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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 역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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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무인열전(29) 곽재우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65 13.08.21 02: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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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 일으킨 홍의장군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는 아호나 본명보다도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별호로 더욱 널리 알려진 당대의 쾌남아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다가 왜란이 일어나자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으며, 뛰어난 전략과 빼어난 용병술로 상승불패의 신화를 남김으로써 우리 역사를 빛냈다.

?이름 없는 시골 선비로서 한가로이 시와 술과 낚시로 세월을 낚던 곽재우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 가재를 풀어 의병을 모으고, 붉은 옷 입고 은 안장 얹은 백마를 타고 서릿발 같은 장검을 휘두르며 왜적을 무찌르기 시작한 것은 선조 25년(1592년) 4월 22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는 홍의장군 곽재우의 출생지이며, 그가 집 앞 정자나무 현고수(懸鼓樹)에 북을 매달아 놓고 울리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간 유격대- 게릴라부대를 창설한 곳이다. 또한 의령군 남강 기슭 정암진은 낙동강을 거슬러올라 경상도를 짓밟고 전라도로 휩쓸어갈 야욕으로 물밀 듯 쳐들어온 왜의 대군을 여지없이 쳐부순 빛나는 싸움터. 그리하여 ‘바다에는 충무공(忠武公)이 있었고 땅에는 홍의장군이 있었다’는 전설을 낳게 한 역사의 현장이다.

?‘의병은 싸울 뿐이지 뽐내지 않는다’며 필승의 전략으로 백전백승하던 유격전의 명장 홍의장군 곽재우는 조정의 포상이나 명성을 탐내지도 않았다. 전란이 끝나자 ‘하늘이 내린 붉은 옷(天降紅衣)'의 장군은 붉은 옷을 벗고 장검도 버렸다. 여러 차례 내려준 벼슬도 끝끝내 마다한 채 망우당을 짓고 이 풍진 세상의 온갖 잡사를 잊으려고 했다.

?망우당은 시와 서, 거문고와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 도사?신선의 길을 찾았다. 400년 전의 풍류남아 곽재우는 그렇게 한세상을 살아넘겼고 지금은 경북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산 기슭에서 망우(忘憂)의 적막을 누리며 말없이 누워 있다.

?의령 충익사는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8년 12월 22일에 정화공사를 마친 성역으로 국난극복과 민족정신 함양의 역사 교육장이다. 의령읍 중동 남산 기슭 7천여 평의 대지 위에 조성된 충익사는 의병탑과 충의문?홍의문?충익사?충의각?기념관 등 여러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의병탑은 27m의 화강암 석탑으로서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한 18명의 장수를 상징한 18개의 고리를 두 개의 기둥이 받치고 선 모양이다. 충익사는 홍의장군 곽재우와 17장령, 수많은 휘하 무명 의병 용사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또 충의각에는 18장수의 명판을 걸어 놓았으며, 기념관에는 홍의장군의 기마상과 전적도 및 보물 제671호로 지정된 장검?은안장?돌벼루?쇠도장?갓끈 등 망우당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정암의 정(鼎)은 ‘세 발 달린 솥’이니 곧 세 개의 돌이 다리처럼 떠받치고 있는 솥바위를 가리킨다. 그 옛날 홍의장군이 백마에 올라 왜구를 무찌르던 전방지휘소 정암나루 북쪽 벼랑 위에는 의병루가 세워져 있고, 그 아래 의병들이 장애물을 설치해 강을 건너려는 왜적 무리를 여지없이 무찔러 고기밥을 만든 솥바위가 물에 반쯤 잠긴 채 그 날의 승전보를 소리 없이 증명해 주는 듯하다.

