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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구교회 봄 집회]
마지막 복음 - 연합의 나라
2019. 5. 5.(오전) 이현래 목사
오늘 연합의 나라라는 말씀을 하려고 한다. 여러분, 진주 햄 소시지 잘 알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소시지이다. 어제 이ㅇㅇ형제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제부터는 진주 햄 소시지보다 더 좋은 소시지가 나왔다.전주 인격 소시지이다. 필요하거든 전주로 주문하면 택배로라도 보내주겠다. 너무 좋았다. 또 두 번째 나온 이ㅇㅇ형제는 그 소시지를 잘 먹으라. 말씀을 잘 먹으면 변화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둘이 연합이 잘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기본(근본)이 연합을 위해서 지어 놓았다. 근본 자체가 홀로는 있을 수 없도록 지어 놓았다. ‘심히 좋다.’고 했던 그 말씀은 개인적으로 홀로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고 둘이 연합해서 완전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라고 했는데, 사람을 만들 때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라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홀로 독야청청 했다거나 백골이 난망이라서 보기 좋았다는 것이 아니다. 둘이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기 때문에 보기에 심히 좋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참 신기하다.
세상은 모두 홀로 완전을 추구한다. 홀로 완전한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이등도 없다. 일등 이등 하다보면 이등도 탈락되고 일등만 남게 된다. 나 홀로이다. 홀로 훌륭하고, 홀로 똑똑하고, 홀로 잘났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 홀로는 자동차로 말하면 마치 자동차 부품과 같다. 자동차에는 3만 개의 부품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부품 하나하나가 다 좋아야 한다. 홀로 좋은 것은 그 부품 하나하나가 좋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부품이라도 홀로 있으면 소용이 없다. 최고 품질의 부품이라도 홀로 있으면 가치가 없다.
지금 우리나라와 대만을 비교하면 대만은 중소기업을 기본으로 육성했다. 부품 생산을 많이 했다. 그런데 우리는 대기업 중심으로 경제가 이루어져 있다. 대기업은 대기업 스스로가 부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을 가지고 조합을 시킨다. 연합을 시킨다.결국은 부품 만드는데 보다 연합을 시키는 데가 승리했다. 아시아에 4마리의 용이 있다고 했는데, 4마리의 용 가운데 우리 한국만 우뚝 솟았다. 다른 나라는 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연합이 최종적인 문제이다. 아무리 좋더라도 연합이 안 되면 헛일이고, 좀 부족하더라도 연합이 잘되면 그것이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연합이 되어야 완성이다.
인간도 홀로 완성되려니까 어렵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굉장히 힘들다.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를 버려야 되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놓아야 되고, 만백성을 사랑해야 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해야 된다.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 사람은 1세기에 하나 나기도 어렵다.
공자님 같은 사람이 늘 나오겠는가? 석가모니 같은 사람이 늘 나오겠는가? 예수 같은 사람이 또 늘 나오겠는가? 그런 사람은 또 언제 나올지 모른다. 그리고 혹시 나온다고 하더라도 홀로지 다른 사람과 연합이 안 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근본 원리가 둘이 연합해서 완전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연합이 없이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똑똑해도 홀로 자식을 못 낳으면 결국 없어져 버리고 만다.
60억 인구가 전부 공자님 같이 됐다고 생각해보자. 결국 100년도 못가서 없어져 버리고 만다. 왜? 생육하고 번성이 안 되기 때문이다. 공자님이 그렇게 많은 제자를 육성했지만 공자님 같은 사람은 몇 사람이 안 된다.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따랐기 때문에 예수님 같은 분이 없다. 예수님 같을 수 없다. 그런데 거기에 도전을 하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를 쓴다. 마음은 가상하지만 불가능한 도전이다. 어떻게 설정하고 따르는가?온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 준 분이라고 설정해 놓고 따르려고 한다.그런데 그런 분을 어떻게 따라가겠는가?
