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絶四 毋意毋必毋固毋我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끊어내셨으니, 사사로운 뜻이 없었고, 기필코 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고집스런 마음이 없었고, 자신에게 이롭게 하는 마음이 없었다. 絶 無之盡者 毋 史記作無 是也 意 私意也 必 期必也 固 執滯也 我 私己也 四者相爲終始 起於意 遂於必 留於固 而成於我也 蓋意必 常在事前 固我 常在事後 至於我又生意 則物欲牽引 循環不窮矣 絶이란 완전히 없는 것이다. 毋는 사기에서 無자로 썼는데, 옳은 것이다. 意라는 것은 사사로운 뜻이다. 必이란 기필하는 것이다. 固는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我는 나를 사사롭게 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서로 시작과 끝이 되어서, 뜻에서 일어나 기필함에서 이루어지고, 고집함에서 머물러 나를 위함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대체로 선입견과 기필함은 항상 事前에 있는 것이고, 고집과 이기심은 항상 사후에 있는 것이다. 이기심에 이르면 다시 선입견이 생기는 법이니, 그렇다면 물욕이 견인하여 그 순환이 무궁해지는 것이다. 程子曰 意是發動處 意發而當 卽是理也 發而不當 是私意也 問聖人莫是任理而不任意否 曰 是 정자가 말하길, “意라는 것은 발현되어 움직이는 부분인데, 意가 발현되어 합당하면, 곧 이치인 것이고, 발현되었으되 부당한 것이면, 이는 사사로운 뜻이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성인은 혹시 이치에 맡길 뿐 意에 맡기지는 않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다!”고 하였다. 胡氏曰 理本於天 意出於己 大學以誠意爲言 蓋好善惡惡一有不實 則所謂意者爲私意 意不可以孤行 必根於理而後可 此獨以意言 卽私心之發也 호씨가 말하길, “理는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고, 意는 자기에게서 나온다. 대학에서 誠意로 말한 것은 대체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에 있어 하나라도 진실하지 않음이 있게 되면, 이른바 意라는 것이 곧 私意가 되기 때문이다. 意는 홀로 행해질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이치에 뿌리를 둔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단지 意로써만 말한다면, 이는 곧 사심이 발현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趙氏曰 四者分之則各爲一事 合之則相爲終始 조씨가 말하길, “이 네 가지는 구분하자면 각자 하나의 일이 되고, 합하자면 서로 시작과 끝이 된다.”라고 하였다. 遂謂將成而勢不容已 遂라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것으로서 그 형세가 그침을 용납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胡氏曰 意必在方有作爲之先 故曰事前 固我在已有作爲之後 故曰事後 호씨가 말하길, “선입견과 기필은 바야흐로 작위가 있기 전에 있기 때문에 사전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고집함과 나를 이롭게 함은 이미 작위가 있은 이후에 있기 때문에 사후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華陽范氏曰 私意動於內而係於事 則有必 必則守而不移 故有固 固則不能忘己 故有我 是三者 皆出於意 故意爲之先 화양범씨가 말하길, “사사로운 뜻은 마음속에서 움직이지만 일에 얽매이게 되면 기필함이 생기고, 기필하게 되면 지켜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고집함이 생기는 것이다. 고집하게 되면 자신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이기심이 생기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니, 이 때문에 意가 그것들의 먼저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意如何毋得 朱子曰 凡事順理 則意自正 毋意者主理而言 不順理則只是自家私意 누군가 묻기를, “意는 어떻게 해야만 없앨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모든 일에 있어 이치를 따른다면, 意는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다. 毋意라는 것은 이치에 주안점을 두고서 말한 것이니, 이치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저 그 자체로 사사로운 뜻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問意必固我 曰 意是初創 如此有私意便到那必處 必便到固滯不通處 固便到有我之私處 누군가 意必固我에 관하여 물었다. 말하길, “意가 처음 만들어지는 것이니, 이와 같이 私意가 생기면, 곧바로 저 기필하는 부분에 이르는 것이며, 기필하게 되면 곧바로 고집하고 막혀서 통하지 않는 부분에 이르는 것이고, 고집하게 되면 곧바로 나를 이롭게 함이 있는 사사로운 부분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凡人做事必先起意 不問理之是非 必期欲事成而已 事旣成 是非得失已定 又復執滯不化 是之謂固 三者之成就得一箇我 及至我之根源 愈大 少間 三者又從這裏生出 意又生必 必又生固 固又歸宿於我 보통 사람이 일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意를 불러 일으키는데, 이치의 옳고 그름을 묻지 않고 반드시 일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일이 이미 이루어졌다면 시비와 득실이 이미 정해진 것인데, 다시 고집하고 막혀서 변화하지 못한다면, 이를 일컬어 고집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하나의 나를 이롭게 함를 성취하는데, 지극한 我의 근원에 미쳐서는 더욱 커져서, 잠깐 사이에 이 세 가지가 다시 여기에서부터 생겨나오는 것이다. 선입견는 다시 기필함을 낳고, 기필함은 다시 고집함을 낳으며, 고집함은 다시 나를 이롭게 함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必者迎之於前 固者滯之於後 意是爲惡先鋒 我是爲惡成就 此四者 如元亨利貞 循環不已 但元亨利貞是好事 此是不好事 貞是好底成就 我是惡底成就 必이라는 것은 앞에서 맞이하는 것이고, 固라는 것은 뒤에서 막히게 하는 것이다. 