?곽재우가 첫 싸움에 거느린 부하는 10명이라고 기록에 전한다. 그러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의병을 처음으로 일으킨 곽재우는 그때까지 어떻게 지낸 사람이었는가. 곽재우는 명종 7년(1552년) 8월 28일에 현풍 곽씨(玄風郭氏)로 의주목사와 황해감사를 지낸 정암(定庵) 곽월(郭越)과 진주 강씨(晋州姜氏)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계수(季綬)였고 아버지가 처가살이하던 유곡면 세간리 외가에서 태어날 때 위로는 재희(再禧)와 재록(再祿) 두 형이 있었다. 3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부친은 김해 허씨(金海許氏)와 재혼하여 재지(再祉)와 재기(再祺) 두 이복 아우를 더 보았다. 그 밖에도 재우에게는 두 누이가 더 있었다.

?<망우집(忘憂集)>의 연보에 따르면 곽재우는 타고난 자질과 인품이 호매하고 기상이 침착하였으며, 눈을 똑바로 뜨고 사람을 쏘아보면 번쩍번쩍 광채가 빛나 마주 쳐다볼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마다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곽재우는 8세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세운 세간천 위 용연정에서 두 형과 함께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웠다. 그리하여 14세 때까지는 사서오경을 떼고, 15세에는 자굴산 보리사에 들어가 유학의 경전 외에도 병법서를 비롯한 수많은 책을 읽고 공부했다.

?그는 또 어렸을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배웠고, 이때 그의 눈에 들어 남명의 외손녀사위가 되었다. 즉, 곽재우가 16세에 결혼한 부인 상산 김씨(商山金氏)는 부제학을 지낸 김언필(金彦弼)의 손녀요 만호(萬戶) 김행(金行)의 딸이며 이 김행의 장인이 바로 남명 조식이었다. 19세에 이르기까지 곽재우는 사서오경과 제자백가를 두루 익혀 학문의 깊이를 더한데 이어 말타기와 활쏘기, 그리고 <손자> <오자> <육도> <삼략>같은 병서까지 널리 익혀 문무겸전의 재사로 성장했다. 벼슬살이에 나아갈 뜻이 없었던 곽재우는 부모의 뜻을 어기지 못해 34세 되던 해에 마지못해 과거를 보았다. 그리하여 별시 정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답안지에 임금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다 하여 며칠 뒤에 무효가 되었다.

?이듬해 8월에 아버지가 돌아갔다. 임종시 곽월은 자신이 입던 정3품 당상관의 조복을 셋째 아들인 재우에게 주며 “우리 가문을 이을 자는 반드시 너”라고 한 뒤에 눈을 감았다고 한다. 하지만 3년상을 마친 재우는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41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처인 기강 가에 집을 짓고 낚시와 술과 시로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냈다. 야인으로 초야에 은둔해 한세상 시름을 잊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해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적은 부산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저항을 받은 것밖에는 싸움다운 싸움 한번 없이 양산?밀양?대구?상주를 거쳐 문경새재로 무인지경을 가듯 북상했다.

?적침을 가장 먼저 당했고 가장 많은 적군이 오랫동안 주둔했던 경상도의 사정은 어땠었나.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경상감사 김수(金?)는 진주에서 왜란 소식을 듣고 동래로 가다가 적이 파죽지세로 밀어닥친다고 하자 도망치며 각 고을에 전령을 보내 다들 재주껏 산속으로 숨으라 하였다. 그런 판국이었으므로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는 경상도민 뿐만 아니라 온 조선 백성이 어육이 되고 멸종의 재앙을 당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관군이 없으니 나라도 믿을 게 못되고 내 발로 일어서서 내 손으로 싸우자, 싸우다 죽더라도 맞서 싸워야겠다, 의병은 그렇게 해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곽재우가 처음 의병을 일으키던 4월 22일 왜장 모리휘원이 이끄는 3만 왜군이 김해?창원을 함락하고 칠원을 거쳐 영산?창녕?현풍으로 육박해 들어올 무렵이었다. 이노(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등에 의하면 곽재우는 처음 가동(家?) 10여 명을 거느리고 이불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붉은 관복을 입고 스스로 ‘하늘에서 내린 붉은 옷의 장수’라는 뜻으로 천강홍의대장군이라 일컬으며 집 앞 정자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치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가산을 정리하여 곳간을 열어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는데 의병 모집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자기 옷을 벗어 의병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벗겨서는 의병의 처자들에게 나누어 입힐 정도였다. 재산을 모두 흩어 군사를 모으고 장차 죽을 일에 나서려 하자 아내 김씨 부인이 참지 못하고 나서서 말렸다.

