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퇴계退溪 이 황李 滉
퇴계退溪 이 황李滉(1501-1570)은 연산군 7년에 태백산을 주룡主龍으로 하는 영지산靈芝山 기슭의 풍광이 수려한 경상도 예안현禮安縣의 온계溫溪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이름은 서홍瑞鴻이지만 이마가 넓다하여 광상廣상이라 부르기도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자리의 한쪽 벽 위에 다음과 같은 백 낙천白樂天의 시를 걸어 놓고, 항시 암송暗誦하므로써 자신의 삶을 채찍질 하였다고 한다.
번거로움을 막는데는 고요함보다 나은 것이 없고 해 정 못난 것을 막는데는 부지런 함보다 나은 것이 없다. 구煩莫如靜 구拙莫如動.
그는 도연명의 시를 좋아했고, 그의 사람됨을 사모하였으며, 훗날 전원으로 돌아 가기(歸田園)를 그토록 갈망했던 것은 소년시절 도연명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퇴계가 열 다섯 살에 처음으로 지은 가제(石蟹)라는 제목의 이 시는 동심이 베어 있는 철학적 시라고 할 수 있다. 돌을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되네 앞으로 가고 뒤로 달리니 다리도 많구나. 평생을 살아도 한 움쿰의 산샘(山泉) 속이니 강호(江湖)의 파도치는 물이 그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네. 負石穿沙自有家 前行각走足偏多. 生涯一국山泉裏 不問江湖水幾河.
또한 퇴계는 중국의 절강성 서호西湖에 초막草幕을 짓고 살면서, 매화를 사랑하므로 처妻로 삼고, 학鶴을 자식으로 여겼으며(梅妻鶴子),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매화시에서 ?암향소영暗香疎影*?이라는 명구名句로 매화의 진면목眞面目을 묘사描寫했던 임 포林逋의 삶과 시의 세계를 동경하였다. * 그윽한 향내 떠돌자 달은 어스름이네.
그는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丹陽, 풍기군수豊基郡守를 지냈고,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예조판서禮曹判書,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일생동안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와 인격도야人格陶冶, 후진양성에 힘써왔으며, 한국에 퇴계가 있음은 중국에 주자朱子가 있는 것과 같이 미완성의 주자학을 크게 발전시켜 놓은 ?동방東方의 주부자朱夫子?로 칭송을 받아 올 만큼 뛰어난 학자이며, 문하門下에 서애 유성룡, 율곡 이 의, 아계 이 산해와 같이 대학자요, 정치가이며, 대경륜가인 동량지재棟梁之材를 318명이나 배출해냈다.
그는 본시 은일隱逸의 본성을 가지고 애매愛梅의 지정至情과 심령心靈의 혜안慧眼으로 매화의 특성을 투시透視하고, 담아淡雅한 필촉으로 매화의 신령神靈스런 자태를 그려 내어 85제題 118편의 단일소재單一素材, 자필自筆, 자작自作의 우리나라 문학사상 유례없는 매화시를 지을 만큼 매화를 아끼고 사랑 하였으며 자신이야 말로?정말 매화를 아는사람(眞知梅者)?이라고 했다. 퇴계가 그토록 매화를 사랑하게 된 것은,
"매화가 高尙하고 아담하여 속기俗氣가 없고, 추운 때에 더욱 아름다우며, 호젓한 향기가 뛰어나고, 격조格調가 높고 운치가 남 다르며, 뼈대는 말랐지만 정신이 맑고, 찬 바람과 눈 보라에 시달리면서도, 곧은 마음을 고치지 않기 때문" 이라고 했다.
퇴계는 매화를 사랑한 나머지 홀로 있을 때면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매화분梅花盆과 마주 앉아 술잔을 비우며 시정詩情을 나누기도 했으며, 조정에 나아가 어려운 국사를 처리 할 때면 매화에게 묻기도 하므로써 매화가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형兄으로 현인賢人으로 여겼다. 퇴계는 매화가 한창 필 무렵에는 매화의 주변을 한 없이 맴 돌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완상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시로써 자신의 모습을 나타 내기도 했다. 뜰을 거닐고 있노라니 달이 사람을 쫓아오네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 그림자 몸에 닿네. 步첨中庭月진人 梅邊行요幾回巡 夜深坐久渾忘起 香滿衣巾影滿身. 퇴계는 매화를 감상하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의자를 사용했으며, 지금도 도산서원의 유물관에는 그 원형原形이 보존되고 있다. 그것은 도자기로 둥글게 통을 만들어 그 밑에서 불을 피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추운 날이면 의자 밑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한 후에 앉아서 매화를 감상한 것이다. 퇴계가 사용했던 도자기 의자에는 매화와 당초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퇴계가 항상 쓰던 벼루에도 매죽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이 벼룩도 현재까지 남아있어 보존되고 있다.