意는 악의 선봉이 되는 것이고, 我는 악의 성취가 되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마치 元亨利貞이 끝없이 순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元亨利貞은 좋은 일이고, 이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貞은 좋은 성취이지만, 我는 나쁜 성취인 것이다. 無意者 渾然天理 不任私意 無必者 隨事順理 不先期必也 無固者 過而不留 無所凝滯也 無我者 大同於物 不私一身也 四者始於意而行於必 留於固而成於我 必之時淺 固之時長 意是始 我是終 固必在中間 一節重似一節也 無意라는 것은 혼연히 천리이니 사사로운 뜻에 맡기지 않는다. 無必이라는 것은 일에 따라 이치에 순응함이니 먼저 기필하지 않는 것이다. 無固라는 것은 지나가서 머물지 않음이니 엉겨서 막히는 바가 없는 것이다. 無我라는 것은 외물에 관하여 크게 똑같이 대함이니, 내 일신을 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意에서 시작되어 必에서 행해지고, 固에서 머물러서 我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기필함의 시간은 짧고, 고집함의 시간은 길다. 意는 시작이고 我는 끝이며, 固와 必은 중간에 있으니, 節이 하나하나 지날수록 더욱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 黃氏曰 卽是而言 其別有四 以心而論 其本則一 天理流行 廓然大公 物各付物 泊然順應 此心如鑒空水止而一毫之繫累 無所容焉 此其所以自始至終而絶無四者之病也 황씨가 말하길, “이에 나아가 말하자면, 그 별개로 4가지가 있지만, 마음으로 논하자면, 그 근본은 하나다. 天理가 유행함이 넓고 공정하며, 사물마다 각자 그 이치에 맡김에 있어 무심히 순응하니, 이 마음은 마치 텅 빈 거울과 잔잔한 수면 같아서 터럭 하나의 얽매임도 용납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 4가지의 병폐가 절대로 없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集註四者相爲終始以下 乃以常人之私欲細分之 有此四者 相爲終始 又平分之作兩截判以事前事後 又飜轉說終而復始 如元而亨利貞 貞下又起元有三節意 皆說常人之累於私如此 非謂夫子之心無私 亦有此三件節數也 聖人之心 惟順乎大公 而渾然一無私耳 細察之 則皆無常人此四者之累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집주에서 네 가지는 서로 시작과 끝이 된다는 것 이하는 오히려 보통사람의 사욕을 가지고 세분한 것이니, 이 네 가지가 있어서 서로 시작과 끝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평균하여 나누어 두 덩어리로 만들어서 사전과 사후로 판별하였다. 다시 뒤집어 굴러서 끝을 말하고서 다시 처음을 말하였으니, 마치 元으로 시작하여 亨으로 행하고 利에 머무르며 貞에서 완성되고서도 貞 아래에 다시 元을 불러 일으켜서 三節(亨利貞)이 있게 한 것과 그 뜻이 같다. 이것은 모두 보통사람이 사사로움에 얽매임이 이와 같다고 말한 것이지, 공자님의 마음에 사사로움이 없지만, 또한 이 3건의 절수가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성인의 마음은 오직 크게 공정함에만 순응하여 혼연하므로 하나의 사사로움도 없을 따름이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보통사람이 갖고 있는 이 네 가지의 얽매임이 전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
2 | ○ 程子曰 此毋字 非禁止之辭 聖人 絶此四者 何用禁止 張子曰 四者 有一焉 則與天地不相似 楊氏曰 非知足以知聖人 詳視而黙識之 不足以記此 정자가 말하길, “여기의 毋자는 금지하는 말이 아니다. 성인에게 이 네 가지가 전혀 없었으니, 어찌 금지어가 필요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장자가 말하길, “네 가지 중에 하나라도 있다면, 천지와 더불어 서로 비슷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양씨가 말하길, “지혜가 성인을 알기에 충분하여 상세히 살펴보고 묵묵히 안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기록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天地大公而已 四者才有一 則累於私小 無復大公氣象 何由與天地相似 신안진씨가 말하길, “천지는 크게 공정할 따름이다. 네 가지 중에 하나가 약간이라도 있다면, 사사로움과 작은 것에 얽매여서 다시는 大公의 기상이 없게 될 것이니, 무엇을 말미암아 천지와 더불어 서로 비슷해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問橫渠說略有疑 朱子曰 人之爲事 亦有其初未必出於私意 而後來不能化去者 若謂絶私意則四者皆無 則曰子絶一便得 何用更言節四 以此知四者又各是一疵也 누군가 묻기를, “장횡거의 말에는 약간 의문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사람이 일을 함에 있어, 그 처음에 반드시 사사로운 뜻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변화시켜 제거할 수 없는 것도 또한 있다. 만약 사사로운 뜻을 끊어버리면 네 가지가 모두 없어지게 된다고 말한 것이라면, 공자님께서는 하나를 끊어버리셨다라고 말하면 그만이었을 텐데, 어찌하여 다시 네 가지를 끊었다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로써 네 가지 또한 각자 하나의 瑕疵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心兮本虛 聖人絶此四者 亦不失其本虛之心而已 意似微雲點翳 我則昏霾之甚矣 大虛中本無一物 聖人此心 渾是天理 亦無一物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마음은 본래 허령한 것이니, 성인께서 이 네 가지를 끊으셨다는 것은 또한 그 본래 허령한 마음을 잃지 않았을 따름이다. 선입견는 옅은 구름이나 한점 티끌 같은 것이지만, 나를 이롭게 하면 곧 어리석기가 매우 심한 것이다. 태허 중에는 본래 하나의 사물이라도 없는데, 성인의 이러한 마음도 혼연하기가 곧 천리이니, 역시 하나의 사물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