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7코스는 서귀포 삼매봉 아래 외돌개에서 옛 중문면 월평마을까지 13.8km 약 4~5시간 소요하는 길이다. 외돌개에서 법환포구 오는 길 특히 돔베낭골까지는 가장 많은 올레꾼들이 발길 닫은 곳이라 생각한다. 돔베낭골까지 도착하면 더 이상 가지 말자고 하다가 법환포구의 아름다움에 빠져 지친몸 추스리고 다시 걸어가고 싶어지는 코스가 바로 7코스의 매력이다. 2013년 5월 17일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 지도를 살펴보고
법환마을의 유래도 읽어본다.
마을약사
고려 충렬왕 26년에 제주도를 동서도로 14개 현촌을 설치하였는데 그 14개 현촌 중에 서귀포시 관내에는 홍로와 예래의 2개의 현촌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현촌의 모습과 생활상 등 규모를 정확히 알만한 기록은 없으나 우리 법환동에도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점은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1374년 고려 공민왕은 목호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최영장군으로 하여금 삼도도통사로 삼고 목호들을 섬멸하도록 명하자 최영장군은 제군을 통솔하여 명월포에 상륙 목호들과 접전을 벌여 크게 승리를 거두고 그 여세를 몰아 목호들을 추격하였는데 목호의 잔당들이 범섬으로 후퇴하여 웅거하고 항거하므로 최영장군은 전함을 모아 섬을 포위하고 밧줄로 병사들을 상륙시키자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와 관음보(觀音保)는 남쪽 벼랑으로 떨어져 죽고 석질리필사는 처자와 함께 포로로 잡히고 여적들은 모두 참수하여 왕경에 승전보고를 하였으며 이때 동도합적(東道哈赤) 석다시만(石多時万)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이 아직 잔병 수백을 거느리고 있는 거성이 함락되지않아 최영장군이 공격하자 달아나므로 뒤를 추적하여 잔적을 모조리 사로 잡아 각 관아의 노비로 하였다.
이로써 목호들이 범섬에 웅거하여 항거한지 불과 10여일 만에 평정되었으며 범섬은 목호들의 최후까지 버티다 항복한 역사적인 격전장이 되었던 곳이다. 따라서 우리 고장에는 최영장군의 목호토벌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최영장군이 숙영 하였다는데서 유래된 '막숙(幕宿)', 성을 쌓았던 '軍城(군자왓)', 활쏘기를 연마했다던 '射場앞', 병기를 만들었던 '병듸왓', 범섬을 공격하기 위해 나무로 배를 엮어 범섬까지 연이었던 '배염줄이', 군사를 조련 시켰던 '오다리'등 마을 전체가 온통 군사기지로 勝戰을 도왔던 지명들이 오늘날 까지 전해오는 것으로 봐서 당시에 우리 고장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 범섬의 유인도(有人島) 내력
서기 1776년 제주시에 살던 신광석씨가 법환동에 입주해 와서 살았는데, 그의 아들 신대수씨가 범섬을 답사한 후 범섬에도 사람이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어 처음으로 정의현청으로 가서 범섬을 답사한 후 범섬에도 사람이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어 처음으로 정의현청으로 가서 범섬에 상륙하여 살도록 윤허를 해 주자 1804년에 비로소 신대수씨의 뜻에 따라 범섬에 상륙하여 살도록 윤허를 해 주자 1804년에 비로소 신대수씨는 범섬에 상륙하여 손자 두인이가 날 때까지 광할한 땅을 개척해 나가는 한편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보리를 갈고 육지와 내왕하면서 우도에서 1820년경에 고구마씨를 처음으로 구입하여 심는 등 이 고장에 처음으로 고구마 씨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범섬에도 사람이 살 수 있고 각종 작물이 재배되기 시작하자 1918년도에 현병훈씨의 증조부인 현응수란 분이 범섬으로 이주하여 왔다. 그 분은 두인씨와 더불어 보리도 갈고 고구마도 심었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술을 빚어 두었다가 섬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극진히 대접하였고 태우(나무로 엮어서 만든 배)를 만들어 법환리에 왕래하면서 물물교환을 하며 살았는데 두인씨가 1894년에 아들 효안이를 낳았다. 이렇게 살아가던 중, 섬에서 낳은 두인씨의 아들 효안이가 24세 되던 해에 풍랑을 만나 죽게 되자 두인씨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범섬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후예 신임길씨가 법환동에 계속 살다가 1995년에 타계하였으며 아들 신청신씨가 후대를 잇고 있다.
이외에도 범섬에 사람이 살았던 내력은 좀더 있는데, 1945년에 법환동 마능씨가 범섬에 이주해서 마성모를 낳았으며 1953년도에 섬을 나와 본동에서 거주하다 60년대 중반에 안덕면 동광리로 이주하여 살고 있으며, 1954년에 문창효씨와 문남진씨의 조부가 범섬에 가서 살다가 그 이듬해인 1955년에 섬을 나왔다고 전해진다. 또한 오평숙이란 분은 효안씨와 범섬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해서 '섬오리방'이란 별명이 붙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고, 현병훈 집안을 지금도 섬집이라 부르는 까닭은 증조부님께서 범섬에서 살았었다고 하여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법환포구에는 2개의 용출수가 있는데 동쪽에는 동카름물(막숙물:최영장군이 막을치고 군사들이 먹었던 물), 서쪽에는 서카름물이 있다. 이 사진은 법환포구 곁에 있는 막숙물인데 내가 간 날은 작업을 하고 있었고 지금도 동내아낙들은 빨래터로 사용중이다.
법환포구의 시설물들
주변에 환경과 잘 어울리는 시설들었다.
막숙물을 지나 약 300m경에는 공물깍 관청할망(송씨할망)당이 있는데 예부터 단궐들이 많은 것으로 보였고 지금도 많은 단궐을 거느리는 할망당이다. 제일은 개날, 돗날 중 택일이며 매는 두그릇, 서귀포 자구리포구 갯당에서 가지갈라온 당신이다.
제장이 잘 정비되어 있었고
올해왔다간 흔적들은 지전물색들이다.
당 옆에 빗자루도 있고 소각장도 있으니
평소에도 청소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동안 당을 확인하고 포구를 빠져 나가면 앞바당 수평선이 아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