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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 명언집 4
니체에 대하여
나는 예컨대 결코 요괴가 아니요, 도덕적 괴물도 아니다. 나는 사실 덕망이 있어 존경받는 사람의 유형과 정반대되는 사람이다. 몰래 말하자면 내게는 이것이 틀림없이 나의 자부심의 일부분이리라.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사티로스(반인반수의 숲의 신. 말의 귀와 꼬리를 가졌고, 술과 여자를 좋아함)가 되겠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제자로서 요상하고 망령된 귀신(요물)이었으며, 도덕적 괴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모든 가치의 파괴자이며, 그 인간 망나니의 삶을 그의 행복으로 삼았던 것이다. 사티로스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반인반수의 괴물이었지만, 디오니소스의 스승이었다가 디오니소스의 위대함을 알아보고, 디오니소스의 충복이 된 반인반수의 괴물이었던 것이다.
모든 가치의 파괴자----이것이 디오니소스의 철학자, 즉, 비극철학자의 운명이다. 그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며, 모든 인간을 해방하는 구원자이다.
하지만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은 개별화의 원리만을 강조하지, 서정시인들의 주관적 자아를 망각한 황홀한 도취의 세계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은 개인적 구원을 위한 소승적인 삶만을 강조하지,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대승적인 삶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니체의 독특한 견해에 따르면,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서사시인과 조각가들)의 자아는 개별적이고 객관적인 자아에 불과하지만,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들(서정시인들)의 자아는 자아를 망각한 존재의 무근거 상태, 즉 통개인적인 자아를 뜻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폴로 유형의 예술가인 소포클레스는 개별적인 소포클레스에 불과하지만, 디오니소스 유형의 예술가인 아이스퀼로스는 “더 이상 아이스퀼로스가 아니고 세계 예술가이며, 자기의 근원적 고통을 인간 아이스퀼로스로 내세우는 비유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예술가의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이 니체의 독특한 견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디오니소스 유형의 예술가들은 아폴로 유형의 예술가들----개별화의 원리와 소승적인 삶, 그리고 아름다운 꿈과 가상의 세계를 강조하는----과는 달리,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대승적인 삶을 강조하고, 죄를 짓고 죄악을 정당화할 수 있는 황홀한 도취의 세계를 강조한다. 포도재배의 신이자 축제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자기 자신의 한계 상황과 존재론적 모순에 묶여 있는 모든 인간들을 해방시키고, 또한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킨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고통의 화신이 되어 티탄들의 처벌이든, 헤라의 처벌이든 간에, 온몸을 갈기갈기 찢기우는 형벌을 받게 된다. 디오니소스 제전은 해마다 봄날 닷새 동안 열렸는데, 그 기간 동안은 모든 죄인들도 자유의 몸이 되어 그 축제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디오니소스 유형의 예술가들은 우리 인간들의 실존적인 삶의 조건들----우연성, 무력성, 결핍성 등---- 앞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외디프스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했던 것이지, 무의미한 염세주의와 소크라테스적 미학주의의 길을 선택했던 것은 아닌 것이다({행복의 깊이} 제1권).
우상파괴, 이것이 바로 내 직업의 일부이다. 인간이 허위로 이상세계를 창조한 만큼 꼭 그만큼 인간은 현실세계로부터 현실세계의 가치와 의미와 진실을 잃어버렸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190페이지
인간의 역사는 신의 역사이자 우상의 역사이다.
우상이 파괴되면 새로운 신이 나타나고, 새로운 신이 등극하면 그 신은 이내 우상이 되어버린다.
니체는 그의 분신인 짜라투스트라의 이름으로 이상과 형이상학의 목을 비틀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예수의 목을 비틀었다.
예수의 사망 이후, 새로운 초인, 즉, 짜라투스트라가 나타난 것이다.
망치의 철학은 삶의 철학이자 행복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이상이라고 하는 ‘거짓’은 여태까지 현실에 있어서는 하나의 저주스러운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인류는 그 자체로서 저 본능 밑바닥까지 거짓말장이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류의 건강, 인류의 장래에 대한 숭고한 ‘권리’를 보장해 줄 가치의 ‘반대되는’ 가치를 숭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상 세계란 가장 완전하고 모든 걱정과 근심이 없는 세계를 말한다. 불교의 극락의 세계가 그렇고, 기독교의 천국의 세계가 그렇다. 극락이나 천국이 없다면 우리인간들은 이 세상의 삶의 목표가 없어지고, 그만큼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된다. 모든 걱정과 근심이 없는 세계, 즉, 이 극락과 천국에 매달릴수록 모든 사제들이 최고의 인간으로 군림하게 되고, 이 세상의 삶은 더없이 비천하고 하찮게 된다.
