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첫 직업은 머슴이었다
이 책은 1941년에 태어나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한일순이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아들인 한대웅이 기록한 것이다. 한일순은 이제 80을 넘긴 노인이 되었는데, 1951년에 태어난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주인공 한일순과는 10년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한일순의 아들 한대웅이 60년대에 태어났고, 내 아들이 70년대 세대라는 차이에서도 비슷한 차이가 있다. 서평인 ‘책 속으로’를 통해 흥미있는 부분들을 짚어 본다.
“그때는 지금 화폐 가치로 천만 원이 채 안 되는 돈 때문에 동료를 죽이려 했던 시절이었다. 이 책은 그런 혹독한 시절을 몸뚱이 하나로 살아낸 아버지 한일순의 이야기다.”- 프롤로그 살인 미수범과의 기이한 동거
“빨치산 이백여 명이 가리점에 나타났다. 그들은 군복을 입지 않았고 무장 역시 빈약했다. 열 명 중에 총을 지닌 사람은 두세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죽창이나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남의 집에서 먹고 자며 자기들끼리 회의를 했다. 갑자기 나타난 빨치산으로 온 마을이 북적였다. 아버지가 살던 집에도 빨치산이 머물렀는데 방 두 칸에 안방에는 식구들이, 행랑채에는 10여 명의 빨치산이 생활했다. 빨치산과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지 않았다.”- 가짜 피난길에 오르다
“아버지의 첫 사회생활은 머슴살이였다. 전쟁 이후 먹고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둘째 고모할머니라고 형편이 다를 건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머슴이 되어야 했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농부의 집에서 모내기, 김매기, 풀베기 등 잡다한 일을 해주고 숙식과 쌀을 받으며 생활해나갔다. 이때 머슴은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조선 시대 머슴과는 달랐다. 조선 시대 머슴이 양반집 노예가 되어 주인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면, 이때 머슴은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언제든지 다른 집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조선의 머슴이 주인의 의사에 따라 다른 집에 팔려가거나 목숨을 잃었던 것과는 달랐다.”- 머슴일 때는 매일 질질 짰지!
“아버지는 임실에서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더는 임실에 계속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할머니와 작은아버지는 절에서 일을 하며 먹고살고 있었다. 식모살이를 떠난 고모는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임실에 남은 건 할아버지가 물려준 선산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맨몸으로 임실을 떠났다. 손에는 차표 한 장밖에 없었다. 멀리 떠나는 사람이라면 작은 보따리라도 들고 있을 법한데 아버지에게는 그 흔한 옷 보따리도 없었다. 이 시절에는 옷 한 벌로 한 달을 버티기도 했다는데 아버지 역시 임실을 떠날 때 당장 입은 옷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임실을 떠나기로 하다
“군대 갈 나이가 되었는데 아버지에게는 호적이 없었다. 한국전쟁 중에 정읍군 산내면 면사무소가 불타면서 그와 함께 아버지의 호적도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호적을 만들 때, 한종석이 도움을 주었다. 한종석은 아버지에게 호적을 복구할 것을 강하게 권유하며 친한 공무원에게 부탁하기까지 했다. 신원 보증은 외할아버지와 한종석이 해주었고, 호적의 주소지는 한종석의 집으로 했다.”- 사라진 호적을 다시 만들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창호지를 만들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에도 종이를 접었다. 추운 겨울에도 찬물에 손을 담가 닥나무 껍질을 벗겨내야 했고, 닥풀이 섞인 죽을 망치와 해머로 깨고, 문짝만 한 나무 발을 좌우로 흔드는 등 종일 일을 해야 했다.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밥 챙겨줄 시간도 부족했다.”- 창호지로 시작한 신혼 생활
“아버지가 중동 파견을 준비하면서 어려웠던 것은 낯선 땅에 가는 게 아니라 서류 작성이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아버지는 처음 이력서를 본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득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먼저 중동에 다녀온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또 그들이 작성했던 서류를 참고해서 이름과 주소만을 바꾸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아버지는 리비아 노동자
“우리 식구가 자리 잡은 곳은 관악구 봉천동이었다. 지금 이곳은 모두 아파트촌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81년만 해도 봉천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산비탈에 조그만 집들이 다닥다닥 연이어 붙어 있던 빈민촌이었다. 이 무렵 〈달동네〉라는 드라마가 최고 시청률 60%를 기록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 드라마가 시작될 때 나오는 배경이 바로 이곳, 봉천동 달동네였다.”- 또다시 중동 근로자가 되다