여러분, 여기 자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는 아예 처음부터 안 되겠더라. 처음부터 못하겠더라. 그래서 기도했다. ‘하나님 혹시 내가 십자가를 지고 순교를 해야 될 그런 일이 있다면 나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진짜로 그것이 필요해서 나에게 시킨다면 내 눈을 감겨 놓고 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수술이 끝난 다음에는 감사를 드리겠습니다.’하고 기도했다. 젊었을 때 기도했다. 도저히 안 되겠더라. 아무리 생각을 해도 순교자들처럼 그렇게 못하겠더라. 그래서 지금 이 모양이 되었다. 여러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많다. 40일 금식 기도를 3번 했니 4번했니 한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에 가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먹을 생각만 난다고 한다. 주님 앞에 기도한다고 했는데, 막판에 가면 주님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아예 먹을 생각밖에 안 난다고 한다. 얼마나 하겠는가? 그것이 자기가 깨끗해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끝나고 나면 물도 먹고 차츰 차츰 먹어야 된다. 도로 마찬가지로 된다. 그러면 옛날이 그리워진다.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하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그러면 또 금식을 한다. 가족이 반대하고 주변에서 반대를 해도 금식을 한다고 한다. 어떤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죽음 직전의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겠는가? 오직 그것밖에 없는 그 위치에서 먹는 그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겠는가? 그 맛을 본 사람은 또 하고 또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원리를 역행하는 것이다. 잘하는 일 같지만 잘하는 것이 아니고 역행하는 것이다. 타이어 하나를 가지고 자동차가 되려고 하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다. 아무리 좋은 타이어라고 하더라도 타이어 하나를 가지고 자동차로 달려갈 수는 없다.
불가능한 것을 하게 할 것 같이 만들어서 하게 가르치고 채찍질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저주이다. 저주가 다른 것이 아니다. 학교의 학생들도 눈높이 교육으로 그 사람이 할 수 있을 것만큼만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전혀 할 수 없는 아이에게 계속 가르친다. 그것이 지옥이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얼마나 괴로울까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 내내 5~6 시간씩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나는 그처럼 괴로운 일이 없을 것 같다. 여기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그 아이를 돕는 것이다.
그 사람 나름대로 그 사람만큼 가르쳐야 되지 할 수 없는 것을 눈높이를 높여놓고 부모 욕심으로 키우려고 하면 아이가 점점 죽는다. 그런 아이들은 아예 귀를 막고 살아야 된다. 누구 말도 안 듣고 살아야 한다. 들으면 자기는 죽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홀로 완성하려고 하는 세계는 생명을 죽이는 세계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만들어 놓지 않았다. 개미는 개미대로 살게 만들어 놓고,지렁이는 지렁이대로 살도록 만들어 놓았다. 사람이 괜히 난리 치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렇게 고생하라고 만들어 놓았겠는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을 괴롭히려고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괴롭히려고 할 것 같지 않다. 부모도 자식이 자기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고, 자기보다 좋은 것을 먹기를 원한다. 형편없는 인간도 그런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기가 지은 인간들을 고생을 시켜서 떡 방앗간에 넣고 짓이기려고 만들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이 안 된다.
그렇게 생각이 안 되어서 그런지 하나님이 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내가 미리 못한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안한다. 우리가 미리 자수하면 그렇게 안한다. 버티니까 고생을 시키는 것이지 버티지 못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안하신다.
나는 언제든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내가 생각하기 전에 내 길을 예비해주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내가 생각지 못한 것을 미리 알고 길을 만들어 주시고, 고개를 넘게 하시고 그렇게 하신 것을 보았다. 산이 높아서 못 넘어갈 것을 알고 터널을 미리 뚫어 놓았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 줄 모른다.
그러면 신이 많으면 기왕이면 좋은 신을 믿지 뭣 하러 괴롭게 하는 신을 믿겠는가? 쉽게 생각하라.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너무 좋다. 왜냐하면 진화했다고 하면, 아메바에서 나왔다면 저주이다. 어떤가? 여러분 아메바에서 나왔다면 저주 아닌가? 괜찮은가? 괜찮으면 그냥 그리로 가면 된다. 우연히 생긴 것이라는 우연설도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우연히 생긴 것이면 내 인생 자체가 우연이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저주이다.
항상 잘만 살라는 것도 없고, 항상 좋으라는 법만 없다. 어려울 때도 있는 것이다. 어차피 모를 바에는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제일 좋다. 어차피 모른다. 진화론이 완전한가? 그것도 완전치 않다. 우연설도 완전한가? 그것도 완전치 않다. 어차피 우리가 모른다. 어차피 모르는 것이면 좋은 것으로 골라잡지 뭣 하러 죽을 자리로 가겠는가? 인생의 자리를 어차피 모른다면, 가장 좋은 것을 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지혜이다. 설사 속더라도 가장 좋은데 가서 속는 것이 낫다.
어떤 교회 장로가 천당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있다니까 믿는 것이 더 이익이지 않느냐고 한다. 왜냐하면 없다고 해서 절망하는 것보다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 사람이 사업가니까 그런 소리를 했다. 학자라면 그런 소리를 못할 것인데, 그 사람은 사업가니까 그렇게 쉽게 말한다. 없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이 뭐 있느냐는 것이다. 날라리 장로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차피 날라리나 진짜나 다 모른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수십 년 간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을 모른다. 그런데 모를 바에는 기왕이면 좋은 하나님을 택하는 것이 낫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성경이 너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책이 없다.