이상이란 하나의 말이며, 상징이며,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극락도 없고, 천국도 없다. 자유와 평등과 사랑이라는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이나 가치관들도 그렇다. 자유는 구속 속에 갇혀 있고, 구속은 자유 속에 갇혀 있다. 평등은 불평등 속에 갇혀 있고, 불평등은 평등 속에 갇혀 있다. 사랑은 미움 속에 갇혀 있고, 미움은 사랑 속에 갇혀 있다. 극락이나 천국이 하나의 말들인 것처럼, 자유와 평등과 사랑도 하나의 말들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의 반이상주의는 이러한 허상에 대한 믿음을 비판한 것이고, 그는 그의 일생내내 형이상학과 기독교의 진리들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상이라고 하는 ‘거짓’은 여태까지 현실에 있어서는 하나의 저주스러운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인류는 그 자체로서 저 본능 밑바닥까지 거짓말장이가 되고 말았다.” 고통을 긍정하고 고통 속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의 삶을 찬양하고 긍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디오니소스 철학자(비극철학자)로서의 니체의 ‘초인 사상’이었던 것이다. “인류의 건강, 인류의 장래에 대한 숭고한 ‘권리’를 보장해 줄 가치”는 현실이며, 인간의 자기 극복의 표상인 짜라투스트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저서의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이 높은 산에 있는 공기이며 ‘강렬한’ 공기임을 알고 있다. 독자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공기에 감기걸릴 염려가 적지 않으리라. 얼음은 가까이에 있고 고독은 처절하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스위스 바젤대학교 교수시절, 그의 대부분의 저서들을 쓴 바가 있고, 학교 강의가 끝나면 글을 쓰고 산책을 하는 것을 그의 유일한 삶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높은 곳은 신성한 곳이며, 그의 저서들이 알프스의 고산영봉처럼 아름답게 펼쳐지게 된다. 이 세상의 만인들의 반대방향에서, 자기 자신만의 사상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따라서 그를 유혹하는 그 모든 손짓들을 다 뿌리치고, 부단히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사람을 보라!
알프스의 고산영봉들이 그 위대함 속으로 파고든다.
하나의 정신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디어 내는가? 하나의 정신은 얼마나 많은 진리와 과감히 맞부딪칠 수 있는가? 점점 더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가치기준이 되어버렸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우리 한국인들은 오천년 역사의 단군의 자손이며, 개천절을 성탄절(건국기념일)로 기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나 불과 몇 십년만에 우리 한국인들은 예수의 자손이 되어가고 있었고, 예수의 탄생일을 성탄절로 기념하게 되었다. 농경민이 유목민의 신을 받들어 모시고, 자기 자신의 민족 신인 단군의 목을 비틀어 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정신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디어 내는가? 하나의 정신은 얼마나 많은 진리와 과감히 맞부딪칠 수 있는가? 점점 더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가치기준이 되어버렸다.”
진리를 살 때는 행복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진리를 견디어 낼 때는 그 진리는 이미 채찍이 되어버린다. 진리를 견딘다는 것, 이민족의 신인 예수가 그 얼토당토 않은 채찍으로 단군을 두들겨 패는 것을 본다는 것, 이 진리를, 이 허위를 견디는 자처럼 더 불행한 자도 있을까?
영원한 불모지대인 이스라엘을, 열사의 나라에 불과한 이스라엘을 지상낙원으로 떠들어대는 진리를 견뎌야 하는 식민지인들처럼 서럽고 불쌍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과연 더 있는 것일까?
지식을 얻는다는 것, 지식을 넓힌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용기로부터, 극기克己로부터, 자신에 대한 결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북한은 남한보다 3ㅡ4십 배나 못사는 최빈국 중의 하나이며 외부의 원조없이는 단 한 달도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오늘날 대북관계는 천하장사 강호동이가 유치원생이 무섭다고 깡패(미국)에게 도와달라고 떼를 쓰는 것과도 같다. 이민족의 노예의 운명이다.
미국을 비롯한 외세를 밀어내고 남북통일을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의 운명을 걸만큼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최고급의 백만 두뇌, 그 어떠한 외부의 적도 두려워하지 않는 최고급의 사상가가 필요하다.