??“여보 영감! 이게 다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다 없애고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죽??? 을라캅니꺼?”

?곽재우가 아내의 말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칼을 빼어 들고 금방이라도 베어 죽일 듯이 펄펄 뛰었다고 한다.

??“여편네가 무슨 말이 많노? 다시는 그따위 소리 말거래이! 한번만 더 나서서 장??? 부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싸면 내 가만 안 둘끼구마!”

?마을 사람들을 마당 가득히 불러 모은 곽재우는 이렇게 소리쳐 말했다.

??“모두 들어보소! 왜구들이 쳐들어와 난리가 났단 말은 다들 들어서 알고 있을끼??? 요. 감사니 목사니 병사니 현감이니 하는 벼슬하는 인간들은 마카 도망쳐 버리고??? 군졸들도 한 사람 남지 않았으니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네 부모처자가 죄다 왜놈??? 들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끼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보다는 한 가지로 마음먹??? 고 저기 저 앞강에 진치고 지키기만 한다면 우리 마을은 꼭 보전을 할 수 있을???? 끼니까, 모두 일어나 한마음으로 싸우자 그 말이요!”

?하지만 나이 40이 넘도록 출세도 못하면서 마냥 술이나 마시고 강에 나가 낚시질이나 하고 풍월이나 흥얼흥얼 읊조리던 무능한(?) 양반 곽재우가 아무리 쌀과 옷을 나누어주고 호소해도 사람들은 “저 양반이 갑자기 왜 저러노? 미쳤는갑다!” 하면서 얼른 호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생각하던 천한 머슴 열 명만 삽과 괭이, 낫이나 몽둥이를 들고 따라나설 뿐이었다.

?이래선 안 되겠구나. 곽재우는 평소부터 눈여겨보며 친분을 맺어온 지략과 담력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여 수십 명을 모아 일단 규모는 적지만 한 무리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성이 차지않은 곽재우는 부자로 살고 있어 하인이 수십 명이나 되는 매형 허언심(許彦深)의 집으로 찾아갔다. 매형에게 사리를 들어 부탁하면 수많은 양식과 머슴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는데, 부자로 살고 있지만 인색했던 매형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오히려 미친 지랄 그만두라고 삿대질을 했다. 곽재우의 성질에 한번 내디딘 발길을 그냥 되짚고 물러설 턱이 없었다.

??“나라가 결딴나고 고을이 잿더미가 될 판국에 어찌 혼자만 편히 잘 살겠단 말이??? 고? 누나고 매형이고 그렇다면 남남이대이! 대의를 위해선 인정사정 볼 것 없는??? 기라!”

?그리고 거느라고 간 장정들을 시켜 매형 부부와 외아들을 끌어내다 목을 치려고 하니, “아이고, 재우야! 니 와 이카노? 니 하자는 대로 하꾸마. 우리 외아들이나 살려도고!”하고 사시나무 떨듯하며 애걸복걸 사정사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매형 허언심은 재산과 머슴들을 다 바치고 그 자신도 곽재우 의병대의 전군향(典軍餉)이란 직임으로 휘하 17장령의 한 사람이 되었다.

?처음부터 의병에 가담하여 선봉장으로 큰 활약을 한 심대승(沈大承 : 沈大升 : 沈大昇)이 곽재우에게 큰 힘이 되었고, 개전 초 도망쳐 흩어졌던 영남의 패잔병들도 수십 명씩 모여들어 차츰 부대의 진용을 이루면서 의병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게다가 첫 전투인 거름강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자 그의 군세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개전 이래 관군과 의병 통틀어 첫 승리인 거름강싸움은 또한 곽재우부대의 신출귀몰한 유격전의 첫 승리이기도 했다. 비록 소규모였지만 첫 싸움에서의 승리는 그 파급 효과가 컸다.