옛날 송나라 주 렴계 周 濂溪는 국화菊花를 꽃 중의 은자라고 했고, 퇴계는 매화를 나무 가운데 은자隱者로 여겼다, 국화는 서리를 이기는 자세가 있고, 매화는 추위를 넘어서는 기골氣骨이 있다.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 밑에서 본 국화의 빛깔이나, 임포가 서호西湖가에서 느낀 매화의 맑은 멋은 서로 같다고 할수 있으나, 옥 같은 뺨(玉頰), 박달나무같은 마음(檀心) 구슬같은 가지(瓊枝), 눈같은 꽃잔(雲?)은 매화만이 자랑 할 수있는 아취雅趣요 품격品格이다.
퇴계는 평소 절우節友 가운데 매화를 가장 사랑 하였으며 도산에 절우사를 만들어 백여그루의 매화를 심고 가꾸었다, 고종기考終記에 보면 임종이 가까워 올때에 이질로 설사를 앓고 있었으므로 매형梅兄*에게 불결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분매盆梅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였고,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에는 ?매화분梅花盆에 물을 주라?고 한 다음 坐折하였다. 참으로 퇴계의 매화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극점極點을 알수있다. 한편 퇴계와 단양丹陽 기생妓生 두향杜香의 이야기는 매화를 사랑했던 퇴계의 또 다른 면을 볼수있다.
* 황산곡黃山谷이 수선화水仙花 시?에서 ?산번화는 아우요, 매화는 형이다?〔山樊是弟 梅是兄〕이라고 표현한 것을, 시인詩人들이 인용하여 ?매형梅兄?이라고 함. 퇴계는 일생을 학문 연구로 보내는 것을 소망했기 때문에 수없이 벼슬을 사양했지만, 경륜經綸이 많고 덕망德望이 높은 대 학자인 그를 임금들도 좀 처럼 벼슬자리에서 놓아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퇴계는 내직內職(중앙관서)에서 나마 벗어나 외직外職(지방관서)을 자청하여 48세 때인 명종3년(1548년)에는 단양丹陽군수로 부임하여 10개월 동안 근무한 적이 있다. 퇴계는 이 때에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인 복도소復道沼를 만들어 농사개량에 힘썼고, 단양팔경丹陽八景을 제정하는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러던중 그 해 10월 친형인 대헌공大憲公이 직속상관인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擦使로 부임해 오자, 형과 아우가 직속상하관계로 있으면 나라 일에 공평을 기 할수 없으며 세인世人들로부터 오해를 사게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그 날로 사표를 제출했다, 청렴 결백한 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퇴계의 성품을 알아차린 조정에서는 그를 충청도가 아닌 경상도 풍기豊基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퇴계가 단양을 떠난 뒤에 단양 고을에는 퇴계와 관련된 꽃다운 기녀妓女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남게 되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을 때 , 단양 고을에는 두향杜香이라는 몹씨 아름다운 관기官妓가 있었다, 두향은 가무歌舞는 물론 시詩, 서書에 능한 명기名妓였으며, 지조志操가 깨끗하고 높기를 사대부댁士大夫宅 부인 못지 않았다. 신임사또 이 퇴계를 처음 대한 두향은 그의 고매한 인격과 심오한 학문에 매료된 나머지 퇴계의 수청기생을 자청 하였고, 두향의 총명과 재주를 인정한 퇴계는 이를 용납하였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시화詩話와 음률音律을 논하고, 산수山水를 거닐며 인생을 즐기기도 했다. 