나의 작품 중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나는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안겨다 준 것이다. 앞으로 수백 년 동안 퍼져나갈 목소리를 가진 이 책은 현존하는 최고의 책이며 그것은 바로 저 높은 산의 공기이며 인간에 대한 모든 사실이 고산의 저 아득한 밑바닥에 놓여져 있다. 그것은 또한 가장 심오하고 진리의 가장 깊숙한 보고에서 탄생하였고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이며, 그 샘에 두레박을 내리면 황금과 선이 가득 담겨져 올라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는 어떠한 예언자도 없으며, 종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질병과 권력에 대한 욕구, 이 양자가 합쳐진 소름끼치는 혼혈아도 없다. 이 책에 담긴 지혜의 뜻을 왜곡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가락을 똑똑히 들어 보아야 한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초인 사상의 경전이며, “나는 너희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라는 가르침이 그 주제로 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 있는 낙타의 정신과 천하무적의 용기의 화신인 사자의 정신과, 그리고 새로운 미래의 주인공인 어린 아이의 탄생이 그 역사 철학적인 과정----초인 탄생의 과정----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낙타에게서는 인내를, 사자에게서는 용기를 배우고, 그리하여, 마침내 새시대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 모든 문장들이 잠언이고 시구이며, 신의 죽음 이후, 우리 인간들의 삶을 찬양하고 옹호하는 대서사시집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니체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안겨다 준 것이다. 앞으로 수백 년 동안 퍼져나갈 목소리를 가진 이 책은 현존하는 최고의 책이며 그것은 바로 저 높은 산의 공기이며 인간에 대한 모든 사실이 고산의 저 아득한 밑바닥에 놓여져 있다. 그것은 또한 가장 심오하고 진리의 가장 깊숙한 보고에서 탄생하였고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이며, 그 샘에 두레박을 내리면 황금과 선이 가득 담겨져 올라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예언자이며, 종교창시자이고(니체는 능청스럽게 이것을 부인하고 있지만), 그 진리의 샘물로 모든 지식인들을 다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육체는 앎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한다. 앎을 시도하면서 육체는 스스로를 높이 끌어올린다. 인식하는 자에겐 모든 충동이 신성한 것이 되고, 높이 끌어올려진 자에겐 영혼은 즐거운 것이 된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장 조용한 말이다. 비둘기의 발로 오는 사고만이 세계를 이끈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로마 교황청의 횡포가 극에 달했을 때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싹이 움텄고, 부르봉 왕조의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 프랑스 혁명의 싹이 움텄고, 유신독재의 횡포가 극에 달했을 때 박정희의 총살형은 예고되어 있었다. 모든 암살자와 혁명가는 가장 조용한 말과 침묵을 사랑하고, 그 비둘기의 발걸음으로 대폭발을 불러일으킨다.
알렉산더 대왕은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가 있지만, 그러나 모든 전쟁은 알프스를 넘어간 나폴레옹처럼 그 기습작전을 펼치게 된다. 모든 암살은, 모든 혁명은 그 어떤 선전포고도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일어난다.
모든 앎(지혜)은 화약이 되고, 모든 학습과정은 그 뇌관을 심는 과정이 되고, 그 앎의 실천은 최고급의 인식의 혁명이 된다.
무화과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있다. 그 열매의 달콤함, 그리고 향기로움이란! 그 열매가 떨어지면 붉은 껍질은 터진다.
나는 무르익은 무화과 열매를 떨어뜨리는 북풍일지니.
그러하니 무화과 열매처럼, 나의 가르침이 너희들에게 떨어지리라.
나의 벗이여, 그것의 즙과 그것의 항기로운 살을 먹어 보아라. 맑은 하늘 어느 오후에, 그것이 우리 곁에 떨어지고 있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무화과는 뽕나무과에 속하며, 지중해 동부지역이 원산지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작물 중의 하나라고 한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무화과의 맛은 달고 음식을 잘 먹게 하며, 설사를 멎게 한다”라고 그 효능을 설명하고 있으며, 실제로 무화과 열매는 소화불량, 식욕부진, 인후통, 노인성 변비, 장염, 이질, 치질에 그 효과가 좋다고 한다.
나는 그러나 무화과 열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며, 이 암수 한 몸인 무화과 나무를 매우 이상하고 신기하게만 생각하고 있다. 어쩌다가 꽃없이 열매를 맺고, 한 마리의 벌과 나비도 찾아오지 않는 나무가 되었을까?
하지만, 그러나 니체는 무화과 열매를 최고급의 과일로 극찬을 하고 있으며, “그것의 즙과 그것의 항기로운 살을 먹어”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무화과 나무는 니체가 되고, 니체의 저서들은 무화과 나무의 열매가 된다.
이 문장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대목이며, 참으로 아름다운 한 편의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제 홀로 가려 한다. 나의 제자들이여, 이제는 너희들도 홀로 가거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니.
나를 떠나가거라! 그리고는 짜라투스트라를 거부하라, 아니 차라리 더 좋은 것은그를 부끄러워하라, 그는 너희를 속였을 테니.
너희가 진정코 지식을 가졌다면 자기의 적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또 자기의친구를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
너희가 언제나 제자인 채로 있다면 너희는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월계관을 빼앗고 싶지 않으냐?
너희들은 나를 공경한다. 그러나 어느 날 너희들의 공경심이 무너진다면 어찌하겠는가? 조심하라, 넘어지는 조상彫像에 깔려 목숨을 잃을 염려가 있느니.