“부모님이 선택한 곳은 15평짜리 생선가게보다 더 열악했다. 가게는 무허가 건물이었다. 외벽은 벽돌 콘크리트가 아니었다. 어떤 곳은 나무판자였고, 비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한 천막이 엉성하게 씌워져 있었다. 가게 안은 조그만 방과 장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방에는 창문도 없었다. 게다가 할머니를 모실 별도의 방도 없었다.”- 8년 동안 7번 이사를 하다
어머니는 당신이 닭 장사를 오래 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닭고기에 비해 가격이 비쌌어. 내 생각에 노동자들은 가격이 만만한 닭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했던 것 같다. 비가 오거나 쉬는 날이면, 소고기나 돼지고기보다 닭고기가 더 많이 팔렸지. 어떤 노동자 가족은 생닭을 대여섯 마리씩 사 가기도 했어.” - KFC개점, 아버지와 어머니도 치킨 시작
“우리는 모두 대학에 진학했고, 아버지는 이 사실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는 지인들에게 우리를 가리키며 ‘어떻게 하다 보니 모두 대학을 가긴 갔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지인 앞에서 그런 식으로 나를 소개할 때마다 나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마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데, 인정을 해줘야 하는 당사자가 나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대학에 들어갔어.’라는 말 자체가 아버지의 은근한 자랑이었다는 사실을.”- 이상적이고, 꿈이 크다
“가평 집 대문을 들어서 집으로 들어오는 길 양옆에는 국화, 맨드라미 같은 꽃을 심었다. 겨울을 제외하고 봄, 여름, 가을이면 빨간색, 노란색, 하얀색 등 다양한 색깔의 꽃들이 피어난다. 평소에는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고, 바람이 불 때면 꽃향기가 가득하다. 나와 아내는 이렇게 꽃을 심은 사람이 분명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가꾼 사람은 아버지였다. 나와 아내는 아버지의 급한 성격을 고려했을 때, 꽃을 심고 가꾼 사람이 아버지였을 것이라고 도무지 상상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꽃, 나무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 기자와 편집자 등을 한 한대웅이 대견하다는 생각을 안 해볼 수가 없다. 물론 아버지 한일순씨도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누구나 그랬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의 저자인 최용범 선생은 이 책의 원고를 처음 읽고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한대웅의 책은 보통사람이 쓴 보통 아버지 이야기다. 그는 그야말로 보통 아버지의 위대한 인생 이야기를 10여 차례의 퇴고를 거쳐 한 권의 전기로 엮었다. 보통 아들의 위대한 결실이다. 나는 첫 독자로서 원고를 읽고 났을 때 울컥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와서다. 50대를 사는 우리 세대가 70, 80대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것, 소통하는 방법으로 부모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책으로 써드리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을 것 같다. 물론 책 한 권 쓴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 의식하지 말고, 문법 신경 쓰지 말고, 한 줄, 한 장, 채우다 보면 100쪽, 200쪽짜리 책은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을 끌어오신 8남매의 맏형 50년생으로 어렵기만 한 큰형님 이야기를 형제들과 함께 올 가을엔 써야겠다.”
아들이 아버지에 대하여 쓴, 아버지의 기구한 운명과 인생 역정에 대해 가감 없이 썼다는 것은 어쩌면 충격일지 모르겠다. 면사무소가 불타는 바람에 호적이 없어졌고 이름조차 일수에서 일순으로 바뀐 사연 등등, 저자는 말한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에서 일했다. 1977년 〈민족통일애국청년회〉라는 단체의 사무국장이 되었다가 다음 해 단체의 회장이 되었다. 이 단체는 6.10 민주항쟁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1998년 나는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저자의 사연도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민주화라는 몸부림으로 그 속에 뛰어들어 암울했던 시절을 잘 이겨낸 저자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거의 평생을 한일수씨 부부는 통닭집을 해 돈을 모았고, 삼 남매를 대학에 보냈고 딸은 프랑스로 유학갔다가 프랑스 남자와 결혼했다. 그 덕에 부부는 유럽 여행도 할 수 있었다. 1941년생이니 이제 80도 넘었다. 젊어서 한 때 숯공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창호지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였던 가평으로 돌아가 나무와 농작물을 키우며 기쁨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가 말했다. “나무와 농작물이 잘 자라는 것, 그것을 보는 것 자체가 기쁨이다. 가평에 온 후 해마다 여러 가지 나무를 심었다.”아버지가 심고 키운 나무는 200그루가 넘는다. 아버지는 밭에 가족들이 먹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농작물을 심었다. 아버지는 수확한 농작물을 자식들을 비롯한 친척과 지인들에게 나누면서 기쁨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