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의 창녕 조씨 분파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 란 말이나 "불이나면 족보부터 챙겨 나온다"는 말이나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일세 꽃 좋고 열매도 많네, 샘이 깊은 물은 가물에 아니 그칠세 내가 되어 바다에 이르네” 이 모도가 요새 시상엔 다 흘러간 옛노래제만 그래도 내 몸에 흐르는 피와 육신인 뼈와 살이 선조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잠시 저에 뿌렁구럴 챙겨봤구만이람짜.
진도에서 오산 조가, 지막 조가, 앵무동 조가, 돔밧 조가, 호구동 조가, 섬밧 조가, 남밧 조가, 침계 조가라고 부르는 창녕을 본관으로 하는 조(曺)씨들은 거의 모두가 입도조이신 휘(諱) 희(希)자 직(直)자 정언공(正言公)의 후손들에 지파 소문중들을 편의상 구별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정언공께서는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창녕 曺씨의 시조이신 휘(諱) 계(繼)자 룡(龍)자 태사공(太師公)으로부터 28세이므로 27세 손이 되신다.
고려시대 1366년(공민왕 15년)에 우정언(右正言)이라는 관직에 계시던 중 승려이면서 정치가로 당시 실권자인 신돈(辛旽)의 실정과 비행을 탄핵했다가 눈 밖에 나서 멀리 진도 땅의 가흥현(嘉興縣=현재의 진도읍과 군내면 지역)의 호장(戶長)으로 좌천되셔서 진도에 들어 오셨다.
*조희직은 정언(正言, 종6품) 재임 중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의 비행을 탄핵하다 진도로 쫓겨나, 가흥현(嘉興縣, 진도 읍내 북쪽 4㎞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현)의 호장(戶長)을 역임하였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4촌 동서지간(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강비와 정언공 부인 강 부인이 4촌간임)인 정언공에게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오기를 요청했으나 “고려왕조에서 고관을 배출한 집안으로 국은에 보답하지도 못했는데 무슨 면목으로 새 조정에 나갈 것인가?” 하시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정으로 끝까지 응하지 않으신 채 현재의 군내면 정자리 해안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낚시를 하시며 살다가 일생을 마치셨다.
※ 태조 이성계가 장군이던 시절 사냥길에 목이 말라 우물가 낭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물에 나뭇잎을 띄워서 주었다가 인연이 되었다는 전설의 주인공인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 강윤성(象山府院君 康允成) 따님이고 강윤성의 바로 아래 동생 강윤충(康允忠, 충혜왕 일등 공신)은 창녕 曺씨 입도조 정언공의 장인이 된다.
후인들은 그러한 공의 충절을 기려 고려에 충절을 이유로 조선의 새 정부에 출사하지 않고 두문불출한 두문동72현을 기린 이행(李行, 1352~1432)의 문집 기우집(騎牛集)에 그 존함이 올려져 있다.
※ 조선이 건국되었으나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고려에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신 72인은 두문동72현(杜門洞 七十二賢) 또는 두문동 태학생 72인(杜門洞 太學生 七十二人)이라고도 불렀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조선 개국이 1392년인데 현 정권에 반대한 사람들을 공공연히 거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개국 348년이나 지난 1740년(영조 16년) 영조의 개성 행차 때에 두문불출(杜門不出)의 두문동(杜門洞)과 부조현(不朝峴, 새로운 왕조에 불복한 고개)의 유래를 듣고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勝國忠臣勉繼世)' 하고 또 직접 부조현(不朝峴)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그 터에다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이러한 계기로 숨어 있던 옛 현인들의 기록과 이야기가 세상에 공개되는바 대표적으로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의 그 시기에 살았던 유학자 이행[李行, 고려 공민왕 원년(1352)~조선 세종 14년(1432)]의 시가와 산문을 1872년에 후손들이 엮어서 간행한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의 시문집인 기우집(騎牛集)에 두문동72현(杜門洞 七十二賢)의 성함과 내용도 출간되었다.
두문동(杜門洞)은 현재 북한 개성 지역인데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두문불출(杜門不出)의 그 두문동이다. 한편 강원도 태백 정선 쪽에 두문동재(杜門洞岾)와 거칠현동(居七賢洞)이 있는데 여기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제34대 공양왕(恭讓王, 1345~1394년)이 폐위되어 삼척으로 유배되면서 7명의 선비가 배알(拜謁)하러 갔다가 공양왕이 죽임을 당하자 이곳 깊은 산속에 숨어들어 살게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이상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이런 연유로 진도에서 뿌리를 내린 진도 창녕 曺씨의 진도 계파는
입도조 휘(諱) 희(希)자 직(直)자 정언공의 두 아드님이신 장남 근(謹)자의 오산파와 차남 심(諶)자의 지막파의 두 계파에서 다시 소문중으로 분류되어 지는데
오산파에서는 오산, 앵무, 송현, 동외, 호구, 서외, 포산, 남외, 수영, 신안의 10개 파로 나눠지고
지막파에서는 지막. 향동, 평산, 침계, 동산의 5개 파로 나뉘어서 총 15개 지파로 후손들이 퍼졌다.
그러나 15개 지파를 6개의 큰 계파로 분류할 때는
오산파는 오산파(오산, 앵무, 송현 포함)와 동외파(동외, 호구)와 서외파(서외, 포산)와 남외파(남외, 수영, 신안)의 네 파로 분류하고
지막파는 지막파(지막, 향동, 평산)와 침계파(침계, 동산)의 두 파로 분류해서 총 6개의 큰 계파로 나눈다.