너희는 짜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느냐? 그러나 짜라투스트라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너희는 나의 신자이다. 그러나 신자가 되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너희는 아직 너희 자신을 찾지 못하였을 때 나를 발견하였다. 그리고는 나를 믿는 모든 신자가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이라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모든 소피스트들은 자기 스스로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자칭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지식을 팔아서 밥을 먹고 살아갔던 직업교사단들을 말한다. 소피스트는 오늘날의 대학교수와 변호사와도 같은 사람들을 말하고, 그들은 인간들이 사회에서 성공하는 방법과 논리적으로 말하는 방법과 웅변술과 변론술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소피스트들은 정치, 철학, 법학, 문학, 예술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그들에 의하여 ‘자연의 철학’에서 ‘인간의 철학’의 싹이 움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주란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화두로부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화두로 옮겨간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프로타고라스(기원전 485년-기원전 415년)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소피스트 중의 한 명이었으며, ‘사람이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바가 있다. 인간은 저마다의 성격과 취향이 다르고, 그가 살아온 전통과 역사와 풍습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과 동일한 현상마저도 저마다 다르게 보는 관점을 지녔고, 이것이 상대성 이론의 전거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돈을 받고 제자들을 가르친 원죄 때문일 수도 있지만, 프로타고라스와 그의 제자인 에우틀루스는 그 수업료를 둘러싸고 그야말로 볼썽 사나운 소송전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에우틀루스는 몹시 가난했고, 그 당시 최고로 비싼 수업료를 한꺼번에 다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에우틀루스의 딱한 처지와 그의 총명함을 알아차린 프로타고라스는 우선은 반값만을 받고, 나머지 반은 그가 첫 재판에서 승소를 하면 받기로 했다고 한다. 프로타고라스는 그의 제자인 에우틀루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여 그의 지식을 가르쳐주었지만, 그러나 그는 이미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첫 재판에서 제대로 변론을 하지 않아 패소를 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프로타고라스는 “만약 네가 이 재판에서 진다면 나머지 수업료를 내게 주어야 할 것이고, 만약 네가 이긴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너를 제대로 가르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그의 제자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에우틀루스 역시도 그 스승만큼 아주 뛰어났고, 이미 그 스승을 뛰어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제가 이 재판에서 진다면 아직 충분히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머지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으며, 제가 이 재판에서 이긴다면 굳이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변론술의 극치이며, 사제지간의 불미스러운 소송전쟁마저도 세계적인 명장면으로 연출해낸 대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훌륭한 제자가 나오고, 이 고귀하고 위대한 사제의 관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진보를 거듭하게 된다. 천재만이 큰 소리로 말할 수가 있고, 천재만이 큰소리를 웃을 수가 있고, 천재만이 ‘사람이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새역사를 쓸 수가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짜라투스트라일 뿐, 짜라투스트라를 신봉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짜라투스트라가 그의 스승을 살해했듯이, 그의 제자들도 짜라투스트라를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짜라투스트라의 거짓말과 사기와 온갖 권모술수를 다 밝히고, 그 인식의 힘으로 짜라투스트라의 동상과 그 신전을 허물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승의 살해는 스승의 은혜에 값하는 것이 되고, 스승에 대한 숭배는 스승의 은혜에 더 큰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나는 나의 아버지이다. 나는 그가 요절한 후에도 계속 그의 나머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우리 한국인들도 소크라테스, 칸트, 마르크스 같은 세계적인 사상가가 될 수 있고, 미국과 일본과 중국도 식민지배할 수 있다. 하루바삐 철학을 토대로 독서중심의 글쓰기교육을 하는 수밖에 없다.
문화선진국에서는 어떤 정치인도, 어떤 단체장도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다. 오직 국가와 민족과 그 단체를 위한 희생과 나라사랑만이 있을 뿐.
독서를 하면 애국심은 저절로 생겨난다.
2017년 1월 4일 오후, 문경새재의 아름다운 길을 산책하면서, 내 나이 70 이전에 이 세상의 숙제를 끝내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인들이 아쉬워할 때, 내 스스로 존엄사를 택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이다. 내가 하늘나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나의 아버지이다.