이무렵 두향은 퇴계에게 사랑의 증표證票로 여러차례 선물을 했지만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난 퇴계가 받아 들일리 없었다. 마침내 매화를 좋아 한다는 것을 알게된 두향은 온 나라 안에 수소문搜所聞하여 꽃 빛이 희다못해 푸른 빛이 감도는 청매靑梅 한 그루를 선물하였다. 퇴계는 이 매화를 동헌東軒 앞 마당가에 심어놓고 ?일문정매一問庭梅?와 ?대매화답對梅和答?등의 시를 읊으며 즐기다가 풍기군수로 옮겨 갈 무렵 이 매화나무는 도산으로 옮겨 갔다. 한편 퇴계가 떠난 후 두향은 부화富華한 시중잡배市中雜輩와 어울리는 것이 그 어른의 인격에 대한 모독冒瀆이라 생각하고 아예 기적妓籍에서 물러 날 것을 결심하고 퇴적계退籍屆를 낸 다음, 오로지 퇴계만을 생각하고 그리워 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을 혼자서 거닐기도 하고,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다가 일생을 마치면서 ?내가 죽거든 내 무덤은 강가에 있는 거북바위(龜岩) 옆에 묻어다오, 거북바위는 내가 퇴계선생을 자주 모시고 가서 시를 말하고 인생을 논하던 곳이다 라는 유언에 따라 400여년 동안 그 곳에 묻혀 있다21)가 충주땜이 건설되어 수몰될 지경에 놓이자 퇴계의 15대손인 이 동준李東俊의 주선으로 1985년 지금의 신단양 제미봉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21) 퇴계일화선. 정비석. 1988. P162. 그 후 도산으로 옮겨진 두향의 매화는 선조3년(1570년) 12월 8일 한서암寒棲庵에서 좌절坐折한 후에 매화도 함께 고사 했다. |
2. 매월당梅月堂 김 시습金時習 김 시습은 자신의 호를 매월당梅月堂이라고 할 만큼 매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매화에 심취했다. 그의 나이 스물 한살 때인 1453년 세조世祖의 정변政變 즉 수양이 김 종서, 황보 인등, 조정대신朝廷大臣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이른바 계유정란癸酉政亂?의 소식을 듣고 ?임금은 죽일수도 있다. 모든 백성의 적으로 규정될 때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개인의 정권 야욕野慾을 채우기 위하여 협박과 공갈로써 왕권을 탈취奪取하거나 또한 폭력으로써 무고한 백성을 어압抑壓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사흘 동안 방문을 걸어 잠근체 통곡을 하다가 끝내는 머리를 깎고 수도修道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십여년 동안 떠도는 구름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주유천하周遊天下하다가 그의 나이 서른 한살 때 금오산金鰲山 아래 거처를 정 하면서부터 스스로 호를 매월당梅月堂이라고 하면서 서재書齋(서재이름=매월당)를 짓고 일생을 여기서 보낼 심산으로 약간의 터전까지 장만하였다. 이 때 세조는 김 시습에 대해서도 회유책을 쓰려고 했다. 매월당이 금오산으로 들어간 그해 3월 효령대군이 시습에게 편지를 보내어 ........ 증건하여 원각사라고 명명하고 낙성 연회를 배푸는데 내가 임금께 그대를 추천하였으니 초야에서 지낼 생각을 그만 버리도록 하라 고 했다. 편지를 받은 매월당은 그간의 소식도 알 겸 서울로 올라갔다. 연회가 한창일 무렵 김 시습이 자취를 감추었고 이상히 여긴 세조世祖는 그의 행방을 찾도록 했다. 찾고보니 시습은 일부러 인근에 있는 똥통에 빠져 온 몸이 범벅이 되어있었다. ?너희들은 모두가 이렇게 구린내가 나는 더러운 인간들이다 라는 시위를 했으며, 서울거리를 지나다가 영의정에 까지 오른 정창손의 행차를 보고 이 놈 그만두지 못하겠는가 라고 외치기도 했다. 