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달마대사의 제법부동적정문諸法不動寂靜門과 안심법문安心法門
달마대사의 이입사행론에 제법부동적정문이 있다. 유정 무정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에 인용한다. 대지도론에 이르기를, “만일 차遮자를 들으면 즉시에 일체 제행이 모두 비행인 줄을 안다.”(大智度論卷四十八 若聞遮字 卽時知一切諸行皆非行)라고 한다. 행行에는 변천하여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 있으니, 비행非行은 곧 부동不動 또는 상주常住한다는 뜻이다.(行有變遷不住之義 非行卽不動常住之義) 또 “만일 차자를 들으면 바로 일체 법의 부동상不動相을 안다.”(若聞遮字 卽知一切法不動相)라고 한다. 부동과 부동상의 출처를 드러냈다.
1) 제법이 부동하여 적정한 문(諸法不動寂靜門)
묻는다. “어째서 여래의 혜일慧日이 유지有地에 잠겨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까?”(問 云何名如來慧日 潛沒於有地)
나의 견해: 여래의 지혜가 마치 일광이 비추어주는 것과 같이 밝고 밝아서 여래 혜일이라 하고, 유지는 유정으로 일체 중생을 말한다.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덕상智慧德相을 원만히 구족했는데, 어째서 여래 혜일처럼 밝게 비추지 못하고 유정 속에 잠겨 있느냐? 어째서 여래장如來藏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또는 청정한 본각이 번뇌 망상 속에 감추어져 있느냐? 이 의문을 사뢴 것이다.
답한다. “유정이 아닌데 유정으로 보니 혜일이 유정에 잠겨 들어갔느니라. 색상이 없는데 색상으로 보니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答曰 非有見有 慧日沒於有地 無相見相亦然)
나의 견해: 유정이 아닌데 유정으로 보고, 색상이 없는데 색상으로 본다. 이 때문에 여래 혜일이 유정에 잠겨 들어간 것이다. 모든 병통이 여기에 있다. 어째서 유정을 부처로 보지 못하느냐? 어째서 색상을 법신으로 보지 못하느냐? 영가대사의 증도가에 이르기를, “무명 실성이 곧 불성이고, 환화 공신이 바로 법신이다.”(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라고 하지 않았는가? 무학대사가 이르기를, “부처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이고, 돼지 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이다.”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진실로 옳다. 불지견佛知見을 갖추고자 하면 시공관時空觀을 올바르게 확립해야 한다. 이에 조백대사의 화엄론을 인용한다.
“시방의 제불은 고금古今이 없는 법성으로 대각을 이루시니, 일념에 견도하면 고금의 견해가 멸진하여 거래금去來今의 삼세가 모두 없다. 일찍이 과거 억천겁 부처님, 불가설겁 부처님과 함께 일시에 성불하고, 또한 미래의 불가설겁 부처님과 더불어 일시에 성불하니, 스스로 증득하여 삼세에 시제時際가 없음을 보았기 때문이며, 시제가 없기 때문에 곧 과거와 미래가 없다. 설령 중생이 자기 신심身心이 본래 정각인 줄을 스스로 보고 알지 못할지라도, 자기 몸과 마음의 정각전덕正覺全德은 본래 없어짐이 없으며, 설령 어떤 중생이 만일 자기의 몸과 마음이 본래 정각인 줄을 스스로 보고 알지라도, 자기 정각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는 것이니, 본래 이와 같기 때문이고, 본래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며, 만일 깨달은 자가 있더라도 또한 이와 같은 본각은 본래 능각이나 소각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본각불本覺佛의 경계는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으며, 선정도 없고, 산란도 없으며, 닦는 것도 아니고 증득하는 것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어리석음도 아니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十方諸佛 以無古今性 成大菩提 一念見道 古今見盡 新故總無 還同已前億千劫佛不可說劫佛 一時成佛 亦與未來不可說劫佛 一時成佛 以自證見三世無時故 以無時即無去來 設使衆生 不自見知自己身心 本來正覺 自己身心正覺全德 本無有滅 設有衆生 若自見知自己身心 本來正覺 於自正覺 本來無生 本如是故 本無能覺所覺者故 若有覺者 還如是覺 本無能覺及所覺者故 如是本覺佛之境界 無凡無聖 無定無亂 不修不證 不智不愚 不生不滅)
묻는다. “어째서 부동상이라 말씀하십니까?”(問曰 云何名不動相)
나의 견해: 달마대사의 이입사행론 중에 소제목의 하나가 제법부동적정문諸法不動寂靜門이다. 제법의 형상形相은 동상動相이고, 제법의 실상은 부동상不動相이라 말해야 옳을 터인데, 어째서 제법의 형상이 부동상이라 말씀하십니까?