침묵이란 하나의 무언의 항변이다.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삼켜버리는 것은 필연적으로 성격을 망쳐버리게 된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자는 소화불량증 환자이다. 그래서 나는 거칠다는 것을 과소평가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가장 ‘인간적’ 항변의 형태이며, 오늘날 나약화되는 시대에 최고의 덕목의 하나이다. 203페이지.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우리는 왜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말을 하지 않는 것, 즉, 침묵에는 여러 가지 유형과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용히 사색하고 싶어서 그 어느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고, 매우 곤혹스럽고 난처한 질문 앞에서 다만 묵묵히 그 말들을 듣고만 있을 때도 있다.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인간들처럼 양심의 가책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고, 아버지나 스승의 권위와 그 강요된 명령 앞에서 무언의 항변처럼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맞선을 보거나 절간에 간 새색시처럼 자기 자신의 교양과 그 얌전함을 가장하느라고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고, 말주변이 없거나 천성적으로 수줍어 하는 인간으로서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침묵도 말이며, 그 무언의 말이 더 큰 역사 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을 때도 있다. 종교재판소 앞에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무언의 말,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라는 외치고 싶었던 어느 이발사의 무언의 말, 여필종부와 일부종사의 사슬 앞에서도 남녀평등을 외치고 싶었던 말, 군부독재의 심장에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비수를 들이대며 하고 싶었던 말, ‘돈만 내시오, 면죄부는 여기 있습니다’라고 로마 교황의 얼굴을 갈겨주고 싶었던 말, 낮에는 도덕군자의 탈을 쓰고 밤에는 도둑놈이 되는 정치인들의 위선을 찢어죽이고 싶었던 말, ‘노동운동에는 법대로를 외치고 자본가의 잘못에는 사회적 공헌’을 외치던 재판관의 얼굴에 침을 뱉아주고 싶었던 말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불의를 보면 참지 말라는 경전의 가르침이 있다.
하지만, 그러나 정의의 길은 순리를 거역하는 길처럼 어렵기만 하고, 불의의 길은 순풍에 돛단 배처럼 쉽기만 하다. 정의는 힘이 약하고, 불의는 그 힘이 너무나도 강하다. 침묵이 무언의 항변이 될 때는 정의로운 자가 힘이 약할 때이고, 그 불의의 힘 앞에서 굴욕을 느낄 때이다. 굴욕의 길은 쓰디 쓰고, 그 모든 밥맛이 다 떨어져 나간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자는 소화불량증 환자이고, 그는 사회적 부적응자가 되어서 오래 살지 못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자, 자기 스스로 화염의 불길 속이나 단두대로 걸어가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자는 온몸으로, 생리적으로 부들부들 떨고, 그 두려움과 공포를 감추기 위하여 더 큰 목소리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거칠다는 것은 용기를 가졌다는 것이고, 용기를 가졌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
거칠다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항변의 형태이며, 오늘날 나약화되는 시대에 최고의 덕목의 하나이다.”
추억은 고름 낀 상처로 점철되게 된다. 병이란 그 자체로 일종의 ‘원한감정’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병자는 오로지 하나의 위대한 치료책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러시아적 운명론’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칠 줄 모르는 강행군, 그 행군 속에서 급기야 눈 속에 쓰러지고 마는 러시아 군인에 의해 예증되는 무저항의 운명론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나라를 빼앗긴 사람이며, 그 사람은 어떠한 사회적인 안전망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사나운 추위와 비바람을 막아줄 집도 없고, 자기 자신은 물론, 그의 가족과 이웃들을 위한 땅 한 평도 없다. 풀뿌리를 캐어먹거나 나무껍질을 벗겨서 허기를 달랠 수도 있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깡통을 차고 밥을 얻어 먹으러 다닐 수도 있다. 다리 밑이나 다 쓰러져가는 폐가에서 잠을 잘 수도 있고, 겨울에 얼어죽거나 무서운 전염병에 걸려서 죽을 수도 있다. 나이 어린 여자애들은 침략자의 성적 노리개가 될 수도 있고, 힘 깨나 쓰는 젊은이들은 이민족의 총알받이가 되어 머나먼 이웃나라의 전쟁터로 끌려갈 수도 있다. 자유와 평등과 사랑이라는 말조차도 공허한 사치가 되고, 조국과 평화와 행복이란 말조차도 전혀 터무니 없고 허무맹랑한 말이 될 수도 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되고, 오히려, 거꾸로 어서 빨리 죽는 것이 더 복된 삶일 수도 있다.
일제 식민시절, 그 치욕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한국인들의 삶이 바로 나라 잃은 사람의 그것을 증명해준다. 한이 쌓이고, 그 원한의 감정이 아직도 골수에 사무쳐 있다. 식민시절의 추억은 상처가 되고, 그 상처에서는 아직도 시뻘건 피고름이 솟아나온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이 원한의 감정을 치유하기 위하여 8.15 해방이후, 지난 70여 년 동안 그 무엇을 해왔단 말인가?
잃어버린 70여 년, 우리 한국인들은 지난 70여 년 동안 이 원한의 감정을 치유하기 위하여 스스로 해낸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이빨이 없는 독설이 물어뜯지 못하듯이, 우리 한국인들은 아직도 모든 면에서 일본인들과 경쟁조차도 할 수가 없다. 독립기념관, 위안부 소녀상, 식민시대에 대한 사과와 반성 요청, “노여움, 병적인 예민성, 복수에 대한 강렬하지만 무력한 욕구”, 일본이라면 무조건 물어뜯고 보는 험담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가 없고, 오직 그 원한감정으로 인하여, 우리 한국인들만이 다치고 있을 뿐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원한감정은 불치의 병일 뿐이고, ‘한국적 운명론’이 되고 있는 것이다. 원한의 감정을 짊어지고 원한의 감정을 향하여 전진, 또, 전진----, 따라서 우리 한국인들의 추억과 역사, 그리고 삶 자체가 고름낀 상처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어느덧 일본인을 미워하거나 욕할 자격조차도 그 허송세월과 함께 잃어버린 것이다.