매월당에게 있어서는 임금을 비롯한 대소신료大小臣僚등 어떠한 권력도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태백李太白에게 오골敖骨(오만한 뼈)이 허리에 있었다는 전설과 같이 김 시습에게도 ?권력에 허리를 굽히지 않는 오골?이 있었다. 이는 매화 나무의 목질木質이 강직剛直하여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층權力層을 미워하고 봉건사회封建社會를 비판批判하고 반항했던 그를 후세의 야사野史와 야담野談에서는 시승. 광승狂僧. 기인奇人으로 전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는 참다운 인생항로를 걷는 냉철한 비판가요. 재야在野의 정치가요. 애국자였다. 김 시습이 그 토록 미워하던 세조가 죽고 성종成宗이 왕위에 올라 시습을 등용하기 위하여 노력했고, 친구인 서 거정도 권했으나 끝내 벼슬길을 멀리 하면서 독창적인 철학적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는 조국강산을 떠돌아 다니면서 ?서민과 접촉하므로써 서민을 동정하고 서민을 대변한 노래와 시, 조국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 탐관오리貪官汚吏와 지주地主, 수전노守錢奴를 풍자한 시?등을 썼고, 《금오신화金熬新話》와 같은 단편소설을 창작하므로써 조선의 첫 한문 소설가 이기도 하다. 김 시습이 44살때인 1479년 머리를 기르고 안安씨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두었으나 가정생활이 순탄하지 못한데다 오래지 않아 처자가 다 죽었다. 그는 이 때부터 본격적인 탐매探梅를 시작했다. 『금오록金熬錄』에 기록된 『탐매探梅』시는 다음과 같다. 매화꽃을 찾아서 한쪽 가지는 시들고 마르고 한쪽 가지엔 꽃이 피었네. 어즈버! 이다지도 고르지 못한 춘심을 한하노라. 비여 이슬이여 너 진정 무정하다 시들고 말라 피여나지 못하는 이 가지를 차마 어찌 보고만 있단말고. 반쯤말라 시든 잎이 꽃가지에 달렸구나 아마도 봄 바람이 잎의 뜻을 모름이라 차라리 잎은 두고 꽃이라도 먼저 피여 잎 없다 조롱할까 남의 입을 막을세라. 探 梅 一枝枯瘦一枝榮 腸斷春心作?生 雨露恰是無情物 耐見彫殘不受亨 半乾枯葉着春枝 細料東風不解吹
爲子却能先着蘂 故防無葉被人欺 그는 매화가 오랜 풍상風霜의 시련試鍊을 모질게 견디며 구불구불 틀리고 얽힌 노매老梅를 바로 자아自我를 인고忍苦로 지키는 매월당 자신의 모습으로 여기기도 했다. 매월당의 매화시 가운데 ?누속陋俗에 굴하지 않고 곧고 깨끗한 자신의 마음을 나타 낸 시?로는 일찍이 들었노라, 곧고도 깨끗함 가장 다정하여 동풍의 홍자와 다투지 않음을. 고산을 한번 본뒤 마음을 허락하여 그때부터 옛 이름 그릇 행해졌네. 夙聞貞潔最多情 不與東風紅紫爭 一見孤山心便許 田來行誤囊時名.이라는 것과,
매화의 높은 품격과 뛰어난 자태,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한 역할을 하면서도 굿굿이 절개를 지킴으로써 모든 꽃 들이 시 새움을 한다는 김 시습만의 매화에 대한 아름다운 예찬이 깃들어 있는 매화시는 다음과 같다. 꽃 필때의 높은 품격 꽃 중에 빼어나고 열매 맺어 조화하면 국 맛이 향기롭다. 끝 날때가 되어서도 큰 절개를 두고 있으니 여러 꽃 들이 어찌 그 곁을 엿볼수 있으리.
花時高格透群芳 結子調和鼎味香 直到終時存大節 衆芳那堪窺其傍. 그는 누구보다도 매화의 품격과 조화를 사랑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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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설매헌부雪梅軒賦
