉과 강릉은 한 울타리 안에 있었지만 1965년에 태릉선수촌이 중간에 건립되면서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임진왜란 초 4월에 서울을 점령한 왜군들이 태릉을 파헤친 일을 ‘태릉(泰陵)의 변(變)’이라고 일컫는다. 이 당시 학림 도정(鶴林都正) 이언진(李彦璡)이 이 사실을 듣고 목이 잠기도록 통곡하다가 그의 아들과 모집한 군사 40여 명을 데리고 밤에 산길을 따라 태릉에 도착하였다. 이미 정침(正寢)까지 파헤쳐졌으므로 몸소 흙을 져다가 밤새도록 메운 다음 사실을 갖추어 방어사 정희현에게 보고하였다.
1592년(선조 25) 7월 1일, 양주 목사(楊州牧使) 고언백(高彦伯)이 능침 주변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왜군이 태릉을 침범하자 이들을 쏘아 죽여 쫓아버렸다. 이해 12월 16일에 왜군이 기병과 보병 50여 명과 주민 50명을 뽑아 강릉(康陵)과 태릉(泰陵)에 가서 능을 팠으나 능 위에 회(灰)가 단단하게 막혀서 깨뜨리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파하고 되돌아왔다.
1593년(선조 26) 2월 20일에는 운천군(雲川君) 이신(李愼) 등이 태릉의 능침을 봉심(奉審)하고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태릉(泰陵)은 능 전면이 반쯤 파였고, 난간석의 전면은 반쯤 파손되었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효종, 숙종, 영조, 정조 등은 태릉과 강릉을 배릉(拜陵)해서 궁궐로 돌아가는 길에 이 부근의 석현(石峴)이나 살곶이벌[箭串坪]에서 실시하는 군사훈련을 지켜보았다.
◇ 태강릉 숲길
- 분리되었던 태릉~강릉 간의 숲길 1.8㎞를 정비해 4개월간 일반에게 개방
그동안 관람이 제한됐던 태릉과 강릉을 잇는 아름다운 숲길 1.8㎞를 조성해 4월 1일~5월 31일, 10월 1일~11월 30일까지 총 4개월간 두 차례 시범 개방한다.
‘태강릉’은 1966년 태릉선수촌이 건립되면서 지금처럼 태릉과 강릉의 권역이 분리돼 50여 년간 본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시범 개방 기간에는 숲과 조선왕릉 전문가를 배치, 숲길 주변의 수목과 자생식물에 관한 설명과 왕릉에 대한 해설을 제공한다.
조선왕릉 관리소는 “조선왕릉을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으나 태릉과 강릉을 잇는 숲길 1.8㎞를 정비해 두 능 간의 역사적 관계성을 점차 회복하고, 국민들이 문화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숲길을 시범 개방한다”라고 밝혔다.
◇ 강릉(康陵) : 노원구 공릉동 (사적 제201호)
- 조선 초 명종과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능
강릉(康陵)은 조선 초 명종과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沈氏)의 능이다. 1567년(명종 22)에 명종이 죽자, 이곳을 능지로 정하였으며, 1575년(선조 8)에 왕비 능도 왕릉과 나란히 앉혀 쌍릉을 이루게 하였다. 능의 모든 제도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의식을 따르고 있다.
중종은 제1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서 명종을 낳았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당시에 12세였던 명종이 즉위하였다. 명종은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였다. 이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이 득세하여 1545년(명종 즉위년)에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윤원형은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 : 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이으려고 한다고 무고(誣告)하는 한편, 윤임이 인종이 죽을 당시에 계성군(桂成君 : 성종의 3남)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를 구실로 윤원형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권,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이어서 1547년(명종 2)에는 또다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당파를 조성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러한 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명종 14)부터 1562년까지 3년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다. 밖으로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이래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겪는 왜인들이 1555년(명종 10)에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 왔다. 이들은 결국 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해 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되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크게 일어났다. 문정왕후는 보우(普雨)를 신임하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삼았다. 그리고 1550년(명종 5)에 선·교(禪敎) 양 종을 부활시키고, 이듬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 이 무렵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명종 18)에 13세로 요절하였으므로, 왕위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중종의 9남)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계승하니, 이가 곧 선조이다.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1532∼1575)는 본관은 청송(靑松)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의 손녀이고,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의 딸이다. 명종 즉위년(1545)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551년(명종 6)에 순회세자를 낳았다.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고, 1575년(선조 8)에 창경궁에서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두 능침은 모두 운채(雲彩)와 12지신상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두르고 있고, 태릉과 같이 만석(滿石) 중간에 문자로 십이지(12支)를 새겨 넣었다. 두 능침 앞에는 각각 혼유석(魂遊石)을 1좌씩 놓았으며, 장명등(長明燈)은 건원릉(태조릉)·헌릉(태종릉)의 양식을 본뜬 16세기 복고풍의 특색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