원한의 감정으로는 우리 한국인들만이 다칠 뿐, 그 어떤 일본인도 이길 수가 없다. 일본과의 새로운 미래를 위하여, 우리 한국인들의 미래의 영광을 위하여, 더 이상 일본인들을 망신 주기 위한 ‘위안부 소녀상’은 즉시 철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과 미국인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성실하게 살면 된다. 일본인과 미국인보다 더 높은 도덕적 실천을 하고, 언제, 어느 때나 모든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고급문화인이 되면 된다.
우리 한국인들의 고귀함과 위대함 앞에서 일본인도, 미국인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게 할 수가 있다.
나는 선천적으로 호전적好戰的이다. 싸움을 건다는 것은 나의 본능의 하나이다. 적이 될 수 있다는 것, 적이라는 것, 그것은 아마 천성이 강하다는 것을 시사해주며, 또 어떤 경우에도 모든 강한 천성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싸움은 삶의 본능이고, 모든 스포츠와 놀이마저도 싸움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학교도, 회사도, 정당도 싸움의 장소이며, 심지어는 친목단체와 장례식장과 국립묘지도 싸움의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발언권을 강화하고 가장 좋은 자리를 잡는 것,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내고 만인들의 존경과 찬양을 받는 것, 언제, 어느 때나 돈과 명예와 권력을 좋아하면서도 그 모든 욕망을 다 비운 성자처럼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그 모든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고, 싸운다는 것은 잘 살고 있다는 것과도 같다.
아버지가 모든 좋은 음식을 다 먹으면 아들이 싫어하고, 날이면 날마다 놀고 먹으면서도 돈을 달라고 하면 아버지가 싫어한다. 언제, 어느 때나 엄마로서의 미모와 그 인자함만을 자랑하면 딸이 싫어하고, 소위 그토록 아름답고 예쁜 딸이 사시사철 바람기를 잠 재우지 못하고 싸돌아다니면 엄마가 싫어한다. 어떤 인간의 초고속 승진과 그토록 엄청난 부의 축적을 마냥 좋아만 할 친구도 없고, 더없이 부끄럽고 치욕적인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사건마저도 그녀의 동생인 박지만에게는 더없이 고소하고 기쁜 일일 수도 있다. 싸움은 축구장에서도 일어나고, 싸움은 가족의 밥상머리에서도 일어난다. 싸움은 장기자랑 시간에도 일어나고, 싸움은 코미디 극장에서도 일어난다. 싸움은 신성한 예배당에서도 일어나고, 싸움은 단체여행 중일 때도 일어난다. 싸움은 일이 되고, 싸움은 돈이 된다. 싸움은 사랑이 되고, 싸움은 아이가 된다. 싸움의 가장 멋진 쾌감은 황홀함이며, 그 황홀함의 중독성은 남녀의 성교와도 같다. 우리는 싸움 속에서 태어나고 우리는 싸움 속에서 자라난다. 우리는 싸움 속에서 일을 하고, 우리는 싸움 속에서 죽어간다. 싸움은 삶의 본능이며, 모든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이 전면적인 싸움들이 그토록 잔인하고 처절한 피비린내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투쟁 속의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투쟁 속의 조화는 자연의 법칙이며, 그 어떤 인간도, 그 어떤 사물도 이 자연의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다. 밤 하늘의 별들이 그토록 아름답고 찬란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별들간의 인력의 싸움도 대폭발이 일어날 만큼 치열하고, 사시사철 늘 푸른 소나무들마저도 그 나무와 나무들간의 싸움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 낮과 밤의 싸움도 마찬가지이고, 물과 불의 싸움도 마찬가지이다. 선과 악, 진실과 허위, 남과 여, 물과 기름, 전쟁과 평화, 여름과 겨울 등----이 모든 것들의 관계도 싸움이며, 이 싸움들이 최종적인 파국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투쟁 속의 조화’라는 ‘게임의 룰’(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호전적好戰的이다. 싸움을 건다는 것은 나의 본능의 하나이다.”