의병을 일으킨 지 보름이 채 못된 그 해 5월 4일, 왜군의 척후선 3척이 남강을 거슬러올라온다는 정탐보고를 받은 홍의장군은 선봉장 심대승을 비롯하여 힘깨나 쓰는 날쌘 군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거름강으로 달려나갔다. 강 언덕 갈대밭에 궁수들을 매복시키고 강 속 물길목에 통나무와 밧줄 따위로 장애물을 설치한 홍의장군은 적선이 거기에 걸려 빠져나오려고 머뭇거리자 “쏴라!” 하고 벽력같이 소리쳤다. 화살에 마구 꿰뚫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물에 빠지는 왜병들, 무적의 신무기라고 자랑하는 조총을 쏠 새도 없이 3척의 적선은 격침되고 왜병들은 고기밥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봤제? 왜놈들이라케도 하나 겁낼 게 없는기라. 이렇게 떨어져서 안 보이는 데서??? 싸우니 왜놈들 조총이고 긴 칼이고 무슨 걱정이노? 그제?”

?환호성을 올리는 부하들을 돌아보고 홍의장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틀이 지난 5월 6일, 이번에는 11척의 왜적 선단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변변한 무기를 손에 잡은 것도 아니건만 이미 한 차례 승전의 희열을 맛보았기에 이번에는 누구 하나 겁내지 않고 힘껏 싸웠다. 그리고 또다시 승리의 환호성을 힘차게 울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26척, 합포해전에서 5척의 왜함을 격침시키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곽재우가 거름강싸움에서 왜놈들을 신나게 무찔렀다는 소식이 퍼져나가자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곽재우가 발광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우리도 싸워서 이길 수 있구나. 산 속에 도망쳐 숨었던 청장년들이 무더기로 산을 내려와 홍의장군의 깃발 아래로 몰려들었다. 처음에 시골 친구와 머슴 10명으로 출발한 홍의장군의 의병부대는 거름강싸움의 승리를 계기로 20명, 50명, 수백 명으로 불어나 급기야는 2천여 명을 헤아리는 대부대로 커지기에 이르렀다.

?홍의장군은 부하들을 머슴이든 양반이든 차별하지 않고 정성을 다한 온정으로 대했으며, 싸움터에서는 앞장서서 돌격하고 신출귀몰하는 지략과 전술로 승리를 거두니 누구 하나 죽기를 각오하고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그러면서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전공을 과시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부하들을 엄히 단속하여 적의 머리 베는 짓을 못하게 하였다.

??“우리가 의병이 된 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고을을 지키기 위해 적을 무찌르??? 려 함이지 왜놈의 머리를 바쳐 공을 세우고 상을 받고자 함이 아니다!”

?그의 부대에는 제법 높은 벼슬까지 지낸 사람도 적지 않았고 자기 고을에서는 내로라하는 호걸도 많았지만 누구 하나 거병 당시 무명의 시골 선비에 불과하던 곽재우의 지휘에 반발하거나 이탈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통솔력은 탁월했고 그의 인품과 인격은 감화력이 컸다.

?정암진전투는 홍의장군의 의병 활동 가운데 가장 빛나는 승리를 안겨 준 싸움이었다. 그해 6월 6일, 지난 달 하순 함안을 점령한 소조천융경 휘하의 왜군 2만이 의령을 공격하려고 정암진에 이르러 도하작전을 시도했다. 경상도를 맡은 왜장은 모리휘원이고, 전라도를 맡은 자가 소조천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의 무적함대에 연전연패 당함으로써 전라도 해안으로의 상륙이 좌절되자 육로로 바꿔 함안?의령?달성?함양으로 하여 전라도를 침범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선봉장은 소조천의 심복인 안국사(安國寺)의 왜승 혜경이었다. 혜경은 자칭 전라감사라고 큰소리치며 군사를 이끌고 정암진에 당도했으나 물이 깊고 진창이어서 바로 도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로잡은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마른 데만 골라서 깃발을 꽂아 표를 해 놓고 다음날 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정찰병의 보고로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알고 있던 홍의장군은 그날 밤 군사들을 시켜 깃발을 모조리 뽑아서 진창에다가 옮겨 꽂게 하고, 강물 속에는 전과 같이 장애물을 설치하고, 강 언덕과 강변 갈대숲 여기저기에 궁노수들을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과연 왜병들은 강가로 줄지어 몰려나왔다. 그리고 깃발을 따라 강을 건너려다가 모조리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아우성을 쳤다. 이때, 정암진 벼랑 위에 붉은 전포 입고 백마에 높이 앉은 장수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장검을 휘두르며 무섭게 고함쳤다. “쏴라! 한 놈도 놓치면 안 된다!” 비오듯 화살이 날고 여기저기에서 왜군들이 비명을 올리며 거꾸러졌다.