각 소문중의 파조는 함께 보내는 계파도에 올렸다.
-창녕 曺씨 53세 정언공 26세 서외파 병현(柄鉉) 올림-
참! 그란데 조선태조 이성계하고 우리 입도조 정언공께서 4춘 동서지간 이란 데 대해 문의덜이 있는데람짜.
이성계의 첫 째 부인 한씨는 안변 한씨(安邊 韓氏)로 정종(방과), 방원(태종) 등을 낳았제만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서 낭중에 신의왕후(神懿王后)에 봉해졌고
조선 최초의 왕비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비(康妃)로 곡산 강씨(谷山 康氏)인데 방번과 방석 두 아들을 낳아서 막내 방석이 세자로 책봉이 되지만 후에 태종이 된 방원이 벌인 ‘왕자의 난’으로 두 아들이 다 죽임을 당하지람짜.
신덕왕후는 왕자의 난이 나기 전에 지병으로 이미 돌아가셨고라.
그래서 이성계가 궁 가까이 바라다 뵈는 언덕인 정동(貞洞)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만들었던 것을 이방원이 태종 9년에 현재의 성북구 정릉(貞陵)이로 옮겨뿌렀답디다.
해서 중구 정동(貞洞)이란 이름도 정릉(貞陵)이 있던 동리라서 이름이 그케 되았다지람짜.
어떻든 진도 창녕 曺씨 입도조이신 정언공의 부인 강씨(康氏) 부인과 신덕왕후(神德王后) 강비(康妃)는 4촌간인데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 강윤성(象山府院君 康允成) 따님이고 강윤성의 바로 아래 동생 강윤충(康允忠, 충혜왕 일등 공신)의 따님이 曺씨 입도조 정언공의 부인이 되싱께 그케 태조와 우리 입도조께서 4춘 동서지간이 되십니다.
야사에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서 왕비가 된 이야기가 고려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얘기하고 또 조선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설화로 두 가지 전설이 있는데다가, 또 연산ㆍ중종때 천민인 유기장(柳器匠)의 딸로 갑자사화 때 쫓기던 이장곤(李長坤)과 결혼해서 나중에 중종이 면천해 주어서 정경부인까지 된 여인 역시 버들잎 띄운 물바가지 얘기들로 신데렐라가 되는 설화로 각각 전하지람짜.
얘긴즉슨
태조 이성계가 장군이던 시절 사냥을 나섰던 길에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물 긷던 낭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물바가지에다 나뭇잎을 띄워서 주었기에 그 연유를 묻자 ‘목마른 장군께서 급히 마시다가 체할까봐 그리했습니다.’ 해서 그로 인연이 되었다는 전설의 주인공 낭자가 내나 훗날에 강비로 신덕왕후지람짜.
그래서 서울 성북구에서는 이 설화를 바탕으로 해가꼬 해마다 <정릉 버들잎 축제>라는 행사를 정릉동 지역에서 매년 열어오다가 코로나로 요즘 몇 년 간은 중단 되었어라.
그란 태조 이성계가 4촌 동서인 정언공에게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오기를 요청했으나 “고려왕조에서 고관을 배출한 집안으로 국은에 보답하지도 못했는데 무슨 면목으로 새 조정에 나갈 것인가?” 하시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정으로 끝까지 응하지 않으신 채 현재의 군내면 정자리 해안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낚시를 하시며 살다가 일생을 마치셨고, 그 묘소는 군내면 분토리 가흥산에 양위분의 합장묘로 되아있지람짜. ※묘비에는 안 보이나 족보 내력에 합장 기록이 있음.
그래서 대표적으로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 그 시대에 함께 살았고 그 사연들을 직접 겪었던 그 당시 유학자 이행[李行, 고려 공민왕 원년(1352)~조선 세종 14년(1432)]의 시가와 산문가운데 고려에 충절을 이유로 조선의 새 정부에 출사하지 않고 두문불출한 두문동72현을 기린 그 내용이 적혀 있었지라.
이후 그 후손들이 1872년(고종 9년)에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 李行, 1352~1432))의 시문집인 <기우집(騎牛集)>을 출간했는데 거기에 두문동72현(杜門洞 七十二賢)의 일흔 두 분 성함과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우리 입도조 정언공의 충절을 기려 그 존함이 올려져 있어람짜.
-진도초 제59회 송현 출신 조병현-
첫댓글 진도 조家 무섭습니다. 터줏대감이라고 대단한 고집......... 진도 제일 먼저 입성 성씨라고 대단한 자붓심이죠
금메 진도 호장이로 토호세력이였다지라
려말 공도정책이로 87년간 진도군청이 육지로 나가가꼬
영암땅 해남땅에 있다가 낭중엔 해진군이로 통합에 수모까장도 젺은 대미
1437(세종 19)년 지끔에 진도 읍성 짓고 진도군이로 복군되아 둘오실 쩍에도
내나 쩌그 표에 시조 35세 입도 8세이신 복자 명자 할아버님께서
젤로 주축이 되셔가꼬 설군유공자가 되신 연유로도 향교고 어디고
진도에서 인구는 4번 째였어도 일종에 진도 토호세력에 중심이었었지라.
밀양 박(朴)씨로 설군유공자인 박연(朴衍), 박정(朴挺) 모친도 내나 창녕 조씨고
청제공(淸齊公)파 입도조도 인척이고
진주 강(姜)씨 입향조도 창녕 조씨 부인
현풍 곽(郭)씨, 남평 문(文)씨, 진주 하(河)씨도
曺씨하고 혼인이로 진도에 입도한 기록덜잉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