늘, 항상 최종적인 승리자는 호전적인 자이고, 이 호전적인 자만이 그 왕관을 머리 위에 쓸 수가 있다. 그 왕관의 명칭이 황제의 그것이든, 대사상가의 그것이든, 대서사시인의 그것이든지 간에, 아무튼 그 모든 왕관은 피비린내 나는 잔혹극의 승자만이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나 역시도 선천적으로 호전적이다. 미국의 제국주의를 베어버린다는 것, 일본의 제국주의를 베어버린다는 것, 니체를, 쇼펜하우어를, 칸트를, 부처를, 예수를 베어버린다는 것만큼 더 기쁘고 신나는 삶의 기쁨도 없다.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나는 행복하다.’
나에 관한 한 지극한 결벽성, 이거야 말로 나의 생존의 전제조건이다. 나는 불결한 조건에서는 죽고 만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들은 지혜와 용기와 성실이다. 이 지혜와 용기와 성실은 천하무적의 공격무기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나의 이 공격무기는 정공법正攻法을 사랑하지 않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그 어떠한 사용가치도 없게 된다.
우리 한국인들의 미래의 목표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이다.
미국이 우리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미국이 그 수호천사의 손길을 거두면 우리 한국인들의 삶은 끝장이 난다.
미국의 이익은 미국의 이익이고, 한국의 이익은 미국의 이익이다. 우리는 ‘우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한국인놈들’의 간도 쓸개도 다 빼다주고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한국인들의 밥상은 뇌물밥상이다. 거짓말로 씨뿌리고, 거짓말로 가꾸어서, 거짓말로 열매를 맺는 뇌물밥상----, 열명이 먹다가, 아니 오천만이 먹다가 오천만이 다 죽어도 아무도 모를 뇌물밥상----. 이 뇌물밥상의 달인들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유병언, 조희팔, 최순실, 그리고 우리 학자들과 우리 법조인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한국인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근본토대는 부정부패이다.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은 모조리 다 몰살시키는 부정부패, 우리의 아이들을 학원지옥과 입시지옥에서 더 이상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모조리 다 몰살시키는 부정부패, 진리는 없고 허위만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부정부패----,
나의 지혜와 용기와 성실은 이 병든 똥개만도 못한 사대주의事大主義 속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나는 이 불결한 조건 속에서는 죽고 만다.
나의 인간애人間愛는 끊임없는 자기 극복이다. 그러나 나는 ‘고독’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복귀, 나 자신에로의 복귀, 자유롭고 가벼웁고 쾌활한 공기 속에서 마음껏 숨쉬는 것, 바로 이것을 필요로 한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지혜사랑’을 통하여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를 양성하고,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 즉, ‘고급문화인’으로 육성하겠다는 나의 꿈은 2,000년 후에도, 3,000년 후에도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주입식 암기교육을 철폐하고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을 하는 것, 모든 사상가들의 글을 다 읽고 그 독서의 힘으로 세계적인 사상가들을 배출해내겠다는 나의---- 전인류의 희망과 영광을 창출해낼---- 꿈은 어느 술주정뱅이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고독이 아닌, 영원한 추락과 그 추락 속의 고통이 필요했다. 한국문단에서도, 한국학계에서도 영원한 생매장을 당했고, 한국의 언론계에서도 한국의 출판계에서도 영원한 생매장을 당했다. 나는 현재 상가집 개만도 못한 인간이며, 그 모든 친구들과 형제들과 하급관리들에게서조차도 마치 최하천민과도 같은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 ‘영원한 추락의 기쁨’을 맛보았고, 이 추락 속의 고통이 나의 삶의 텃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공자).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일 수밖에 없었으며, ‘신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오만방자함으로 ‘사색인의 십계명’을 창출해냈다. 나는 나의 고통을 즐겼으며, 그 고통으로 책을 읽고, 그 고통으로 산책을 하며, 그 고통으로 글을 썼다.
오오, {행복의 깊이}여,
오오, {행복의 깊이}여,
염세주의와 회의주의와 냉소주의마저도 나의 사상 속으로 끌어들이고, ‘모든 사상은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라고 그 개선나팔을 불어댈 수 있었던 기쁨은, 오직 나 자신을 위한 자기 극복의 결과이기도 했던 것이다.
영원한 추락만이 멋진 신세계가 되고, 그 생사의 운명이 걸린 혈투만이 그 고통의 열매를 수확하게 된다.
고통이 씨 뿌려지고, 고통이 자라나고, 고통의 열매가 달린다.
고통이 가벼워지고, 고통이 그 웅장한 날개를 펼치게 된다.
나는 낙천주의 창시자로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왜,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영원한 추락만이 네 자신의 길인 것을.......’
미래라는 나무 위에 우리의 둥지를 튼다. 우리의 고독 속에다 독수리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부리로 먹이를 날라다 줄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국제원조에 해마다 10조 원을 쓰는 국가와 1억 원을 쓰는 국가가 싸우면 과연 어느 국가가 이기게 될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10조원을 쓰는 국가가 백전백승을 하게 될 것이다.