?복병에 의해 돌격하던 선발대가 거의 전멸하고 말자 왜군은 우세한 머릿수를 믿고 인해전술로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홍의장군의 전술은 어디까지나 유격전. 그는 무모하게 우세한 적과 맞서려 하지 않았다. 장군은 복병을 후퇴시킨 다음 이곳저곳 산등성이와 골짜기 속에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나서 자기처럼 키 크고 날쌘 부하 10여 명을 뽑아 홍의에 백마 탄 가짜 홍의장군을 만들어 똑같이 ‘天降紅衣大將軍’이라 고 쓴 대장기를 지니게 하여 여러 길목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 돌격대장이 되어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제 막 강을 건넌 적군을 향해 돌격해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러다가 말머리를 돌려 후퇴하니 그제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왜병들이 고래고래 악을 쓰고 조총을 쏘며 마구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을 쫓아가다 보니까 이게 웬 조화 속인가! 여기에도 홍의장군, 저기에도 홍의장군, 백마의 홍의장군이 갑자기 열명도 넘게 늘어나 우렁찬 호령소리를 뽑으며 어지럽게 칼춤을 추고 돌아가는 게 아닌가. 우리가 조선 의병대장 홍의장군의 복병지계에 넘어가 사지(死地)에 빠졌구나! 놀란 왜병들이 이번에는 등을 돌리고 방금 건너온 강변을 향해 죽자사자 내빼기 시작했으나, 홍의장군의 명령에 따라 1천여 명의 의병부대가 일시에 몰려나와 왜놈들을 마구 잡아 죽이니 이 싸움에서 왜군은 숱하게 맞아 죽고 빠져 죽고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렇게 해서 왜군들은 그 다음부터 붉은 옷 입은 장수만 만나면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님이 나타났다!’며 도망치기에 바빴다고 한다.

?정암진전투에서 대패한 안국사 혜경이 남강도하작전을 단념한 채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고, 홍의장군도 역시 대안에서 마주보고 따라 올라가며 유격작전으로 크고 작은 전과를 숱하게 올렸다. 그리하여 왜군은 경상도를 우회하여 전라도를 침범할 계획을 버릴 수밖에 없었으니, 그것은 오로지 바다의 충무공과 육지의 홍의장군 덕분이었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곽재우는 경상좌방어사로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적을 맞았다. 사적 제80호로 지정된 화왕산성은 신라 때 쌓은 고성으로서 산정에 오르면 멀리 고령?합천?의령?함안?창녕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현풍에서 석문산성을 쌓고 있던 곽재우는 왜군 재침의 급보를 받자 이내 밀양?양산?창녕?현풍 네 고을의 군사와 백성들을 거느리고 7월 21일에 화왕산성으로 들어갔다. 성벽을 수축한 곽재우는 장작과 섶을 무더기로 쌓아 성이 함락될 경우 다 함께 불을 질러 죽기를 결의하고 적을 기다렸다.

?곽재우가 유격전에서 수성전으로 전법을 바꾼 것은 이제는 무기와 군량 확보가 어려운 의병대장으로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규군 총사령관으로 휘하 장병들을 지휘해 적의 대군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강성한 적세에 비해 약한 군세로는 맞서는 것보다 굳게 지키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윽고 적장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을 뽐내며 흉포하다는 가등청정이 수만 대군을 이끌고 산성 아래 이르렀는데 온 산과 들을 덮은 적군의 기치창검을 내려다보고도 장군은 바위처럼 태연자약했다.