의상조사의 법성게法性偈에 “법성이 원융하여 두 가지 상상이 없나니, 제법은 부동하여 본래 적정하느니라.”(法成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제법의 자성이 곧 법성이니, 법성은 다시 법자성과 동일하다. 이 법의 자성은 유상有相도 없고 무상無相도 없으며, 동상同相도 없고 이상異相도 없으며, 총상總相도 없고 별상別相도 없다. 일체 분별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제법은 부동하여 적정할 수 있다. 이를 적정문이라 한다.
답한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으니 유정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 무정에서 무정을 얻을 수 없으니 무정도 동할 만한 것이 없다.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으니 마음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 상상相狀을 찾아도 상상이 없으니 상상도 동할 만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부동상이라 일컫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바로잡았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이는 스스로 미혹하여 헷갈리게 한다고 말할 것이다. 상고上古 이래以來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려 해도 해결할 만한 방법이 없다.”(答曰 不得於有有 有無有可動 不得於無無 無無有可動 卽心無心 心無有可動 卽相無相 相無有可動 故名不動相 若作如是訂者 是名自誑惑 上來未解 解是無法可解)
나의 견해: 위에서 부동과 부동상의 출처를 설명했다. “비행非行은 곧 부동 또는 상주한다는 뜻이다.”(非行卽不動常住之義) 또 “아자阿字로부터 일체 자륜字輪을 출생할 수 있고, 그래서 아자는 ‘본래 생기지 않고’ ‘얻을 수 없다’는 뜻이며, 그 본신은 본래 상주하여 부동하니, 이 때문에 자륜이 부동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又從阿字能生出一切之字輪 然阿字爲本不生不可得之義 其本身爲本來常住不動 故字輪含有不動之義) 부동상주不動常住는 상주부동常住不動과 같고, 또 상주는 부동과 같으며, 그 근원이 불가득不可得이고 본불생本不生이니, 아자본불생阿字本不生이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으니 유정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으니 마음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는 좀 쉽다. 왜 그러한가? 친근하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라는 명문이 있고, 달마대사의 안심법문도 있으며, 덕산스님과 관련한 “삼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데, 어느 마음에 요기療飢하시렵니까?”(三世心不可得 點麽何心)라는 공안도 있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으니 유정이 동할 만한 것이 없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고, 유정에서 유정을 볼 수 없으며, 유정에서 유정을 취할 수 없다. 무정도 또한 그러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법성은 조작이 없고 변역시킬 수도 없나니,
오히려 허공이 본래 청정함과 같으니라.
모든 불성이 청정함도 이와 같나니,
본래 불성은 불성이 아닌지라 유무를 여의었느니라.
法性無作無變易 猶如虛空本清淨 諸佛性淨亦如是 本性非性離有無
제불의 진신도 또한 이와 같나니,
일체 법계에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느니라.
볼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지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신형을 나투시니라.
諸佛眞身亦如是 一切法界無不遍 不可得見不可取 爲化衆生而現形
80권 화엄경에 법성은 171번 나오는데, 불성은 위 게송에 나온 것이 전부이다. 유정은 불성이 있고, 무정은 법성이 있다고 한다. 이는 수자의어 법문이 아니다. 어떤 것이 수자의어 법문인가?
법성은 조작이 없고 변역시킬 수 없는 것과 같이 불성도 또한 그러하고, 법성이 허공처럼 청정한 것과 같이 불성도 또한 본래부터 청정하다. 여래출현품에 이르기를, “보리성菩提性이 없고, 법계성法界性이 없으며, 허공성虛空性이 없고, 또한 다시 성정각성成正覺性도 없느니라.”(無菩提性 無法界性 無虛空性 亦復無有成正覺性)라고 하니, 이 때문에 본래 법성에서 법성을 얻을 수 없고, 불성에서 불성을 찾을 수 없다. 본래 없기 때문이다. 보리성이 불성이고, 법계성이 법성이다. 제불여래와 일체중생은 모두 함께 일성一性이라 차별이 없다. 이 때문에 “본래 불성은 불성이 아닌지라 유무를 여의었느니라.”라고 한 것이다.