부상扶桑의 늙은이가 깊은 깨달음을 발하여 도道의 뿌리가 깊고 맘이 재(灰)처럼 싸늘하여, 산뜻히 진세塵世를 떠난 얼굴과, 한가히 세속을 끊은 지경地境이 옥병에서 얼음〔玉壺之氷〕①이 나오는 듯, 요대瑤臺에 휘영청 달이 비치는 듯, 이에 사장謝莊의 설부雪賦는 탈태奪胎⑧하고 송 경宋璟②의 매화부는 환골換骨하여 두 부賦가 유전流傳하여 천추에 뛰어났다. 시인들이 보고 입 다물고 못 떠들며 ,문인들이 듣고 잠잠한 채 속만 태울뿐. 한산자韓山子③가 백발을 흩 날리고 삼옷을 펄렁이며. 우연히 만나 한바탕 웃고자. 정중鄭重한 초대를 오히려 싫어하여 섬계剡溪의 배 삿대를 치며 유령庾嶺④의 수레를 달려 가다가 중도에 머무는데. 식목息牧이 불러 청해주네. 대방(竹房)을 열고 바람 난간에서 굽어보며 방석 깔고 가부좌跏趺坐하여 노아차露芽茶를 끓여 해정解정술깰정하면서 주시周詩의 재도載塗⑤를 읊고. 은殷나라의 ?국맛 맞추기?(調羹)⑨를 생각하니 이는 다만 ?쓰임 없는 쓰임?이요⑥대저 물건이 있음에 법칙이 있음 이로다.⑦ 내가 이에 알괘라. 서역西域의 교敎도 이것과 갑을甲乙이라. 비와 이슬이 눈과 다 같은 은택恩澤이로되 농상農桑에 소중하고 복숭아, 오얏이 모두 〈매화와〉 다 꽃이언만 부귀富貴에 마땅하네. 대관절 눈과 매화와 우리 스님이 정경 情境이 서로 어울리고 침개針芥 ⑪처럼 서로 따라 잠깐도 떨어지지 못 함을 뉘라서 알손가. 게다가 한 가지(枝)가 백옥처럼 빛나고 천산千山이 온통 흰빛. 나는(飛) 새도 끊어지고 노는 벌(游蜂 )도 아니오며. 먼지 찌꺼기를 기화氣化에 녹이고 우주의 본체本體를 심제心齊⑩ 에 합하면 실로 공부에 도움이 있으리니. 높은 서제의 편篇을 삼음이 마땅한저. 그 뒤 세월이 얼마, 아름다운 정과 경境이 모두 격조隔阻했네. 일후에나 병이 나아 쩔룩발 아닌 평보平步가 되거든. 돌길에 남여藍輿를 타고 한번 가 관상觀賞하고 속정俗情을 잊으오리. ① 마음이깨끗한 것. ②당나라 문인. ③작자자신. ④매화가많은 고개이름. ⑤「시경」중의 구절. ⑥장자莊子에 있는 말 ⑦시경詩經에 있는말 ⑧ 도가의 말로는 범인凡人을 바꿔 선인仙人을 만드는 것이나 문학의 말로는 문장에는 옛 사람의 일언 일구도 도습蹈襲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환골 탈태등의 법이 있다 한다. ⑨「서경書經」에 "간이 맞는 국을 만드는 데는 네가 오직 소금이요. 매실이로다"(若作和羹 爾惟鹽梅)하였다. 이것은 은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삼으면서 한 말이다. ⑩심제心齊는 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뜻을 한결같이 하고, 마음을 비워서 도道에 합한다는 뜻이다.⑪자석에 붙는 바늘과 호 박에 붙는 개자. ⑫ 만물이 생생하는 이치. ⑬ 태극太極 그는 매화를 소재로 최초로 시조時調를 읊은 사람이다. 5. 서 거정 徐居正 서 거정徐居正(1420-1488)의 자는 강중剛中이요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며, 본관은 대구이다. 그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외손자이다. 세종20년 열아홉살의 나이로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급제하여 학사學士에서 공부할 때에 매번 으뜸을 차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양촌의 문장이 외손에게 전해졌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거정은 네번씩이나 과거에 급제하였고,1) 다섯임금을 섬기었으며,2) 경연3)을 모신것이 45년이요, 대제학大提學으로 23년간이나 있었으며, 시관試官으로써 선비를 선발한 것이 33방榜인데, 그 선비들 중에 정승에 오른자가 권남權擥, 윤필상尹弼商, 홍응洪應, 이극배李克培등 수십 인이었다. 1). 시과試科, 중시重試, 발영시拔英試, 등준시登俊試. 2).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세조世祖, 성종成宗. 3).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의하던 자리.