??“왜놈들 가운데도 병서를 읽고 군사 쓰는 법을 아는 자가 있다면 감히 우리 성??? 에 달려들지는 못할끼구마!”

?과연, 가등청정은 하루낮 하룻밤을 동정만 살피다가 그냥 군사를 물려 우회하고 말았다. 만세 소리가 온 성중에 우렁차게 울려퍼졌고, 곽재우는 성문을 열고 짓쳐나가 적의 후미를 공격해 많은 왜군을 죽였다.

?다음달인 8월 29일 곽재우는 계모 허씨가 성안에서 운명하자 관복을 벗고 상여를 모시고 산성을 내려와 장례를 마친 후 강원도 울진으로 가 3년상을 치렀다. 상중에도 임금이 여러 차례 경상우방어사와 경상좌병사 등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임금이 마땅히 깨닫고 뉘우치고 분발하여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하여 동이니 서니 남이니 북이니 하는 조정 붕당을 없이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더욱 위험할 것’이란 상소를 올리고 벼슬을 헌신짝처럼 벗어 던졌다. 그렇게 저렇게 괘씸죄에 걸린 곽재우는 임금이 내린 벼슬을 마음대로 버렸다는 죄목으로 전라도 영암 땅에서 꼬박 2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벼슬을 끝끝내 마다한 것은 백해무익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개죽음을 당하기 싫어서였던 듯싶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곽재우는 창녕군 길곡면 창암리 비슬산 기슭에 망우정을 짓고 은거했으니 그의 자호 망우당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때부터 곽재우는 뜬구름같이 무상한 세상의 온갖 잡사를 잊고 신선이 되어 오래 사는 양생법(養生法)의 하나인 도인법(導引法)을 행하며 이승의 번외와 오욕을 죄다 잊으려고 했다.

?그는 산중에 은둔한 이후 10여 년간 한 톨의 쌀도 먹지 않고 누가 억지로 권하면 마지못해 잠깐 숟가락을 댔다가 이내 귀와 코로 토해버렸다는 얘기가 <일월록>과 <연려실기술> 등에 전해오고 있다. 그그가 양식을 삼은 것은 솔잎을 씹고 날마다 조그맣게 뭉친 송화가루 한 알을 먹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죽을 때까지 몸이 가볍고 건강하였다는 것이다.

??왜란이 끝난 뒤 임금 선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대부분의 벼슬을 사양했으며,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여 2년째 될 때 왕의 간청에 못 이겨 잠깐 상경했다가 함경감사 겸 병사?수사 겸 함흥부사로 발령받았지만 모두 부임도 하지 않고 사직했고, 그 뒤에도 전라병사니 뭐니 하는 벼슬자리도 죄다 마다했다. 그리고 다섯 아들에게도 모두 벼슬살이를 하지 말도록 타이르며 이런 시를 읊었다.

?-부귀영화를 버리고 운산에 누웠으니

??근심을 잊어서 몸은 절로 한가하네

??예부터 신선이란 없다고들 하건만

??오로지 마음으로 깨우친 순간 신선이 되는구나. -

?강호 초야에 이름 없이 묻혀 있다가 국난을 당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백전백승하여 나라를 구한 불패의 천강홍의장군은 다시 산야로 돌아가 지상의 신선으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그가 진정으로 온갖 근심?걱정?슬픔을 여의고 천수 66세로 우화등선(羽化登仙)한 것은 광해군 9년(1617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였다.

?그 날 갑자기 하늘에서 크게 천둥 벼락이 치고 비가 쏟아져 망우정이 한 차례 진동하더니 문을 열자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차 있었고 홍의장군 곽재우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생전에 그 숱한 공신의 반열에도 끼지 못한 곽재우에게 숙종 35년(1709년)에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공신호가 내렸지만, 이미 신선으로 우화등선한 망우당에게 그런 것이 죄다 무슨 소용이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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