하나님이 나를 지었다. 얼마나 좋은가! 하나님이 나를 지었다는 것을 못 믿었을 때 방황을 많이 했다. 몇 년을 방황했는데, 그때 나는 한 번도 내 인생은 왜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있나 없나하고 생각했다. 내 인생은 왜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던데, 나는 그것이 이해가 잘 안 된다. 누구에게 물어보고 있으며, 자기에게 물어보면 누가 대답을 해주겠는가? 내 인생은 어디서 왔느냐고 내게 물으면 누가 대답을 해주겠는가? 나는 그런 질문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하나님이 나를 지었구나. 나는 그의 피조물이구나. 이것을 알고 나니까 그 다음 질문이 나오더라.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지어 놓았습니까? 왜 나를 지어 놓았습니까?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때 나는 정말 사는 것이 어려운 때였다. 편안했으면 그런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정말 어려운 때였다. 살면 뭐하는가? 이런 때였다. 그런데 왜 나를 지어 놓았습니까?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이다. 선생을 만나야 질문이 생기지 선생을 만나지 않으면 질문하는 것이 미친 짓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질문을 하면 답이 나오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 그것이 참 좋았다. 그래서 한참 좋아하고 있는데 그 다음 질문이 나왔다. 그러면 나는 무엇 때문에 있을까? 나는 무엇 때문에 지어 놓았을까? 이런 질문이 나왔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딱 있다. 그때는 몰랐다. 지금 보니까 그 다음 대답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답이 자세하게 딱 있다. 정상적인 길로 오면 답이 착착 있도록 되어 있는 책이다. 아주 신기한 책이다. 정상적으로 오면 우리가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을 시킬 수 있는 것처럼,하나님이 정해 놓은 길로 가면 성경에 있는 것이 자기 말이 된다. 남의 말이 아니다. 배 깔고 엎드려서 오징어 뜯어 먹으면서 쓴 책이 아니다. 담배 피워가면서 쓴 책이 아니다.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신기한 사람이 쓴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보고 심히 좋다. 심히 좋다고 했다. 1장 마지막에 그랬다. 심히 좋다. 왜 좋은가? 하나님이 지었으니까 좋고 또 연합으로 완성되니까 좋고 수없이 좋은 것이 많다. 성경을 읽으면 좋은 것이 너무 많다. 복된 말씀이 너무 많다. 그것이 다 복음이다. 흙으로 지었다는 것도 복음이고, 갈빗대를 뺐다는 것도 복음이다. 하여간 모든 것이 다 복음이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런 책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을 맛을 들이면 다른 책은 골치 아파 못 본다. 쓸데없는 소리만 계속 해놓아서 답이 있는가 하고 보면 아무리 읽어도 답이 없다.그래서 답이 없는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시간도 없는데,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답이 있는 것도 찾기도 바쁜데 답도 없는데, 찾고 있을 그런 미친 짓을 누가 하겠는가? 요즘 말로 미쳤냐? 내가 미쳤어? 확실한데 가서 찾으려고 해도 이제 시간이 없다. 다 찾을 시간이 없다. 여러분은 시간이 있겠지만 나는 시간이 없다.
이번에 어떤 형제가 난감한 질문을 했길래 시간이 생명이라고 했다. 많이 여유가 있으면 이것도 생각해보고 저것도 생각해 볼 텐데 그럴 여유가 없으니까 그냥 열매 될 것만, 먹고 살 것만 찾아도 시간이 없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우리가 알아야 된다. 그것을 모르면 헤맨다. 창세기 1장을 보니까 연합으로 완성하도록 만들어 졌구나. 한자도 빼놓지 않았다. “사람을 지으시되 남성과 여성으로 지으시고.” 그 다음에 말해도 될 일인데 거기다 써놓았다. “남성과 여성으로 지으시고.”라고 하니까 남성과 여성이 둘이 연합을 해야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하지 않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면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겠는가? 하나님이 미리 다 만들어놓았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라.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놓았다.무작정 해보지 않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일도 알아야 남에게 일을 시킨다. 일을 모르는 사람은 일을 못 시킨다. 미국에서 오신 분이 한 이야기이다. 매일 9시 출근해서 5까지 그 사람이 할 만한 일거리를 가져 온다고 한다. 이 사람은 9시에 와도 좋고, 10시에 와도 좋고, 너는 이것만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을 하게 되면 그 시간 내내 해야 한다. 자기가 일을 아니까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9시에 와서 5시 땡 할 때 나가라는 것이다. 조금만 늦게 와도 안 되고, 조금만 빨리 나가도 안 된다.