앎의 투쟁, 즉, 최고급의 인식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많이 아는 자, 즉, 최고급의 사상을 정립한 사람이 백전백승을 하게 된다. 지난 1,000년 동안 수많은 사상가들 중에서 마르크스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사상 앞에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한국의 대통령이었다면 지난 식민시대의 모든 잘못들을 다 용서해주고, 일본의 평화헌법개정과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진출을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도와주었을 것이다. 과거는 다만 역사적 과거일 뿐, 그 어떤 새로운 미래의 현실이 될 수가 없다. 일본의 가장 큰 잘못을 용서해주고, 일본의 가장 소중한 문제들을 그 무엇보다도 앞장 서서 해결해주고, 그 대신에, 일본보다도 더 높은 도덕성과 그 앎(지혜)의 실천으로 전세계인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우리 한국인들, 즉, ‘고급문화인’을 육성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 즉, {행복의 깊이} 제4권, 제5장에서 ‘대덕 大德의 사상’과 ‘신외교예법新外交禮法’으로 역설한 바가 있다. 아는 자는 크게 용서하고, 아는 자는 크게 끌어안는다. 아는 자는 단군을 부처와 예수보다도 더 고귀하고 위대한 신으로 창출해낼 수도 있고, 아는 자는 일본인도, 미국인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단군의 신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게 할 수가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애지(앎)’라는 나무 위에다가 둥지를 튼다. 우리의 ‘애지의 둥지’ 속으로 우리의 독수리들이 ‘낙천주의 사상’이라는 먹이를 날라다가 줄 것이다.
크게 용서하고, 크게 끌어 안아라!!
아는 자는 천하무적의 낙천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면 일본의 아베보다, 중국의 시진핑보다 열배는 더 정치를 잘할 수 있다. 해마다 노벨상을 타게 하고 전세계인의 존경을 받게 할 수 있다. 왜, 나는 대한민국 최초로 낙천주의 사상을 창시했으니까.
아는 것만큼 고귀하고 위대하게 살 수 있다.
신이란 우리 사상가에게 있어 하나의 조잡한 해답이며, 맛없는 음식이다. 즉 그것은 ‘너희들은 사고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본질적으로 단순한 하나의 조잡한 금지명령인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신이란 우리 사상가에게 하나의 상한 음식이며, 구역질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신의 뜻이고,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것도 신의 뜻이다. 밥을 먹는 것도, 일터를 얻은 것도 신의 뜻이고, 감기에 걸린 것도, 돈을 번 것도 신이 뜻이다.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 인간의 삶 자체는 없게 되는 것이다.
신이란 “너희들은 사고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단순한 하나의 조잡한 금지명령”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삶을 말살하는 저승사자일 뿐인 것이다.
나는 수많은 신들의 목숨을 빼앗은 천하무적의 용사이며,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한 바가 있다.
나는 전지전능한 신의 살해자----, 나의 사상의 신전에는 그 녀석의 흔적조차도 없다.
참으로 나는 성인이 되기까지 항상 영양실조에 허덕여 왔다.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비개인적인’, ‘이타적인’, ‘사심없는’ 식사만을 해온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선과 악, 즉, 도덕이란 사회적 획득물이며, 어린 아이에게는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된 것일 수밖에 없다. 선이란 좋은 것이고, 악이란 나쁜 것이다. 선은 사회적인 것이고, 악은 반사회적인 것이다. 선은 ‘비개인적인’, ‘이타적인’, ‘사심없는’ 어떤 것이고, 악은 ‘개인적인’, ‘이기적인’, ‘사심없는’ 어떤 것이다.
어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타인들만을 돌본다면 자기 자신과 그의 가족들을 해치는 것이 되고, 어떤 인간이 타인을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돌본다면 타인과 그 가족들이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와 타인, 개인과 사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등의 이항 대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이며, 변증법적인 조화라고 할 수가 있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타인도 행복할 수가 없고, 타인이 행복하지 않으면 나도 행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 어떤 대단한 인물도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개인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것도 소중하고, 사심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심있는 것도 소중하며, 이타적인 것과 마찬가지도 이기적인 것도 소중하다.
진정으로 선과 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즉, 어떤 독단주의나 지적 편식증에 빠져 있다면 그는 영양실조로 인하여 매우 고생하게 될 것이다.
자유롭게 옥외에서 활동하면서 얻어내지 않은 사상은 어느 것도 신뢰하지 말라.
좌업坐業의 생활----이것은 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죄악’인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책을 읽고 산책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인간과 앉은뱅이와의 차이보다도 더 크다. 전자는 지식의 날개를 달고 그 상상력의 힘으로 아주 멋진 우주여행을 할 수가 있지만, 후자는 그 좁디 좁은 골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책도 읽지 않고 산책을 하지 않은 사람은 학원지옥과 입시지옥에 빠진 우리 한국인들처럼, 죽어도 자기 혁신과 자기 발전이 가능하지 않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