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대학로에서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라는 연극을 보았다.
이 연극은 1949년에 발표된 희극작가 오영진의 현실 비판적 사회극이다. 인생차압(人生差押)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되기도 하였다. 3막 4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인간 내면의 위선과 탐욕을 꼬집고 사회 부조리를 파헤치는 작품이다. 해방 전부터 친일행각으로 사리사욕을 꾀하였던 주인공 ‘이중생’은 광복 후 사회적 혼란을 틈타 국유림을 불하받고 제지회사를 세우고 불법적으로 달러를 구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중생은 달러 구입을 위해 사귀었던 미국인 랜돌프에게 사기를 당한 것을 알고 그를 찾으러 나서다 사기,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경찰서로 연행된다. 구속되었던 이중생이 재산 정리를 명목으로 보석으로 풀려나와서 자신의 구속으로 재산을 잃게 된 형 이중건의 재산을 유지시켜 줄 것을 약속한다. 고문변호사 최씨와 짜고 재산을 지킬 방법을 찾다가 자신의 전 재산을 사위인 송달지의 명의로 빼돌리고 자살을 한 것처럼 꾸미기로 결심한다. 이중생은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전한 후 최변호사와 유서를 작성하고 자살로 꾸민 후에 부고를 띄우려 한다. 그러나 의사인 사위 송달지가 사망진단서에 도장 찍는 것을 거부하자 송달지의 도장을 훔쳐서 찍고 사망진단서를 위조하기에 이른다. 자살로 위장한 이중생의 거짓 장례식이 시작된다. 그때 국회의원 김의원이 나타난다. 김의원은 뛰어난 언변으로 송달지에게, 상속받은 재산은 국고로 환수될 가능성이 많으니 무료병원을 설립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고, 이에 사위 송달지는 수락을 하게 된다. 김의원이 돌아가자 장례식에 거짓으로 죽은 체 하던 이중생이 뛰어나와 송달지를 꾸중한다. 이때 징용 갔다가 10년 만에 돌아 온 아들 하식도 아버지를 책망한다. 전 재산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서 아들에게까지 외면받고, 일을 도와주러 온 박씨에게 까지 귀신 취급을 받은 이중생은 결국 스스로 자살을 선택한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라는 제목의 의미를 연극이 끝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이중생’이라는 이름은 이중적(二重的)으로 삶을 살아가는 교만한 사람(각하)이 거짓으로 죽은 척하고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주위에도 연극 속의 주인공인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와 같은 불쌍한(?) 사람은 없을까? 나는 ‘중요한 일’과 ‘급한 일’ 중에서 어떤 일을 우선적으로 하고 있는가? 나는 어느 일이 중요한 일이고 어느 일이 급한 일인가를 식별할 줄 아는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몇 가지 일들이 생각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못된 상사의 업무 관련 업체에서 부정한 돈을 받아오라는 지시를 거절한 적이 있다. 몇 년 전에는 살던 아파트에서 동대표 회장을 할 때에 사회적 지위가 꽤 높은 공직자로부터도 부당한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부당한 청탁이나 부정한 돈을 단연코 뿌리쳤다. 그것은 순간적으로는 이익이 된 것처럼 느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주인공인 이중생은 부당한 방법으로 사리사욕을 꾀하고 일시적으로 각하(?)처럼 군림했지만 결국은 가족도, 이웃도, 부귀도, 명예도 다 잃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아파트 생활도 이중생처럼 어리석게(?) 살기보다는 서로 조금씩 배려하고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더불어 법대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