그는 문장에 능하여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비롯하여, 여지승람輿地勝覽 50권, 그밖에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등 수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기로도 소문이 났으며,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중국 연경에 사은사謝恩使 로 갈 때에 선생이 종사관從事官으로 함께 동행하여 가다가 일행이 압록강 건너 바사보婆娑堡라는 땅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압로강을 건너기 전에 수양대군은 사가정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유서諭書를 받았으나 본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날 밤 깊히 잠에 들었던 사가정이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있었다. 함께 있던 일행이 그 이유를 묻자 " 꿈에 달이 구름에 가리워져 있었는데, 달은 어머니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꿈이 상서롭지 못하여 슬퍼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함께 잠자던 사람이 이 사실을 수양에게 알리니 수양이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거정의 지극한 효성이 하늘을 움직이게 하였음이 틀림없다" 고 하면서 사가정을 불러 "어제 유서가 왔었는데 그대의 어미가 병이 있다하니 급히 환국還國하라" 하고 되돌려 보낸 사실이 있을 정도로 지극한 효성에 대한 일화가 있다. 사가정은 매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랑이 있었고, 매화의 진면목을 꿰뚫어 통찰하는 예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사가집四佳集』에 있는, 매화시 가운데 노선성댁매화시사십수盧宣城宅 梅花詩四十首?의 시에서 매화를 향한 자신의 심회를 잘 투영하고 있음을 볼수있다. 그는 매화에서 태평성대를 만나 조정에 나아가 뜻을 펴는 군자君子, 즉 자신과 함께 사대부들의 우아하고 여유있는 기상氣象을 얻고자 했다. 그가 운성군부원군雲城府院君 박상공朴相公댁에서 매화를 감상하는 시회詩會에서 지은 매화시 서문을 보면,
"대저 천지의 도를 궁구窮究해 보면 일음一陰과 일양一陽 뿐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고 사물에 미루어 가도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동짓달에 일양이 되돌아 오니 매화는 양이 바램하는 상象이다, 모든 꽃들이 삼춘三春 봄 날에 붉고 흰 꽃을 다투어 피우나 매화는 빼어난 모습으로 우뚝 서서 홀로 지조志操를 지키니 군자의 상象이다. 바야흐로 지금 성왕聖王이 재위 하시고 어진 신하들이 국정을 보좌하니 군자의 도는 성하고 소인의 도는 쇠衰하였다. 사람에게 이와 같은데 오직 사물에게만 그렇지 않겠는가?, 이것이 공公이 즐겨 취하는 까닭이고 여러분도 함께 즐기는 까닭이다" 라고 했다. 여기서 매화는 동짓달에 피기 시작하여 일양이 발생하는 형상이며, 또 봄 날에 다투어 피는 소인과는 달리 홀로 우뚝서서 지조를 지키는 군자의 모습을 나타 내는 꽃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일양이 발생하는 형상은 천지의 생의生意인 인仁을 펼쳐 나가는 것이며, 이것은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인간상을 암시暗示해 주고있다. 따라서 시대라고 함은 인정이 베풀어 지고 있는 태평성대이고, 인물은 인정을 베푸는 주역으로써의 군자, 즉 서거정 자신을 포함한 사대부들이며, 시대는 서거정이 살았던 조선조 초기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태평성대를 누리는 군자인 이들이 매화를 즐겨 감상하는 이유는 군자의 도(一陽)가 성하고, 소인의 도(一陰)가 쇠하여, 군자가 마음껏 뜻을 펴는 이때, 사람 가운데 군자인 자신들과 꽃 중의 군자인 매화가 동류同類로써 일체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는 또 매화를 풍류와 부귀를 누리는 자들 가운데 문아文雅함을 가진 자로 여기고 곧고 깨끗한 성품에 청정한 마음과 향기로운 덕을 갖추어 무리중에 빼어난 꽃중의 청고淸高한 성인 즉 ?화중성花中聖?으로 여겨 다음과 같이 읊고있다. 매화는 꽃중의 성인이니 아무도 그 성정을 모른다. 기운氣運은 천지의 빼어남을 모았고 마음은 빙설의 곧음을 지녔다. 동지무렵 일양이 처음 돋아 올때 가지 끝엔 벌써 괘상卦象이 생겨나네. 온갖 꽃 모두 필 생각을 않는데 새 하얀 그 꽃은 짐짓 앙증스러워. 중 략 옥색 꽃빛 정명도程明道의 사람 됨 같고 쇠창자 송광평宋廣平*의 정심貞心이로다. 모름지기 겉 모양 구하지 말고 가만히 그 정신과 합할뿐. 빼어난 운치 누군들 사모하지 않으리오 꽃다운 마음이 나를 반하게 하네. 바라기는 많은 열매를 따서 상商나라 솥에 넣어 국을 끓이리. * 송경宋瓊