하나님은 일을 아시기 때문에, 인생을 아시기 때문에, 길도 다 만들어 놓았다. 길이 없이 차를 만들겠는가?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야당에서 무슨 차도 없는데 길을 만드느냐고 했는데, 차관을 빌려서 길을 만들었다.전부 빚이었다. 그래서 그 알량한 분들이 경부고속도로 공사하는데 와서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MBC와 KBS에 와서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사진 찍고 나니까 옷 입고 가버렸다. 그렇게 건설된 도로이다.
그때는 정말 차가 없었다. 그런데 길을 만들어 놓으니까 차가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부산에서 서울까지 계속 차가 왔다 갔다 한다.내가 서울에 갔을 때 멍게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서해안에는 멍게가 없다. 이상하게 생긴 물건인데 멍게라고 길가에 놓고 팔았다. 어디서 왔느냐고 하니까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그때 부산에서 서울을 오려면 기차로 열 몇 시간씩 와야 한다. 멍게는 아예 서울까지 올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고속도로가 생겨서 4시간 만에 오니까 멍게 같은 놈이 다 올라왔다. 길이 좋은가보다. 길이 좋으니 멍게까지도 올라온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경부고속도로가 만원이 되어서 정체가 된다. 길이 있으면 차가 왔다 갔다 하게 된다. 차 다 만들고 길 만들려면 안 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만들어놓았다. 다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사람을 지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것이 그래서 필요하다. 정부에서 무엇을 하는가를 알면 사업하는 사람들은 그쪽으로 간다.
하나님이 뭘 하는가를 먼저 아는 것이 인생이 제대로 빨리 가는 길이다. 자기 혼자 아무리 머리 써봐야 안 된다. 왜냐하면 위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위에서 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안 된다.
한국 사람들은 옛날에 하늘님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비가 오냐 오지 않느냐에 따라서 일 년 농사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때였다. 아무리 밑에서 땅을 잘 만들어 놓아도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아서 가물면 다 죽어 버린다. 위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제공권을 장악한 나라가 세계 최강국이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인데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다. 공중을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는 연합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홀로 서려면 망하는 길이다. 고생하는 길이고 망하는 길이다.연합으로 된다. 이것만 알아도 인생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모른다. 홀로 하다가 둘이 합해야 되는구나. 이것만 알아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교회생활을 하러 올 때 절에 오듯이 염불이나 하고 가려고 올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기도하는 집이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해서 와서 기도만 실컷 하고 가면 그것이 교회인가? 사찰이다. 사람이 필요해서 와야 한다.
나 혼자 있으면 재미없는 사람이라야 정상적인 사람이다. 혼자 있는데 재미있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홀로 있으면서 씩씩 웃고 있는 사람은 비정상이다. 같이 봐야 웃기도 하는 것이지 혼자 있는데 웃을 일이 없다. 이 한 가지만 알아도 우리 세계가 얼마나 넓어지는지 모른다. 미운 놈이라도 같이 있어야 미워할 수 있지 미운 놈도 없으면 미워할 수도 없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 그래서 한 나라를 이루도록 만들어놓았다. 우리가 이것을 깊이 알아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류는 어디로 갔는가? 바벨로 갔다. 바벨이라는 말은 혼잡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결국 분열이라는 뜻이다. 분열된 길이다.선악과를 먹고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바벨로 갔다. 그것은 선악과라는 이것이 분열시키는 약이다. 분열시키는 양식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한 백성을 불러낸 것이다. 바벨로 가는 인간 속에서, 인류 속에서 한 백성을 불러냈다. 그래서 회복의 길을 준비했다. 하나님이 원래 계획했던 그 길을 찾기 위해서 한 백성을 불러냈다. 아브라함을 불러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는 사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운명 안으로 인류를 불러 모았다. 분열된 것을 불러 모은 것이 십자가이다. 고난을 이기게 하는 것이 십자가인줄 알지만 그것이 아니고 모든 인류를 한 자리로 불러 모은 것이다.
어떻게 한 자리로 불러 모으겠는가? 생각해보라. 인류는 그동안 얼마나 그런 노력을 많이 했는가? 통일해 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한 자리로 불러 모으는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였다. 그것이 비밀이다.
십자가 앞에서만 모든 인류가 하나로 불러 모아진다. 아브라함도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한 곳으로 가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따라 왔는가? 다른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모든 사람에게 다 그렇게 말했지만 그중에 아브라함이 따라갔다는 것이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했을 때, 그것을 베드로에게만 귓속말로 한 것이 아니다. 바닷가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데서 했지만 따라 온 사람은 딱 한 사람이다. 부른다는 것이 이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인류를 한 자리로 불러 모았는가? 황제가 되어서 세계최강국이 되어서 모든 인류를 한 자리로 부르면 될 것 같지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것은 분열의 길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