“제불의 진신도 또한 이와 같나니, 일체 법계에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느니라. 볼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지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신형을 나투시니라.” 볼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는 것이 어찌 제불의 진신뿐이랴. 법성도 그러하고, 불성도 또한 그러하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제법諸法이 무성無性이고, 공상空相이기 때문이다.
2) 안심법문安心法門과 안락심安樂心
“제자의 마음이 아직 안락安樂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스님께서 마음을 안락하게 하여 주소서.”(弟子心未安 乞師安心)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대에게 안락한 마음을 주겠노라.”(將心來 與汝安)
“마음을 찾아도 전혀 얻을 수 없습니다.”(覓心 了不可得)
“그대를 위한 안심법문을 마쳤느니라.”(爲汝安心竟)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으니 안락하지 못한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안락하지 못한 마음이 없으니 요동搖動할 만한 마음인들 어디에 있으랴. “열반은 적정하고 무위하며 안락하다.”(涅槃寂靜無爲安樂) 안락은 열반에 들어간 경계 중에 하나이다. 이 안락심安樂心은 요동하지 않고 적정하다. 이 때문에 찾을 수 없다. “일체 제법諸法 중에도 모두 안락성安樂性이 있다.”(一切諸法中 悉有安樂性) 하물며 어찌 일체 중생에 안락심이 없으랴. 이 안락심을 증득한 이가 가는 곳이 바로 안락국安樂國 곧 극락정토이다.
유정에서 유정의 실체를 찾을 수 있느냐? 또 무정에서 무정의 실체를 찾을 수 있느냐? 다시 제상에서 제상의 실상을 찾을 수 있느냐?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모든 것이 본불생이고 불가득이기 때문이며, 또한 부동상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이 바로잡았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은 무슨 뜻인가? 정訂 자는 정정訂正 또는 수정修訂 등으로 쓰이니 ‘바로잡아 정하다’는 뜻이다. “만일 일체 사견을 바로잡아 제법적정부동상과 같은 정견을 세웠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이는 시방세계를 좌단坐斷해도 오히려 이마에 점을 찍는 것과 같다. 그래서 “스스로 미혹하여 헷갈리게 한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상고上古 이래以來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상래上來를 상고 이래로 해석했다. 상고는 최초 위음왕불威音王佛이 정각을 이루기 이전을 말한다. 삼세 부처님이 모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 “불자여, 제불의 보리는 일체 문자로 펼쳐낼 수 없고, 일체 음성으로도 미칠 수 없으며, 일체 언어로도 광설廣說할 수 없느니라. 단지 마땅함을 따라서 방편으로 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니라.”(佛子 諸佛菩提 一切文字所不能宣 一切音聲所不能及 一切言語所不能說 但隨所應方便開示) “불자여, 여래는 일체 비유를 써서 갖가지 사법事法을 말할 수 있지만, 어떤 비유로도 이 법을 선설宣說할 수는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심지心智의 법로法路가 끊어져 부사의不思議한 해탈경계이기 때문이니라.”(佛子 如來以一切譬諭說種種事 無有譬諭能說此法 何以故 心智路絕不思議故) 이 부동상의 경계는 어떻다고 내놓으면 바로 그르치느니라. 그래서 “이를 해결하려 해도 해결할 만한 방법이 없다.”라고 끝맺은 것이다.
거듭 부연한다. 유정이나 무정 그리고 유정의 마음이나 무정의 법상을 모두 제법諸法이라 한다. 이 제법이 바로 부동상이고, 이 부동상은 본래 적정하여 곧 적멸상寂滅相이다. “제법이 본래로부터 상주常住하여 자체로 적멸상이니라. 불자佛子가 이 상도常道를 행만行滿하면 내세에 성불할 수 있느니라.”(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제법은 산하대지의 삼라만상이다. 비로자나불의 법신은 일체처一切處에 변만遍滿한다. 비로자나는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하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본래本來는 상래上來와 같다. 위음왕불 이전부터 제법이 법위法位에 상주한다. 이 때문에 유정 무정의 일체 세간상世間相이 그대로 적멸상이다. “불자佛子가 이 상도常道를 행만行滿하면 내세에 성불할 수 있느니라.” 불자는 유정을 말한다. 어떻게 상도를 행만할 수 있는가? 이 유정의 번뇌망상이 상고이래로 적멸상인 줄을 체달하면, 곧바로 내세가 되는 것이다.
2023년 1월 16일 74세 길상묘덕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