梅是花中聖 無人識性情 氣鍾天地秀 心與雪氷貞 子半陽初復 枝頭卦己生 千紅俱閒寂 一白故輕盈 中 略 玉色程明道 鐵腸宋廣平 不須求面貌 묵己合神情 勝韻疇非慕 芳心我自傾 要이多採實 商鼎爲調羹. |
6. 삼봉三峰 정 도전鄭道傳
충북 단양에는 단양팔경丹陽八景 가운데 하나인 도담삼봉이라는 절경이 있다. 이 삼봉에는 정 도전의 출생과 관계된 전설이 있다. 정 도전의 아버지인 정 운경鄭云敬이 젊었을 때 이곳을 지나다가 상相을 잘 보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정 운경에게 "10년후에 결혼을 하면 장차 재상宰相이 될 아이를 낳게 될터이니 그렇게 하라" 고 일러 주었다. 정 운경은 그가 일러 준대로 10년후에 삼봉에 돌아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여인이 아이를 길에서 낳게되어 그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부르게 되었고, 부모가 인연을 맺게 된곳이 삼봉이기에 호號를 〔삼봉三峰〕이라고 했다. 정 도전의 아버지 정 운경은 충숙왕 때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올랐고, 수령 재임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고려사高麗史」열전에는 ?양리전良吏傳?에 등재 될만큼 청렴결백하여 가산家産은 별로 많지 않았다. 정 도전은 그의 부친이 이 색의 아버지 이 곡李穀과 학우學友관계를 갖게 됨에 따라 이 색과도 자연히 친하게 되었고, 이 색의 문하생인 정 몽주, 이 숭인등과도 막역한 사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면에서도 이 색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고려 공민왕(19년) 때에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어 이 색, 정 몽주, 이 숭인등과 함께 성 리학을 강론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깊이있게 넓혀가던 중, 우왕禑王(1374)이 왕위에 오르 고 이 인임李仁任등이 집권하여 친원반명親元反明 정책을 시행하자 이에 반대 하다가 개 경에서 쫓겨나 나주羅州 부근의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었으며, 이 곳에서 소재동消災洞 의 부곡민部谷民과 생활 하면서 농촌의 상황을 낱낱이 느끼고 체험하여 이를 토대로 많은 시와 글을 쓰기도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 도전은 고향인 영주榮州에서 4년간 복거하다가 다시 삼각산三角山. 부평. 김포등지에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고, 우왕 9년에 함주에 있는 이 성계를 만날 때 까지 10년간에 걸친 유배와 유랑생활이 계속되었다. 이후 조선왕조의 개국에 있어서 이 성계는 군사적으로 크게 기여한데 반하여, 정 도전은 사상적인 기여도가 높았으므로 개국 일등공신一等功臣에 피봉되었고, 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 .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등 요직을 겸직 및 역임하면서 왕을 능가하는 권한을 행사하였다. 태조 7년에 발생한 ?무인난戊寅亂?과 ?공소恭昭의 난?으로 인하여 정 도전의 일파는 제거되고 태조의 정권이 붕괴됨에 따라 정 도전은 ?왕자와 종친을 모해했다?는 역적의 누명을 뒤집어 쓴체 방원의 칼에 쓰러지므로써 비명의 결과를 맞게 되었다. 평소 그는 시.문과 경국제세經國濟世. 성리철학과불교비판性理哲學佛敎批判. 병제및병법兵制및兵法. 악사樂詞등 다섯가지 부분에 있어서 많은 저술을 하였다. 정 도전의 시문은 「혁명을 수행한 풍운아 답게 호방하면서도 날카로운 사회의식이 번득이고」있어서 신 숙주. 이 색. 정 몽주. 권 근과 같은 당대의 대 문장가들도 높이 평가 하였으며, 멀리 중국에서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정 도전이 생전에 매화를 가꾸었다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그가 남긴 수많은 시.문을 통하여 매화를 아끼고 사랑했던 마음을 읽을수가 있다. 그는 매화를 소재로 한 『매천부 梅川賦』를 지었으며, 매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천진스러운 태도에 다정한 얼굴, 하얀 치마에 깨끗한 소매, 우의羽衣와 예상霓裳으로 눈 같이 흰 고운 살결, 옥 같은 얼굴에 윤이 흘러 산뜻하다. 매천부梅川賦 해는 경신庚申년, 때는 늦 겨울. 날씨가 살을 에는듯, 마른 나무가 바람에 외치는데, 삼봉자三峰子①가 나막신 신고 문을 나오니 사면이 창망蒼茫하다. 온 누리가 음산한데, 문득 코 끝에 맑은 향내. 만져도 안 보이고 찾으려야 찾을 곳 없고. 무슨 물건인지, 황홀하여 내 마음에 몹시 아쉬었다. 그 때 밤 눈(雪)이 새로 개고 달 빛이 환 하기로, 내가 맑은 개울을 건너 산책散策하며 거닐다가 반가이 개울가에서 그를 만났으나. "누구냐"말도 못 붙였네. 천진天眞스런 태도에 단정한 얼굴, 감장치마에 새 하얀 소매. 우의羽衣와 예상霓裳으로 눈 같이 흰 고운 살결, 옥 같은 얼굴에 윤이 흘러 산뜻해. 훨훨 은하수銀河水에 떠서 광한전廣寒殿②을 지나 상청궁上淸宮에 뭇 신선을 만나 뵈온듯이, 한 소년이 벙실벙실 낄낄거리는 듯하는 말. ?세상의 모든 물건 각기 유類로써 쫓아, 신선과 범인이 거처를 달리하고, 맑은 것 흐린 것이 함께 있지 아니하네. 그런데 물건중의 지극히 깨끗한 것이 눈(雪)이요, 기운(氣)중의 지극히 밝은 것이 달이다. 이 두가지가 위와 아래에 틈이 없이 해 맑은 한 빛인데, 조물주가 나의 즐김을 만족시켜 주어 나는 이로써 멋지게 사네. 돌아보면, 인간(世)이 어디메뇨. 세월이 몇 겁(劫)인가. 인간의 더위가 내 병病이 못 될것이요, 세속의 누累가 내 진실을 굽히지 못 하리라. 그런데 자네는 어디서 온 사람인가.? 삼봉자가 부지중 깜짝 놀라 머리털이 주뼛하여. 눈을 씻고 자세히 보니 실은 호보浩甫와 함께 매천梅川에 노닌 것이었다. ① 정도전의 호. ②달속에 있다는 궁전.
정 도전이 남긴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영매시詠梅詩》는 다음과 같다. 아득하고 아득하다 강남의 꿈이, 날리고 날리어라 재 밖의 혼이. 상사에 잠겨 부질없이 서 있노라, 더더군다나 갓 떠오르는 황혼일레랴.
渺渺江南夢 飄飄嶺外魂 相思空佇立 又是月黃昏
맑고 청명한 소리 거문고 줄이라면 한들한들 물에 잠긴 연기로구료. 희고 희다 벗님의 옥 같은 얼굴 밤이라 창문 앞에 갑자기 왔네. 冷冷孤桐絲 요요水沈煙 皎皎故人面 忽到夜窓前 한 굽이 시냇물은 맑고 얕은데 삼경이라 달 그림자 저물었구나. 손님네 어서 와서 옥피리 불어라 홀로 서서 추위를 이기지 못해.
一曲溪流淺 三更月影殘 客來吹玉수 獨立不勝寒 |
7. 우봉又峯 조희룡趙熙龍 조희룡(1797-1859)의 호는 우봉, 또는 호산壺山이며 특히 매화를 좋아했기에 매수라고도 한다. 19세기 대표적 문인화가이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생으로써 시,서,화에 뛰어난 사람이다. 그는 글씨에 있어서는 추사체秋史體를 본 받았고 그림은 사군자화를 잘 그렸으며, 그 가운데서도 매화를 가장 잘 그렸다. 그의 특별한 매화 사랑은 다음의 기록에서 알수있다. "나는 매화에 대한 편벽偏僻이 있다. 스스로 매화대병梅花大屛을 그려 침실에 두루고 벼루는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매화시경연梅花詩鏡硯을 쓰고, 먹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硯을 쓴다. 매화백영梅花百詠 을 본따 시를 짓고 내가 거처하는 곳을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 라 편액을 단 것은 매화를 사랑하는 내 뜻에 흔쾌히 마땅한 것이지 갑자기 이룬 것이 아니다. 시를 읊다가 목이 타면 매화편차梅花片茶 를 달여 마셨다."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그는 남 달리 매화를 사랑했기에 매화백영루에 매화병풍을 둘러치고 앉자 매화시를 읊고 매화차를 마시면서,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와 〈홍매도紅梅圖〉,〈묵매도墨梅圖〉등 조선시대 화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명작의 매화그림을 남긴 사람이다.
이 밖에도 우리의 선인들 가운데 정치가, 문인, 묵객과 사대부들을 비롯하여 일반에 이르기 까지 매화는 그들의 임금으로써, 연인으로써, 친구로써, 의인화 되어 존경과 사랑을 받아 왔으며, 그들의 내면 세계와 합일된 신성성과 청렴 결백함의 표상으로 삼았기에 정매, 분매, 또는 절매折梅, 화매畵梅등으로 오늘 날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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